военные советники / главный военный советник · 1945년–1953년

주북조선 쏘련군 군사고문단

Soviet Military Advisory Group in North Korea

1945년 8월 조선 북부에 들어선 쏘련 점령 행정의 군사 부문에서 출발해 한국전쟁기까지 존속한 쏘련 군사고문 조직이다. 러시아어 사료는 구성원을 군사고문, 단장을 수석 군사고문이라 부른다. 조선인민군과 조선인민공군 창설의 조직 역량으로 기능했고, 1950년 5월 각료회의 결정으로 246명이 파견되어 군단과 사단 참모부에서 활동했다. 고문은 부대에 직접 명령을 내리지 않았고 조선인민군 지휘부의 작전 결정을 돕는 역할로 규정되었으며, 전쟁기에는 38선 이남 진입이 금지되었다. 활동은 엄격한 비밀로 진행되었다.

상세

명칭과 성격

러시아 사료는 구성원을 군사고문, 단장을 수석 군사고문이라 부르며, 한국 학계는 주북 소련 군사고문단이라는 서술적 명칭을 쓴다. 이 조직을 세운 점령 행정은 1945년 8월 24일 수립된 쏘련 민정청으로, 형식상 민간 행정이었으나 군사 조직을 모체로 했고 1948년 9월 9일까지 조선 북부의 공식 통치 기구였다. 민정청은 25군 사령관 이반 치스쨔꼬프 대장이 평양을 군 사령부이자 수도로 정하는 과정에 관여했고, 25군 정치 장교였던 니꼴라이 레베제프 소장은 김일성을 훈련시키고 국가의 공식 명칭을 만들었다. 사실상의 지도자였던 쉬띄꼬프는 헌법 초안을 다듬고 첫 내각을 구성했다. 점령기에는 쏘련 병사들의 강간과 약탈이 기록되었고, 민정청이 사할린 어업에 쓸 값싼 조선인 노동력을 확보하려 사할린 행정부와 관계를 맺어 1950년까지 사할린에만 약 만 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있었다는 주장도 전해진다.

군사고문단의 성립과 비밀성

쏘련 병사들은 1945년부터 조선인민군과 조선인민공군의 창설과 초기 발전에 관여했고, 조선인민공군 학교는 1945년 10월 25일 쏘련의 지도로 조종사 양성을 시작했다. 고문단은 1948년 말 점령군이 철수한 뒤에도 군사고문과 기술자, 해군 인원으로 남았다. 고문은 소련 대사관 영사부에 등록되지 않았고 당 중앙위원회에 비밀 유지 서약을 제출했으며, 민간 복장으로 도착해 이틀 안에 중국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러시아 사료는 고문의 상당수가 쏘련 국적의 고려인이었다고 전하며, 통역이나 군사고문과 전문가로 일한 이들이 모스크바 정책의 직접적 통로였다는 점은 아직 과소평가되어 있다.

편성과 물자 지원

1949년 3월 17일 협정은 보병 6개 사단과 기계화 부대 3개, 변경 경비대 8개 대대의 무기와 장비, 조선인 조종사 훈련이 끝난 뒤 정찰기 20대와 전투기 100대, 폭격기 30대 지원을 약속했다. 같은 해 3월 김일성의 모스크바 방문으로 차관과 철도·항공 연결, 합작회사, 쏘련 유학, 청진에 쏘련 해군 주둔 권리가 담긴 지원이 약속되었고, 메레쯔꼬프와 쉬띄꼬프는 쏘련 전문가 주둔이 철수 뒤에도 조선에서 자국 영향력을 강화할 것이라며 파견을 밀어붙였다. 1950년 1월 스딸린은 김일성에게 쏘련의 기술 지원과 전문가가 필요할 수 있다고 썼고, 4월의 군사학교 교관 파견 요청도 승인되었으며 5월 말의 연료·의약품·함선 요청은 하루 만에 승인되었다. 1950년 5월 16일 각료회의 결정으로 246명의 군사고문이 파견되어 군단 참모부와 사단에서 일했고, 전쟁 개시 후에는 2제대와 후방 참모부로 옮겨갔다. 비밀 지령은 고문을 선봉 부대나 야전군 참모부에 배속하지 말 것, 단 한 명의 고문도 조선인민군과 함께 38선을 넘지 말 것을 명했다.

전쟁 수행과 고문단

개전 전후로 바실레프 중장이 수석 군사고문이 되어 쉬띄꼬프 대사와 긴밀히 협의했으나, 비밀 서신은 실무에서 쉬띄꼬프가 쏘련 지도부와 고문단을 잇는 통로였음을 보여준다. 전쟁 둘째 날 쉬띄꼬프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6월 25일 04시 40분에 공격을 개시했다고 보고하면서, 고문단이 38선 이남으로 부대를 따라갈 수 없게 되자 전투 명령 조직이 이루어지지 않고 포병과 전차 운용이 미숙했으며 통신이 끊겼다고 전했다. 고문이 남부에서 포로로 잡히면 미국의 개입 빌미가 된다는 우려에서 고문을 침공 부대에서 제외한 것이다. 1950년 10월 1일 스딸린은 어떤 수단을 써서든 고문이 포로로 잡히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했고, 이는 고문의 존재가 오랫동안 공개되지 않은 이유로 설명된다. 1950년 11월 말 쉬띄꼬프와 바실레프는 북부에서의 반격전 중 업무상의 오산을 이유로 해임되었다. 대사로 부임한 라주바예프 중장이 바실레프를 대신해 수석 군사고문을 겸임하며 전쟁 말기까지 두 직을 맡았다.

규모와 전쟁 중 기록

고문단의 규모는 사료마다 다른 수치를 제시한다. 1950년 5월 파견된 246명과 함께, 1950년 11월 17일 조선인민군 소속 쏘련 군사고문이 123명에 불과하다는 문서 수치가 제시된다. 1948년 12월 철수 이후 미 국방부 기록이 전하는 군사고문 2,000명과 보안 인원 1,000명, 1950년 6월 19일 미 정보기관이 추정한 4,000명에서 5,000명 규모의 쏘련 사절단도 경합하는 계수로 함께 제시되어야 한다. 후자의 추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확고히 통제되는 쏘련 위성국으로 규정한 해당 기관의 시각을 반영한 것이며 중립적 계수가 아니고, 어느 하나를 유일한 수치로 확정할 수 없다. 1951년 초 전선이 38선에서 굳어진 뒤 고문은 주로 압록강 부근 후방에서 활동했고, 1951년 한 해에만 군사고문 11명과 민간인 7명이 전사했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미국·영국 개입군과의 투쟁을 도운 공로로 76명이 조선 국가 훈장을 받았다. 라주바예프의 1951년 2월 16일 보고서는 각 군단에 전투 활동을 기술하는 임무를 맡은 장교 33명이 있었음을 전하는데, 이는 고문단 자체에 관한 포괄적 보고서가 아직 공개되지 않아 조직 연구가 제한적임을 보여준다.

시기 구분의 한계

고문단 활동이 러시아 학계에서 다루는 시기는 한국전쟁기인 1950년에서 1953년이며, 휴전 직전 쏘련 총참모장 소꼴로프스키 원수는 수석 군사고문에게 조인 시점에 조선인민군 전투 부대에 쏘련 고문이 단 한 명도 없어야 하고 조선에는 최소 인원만 남아야 한다고 지시했다. 1953년은 문서로 확인되는 고문 존재의 기록상 한계이며, 고문단의 공식 해산을 문서화한 사료는 확인되지 않는다. 한편 일부 회고에 나오는 인원 수는 고문단 규모의 근거로 쓸 수 없다.

출처

  1. 위키백과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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