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도맹그 원정
Saint-Domingue expedition
1801년 12월부터 1803년 12월까지 제1통령 나폴레옹이 매제 샤를 르클레르에게 맡겨 생도맹그에 보낸 대규모 침공. 투생 루베르튀르의 자치 정부를 무너뜨리고 프랑스의 지배와 노예제를 되살리려 했으나, 황열병과 1802년 가을 재개된 봉기, 1803년 영국의 봉쇄 속에 베르티에르에서 패해 철수했다. 보낸 약 3만 1천 명 가운데 7,000~8,000명만 살아남았고, 아이티의 독립으로 끝났다.
상세
1801년 2월 뤼네빌 조약으로 대륙에서 손이 자유로워진 나폴레옹은 처음에 투생 장교들의 계급과 토지를 인정하고 해방을 보장하면서 파리의 권위만 세우려 했으나, 1801년 7월 헌법을 보고 10월에는 투생 정부를 무장 해제하고 흑인 장교들을 추방하라고 비밀리에 지시했다. 투생이 1만 6천 명을 거느렸으므로 르클레르에게는 3만 명이 주어졌다. 아미앵 조약이 맺어지기 전인 1801년 12월 14일 빌라레 드 주아외즈의 함대가 전열함 35척과 프리깃 21척에 7,000~8,000명을 싣고 브레스트를 떠났고, 2월 툴롱의 강톰(4,200명)과 카디스의 리누아(2,400명) 전대, 뒤이어 해군 보병 4,000여 명과 네덜란드 사단, 폴란드 제3반여단과 스페인의 그라비나 함대가 따랐다. 모두 31,131명이 상륙했고 리고와 페티옹 같은 자유 유색인 장교들도 함께였다(르클레르 전기는 4만 명, 투생 전기는 2만 명이라고 적는다). 1802년 2월 3일 카프프랑세 앞에 닿은 함대는 5일 공격을 시작했고 크리스토프는 명령대로 도시를 불태웠다. 열흘 안에 프랑스군은 항구와 도시, 경작지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2월 17일의 총공세로 투생을 고나이브 쪽으로 몰아넣었다. 데살린은 크레타피에로 요새에서 3월 4~24일 포위를 버티다 빠져나갔고, 크리스토프(4월 25일)와 데살린의 투항에 이어 5월 6일 투생이 르클레르의 권위를 인정하고 에네리의 농장에 물러났다. 르클레르는 6월 회담을 구실로 투생을 체포해 프랑스의 주 요새로 보냈다.
3월의 우기와 함께 황열병이 번져 두 달 만에 약 1만 5천 명이 죽었다. 아미앵 조약으로 돌려받은 마르티니크의 노예제를 확정한 1802년 5월 20일 법과 과들루프의 노예제 복원 소식이 전해지자 생도맹그에는 다시 반란의 기운이 돌았고, 르클레르가 흑인을 무장 해제하려 하자 분노만 키웠다. 8월부터 흑인·물라토 부대의 집단 이탈이 시작되었고 10월에는 페티옹, 크리스토프, 데살린이 모두 프랑스군을 떠났다. 싸울 수 있는 병력이 8,000~1만 명으로 준 르클레르는 포르드페에서 크리스토프가 폴란드 병사 수백 명을 죽이자 카프의 흑인 식민지 부대 1,000명을 밀가루 부대를 목에 매달아 배에서 밀어 넣어 죽였고, 충성을 지키던 모르파 장군도 11월 초 가족과 함께 익사시켰다. 르클레르는 1802년 11월 1일 토르튀섬에서 황열병으로 죽었고(영어 전기는 11월 2일), 아내 폴린 보나파르트는 머리카락을 잘라 관에 넣고 그의 심장을 단지에 담아 유해를 프랑스로 가져갔다. 뒤를 이은 로샹보는 쿠바에서 노예 사냥개를 들여왔으나 군사적으로는 실망스러웠고, 그 잔학은 아이티에서 식민 지배의 악랄함의 상징으로 남았다. 1803년 5월 영국과의 전쟁이 재개되어 봉쇄가 시작되었고, 11월 18일 베르티에르에서 패한 프랑스군은 12월 말 섬을 떠났으며 로샹보는 귀환길에 영국 해군에 붙잡혀 9년 가까이 억류되었다. 3만 1천 명 가운데 살아남은 병사는 7,000~8,000명뿐이었고 장군 20명 이상이 죽어, 프랑스는 뒷날의 워털루보다 더 많은 병력을 생도맹그에서 잃었다. 1804년 1월 1일 데살린은 아이티의 독립을 선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