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의 변증법』과 문화산업 비판, 부정변증법으로 비판 이론을 이끈 프랑크푸르트학파 철학자
1951년 망명지에서 쓴 아포리즘을 모은 『미니마 모랄리아』에서 아도르노는 “그릇된 삶 속에 올바른 삶은 없다”고 썼다. 10만 부 넘게 팔린 이 책의 이 한 문장은 그의 말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졌다.
프랑크푸르트에서 테오도어 루트비히 비젠그룬트로 태어났다. 철학과 음악을 함께 공부했고 알반 베르크에게 작곡을 배웠다. 1931년 프랑크푸르트대학교 교수자격을 얻었으나 1933년 나치 정권이 유대계 혈통을 이유로 강의권을 빼앗았다. 1938년 미국으로 건너가 막스 호르크하이머의 사회연구소에서 일했고, 함께 쓴 『계몽의 변증법』(1944·1947)에서 문화산업 비판을 내놓았다. 1949년 독일로 돌아와 1958년 사회연구소 소장이 되었고 『미니마 모랄리아』(1951)와 『부정변증법』(1966)을 냈다. 말년에 1968년 학생운동과 크게 부딪쳤고, 1969년 스위스 피스프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
다른 이름: 테오도어 비젠그룬트 아도르노 · 테오도어 루트비히 비젠그룬트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24프랑크푸르트대학교에서 에드문트 후설 현상학 연구로 박사학위
- 1931.02키르케고르 연구로 프랑크푸르트대학교 교수자격 취득
- 1933나치 정권이 아버지 쪽 유대계 혈통을 이유로 강의권 박탈
- 1934–1937옥스퍼드대학교 머튼 칼리지에서 연구
- 1938.02미국으로 이주, 프린스턴 라디오 연구 사업과 사회연구소에서 일함
- 1943.11미국 시민권 취득
- 1944막스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계몽의 변증법』 첫 판(『철학적 단편』) 간행, 1947년 정식 출간
- 1951『미니마 모랄리아』 출간
- 1956프랑크푸르트대학교 철학·사회학 정교수
- 1958사회연구소 소장
- 1963–1967독일사회학회 회장
- 1966『부정변증법』 출간
『계몽의 변증법』과 문화산업: 이성의 진보는 왜 새로운 야만으로 뒤집혔나
『계몽의 변증법』은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가 망명지 캘리포니아에서 1942년 초부터 함께 쓴 책이다. 1944년 『철학적 단편』이라는 제목의 등사판으로 먼저 나왔고, 1947년 암스테르담의 크베리도 출판사에서 지금의 제목으로 나왔다. 유대인을 비롯한 사람들에 대한 대량 학살을 눈앞에 두고, 두 사람은 책 첫머리에서 이렇게 물었다. 왜 인류는 참으로 인간다운 상태에 들어서는 대신 새로운 종류의 야만으로 가라앉는가.
여기서 ‘계몽’은 18세기 계몽주의만이 아니라, 생각의 힘으로 사람을 공포에서 풀어 주고 자연의 주인으로 세우려 한 인류의 긴 노력 전체를 가리킨다. 책의 두 명제는 “신화는 이미 계몽이며, 계몽은 신화로 되돌아간다”이다. 옛사람이 제물을 바쳐 자연의 힘을 달래던 때 이미 하나를 다른 것으로 바꾸는 교환과 계산의 논리가 싹텄고, 근대에 이르러 이성은 목적은 묻지 않고 수단만 계산하는 ‘도구적 이성’이 되었다. 이 이성이 산업 자본주의와 관료제의 지배적 형식이 되자, 세계는 다시 사람이 거스를 수 없는 운명처럼 보이게 되었다. 두 사람은 오디세우스가 세이렌의 노래를 들으려 제 몸을 돛대에 묶고 노 젓는 선원들의 귀는 밀랍으로 막는 장면을 시민적 개인의 원형으로 읽었다. 자기를 지키려고 제 안의 자연을 억누르는 순간, 살아가는 목적 자체가 비어 버린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널리 읽힌 장이 ‘문화산업’이다. 아도르노의 손길이 가장 뚜렷한 이 장은 영화·라디오·잡지가 ‘하나의 체계’를 이룬다고 말한다. ‘산업’이란 공장 굴뚝이 아니라 문화 상품이 표준화되고 유통 기술이 합리화되었다는 뜻이다. 대중을 위해 만든 상품은 자극과 기분 전환 같은 정해진 효과를 내도록 계획되고, 쓸모보다 팔리는 값으로 평가된다. 그래서 이 상품들은 현실을 그대로 되풀이하며 기존 질서를 우상처럼 떠받든다. 진정한 예술은 사회의 모순을 적어도 말하게 하지만, 문화산업의 상품은 사람들에게서 스스로를 알고 스스로 정하려는 욕구를 몰아내고 행동과 생각과 느낌을 획일화한다고 아도르노는 보았다.
이 생각의 뿌리는 망명 초기의 경험에 있다. 1938년 미국에 도착한 그는 폴 라자스펠드가 이끄는 프린스턴 라디오 연구 사업에서 음악 부문을 맡았다. 그때 쓴 「음악의 물신적 성격과 청취의 퇴행」에서 그는 히트곡이 노래의 질만큼이나 벌어들이는 이윤으로 평가되고, 듣는 사람은 곡 전체를 따라가지 않은 채 낱낱의 감각 효과만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고 썼다. 마르크스의 ‘상품 물신성’, 곧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물건들 사이의 관계처럼 보이는 현상을 음악에 적용한 것이다. 다만 그가 영화를 통째로 경멸한 것은 아니어서, 찰리 채플린과 프리츠 랑을 높이 샀다는 지적도 있다. 아도르노는 그 뒤의 주요 저작을 모두 『계몽의 변증법』의 보론으로 여긴다고 자주 말했다.
『부정변증법』: 개념으로 다 붙잡히지 않는 것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나
1966년에 나온 『부정변증법』은 아도르노의 철학적 주저로, 그는 이 책을 스스로 ‘반(反)체계’라고 불렀다. 출발점은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의 변증법이다. 헤겔은 아는 주체와 알려지는 대상이 서로를 통해 매개된다고 보아, 주체를 대상과 아무 연결 없이 맞세운 이마누엘 칸트를 비판했다. 아도르노는 이 ‘매개’ 개념을 이어받으면서도 그 안의 불균형을 강조한다. 주체는 그 자체로 언제나 대상이기도 하지만, 대상은 주체를 거쳐서만 생각될 수 있을 뿐 주체와 같지 않은 다른 것으로 남는다. 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유는 스스로를 속이고, 현실의 잘못된 질서 앞에서 정신이 무력하다는 것만 확인해 준다고 그는 보았다.
그래서 이 책은 ‘비동일적인 것의 철학’으로 불린다. 비동일적인 것이란 개념에 다 담기지 않는 것, 곧 낱낱의 것과 특수한 것이다. 헤겔은 이런 것에 관심이 없다며 ‘게으른 실존’이라는 딱지를 붙였는데, 아도르노는 바로 그것을 변호했다. 그는 구체적인 것을 추상하는 개념으로 모든 것을 같은 틀에 맞추는 ‘동일화하는 사유’를 믿지 않았다. 변증법적 사유는 개념이 어떤 사태를 고정되고 변하지 않는 것으로 그리는 데 이의를 제기한다. 예컨대 한 사람을 ‘노동력’이나 ‘사례’로만 다루면 그 사람의 고유함은 사라진다. 그렇다고 철학이 개념 없이 생각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는 “개념 없는 것을 개념으로 열되, 개념과 같게 만들지 않는다”는 역설적인 과제를 내걸었다. 이 철학은 정신이든 물질이든 맨 처음의 원리를 세우는 철학에도, 대상을 주체에 딸린 것으로 보는 철학에도 맞선다.
이 사유가 바라는 것은 ‘화해’다. 아도르노는 그것을 ‘서로 다른 것들의 폭력 없는 통합’이라고 풀었다. 정신과 자연, 주체와 대상, 보편과 특수, 개인과 사회가 한쪽이 다른 쪽을 지배하지 않게 되는 상태다. 화해는 비동일적인 것을 풀어놓아 서로 다른 것들의 다양함을 비로소 열어 준다. 그가 여기서 자주 쓴 말이 ‘미메시스’, 곧 다른 것을 지배하지 않고 닮아 가며 다가가는 태도다. 『계몽의 변증법』이 자연 지배로 치달은 이성을 비판했다면, 『부정변증법』은 그런 이성을 넘어설 사유의 방식을 철학의 언어로 찾으려 한 책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역사를 쓴 롤프 비거스하우스는 이 ‘비동일적인 것의 철학’을 그의 비판적 사회 이론의 지평이라고 불렀고, 알브레히트 벨머는 아도르노를 ‘비동일적인 것의 변호인’이라고 했다.
학생운동과의 충돌: 비판 이론의 스승은 왜 제자들과 맞서게 되었나
1960년대 말 서독의 학생운동은 대연정 정부가 추진한 비상사태법과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의회 밖 반대파(APO)에서 자라났고, 그 선두에 독일 사회주의 학생동맹(SDS)이 있었다. 반란의 정신을 대표한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아도르노의 제자였고, 그들은 비판 이론에서 ‘실천적 결론’을 끌어내려 했다. 아도르노도 비상사태법에는 반대해, 1968년 5월 28일 ‘비상사태 속의 민주주의’ 행동위원회 집회에서 공개적으로 발언했다. 1967년 6월 2일 서베를린 시위에서 학생 베노 오네조르크가 경찰의 총에 맞아 죽자, 그는 미학 강의에 앞서 그 학생에게 공감을 표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직접행동에는 거리를 두었고, 1969년 라디오 강연 「체념」에서 그것을 ‘사이비 활동’이자 ‘이론에 대한 조급함’이라고 불렀다.
1969년 5월 《슈피겔》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론적 모델을 세웠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화염병으로 실현하려 할 줄은 몰랐다.” 1967년 베를린에서 처음 그를 겨냥한 소동이 벌어진 뒤 일부 학생 집단은 그에게 연대와 실천적 행동을 거듭 요구했지만, 그는 거부했다. 학생들은 전단에서 옛 스승들을 ‘권위주의 국가의 앞잡이’라고 불렀고, 그의 강의는 여러 차례 중단되었다. 1969년 4월에는 여학생 세 명이 가슴을 드러낸 채 연단의 그를 둘러싸고 꽃잎을 뿌리는 일까지 있었다. 그는 사뮈엘 베케트에게 “갑자기 반동으로 공격받는다는 느낌은 놀라운 데가 있다”고 썼다. 반대로 정치적 우파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학생 폭력의 정신적 원흉이라고 비난했다.
결정적인 일은 1969년 1월 31일에 일어났다. 학생들이 사회연구소에 들어와 정치 상황에 대한 즉각 토론을 요구하자, 연구소장인 아도르노와 루트비히 폰 프리데부르크는 경찰을 불러 점거자들을 고발했다. 경찰국가와 감시 국가에 늘 반대해 온 그에게 이것은 자기 이해가 깨지는 경험이었다. 그는 가장 재능 있는 제자로 꼽히던 한스위르겐 크랄의 재판에 증인으로 서야 했다. 같은 해 2월부터 그는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와 편지로 격하게 논쟁했다. 마르쿠제는 아도르노가 실천을 멀리하는 것, 위르겐 하버마스가 학생들에게 던진 ‘좌파 파시즘’ 비난, 연구소 점거의 경찰 해산을 비판했다. 아도르노는 하버마스를 옹호하며, 이제 학생운동에도 “파시즘과 곧바로 수렴하는” 경향이 보이고 학생운동이 파시즘으로 뒤집힐 위험을 마르쿠제보다 훨씬 무겁게 본다고 답했다. 크랄 재판 다음 날 그는 스위스 산으로 휴가를 떠났고, 1969년 8월 6일 피스프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