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푸르트학파
Frankfurt School
프랑크푸르트학파는 1923년 프랑크푸르트에 세워진 사회연구소(Institut für Sozialforschung)를 중심으로 모인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사회과학자들과 그 후계 전통을 함께 부르는 이름이다. 1930년부터 연구소를 이끈 막스 호르크하이머 아래에서 철학·정신분석·경제학·사회학을 묶은 ‘비판 이론’을 내세웠고, 민족사회주의 집권 뒤 제네바와 뉴욕으로 옮겨 망명 연구를 이어 가다가 1950년 무렵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왔다. 호르크하이머·아도르노·마르쿠제·프롬 등의 1세대, 하버마스를 중심으로 한 2세대, 호네트·프레이저 등의 3세대로 이어진다.
상세
이 이름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프랑크푸르트학파’는 같은 이론을 공유한 사람들의 무리와 그들이 일한 기관, 곧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를 함께 가리킨다. 정작 당사자들이 스스로를 그렇게 부른 것은 아니다. 독일어권에서 「프랑크푸르트학파」(Frankfurter Schule)라는 말이 널리 쓰인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다.
이들은 헤겔·마르크스·프로이트를 이어받아 사회 전체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려 했다. 그 이론을 「비판 이론」이라 부르는데, 이 이름은 막스 호르크하이머의 1937년 논문 「전통 이론과 비판 이론」에서 나왔다. 학파의 대표 저작으로는 호르크하이머와 테오도어 W. 아도르노가 함께 쓴 『계몽의 변증법』이 꼽힌다. 학파가 사람과 기관을 가리킨다면 비판 이론은 그들이 만든 이론을 가리킨다. 이론의 내용은 비판 이론 항목에서 따로 다룬다.
연구소는 어떻게 세워졌나? (1923~1933)
사회연구소는 1923년 상인이자 후원자인 헤르만 바일과 그 아들 펠릭스 바일이 낸 기금으로 세워졌다. 같은 해 5월 연구소의 첫 이론 세미나로 여겨지는 「마르크스주의 작업 주간」이 열렸다. 펠릭스 바일에 따르면 이 모임을 처음 제안한 사람은 카를 코르슈였다. 코르슈와 죄르지 루카치, 훗날 연구소에서 일할 프리드리히 폴로크와 카를 아우구스트 비트포겔, 그리고 리하르트 조르게가 참석했다.
연구소 건물은 1924년 6월 22일 문을 열었다. 독일어판 위키백과는 이 연구소를 ‘과학적 마르크스주의를 위한 최초의 연구 기관’으로 소개한다. 첫 소장은 빈 대학 교수였던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자 카를 그륀베르크였다. 그는 개소 연설에서 연구소가 마르크스주의 성격을 띤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그는 자기가 펴내던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사 아카이브》도 함께 가져왔다. 그륀베르크 시기 연구소는 사회주의 역사와 경제사 연구로 이름을 알렸다. 또 모스크바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의 첫 『마르크스-엥겔스 전집』(MEGA) 편찬에 협력해, 독일 사회민주당이 보관하던 마르크스·엥겔스 유고 15만 쪽을 사진으로 복제했다.
1928년 그륀베르크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폴로크가 소장 대행을 맡았다. 1930년부터는 호르크하이머가 사실상 연구소를 이끌었고, 1931년 정식 소장이 되었다. 그는 1931년 1월 24일 취임 연설에서 철학과 개별 과학(사회학, 경제학, 역사학, 심리학)이 서로 침투하는 공동 연구를 내세웠다. 경제생활과 개인의 심리, 문화 변화가 어떻게 맞물리는지를 함께 밝히자는 것이었다. 이 구상은 「학제적 유물론」이라 불린다. 1932년에는 기관지 《사회연구지》(Zeitschrift für Sozialforschung)를 창간했다.
망명 시기에는 무엇을 했나? (1933~1949)
호르크하이머는 위험을 일찍 내다봤다. 1930년 9월 선거에서 민족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이 제2당이 되자 연구소는 1931년 기금을 네덜란드로 옮겼고, 1932년 여름 제네바의 국제노동기구 옆에 지부를 열었다. 1933년 3월 13일 연구소는 폐쇄되었다. 같은 해 7월 13일 게슈타포는 ‘공산주의 재산 몰수법’을 근거로 연구소 재산을 압수했다.
본부는 제네바로 옮겨졌다. 이어 컬럼비아 대학이 건물 한 채를 내주어 1934년 연구소는 뉴욕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폴로크·마르쿠제·뢰벤탈이 곧 합류했고, 아도르노는 1938년에야 런던에서 건너와 정식 연구원이 되었다. 1941년 호르크하이머·아도르노·폴로크는 로스앤젤레스로 옮겼다.
망명 시기의 주요 작업은 다음과 같다.
- 『권위와 가족에 관한 연구』(1936): 가족과 권위, 성격 구조의 관계를 다룬 공동 연구. 에리히 프롬의 사회심리학 이론이 뼈대가 되었다.
- 『계몽의 변증법』(1944년 타자본, 1947년 출간): 이성 자체가 지배의 도구가 되었다는 진단. 「도구적 이성」, 「문화산업」 같은 개념이 여기서 나왔다.
- 『권위주의적 성격』(1950): 미국유대인위원회가 후원한 「편견 연구」 총서의 첫 권. 파시즘에 끌리는 성격을 재려 했다.
- 프란츠 노이만의 『비히모스』와 폴로크의 「국가자본주의」론: 민족사회주의 체제와 전시 경제를 어떻게 볼지를 두고 연구소 안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연구소가 하나의 목소리를 낸 것은 아니다. 경제학자 헨리크 그로스만과 비트포겔은 그륀베르크 시기의 정통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서서 소련을 옹호했고, 호르크하이머를 둘러싼 핵심 그룹과는 거리가 있었다. 프롬은 아도르노와 갈등을 빚다가 1939년 연구소에서 밀려났다.
전후에는 어떻게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왔나?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1950년 무렵 프랑크푸르트 대학으로 돌아왔다. 연구소는 새 건물을 짓고 1951년 11월 14일 정식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망명했던 연구원 가운데 돌아온 사람은 호르크하이머·아도르노·폴로크뿐이었다. 마르쿠제, 뢰벤탈, 노이만 등은 미국에 남았다.
재건된 연구소의 첫 대형 사업은 「집단 실험」(Gruppenexperiment)이었다. 서독 주민들을 소집단으로 모아 유대인 박해, 독일의 죄책, 점령국, 민주주의 같은 민감한 주제를 자유롭게 토론하게 하고 그 반응을 분석한 연구다. 1960년대에는 학파의 이론이 서독 학생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다만 아도르노와 학생운동 사이에는 갈등도 있었다.
연구소를 이끈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 시기 | 소장 | 비고 |
|---|---|---|
| 1924~1928 | 카를 그륀베르크 | 1928년 뇌졸중 뒤 폴로크가 대행 |
| 1930/31~ | 막스 호르크하이머 | 1930년 사실상, 1931년 정식 취임. 망명과 재건을 이끌었다 |
| ~1969 | 테오도어 W. 아도르노 | 호르크하이머에게서 넘겨받은 해는 자료마다 다르다(1958년, 1964년 등) |
| 1969~2001 | 루트비히 폰 프리데부르크 | 1972~1984년에는 게르하르트 브란트가 함께 이끌었다 |
| 2001~2018 | 악셀 호네트 | 하버마스의 제자. 사회철학 연구를 되살렸다 |
| 2019~2021 | 페르디난트 주터뤼티 | 소장 대행 |
| 2021~ | 슈테판 레세니히 |
세대는 어떻게 나누나?
학파는 흔히 세대로 나누어 설명한다. 다만 누구를 어느 세대에 넣을지는 연구자마다 다르다. 특히 3세대 명단은 학자마다 크게 엇갈린다.
| 세대 | 대표 인물 | 특징 |
|---|---|---|
| 1세대 (1892~1905년생) | 막스 호르크하이머, 테오도어 W. 아도르노,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에리히 프롬, 프리드리히 폴로크, 레오 뢰벤탈, 프란츠 노이만, 오토 키르히하이머. 연구소 주변에서 발터 벤야민,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 | 바이마르 공화국과 망명기에 활동했고 서로 직접 교류했다. 모두 민족사회주의의 박해를 피해 망명했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결합했고, 1940년대 이후에는 비관적인 문명 진단으로 기울었다 |
| 2세대 (1922~1937년생) | 위르겐 하버마스, 알프레트 슈미트, 알브레히트 벨머, 오스카어 네크트, 클라우스 오페 | 대부분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제자이고 활동은 전후에 이루어졌다. 하버마스는 1세대의 철저한 이성 회의를 버리고 ‘의사소통적 이성’을 이론의 중심에 놓았다 |
| 3세대 | 악셀 호네트, 낸시 프레이저, 세일라 벤하비브, 크리스토프 멘케. 이후 라헬 예기, 하르트무트 로자 등 | 호네트는 인정 이론, 프레이저는 분배와 인정의 정의론으로 이론을 넓혔다. 활동 무대도 미국과 라틴아메리카로 넓어졌다 |
마르크스주의와는 어떤 관계인가?
학파의 1세대는 공산당의 정통 교리에서 벗어난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정당 마르크스주의가 마르크스 사상의 일부만 되풀이하고 그 철학적 함의를 무시한다고 보았다. 제1차 세계대전 뒤 노동운동의 혁명이 실패하고, 문명국 독일에서 민족사회주의가 권력을 잡았다. 이 두 사건 앞에서 그들은 노동자가 왜 자기 계급 이익에 어긋나는 권위주의 정치에 끌리는지를 물었다. 이 물음에 답하려고 마르크스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막스 베버의 합리화론을 결합했다.
‘비판 이론’이라는 이름에는 마르크스주의와의 미묘한 관계도 담겨 있다. 독일어판 위키백과는 이 이름이 정치적으로 무거운 ‘마르크스주의’라는 꼬리표를 피하게 해 주었다고 설명한다. 『계몽의 변증법』은 1947년 출간되면서 ‘자본’을 ‘경제’로, ‘생산관계’를 ‘경제의 형태’로 바꾸는 식으로 마르크스주의 용어를 덜 부담스러운 말로 고쳤다. 전후 서독의 보수적 분위기에서도 이들은 마르크스주의 뿌리를 조심스럽게 감추었다.
연구의 중심도 옮겨 갔다. 1930년대에는 정치경제학 비판과 경험적 사회 연구를 묶으려 했다. 그러다 1940년대 『계몽의 변증법』에 이르러 베버에게서 빌린 ‘도구적 이성’ 비판이 앞에 섰다. 이 전환의 배경에는 폴로크의 국가자본주의론이 있었다.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면서 마르크스가 말한 경제의 우위가 정치의 우위로 바뀌었다는 분석이다.
누가 어떻게 비판했나?
마르크스주의 쪽 비판의 초점은 이론과 실천의 분리였다. 루카치는 『소설의 이론』 재판 서문에서 학파의 지식인들을 이렇게 비꼬았다. 그들은 ‘심연 그랜드 호텔’(Grand Hotel Abgrund)의 테라스에서 ‘느긋하게 즐기는 식사나 예술 작품’ 사이로 세상의 비참을 내려다본다는 것이다. 이 표현은 이후 학파를 비판하는 관용구가 되었다. 폴란드 철학자 레셰크 코와코프스키는 1930년대 호르크하이머의 비판 이론을 ‘프롤레타리아 없는 루카치식 마르크스주의’라 불렀다. 나머지 절반을 무엇으로도 채우지 못한 ‘반쪽 마르크스주의’라는 것이다.
보수 쪽에서는 요아힘 리터의 제자들이 맞섰다. 귄터 로르모저는 『비판 이론의 빈곤』(1970)에서 아도르노가 하이데거처럼 이성의 파괴에 가담했다고 비판했다. 헤르만 뤼베는 학파의 이데올로기론이 현실을 모른다고 공격했다.
학파 내부의 비판도 있었다. 하버마스는 『계몽의 변증법』이 이성을 송두리째 의심한 탓에 자기 비판의 근거마저 잃었다고 지적하며 의사소통적 이성으로 이론을 다시 세웠다.
‘문화 마르크스주의’ 음모론은 무엇인가?
「문화 마르크스주의」(Cultural Marxism)라는 말은 학술 용어가 아니다. 극우와 반유대주의 진영에서 퍼뜨린 음모론의 이름이다. 이 음모론은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서구 사회를 무너뜨리려고 문화 전쟁을 계획적으로 벌여 왔고, 오늘의 진보 운동과 ‘정치적 올바름’이 그 결과라고 주장한다. 이 음모론을 분석한 학자들은 그 주장에 사실 근거가 없다고 결론지었다.
음모론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퍼졌다.
- 1930년대: ‘문화 마르크스주의’라는 말은 1938년 영국파시스트연합의 기관지 《영국연합 계간》에 이미 나온다. 민족사회주의 선전은 프랑크푸르트학파처럼 유대계 지식인이 많은 문화 흐름을 「문화 볼셰비즘」(Kulturbolschewismus)으로 몰아붙였다.
- 1992년: 라루슈 운동에 속한 마이클 미니치노가 쓴 「새로운 암흑시대: 프랑크푸르트학파와 ‘정치적 올바름’」이 미국판 음모론의 출발점으로 꼽힌다. 미니치노는 2011년 노르웨이 테러 이후 자기 글이 라루슈의 세계관에 맞추느라 ‘절망적으로 일그러졌다’며 사실상 철회했다.
- 1990년대 후반~2000년대: 미국 문화 보수주의자 폴 웨이리치와 윌리엄 린드가 정치적 올바름을 문화 마르크스주의와 동일시하며 이 말을 퍼뜨렸다.
- 2011년: 노르웨이에서 테러를 저지른 안데르스 브레이비크가 선언문에서 이 음모론을 내세웠다. 2010년대 이후 이 말은 주류 정치 담론으로도 번졌다.
음모론과 실제 역사는 다음과 같이 다르다.
| 음모론의 주장 | 사료가 보여 주는 것 |
|---|---|
| 하나의 조직이 계획적으로 문화를 장악하려 했다 | 작은 연구소가 책과 논문, 강의로 학계에 영향을 주었다. 구성원끼리도 다투었다. 프롬은 연구소를 떠났고, 하버마스는 1세대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
| 대중문화를 일부러 타락시켰다 |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오히려 상업 대중문화를 비판했다. 그들은 문화산업 뒤에 음모를 꾸미는 엘리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상품으로 만드는 자본주의의 구조가 있다고 보았다 |
| 오늘의 진보 운동은 그들의 작품이다 | 페미니즘과 반인종주의 운동은 각자의 역사와 주체를 갖는다. 학파의 영향은 학계에 한정되었고, 마르쿠제를 빼면 1세대는 1960년대 운동과 거리를 두었다 |
미국의 역사가 마틴 제이는 이 음모론이 학파의 실제 생각을 ‘빈약한 만화’처럼 그려 놓는다고 평했다. 음모론을 가려내는 기준은 단순하다. 서로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작업을 하나의 의도로 묶는지, 반증할 수 없는 비밀 계획을 가정하는지, 특정 민족 집단을 표적으로 삼는지 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