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과 마르크스주의를 이은 사회심리학자, 『자유로부터의 도피』와 사회주의 휴머니즘의 사상가
프롬은 현대 서방 사회가 어느 때보다 큰 자유와 풍요를 누리면서도 사람들이 남들이 하는 대로만 하려 든다고 보았다. 그의 진단으로 사람들은 “더 이상 노예가 될 위험이 아니라 로봇이 될 위험에” 놓여 있다.
프랑크푸르트의 엄격한 유대교 집안에서 태어나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정신분석가로 훈련받았다. 1930년 사회연구소의 사회심리학 부문을 맡아 정신분석과 마르크스주의를 잇는 작업으로 비판 이론의 형성에 이바지했다. 1934년 미국으로 망명했고 1939년 연구소와 갈라섰다. 『자유로부터의 도피』(1941)에서 근대인이 자유의 짐을 피해 권위에 매달리는 심리를 분석했고, 『건전한 사회』(1955)에서는 서방 자본주의와 소련 공산주의를 함께 비판하며 인간주의적 민주 사회주의를 내세웠다. 멕시코에서 가르쳤고 미국 사회당원으로 반핵 평화운동에 나섰다. 1980년 스위스에서 죽었다.
다른 이름: 에리히 젤리히만 프롬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22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서 알프레트 베버 지도로 사회학 박사학위(「유대 율법」)
- 1926정통 유대교에서 떠남, 프리다 라이히만과 결혼
- 1929베를린에서 비의사 정신분석가로 개업
- 1930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 사회심리학 부문 책임자
- 1934.05미국으로 망명, 컬럼비아대학교에서 활동
- 1939사회연구소와 결별
- 1940.05.25미국 시민권 취득
- 1941『자유로부터의 도피』 출간
- 1946윌리엄 앨런슨 화이트 정신의학·정신분석·심리학 연구소 공동 설립
- 1949멕시코시티로 옮겨 멕시코국립자치대학교 교수
- 1955『건전한 사회』 출간
- 1974스위스 무랄토로 이주
『자유로부터의 도피』와 사회적 성격: 사람들은 왜 자유를 버리고 권위에 매달리나
프롬은 사회연구소에서 정신분석을 사회 연구에 들여온 사람이었다. 1932년 《사회연구지》 창간호를 연 그의 글 「분석적 사회심리학의 방법과 과제」는 연구소의 이론적 방향과 1936년의 『권위와 가족에 관한 연구』, 나아가 아도르노 등의 『권위주의적 성격』(1950)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 그보다 앞선 1929~1930년 그는 노동자와 사무직원에게 설문지 3000부를 보내 1150부를 돌려받았다. 당시 독일에서 거의 쓰이지 않던 방법이었다. 연구소가 망명하는 와중에 자료가 흩어져 1934년에는 584부만 남았고, 분석은 이 584부로 이루어졌다. 응답자를 권위주의적 성격, 사회를 이성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급진적·혁명적 성격, 두 경향이 섞인 성격으로 나눈 이 조사는 권위주의적 성격에 관한 최초의 경험 연구였다.
프롬이 던진 물음은 이렇다. 한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은 왜 역사가 보여 주듯 그토록 효과적인가. 물리적 폭력에 대한 공포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이론을 고쳐 답을 찾았다. 아이는 가족 안에서 부모, 특히 아버지를 통해 사회의 권위를 처음 만난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권위의 원본이 아니라 복사본이다. 프로이트가 작은 가족 안에서 설명한 양심(초자아)의 형성을, 프롬은 아버지에게 권한을 주는 사회의 힘에서 끌어냈다. 거꾸로 사회의 권위도 늘 아버지 같은 얼굴을 띤다. 나라의 아버지라는 말이나 아이를 안아 드는 정치인의 모습이 그렇다.
여기서 ‘사회적 성격’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한 사회의 구성원 다수가 함께 지니는 생각과 행동의 틀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가치와 규범으로 제2의 천성처럼 받아들이고, 그 덕분에 사회와 문화가 이어진다. 이 개념은 사회학과 심리학을 잇는 다리가 되었다.
1941년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이 생각을 나치즘의 시대에 적용했다. 중세 사람은 근대적 의미에서 자유롭지 않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자리가 있어 외롭지 않았고 삶에 의심할 여지 없는 의미가 있었다. 근대는 사람을 그런 ‘일차적 유대’에서 풀어 주었다. 그러나 경제·사회·정치 조건이 개성을 실현할 바탕을 주지 못하면, 안정을 잃은 사람에게 자유는 견딜 수 없는 짐이 된다. 그러면 사람들은 자유를 빼앗기더라도 불안을 덜어 줄 복종으로 달아난다. 프롬은 그 도피의 방식으로 남에게 자기를 맡기는 권위주의, 세계를 없애 버리려는 파괴성, 그리고 사회가 바라는 모습으로 자기를 바꾸는 ‘자동인형 같은 순응’을 꼽았다. 그가 내놓은 길은 모든 사람과의 적극적 연대, 그리고 사랑과 노동 같은 자발적 활동으로, 일차적 유대가 아니라 자유롭고 독립된 개인으로서 세계와 다시 이어지는 것이었다. 이 책은 정치심리학의 출발점이 된 저작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마르쿠제와의 논쟁과 사회주의 휴머니즘: 프롬은 어떤 사회주의를 원했나
1930년대 말 프롬은 리비도 충동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프로이트의 견해에 의문을 던졌고, 정통 프로이트주의에서 멀어지는 그를 연구소 동료들은 불편하게 여겼다. 그는 1939년 말 연구소와 갈라섰고, 미국에서 카렌 호나이, 해리 스택 설리번과 함께 ‘신프로이트학파’로 묶였다.
갈등은 1955년 공개 논쟁으로 터졌다.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에로스와 문명』의 에필로그 「신프로이트주의 수정주의 비판」에서, 프롬을 비롯한 정신분석가들이 리비도 이론, 죽음 충동,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같은 프로이트의 핵심 통찰을 버려 정신분석을 순응의 심리학으로 만들었다고 공격했다. 프롬이 인간 성격의 충동적 바탕에서 멀어져, 부정적인 것을 그대로 둔 채 ‘긍정적 사고’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프롬은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의 이른바 급진주의」에서 반박했다. 마르쿠제가 부르주아지의 전형적 대표이자 사회주의의 반대자였던 프로이트를 혁명적 사상가로 잘못 읽었고, 임상 관찰과 경험을 일부러 배제해 정신분석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잡지 《디센트》에서 오간 논쟁은 매우 격해서, 프롬이 비판 이론의 영역에서 밀려나는 계기가 되었고 두 사람의 우정도 끝났다. 스탠퍼드 철학 백과는 두 사람이 서로 엇갈린 말을 했다고 평한다. 프롬은 사회가 성격을 빚는 방식에 더 관심을 두었을 뿐 덜 비판적이 된 것이 아니며, 그 역시 자본주의의 억압에서 에로스를 구하려 했다는 것이다.
같은 해 나온 『건전한 사회』는 프롬의 사회·정치 철학이 정점에 이른 책이다. 그는 주로 카를 마르크스의 초기 저작에 기대어, 소련 마르크스주의에서는 거의 사라진 자유의 이상을 다시 앞세웠다. 그의 사회주의는 서방 자본주의와 소련 공산주의를 모두 사람을 비인간화하는 체제로 거부했고, 두 체제에 공통된 현대인의 ‘소외’를 문제 삼았다. 소외란 사람이 한 일이 오히려 낯선 힘이 되어 그 사람을 지배하는 상태를 말한다. 그는 1960년대 초 마르크스의 인간관을 다룬 책과 『환상의 사슬 너머』를 내어 마르크스의 인간주의적 메시지를 미국과 서유럽 독자에게 알렸다. 1965년에는 동서의 마르크스주의 인간주의자들이 협력하도록 논문집 『사회주의 휴머니즘』을 엮었고, 1960년대 공산주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밀란 마호베츠 등이 꾸린 기독교-마르크스주의 대화 모임에도 참여했다.
실천도 따랐다. 그는 1950년대 중반 미국 사회당에 들어가 매카시즘으로 기운 미국 정치에 대안을 내려 했고, 반핵 단체 SANE를 함께 세워 핵무기 경쟁과 베트남 전쟁 개입에 반대했다. 1968년 유진 매카시의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을 지지했다가 패한 뒤에는 미국 정치 무대에서 대체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