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orie des kommunikativen Handelns · 1981–현재

의사소통 행위 이론

Theory of Communicative Action

위르겐 하버마스가 1981년 두 권짜리 『의사소통행위이론』에서 펼친 사회 이론. 사람들이 말로써 서로를 이해하고 합의에 이르려는 ‘의사소통적 행위’를 사회 질서의 바탕으로 보고, 이를 결과만 계산하는 전략적·도구적 행위와 구별한다. 사회를 일상의 의사소통으로 짜인 ‘생활세계’와 돈과 권력으로 움직이는 ‘체계’로 나누고, 체계가 생활세계를 잠식하는 ‘생활세계의 식민지화’를 현대 자본주의의 병리로 진단했다. 비판 이론의 ‘의사소통적 전환’으로 불리지만,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과 계급 대신 언어를 중심에 놓아 자본주의 극복 전망을 놓았다고 비판했다.

상세

의사소통적 행위란 무엇인가?

친구 넷이 저녁 메뉴를 정한다고 해 보자. 한 사람이 “어제 고기를 먹었으니 오늘은 생선이 어때?”라고 이유를 대고, 다른 사람이 “생선집은 너무 멀어”라고 반박한다. 서로 이유를 주고받다가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곳으로 정한다. 하버마스는 이렇게 말로 서로를 이해시켜 행동을 맞추는 것을 ‘의사소통적 행위’(kommunikatives Handeln)라고 부른다.

이와 다른 방식도 있다. 한 친구가 자기가 좋아하는 식당에 가려고 “거기 오늘 할인한대”라고 거짓말을 하거나, 돈을 내주겠다며 다른 사람을 끌어들일 수도 있다. 이때 말은 상대를 이해시키는 수단이 아니라 원하는 결과를 얻어 내는 도구다. 하버마스는 이것을 ‘전략적 행위’라 하고, 사물을 다루듯 목적을 계산하는 행위를 ‘도구적 행위’라 부른다. 그의 이론은 사회가 결국 전략과 계산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고, 의사소통적 행위가 그 바탕을 이룬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어떻게 짜여 있나?

『의사소통행위이론』은 1981년 두 권으로 나왔고, 하버마스의 주저로 꼽힌다. 1권 ‘행위 합리성과 사회 합리화’는 막스 베버의 합리화 이론을 다시 읽고, 죄르지 루카치에서 테오도어 W. 아도르노로 이어지는 ‘물화로서의 합리화’ 논의를 검토한다. 2권 ‘기능주의적 이성 비판’은 미드와 뒤르켐에게서 일어난 ‘목적 활동에서 의사소통적 행위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추적한다. 이어 ‘체계와 생활세계’를 다루고, 탤컷 파슨스를 거쳐 베버와 마르크스로 돌아오는 결론으로 끝난다.

비판 이론 전통에 서 있는 만큼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도 꼼꼼히 다룬다. 가치론, 도구적 이성 비판, 물화와 추상 같은 개념이 그 대상이다. 동시에 니클라스 루만의 체계 이론,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 발달심리학을 폭넓게 끌어들인다.

말이 통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타당성 주장

하버마스는 우리가 무언가를 말할 때 듣는 사람이 따져 물을 수 있는 몇 가지 ‘타당성 주장’을 함께 내세운다고 본다. 첫째는 진리다. 말한 사실이 실제로 맞아야 한다. 둘째는 규범적 정당성이다. 그 말이 함께 인정하는 가치와 규범에 맞아야 한다. 셋째는 진실성이다. 말하는 사람이 정직해야 한다. 넷째는 이해 가능성이다. 듣는 사람이 그 뜻을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

“내일 회의는 취소됐어”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그것이 사실인지, 그 사람이 그런 결정을 알릴 위치에 있는지, 거짓말은 아닌지를 물을 수 있다. 의심이 남으면 이유를 대며 따지는 ‘담론’으로 넘어간다. 이상적인 대화라면 누구나 똑같이 말할 기회를 갖고, 아무도 지배받거나 속지 않는다. 그런 대화에서 통하는 힘은 오직 “더 나은 논증의 강제 없는 강제”뿐이다. 현실에 그런 대화는 없다는 것을 하버마스도 안다. 다만 우리가 대화를 시작할 때마다 이런 이상을 은연중에 전제한다고 본다.

왜 ‘노동 패러다임에서 의사소통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라 부르나?

마르크스와 그를 이은 비판 이론은 인간이 자연에 손을 대어 무언가를 만드는 ‘노동’에서 사회와 역사를 이해하려 했다. 하버마스는 일찍부터 이 구도를 둘로 나누었다. 1968년 『인식과 관심』에서 그는 자연과학을 ‘노동’(도구적 행위)과 물질적 재생산의 연장으로 보았다. 반면 인문·사회과학은 ‘상호작용’(언어적 의사소통)과 상징적 재생산의 연장으로 보았다. 노동만으로는 사람들이 어떻게 규범을 세우고 서로를 인정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1976년 『역사적 유물론의 재구성』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사회 통합의 발전이 물질적 생산의 발전에 의해 결정된다는 마르크스적 가정에 맞서, 규범 구조가 생산력과 독립된 자기 발전 논리를 가진다고 주장했다. 『의사소통행위이론』 2권의 장 제목 ‘목적 활동에서 의사소통적 행위로’는 이 전환을 그대로 보여 준다.

이 전환은 하버마스가 스승 세대에게 내놓은 답이기도 했다.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인간의 이성이 자연과 인간을 지배하는 도구적 이성으로 굳어 버렸다는 비관적 결론에 이르렀다. 하버마스는 이성을 고립된 개인의 의식, 곧 주체철학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에서 찾았다. 그렇게 하면 비판의 규범적 근거를 다시 세울 수 있다고 보았다. 비판 이론 연구에서는 이를 ‘의사소통적 전환’이라 부른다.

체계와 생활세계는 어떻게 다른가?

하버마스는 사회를 두 층으로 본다. 하나는 ‘생활세계’다. 가족, 친구, 이웃, 동아리처럼 사람들이 말로 서로를 이해하며 문화와 규범을 물려주고 정체성을 기르는 영역이다. 다른 하나는 ‘체계’다. 시장 경제와 국가 행정처럼 돈과 권력이라는 ‘조종 매체’로 움직이는 영역이다.

슈퍼마켓 계산대를 떠올려 보자. 우리는 점원과 물건값을 두고 토론하지 않는다. 가격표대로 돈을 내면 거래가 끝난다. 구청에서 서류를 뗄 때도 규정에 따라 처리될 뿐 매번 합의할 필요가 없다. 하버마스는 이런 체계가 복잡한 현대 사회의 짐을 덜어 주는 장치라는 점을 인정한다. 체계가 생긴 것 자체가 병리는 아니다. 그는 루만을 따라 시장을 ‘규범 없이 협력을 조절하는’ 가장 중요한 예로 들기도 했다.

‘생활세계의 식민지화’란 무엇인가?

문제는 체계가 제자리를 넘어설 때 생긴다. 하버마스는 합리화가 진행되면서 ‘생활세계의 식민지화’(Kolonialisierung der Lebenswelt)가 일어난다고 말한다. 식민 지배자가 부족 사회에 밀고 들어가듯, 체계가 생활세계에 침입한다는 비유다. 체계는 소비사회가 내놓는 상품과 서비스, 관료적 규제, 법제화를 통해 생활세계를 점점 더 파고든다. 그러면 개인에게 남는 역할은 소비자와 행정 서비스의 고객(클라이언트)뿐이다.

하버마스의 설명을 풀어 쓰면 이렇다. 돈과 권력이 매개하는 경제와 행정의 명령이 서로 이해하는 행위에서 떼어 내면 망가지는 영역에까지 밀려든다. 아이를 돌보는 일이 시간당 단가로 매겨지고, 학교 교육이 성과 지표로만 평가되고, 이웃 사이의 문제를 대화 대신 민원과 소송으로 푸는 모습이 그런 예다. 그러면 생활세계는 줄어들고, 문화를 잇고 연대를 만들고 인격을 기르는 능력이 약해진다. 체계도 결국 생활세계의 의사소통 자원에 기대고 있으므로, 식민지화는 체계 자신도 불안정하게 만든다.

마르크스의 물화 개념은 어떻게 바뀌었나?

하버마스는 식민지화 테제로 루카치의 물화 개념을 새롭게 정식화하려 했다. 그런데 하버마스에게 물화 효과는 특정 계급에만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사회국가가 계급 갈등을 대체로 진정시켰기 때문에, 이런 위기가 계급 투쟁으로 번지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는 사회적 불평등을 거쳐 물화 효과가 걸러진다는 점은 인정했지만, 불평등 자체를 주요 병리로 다루지는 않았다. 그가 주목한 것은 사회국가의 고객화와 법제화였다.

좌파는 어떤 비판을 했나?

마르크스주의 쪽 비판은 1970년대부터 나왔다. 당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하버마스의 작업이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명제를 버렸고 루만의 체계 이론에 너무 많이 양보했다고 비판했다. 하버마스가 시장을 ‘규범 없는’ 영역으로 받아들인 것도 같은 맥락에서 문제가 되었다. 시장을 착취와 지배의 관계로 보지 않고, 복잡성을 덜어 주는 중립적 장치로 인정한 셈이기 때문이다.

울리히 패첼은 하버마스를 마르크스, 아도르노와 견주었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를 통째로 넘어서려던 마르크스의 목표가 하버마스에게서는 체계가 생활세계로 넘어오는 것을 ‘막아 내는’ 일로 줄어든다. 마르크스는 혁명을 말했다. 아도르노는 혁명의 전망은 없었지만 자본주의의 이윤과 지배 원리에 죄를 물었다. 하버마스는 생활세계를 지키려다 경제와 행정의 강제를 사실상 받아들일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하버마스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와의 관계를 끊지 않았다. 1979년 인터뷰에서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확실한 설명 체계로 믿지는 않지만,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관계를 연구할 동기와 분석 수단을 마르크스주의에서 얻었다고 말했다. 1989년에도 자신을 ‘마지막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불렀다. 하지만 비판 이론 내부에서도 이후 수십 년 동안 위기 비판과 자본주의 비판은 대체로 뒷전으로 밀렸다. 모이시 포스톤의 작업이 드문 예외로 꼽힌다.

다른 쪽에서는 어떤 비판이 나왔나?

헤르베르트 슈네델바흐는 1982년, 합의로 얻은 답에도 끝내 객관화할 수 없는 전제가 남는다고 지적했다. 루만은 합리성이나 인간 행위로는 사회의 결정적 과정을 붙잡을 수 없다고 보았다. 한스 알베르트, 카를오토 아펠, 장프랑수아 리오타르도 저마다 다른 방향에서 그 규범적 정초의 주장을 상대화했다.

그럼에도 이 책은 20세기 사회학의 가장 중요한 저작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하버마스는 이 이론을 바탕으로 『도덕의식과 의사소통적 행위』(1983)의 담론 윤리와 『사실성과 타당성』(1992)의 민주주의·법 이론을 펼쳤다. 그 핵심 개념인 생활세계와 공론장은 각각 해당 항목에서 다룬다.

관련 인물

출처

  1. de.wikipedia.org
  2. 위키백과 (영문)
  3. plato.stanford.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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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de.wikipedia.org
  6. 위키백과 (영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