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천인 대회
Seven Thousand Cadres Conference
1962년 1월 11일부터 2월 7일까지 베이징에서 중앙과 지방, 기업과 군의 간부 7,118명이 모여 대약진의 경험을 총결한 중국공산당 확대 중앙공작회의. 류사오치는 재난이 「3할은 천재, 7할은 인재」라고 공개적으로 말했고, 마오쩌둥은 중앙의 잘못에 첫째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며 자기비판을 했다. 회의 뒤 마오는 「2선」으로 물러났으나, 류사오치와의 균열은 문화대혁명의 씨앗이 되었다.
상세
회의는 류사오치가 준비한 보고 초안을 정치국 토론 없이 참석자들에게 바로 돌려 의견을 받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류사오치가 이끈 21인 기초위원회가 8일 동안 두 번째 초안을 만들었다. 기초위원회에서 펑전은 3~5년 과도 문제와 식당은 마오가 승인한 것이라며 마오의 1%, 1‰의 잘못이라도 검토해야 한다고 했고, 저우언라이는 잘못된 자료를 올린 실무자의 책임이라며 마오를 감쌌다. 1월 27일 류사오치는 보고에서 1959~1961년 농업이 크게 감산했고 1961년 공업 생산이 40% 넘게 줄었다고 인정하며 후난 농민의 말을 빌려 「3할은 천재, 7할은 인재」라 했다.
1월 30일 마오는 민주집중제를 주제로 연설했다. 그는 대중의 비판을 두려워하는 간부를 꾸짖고, 지난 몇 년의 결점과 잘못은 첫째로 중앙에, 중앙에서는 첫째로 자신에게 책임이 있으며, 이어 성·지구·현·공사의 당위원회에 차례로 책임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지난 4년의 노선은 옳았다는 류사오치 보고의 판단을 인용했고, 「세 개의 붉은 깃발」은 손대지 못하게 했다. 린뱌오는 대약진의 실패를 언급하지 않은 채 마오쩌둥 사상을 찬양했다. 회의 뒤 2월 시러우 회의에서 천윈이 재정 적자의 실상을 밝혔고, 류사오치·덩샤오핑·덩쯔후이 등이 「삼자일포」를 지지했다. 마오는 8월 베이다이허와 9월 10중전회에서 계급투쟁을 다시 내세웠고, 1963년 사회주의 교육운동과 1966년 문화대혁명으로 권력의 중심에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