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둥 문제
Shandong Problem
1차 세계대전 뒤 독일이 산둥에 가졌던 자오저우만 조차지와 철도 등의 권익을 중국에 돌려주지 않고 일본에 넘긴 파리 강화회의의 결정, 곧 베르사유 조약 제156조를 둘러싼 분쟁. 이 결정이 1919년 5·4 운동을 일으켰고 중국 대표단은 조약 서명을 거부했다. 1922년 워싱턴 회의에서 미국의 중재로 조차지는 중국에 돌아왔으나 일본의 경제적 지배는 이어졌다.
상세
기원: 1897년 독일 선교사 두 명이 산둥에서 살해되자 독일은 이를 구실로 1898년 칭다오를 포함한 자오저우만을 99년 동안 조차했다. 1914년 일본은 1차 세계대전에 뛰어들어 칭다오를 점령했고, 1915년 위안스카이는 21개조 가운데 13개조를 받아들여 일본의 독일 권익 승계를 사실상 인정했다. 영국과 프랑스도 일본에 이를 약속했고, 1918년 말 돤치루이 정부는 니시하라 차관을 받으면서 이양을 비밀리에 재확인했다.
파리: 1917년 참전한 중국은 산둥 반환을 조건으로 연합국을 지지했고, 루쩡샹이 이끈 대표단은 21개조 취소와 산둥 반환을 요구했다. 구웨이쥔은 공자가 태어난 산둥은 기독교도에게 예루살렘과 같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1919년 4월 30일 회의는 일본의 손을 들어 주었고, 이것이 조약 제156조가 되었다. 소식이 전해지자 5월 4일 베이징의 학생들이 시위에 나섰고, 6월 28일 중국 대표단은 서명을 거부했다. 중국은 1921년 독일과 따로 강화 조약을 맺었다.
해결: 1922년 워싱턴 해군 회의에서 미국의 중재로 산둥에 대한 중국의 주권이 인정되어 6월 조차지가 반환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철도와 성 전체에 대한 경제적 지배를 유지했고, 1928년 북벌군이 산둥에 이르자 출병해 지난 사건을 일으켰다. 산둥은 1945년까지 사실상 일본의 세력권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