მონანიება (Покаяние) · 1984 (1984년 제작, 1986~1987년 공개)

참회 (영화)

Repentance (film)

그루지야 감독 텐기즈 아불라제의 1984년 영화. 독재자 바를람의 시신을 묻을 때마다 파내는 여자의 재판을 통해 스탈린 시대의 공포를 그렸다. 상영이 막혔다가 고르바초프의 허락으로 1987년 소련 전역에 공개되어 글라스노스트의 신호탄이 되었고,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다.

상세

무슨 이야기인가?

어느 그루지야 소도시의 한 여자가 교회 모양 케이크를 만들고 있고, 옆에서 남자가 신문을 읽는다. 시장 바를람 아라비제가 죽었다는 소식이다. 호화로운 장례가 끝난 이튿날 아침, 시신이 아들 아벨의 집 정원에 나타난다. 다시 묻어도 또 나온다. 잠복하던 손자 토르니케가 어둠 속의 인물을 총으로 쏘아 맞히는데, 잡고 보니 도시 최고의 제과사 케테반 바라텔리다.

법정에서 그는 왜 파내는지 말한다. 케테반이 여덟 살 때, 바를람이 시의 권력을 잡았다. 화가인 아버지 산드로는 옛 교회에 설치된 과학 장비를 치워 달라고 탄원하러 갔다가 눈에 띈다. 바를람은 온실에서 그를 맞으며 선선히 들어주는 척하지만, 다음 날 탄원단이 체포된다. 산드로는 고발로 끌려가고, 어머니 니노도 사라진다. 친구 미하일은 봄베이에서 런던까지 굴을 파려던 2600명의 음모에 산드로를 끌어들인다. 여자들은 소식을 듣겠다고 작은 창구에 줄을 선다. 시베리아에서 온 통나무 더미를 뒤지며 혹시 남편이 새긴 이름이 없는지 찾는 장면이 나온다.

아벨의 변호사는 케테반을 미친 사람으로 몰아가고, 아벨은 아버지를 감싼다. 토르니케는 진실에 충격을 받고 아버지와 맞선 뒤, 할아버지가 선물한 사냥총으로 목숨을 끊는다. 아벨은 스스로 무덤을 파 시신을 도시 밖 절벽 아래로 던진다. 영화는 처음의 케이크 장면으로 돌아온다. 창밖의 노파가 이 길이 교회로 가느냐고 묻는다. 케테반은 여기는 바를람 거리라 교회에 이르지 않는다고 답한다. 노파가 말한다. “교회로 이어지지 않는 길이 무슨 소용이오?”

어떻게 이런 영화를 찍을 수 있었나?

《기도》, 《소원의 나무》에 이은 아불라제 3부작의 마지막 편이다. 아불라제는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남자가 자기를 감옥에 보낸 검사의 관을 파 벽에 세웠다는 그루지야 서부 이야기에서 착상했다고 한다. 1981년 대본을 들고 간 상대가 당시 그루지야 공산당 제1서기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였다. 여섯 달 뒤 그는 “1937년은 우리 집에도 왔다”며 방법을 찾자고 했다. 공화국 텔레비전에는 모스크바가 들여다보지 않는 두 시간의 몫이 있었고, 공화국급 영화는 주제와 감독 이름만 적으면 되었다. 덕분에 모스크바의 대본 승인을 피할 수 있었다.

셰바르드나제는 “일반화할수록 좋다”고 조언했다. 아불라제는 바를람을 스탈린의 복사판으로 만들지 않았다. 히틀러 같은 콧수염, 무솔리니의 허세와 오페라 취향, 베리야의 코안경과 체격을 섞었고, 경비병에게 중세 갑옷을 입혀 시대를 흐렸다. 아라비제라는 그루지야 성은 없으며, 어근은 “아무도 아닌 자”를 뜻한다.

위기도 많았다. 1983년 찍은 필름 5000미터는 현상소 잘못으로 못 쓰게 되었다. 토르니케 역의 게가 코바히제는 같은 해 11월 터키행 비행기 납치 시도에 가담해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고, 메라브 니니제로 바꿔 다시 찍었다.

왜 막혔다가 풀려났나?

1984년 완성했을 때의 권력자는 콘스탄틴 체르넨코였고, 영화는 한 번 상영된 뒤 묶였다. 1985년 고르바초프가 집권하고 셰바르드나제가 정치국원이 되었다. 1986년 봄 그가 고르바초프를 위한 상영을 주선했고, 두 조부가 모두 탄압받은 고르바초프는 동의했다. 그러나 곧 체르노빌 사고가 났다. 제5차 소비에트 영화인대회 뒤 새 영화인동맹 제1서기가 된 엘렘 클리모프가 금지 영화 위원회를 세우면서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를 찾아갔다. 야코블레프는 먼저 선별된 관객에게 보이고 차차 넓히자고 제안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이 영화의 개봉은 정치 노선의 전환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1986년 10월 엘리트 상영을 거쳐 1987년 1월 26일 모스크바에서 첫 공개 상영이 열렸고, 전국으로 퍼졌다.

영어 자료에 따르면 1988년 당국은 비공식적으로 다시 상영을 막았다고 한다. 동독에서도 금지되었으나, 1987년 10월 서독 ZDF 방송을 많은 동독인이 보자 동독 신문들이 금지된 영화를 비판하는 사설을 싣는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1987년 칸에서는 심사위원 대상과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 에큐메니컬상을 받았다. 영화계에서는 심사위원이던 클리모프가 영화의 수상을 위해 니키타 미할코프의 《검은 눈동자》를 밀어냈다는 말이 돌았지만, 이것은 미할코프 쪽의 주장과 비평가의 전언이다.

무엇이 진짜 있었던 일인가?

이름은 지어냈어도 조각은 사실이라고 아불라제가 말한다. 처형된 공산주의자 마미야 오라헬라시빌리의 딸은 평생 제과점에서 일했다. 초하타우리에 시베리아에서 온 통나무 기차가 도착했는데 거기 그루지야어 글씨가 있었고 정치범 친족의 이름을 찾은 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탄원단을 받아들인 뒤 이튿날 체포했다는 일화는 베리야의 일이었다. 창구 앞 여인들의 줄은 안나 아흐마토바의 시 「레퀴엠」을 떠올리게 하고, “통신권 없는 10년 유형”은 사형을 뜻했다. 1930년대의 공포는 이 영화의 뼈대이며, 스탈린 자신은 끝내 이름도 얼굴도 나오지 않는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러시아어)
  2. 위키백과 (영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