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

『존재와 시간』을 쓴 독일 철학자, 1933년 나치당에 입당한 대학 총장

1933년 5월 27일 총장 취임 연설 「독일 대학의 자기주장」에서 그는 “이 떨쳐 일어남의 위대함과 영광”을 말하고, 교수와 학생의 관계를 “지도자”와 “추종자”의 관계로 그렸다.

바덴 메스키르히의 성당지기 집안에서 태어났다. 신학에서 철학으로 옮겨 에드문트 후설의 조교로 현상학을 익혔고, 1927년 『존재와 시간』으로 이름을 얻어 이듬해 후설의 프라이부르크 대학 교수 자리를 이었다. 1933년 4월 이 대학 총장이 되고 5월 1일 나치당에 들어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당원으로 남았다. 총장직은 1934년 4월 그만두었다. 전후 대학은 1946년 그의 강의 자격을 박탈했고, 금지는 1951년 정년 퇴임으로 풀렸다. 헤르베르트 마르쿠제·한나 아렌트·한스 요나스 등이 그에게 배웠다. 2014년 공개된 「검은 노트」의 반유대주의 서술로 나치 협력 문제가 다시 논쟁이 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존재와 시간』은 무엇을 물었고 누구에게 이어졌나

『존재와 시간』(1927)이 던진 물음은 단순해 보인다.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우리는 날마다 책이 있다, 내가 있다고 말하지만, 그 있음(존재) 자체가 무엇인지는 제대로 묻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플라톤이 이미 이 물음 앞에서 당황했다는 말을 인용하며, 2천 년이 지나도 답이 없으니 존재의 의미를 다시 물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이 물음을 던지는 존재, 곧 인간에서 출발했다. 그는 인간을 “현존재”(Dasein, 거기에 있음)라고 불렀다. 근대 철학은 세계와 따로 떨어진 주체가 바깥 사물을 인식한다고 보았지만, 하이데거가 보기에 인간은 언제나 이미 사물과 사람과 의미의 그물 속에 놓여 있다. 이것이 “세계-내-존재”라는 말의 뜻이다.

이 책에서 가장 널리 읽힌 것은 일상에 대한 분석이다. 사람은 대개 “세상 사람”(das Man), 곧 누구라고 할 수 없는 익명의 남들이 사는 방식대로 생각하고 산다. 하이데거는 이를 “비본래적” 삶이라 불렀고,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자기 죽음을 마주하는 “죽음을 향한 존재”, 불안, 결단 같은 개념으로 그 휩쓸림에서 벗어나는 길을 그렸다. 책은 스승 에드문트 후설이 펴내던 현상학 연보의 한 권으로 나왔고 후설에게 바쳐졌지만, 후설 자신은 이 책이 자기 현상학의 목표에서 벗어났다고 여겼다.

그의 명성은 책보다 먼저였다. 마르부르크에서 그의 강의를 들은 한나 아렌트는 강의 필기가 손에서 손으로 돌았고 그의 이름이 “숨은 왕에 대한 소문처럼” 독일을 돌았다고 회고했다. 마르부르크와 프라이부르크에서 그에게 배운 사람으로는 카를 뢰비트, 한스게오르크 가다머, 한스 요나스, 귄터 안더스,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등이 있다. 1925년부터 그는 열여덟 살 유대인 학생 아렌트와 비밀 연애 관계를 맺었는데, 이 사실은 두 사람이 죽은 뒤에야 알려졌다.

영향은 넓게 퍼졌다. 장폴 사르트르를 거쳐 프랑스 실존주의가 생겨났고, 가다머는 이해와 해석의 철학인 해석학을 이어 갔으며,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존재보다 타인을 앞세우는 윤리학으로 그에게 맞섰다. 마르쿠제는 『존재와 시간』을 마르크스주의와 결합하려 했다가 1932년 그와 갈라섰다.

1933년 총장 하이데거는 나치를 위해 무엇을 했나

1933년 1월 히틀러가 총리가 되자 하이데거는 그가 “민족사회주의 혁명”이라 여긴 흐름에 열성적으로 뛰어들었다. 이미 1932년 선거에서 나치당에 표를 던졌던 그는 4월 21일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이 되었다. 사회민주당원인 전임 총장 빌헬름 폰 묄렌도르프가 하루 전 물러나며 그를 추천했는데, 이 사퇴는 나치 정권의 압력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5월 1일 그는 나치당에 들어갔고(당원 번호 3,125,894) 전쟁이 끝날 때까지 당원으로 남았다.

5월 27일 총장 취임 연설 「독일 대학의 자기주장」에서 그는 “이 떨쳐 일어남의 위대함과 영광”을 말하고, 교수와 학생의 관계를 “지도자”와 “추종자”의 관계로 그렸으며, 대학이 “민족공동체”에 매여야 한다고 했다. 총장으로서 그는 나치 선전과 “획일화”(대학과 단체를 나치 체제에 맞게 뜯어고치는 정책)에 참여했다. 그가 총장이던 때 유대계 동료 교수들이 해임되었고, 그는 동료 두 사람을 미온적인 나치라고 고발했다. 11월 11일에는 라이프치히에서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독일 교수들의 신앙고백」에 서명하고 주 연설을 했다.

1934년 4월 27일 그는 총장직에서 물러났다. 뒷날 그는 나치의 대학 정책을 따를 수 없어서 물러났다고 설명했지만, 독일어권 서술은 오히려 그 정책이 그에게 충분히 멀리 가지 않았고, 미래의 대학교수 모두를 철학적으로 훈련할 중앙 아카데미 같은 그의 계획이 대학과 당 어디서도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 뒤에도 그는 나치당원으로 남았고, 1934년 5월 한스 프랑크가 이끄는 독일법 아카데미의 법철학 위원회에 알프레트 로젠베르크와 함께 창립 위원으로 들어가 적어도 1936년까지 활동했다.

스승 후설과의 관계는 이 시기의 아픈 대목이다. 1933년 4월 바덴 주의 유대계 공무원 정직 조치로 이미 은퇴한 후설에게도 강제 휴직이 통보되었는데, 영어권 서술에 따르면 통보한 것은 하이데거가 아니라 전임 총장이었다. 하이데거는 그 무렵 이미 후설과 직접 연락을 끊었고, 1938년 후설의 장례에 가지 않았으며, 1941년 출판사의 요구로 『존재와 시간』의 후설 헌사를 뺐다. 그는 뒷날 이를 “인간적 실패”라고 했다.

전쟁이 끝난 뒤 대학은 그를 다시 심사했다. 그의 요청으로 소견서를 쓴 카를 야스퍼스조차 그를 교수단에 둘 수 없다며 몇 년의 정직을 권했고, 대학 평의회는 1946년 1월 19일 그의 강의 자격을 박탈했다. 이 금지는 1951년 정년 퇴임으로 풀렸다. 그는 그 뒤로 자신의 나치 경력에 대해 대체로 침묵했다.

「검은 노트」는 무엇을 드러냈고, 무엇이 아직 해석의 문제인가

「검은 노트」는 하이데거가 1931년부터 1975년까지 검은 표지 공책에 적은 사유 일기다. 그는 이 공책들을 전집 마지막에 실으라고 정해 두었고, 1931~1941년 부분이 2014년 2~3월에 세 권으로 나왔다. 1938~1939년 공책에는 볼셰비즘과 인종 이론을 함께 “계략”(Machenschaft, 모든 것을 계산과 지배의 대상으로 만드는 근대의 경향을 가리킨 그의 말)의 표현으로 비판하는 대목과 함께, “유대교”를 문제적으로 다루는 대목이 처음 나온다.

공개된 문장 가운데는 이런 것들이 있다. “세계 유대인”은 어디서도 붙잡을 수 없고 군사 행동에 나설 필요 없이 영향력을 넓히는데 “우리”는 민족의 가장 좋은 피를 바쳐야 한다는 대목, 유대인이 인종 원리에 따라 살아 왔으니 그 원리로 공격받아도 불평할 수 없다는 대목이다. 후설이 죽은 이듬해인 1939년에는, 유대교의 힘이 커지는 것은 서양 형이상학이 텅 빈 합리성과 계산 능력에 발판을 내주었기 때문이라고 쓰면서 바로 이어 괄호 안에 후설의 현상학을 언급했다. 반면 같은 공책에는 생물학적 인종주의를 비판하는 대목도 있다.

이 공개 뒤 독일어권 연구에서는 하이데거가 반유대주의자였다는 데에 대체로 의견이 모였다. 다만 다수는 생물학적 인종주의는 그에게서 배제한다. 의견이 갈리는 것은 그 다음 물음, 곧 나치 참여와 반유대주의가 그의 철학 자체에 얼마나 스며 있느냐다. 한쪽 끝에는 그것이 작품과 상관없는 한때의 잘못이었다는 하이데거 자신의 입장이 있고, 다른 끝에는 그의 철학 전체를 나치 이데올로기로 읽는 해석이 있다. 그 사이에서 철학자 도나텔라 디 체사레는 1939년의 문장이 하이데거가 후설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철학적 한계를 지닌 사람으로 보았음을 뜻한다고 읽는다.

정리하면 이렇다. 1933년 5월 1일 나치당 입당과 1945년까지의 당적, 총장 취임 연설의 문장, 동료 고발, 히틀러 지지 선언 서명, 독일법 아카데미 위원회 활동, 「검은 노트」의 반유대주의 문장은 기록으로 확인되는 사실이다. 이것이 『존재와 시간』의 개념들과 어떻게 이어지는지는 해석의 문제이고, 마르쿠제·아렌트·레비나스 같은 제자와 후학이 그를 두고 서로 다른 결론을 낸 것도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