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학
Phenomenology
의식에 나타나는 경험을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 기술해 그 구조를 밝히려는 철학의 방법이자 흐름. 1900~1901년 에드문트 후설의 『논리 연구』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사태 자체로’ 돌아가자는 구호, 모든 의식은 무언가에 대한 의식이라는 지향성, 세계가 실제로 있는지에 대한 판단을 괄호 치는 에포케(판단 중지)가 핵심이다.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 물음, 장폴 사르트르와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실존·신체 철학으로 갈라졌다.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쩐득타오, 카렐 코시크 등은 이를 마르크스주의와 결합하려 했다.
상세
현상학은 무엇을 하려는가?
탁자 위의 커피잔을 생각해 보자. 물리학은 그것을 원자와 분자의 배열로 설명한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커피잔은 그렇지 않다. 손잡이가 달려 있어 쥘 수 있고, 따뜻한 것을 담아 마실 수 있다. 앞면만 보여도 뒷면이 있다는 것을 안다. 할머니에게 받은 잔이라면 추억도 함께 떠오른다. 현상학은 이처럼 의식에 나타나는 그대로의 경험을 꼼꼼히 기술해, 그 경험이 어떤 구조로 짜여 있는지를 밝히려는 철학이다.
말의 뿌리는 그리스어 phainomenon(나타나는 것, 현상)과 logos(말, 학문)다.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은 현상학을 “1인칭 관점에서 경험되는 의식의 구조에 대한 연구”로 정의한다. 독일어권 백과사전도 현상학을 직접 주어진 현상에서 인식의 근원을 찾는 흐름으로 소개한다. 핵심은 이론을 먼저 세우고 경험을 거기에 끼워 맞추지 말고, 경험이 스스로 보여 주는 것에서 출발하자는 태도다.
이 말은 누가 먼저 썼나?
‘현상학’이라는 말은 18세기부터 있었다. 요한 하인리히 람베르트는 1764년 『신기관』에서 ‘현상학 또는 가상(假象)의 학설’을 진리 탐구의 도구로 내세웠다. 칸트도 이 말을 썼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의 『정신현상학』(1807)에서 이 말은 의식이 단순한 감각에서 출발해 절대지에 이르기까지 거치는 형태들을 뜻한다. 헤겔에게는 그 과정에서 인간의 구체적 활동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점에서 오늘날의 현상학과 쓰임이 다르다. 프란츠 브렌타노는 ‘기술 심리학’이라는 이름으로 마음의 현상을 기술했다. 현상학이 독자적인 철학 방법이 된 것은 20세기 초 후설에게서다.
‘사태 자체로’는 무슨 뜻인가?
후설은 『논리 연구』(1900~1901)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사태 자체’로 돌아가고자 한다.” 이 구호는 현상학 운동 전체의 표어가 되었다. 공허한 사변과 높이 떠 있는 추상 이론을 멀리하고, 실제로 주어진 것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자는 뜻이다.
당시 철학에서는 논리 법칙도 결국 사람 머릿속의 심리 과정이라는 ‘심리주의’가 힘을 얻고 있었다. 후설은 『논리 연구』 1권에서 이것을 비판했다. 2 더하기 2가 4라는 것은 누가 어떤 기분으로 계산하든 참이다. 그러니 논리의 타당성을 심리학으로 환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후설이 바란 것은 자연과학이 깔고 있는 선입견과 존재 가정에서 벗어나 직접 체험되는 명증에서 출발하는 ‘엄밀한 학문’으로서의 철학이었다.
지향성이란 무엇인가?
현상학의 출발점은 브렌타노에게서 이어받은 ‘지향성’이다. 의식은 언제나 무언가에 대한 의식이다. 두려워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것이고, 바란다는 것은 무언가를 바라는 것이다. 대상 없이 그냥 ‘두려움 일반’만 있는 의식은 없다. 희망하기, 의심하기, 후회하기, 확신하기는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대상을 향한다.
이 생각은 사소해 보이지만, 철학이 오래 씨름해 온 문제에 새로운 길을 열었다. 세계를 ‘안의 주체’와 ‘밖의 객체’로 쪼갠 뒤, 주체가 어떻게 객체에 닿는지 묻는 문제다. 현상학은 의식이 처음부터 세계를 향해 열려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후설은 이 구조를 의식 작용(노에시스)과 그 의미 내용(노에마)으로 나누어 분석했다.
에포케와 환원이란 무엇인가?
현상학자는 일상의 ‘자연적 태도’를 잠시 멈춘다. 평소 우리는 세계가 우리와 상관없이 그냥 있다고 믿으며 산다. 후설은 이 믿음을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말고 일단 ‘괄호 안에’ 넣자고 했다. 이것이 그리스어로 ‘판단을 멈춘다’는 뜻의 에포케(Epoché)다. 독일어권 해설은 이를 “세계의 존재를 괄호 안에 묶는” 일이라고 요약한다. 감정적 선입견, 이론적 가정, 전통에서 물려받은 지식을 모두 멈춘 채, 대상이 의식에 어떻게 주어지는지만 본다.
예를 들어 지금 보는 장면이 꿈인지 현실인지를 따지지 않아도, 그 장면이 어떻게 보이는지는 기술할 수 있다. 다음 단계가 ‘본질 직관’이다. 상상 속에서 대상을 자유롭게 바꿔 보며 무엇이 끝까지 변하지 않는지를 찾는다. 진홍색과 와인색은 다른 색이지만 둘 다 빨강이다. 이렇게 변주를 거듭해도 남는 공통점이 본질이다. 후설은 1913년 『순수 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에서 이 방법을 ‘선험적 관념론’의 형태로 정식화했다. 그러자 『논리 연구』를 실재론으로 읽었던 제자들 일부가 그에게서 멀어졌다.
하이데거는 현상학을 어떻게 바꾸었나?
후설의 조교였던 마르틴 하이데거는 스승의 방법을 이어받으면서도 방향을 크게 틀었다. 그는 인간을 에포케 안에서 기술하면 바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 곧 ‘실존’을 빼놓게 된다고 비판했다. 세계에 대한 믿음을 괄호 치는 대신, 이미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 방식을 분석하자는 것이다.
1927년 후설에게 헌정한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현상을 ‘자기 자신을 내보이는 것’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존재론은 현상학으로서만 가능하다”고 결론지었다. 후설이 대상이 주어지는 방식을 물었다면, 하이데거는 존재 자체의 의미를 물었다. 그 분석의 중심 개념은 현존재 항목에서 다룬다.
프랑스에서는 어떻게 이어졌나?
1930~1940년대 프랑스에서 현상학은 실존주의의 뿌리가 되었다. 장폴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1943)에서 사물처럼 그냥 있는 ‘즉자 존재’와 무(無)와의 관계를 통해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인간의 ‘대자 존재’를 구별했다. 그는 선택의 자유와 타인의 ‘시선’을 생생하게 기술했다.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지각의 현상학』에서 몸을 철학의 중심에 놓았다. 우리는 머리로 세계를 생각하기 전에 몸으로 세계에 관여한다. 자전거 타는 법을 아는 몸은 그것을 말로 설명하지 못해도 이미 알고 있다. 그는 정신과 몸, 주관과 객관이라는 낡은 이분법을 넘어서려 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에서 출발하는 윤리를 세웠다. 미셸 푸코는 초기에 하이데거를 중심으로 현상학의 강한 영향을 받았다. 1954년 무렵에는 현상학과 마르크스주의, 정신분석을 함께 공부해 ‘정신병’에 대한 인간학적 모델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이후 계보학 시기에는 현상학을 강하게 비판했다.
마르크스주의와는 어떻게 만났나?
현상학은 의식과 경험에서 출발하고, 마르크스주의는 노동과 사회관계에서 출발한다. 얼핏 멀어 보이는 두 흐름을 잇는 시도는 여러 곳에서 나왔다.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존재와 시간』에 끌린 마르쿠제는 1928년 프라이부르크로 가서 후설과 하이데거에게 배웠다. 1928~1932년 그는 ‘하이데거적’ 또는 ‘현상학적 마르크스주의’라 불리는 기획을 밀고 나갔다. 혁명이 예상대로 오지 않는 ‘마르크스주의의 위기’ 속에서 마르크스주의에 구체적인 철학적 토대를 주려는 것이었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그를 ‘최초의 하이데거 마르크스주의자’라 불렀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민족사회주의 쪽 행보와 1932년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수고』 출간이 겹치면서 마르쿠제는 같은 해 하이데거와 갈라섰다. 자세한 내용은 현존재 항목에서 다룬다.
쩐득타오(Trần Đức Thảo).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태어난 베트남 철학자로, 1936년 프랑스로 건너가 고등사범학교에서 메를로퐁티에게 배웠다. 1951년 『현상학과 변증법적 유물론』(Phénoménologie et matérialisme dialectique, 국내 미번역)을 펴냈다. 이 책에서 그는 현상학이 의식을 설명하는 데 지닌 결함은 노동과 사회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설명으로만 메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의 잡지 《현대》에 인도차이나 식민주의를 비판하는 글을 실었고, 이 글들은 프란츠 파농 같은 반식민주의자들에게 읽혔다. 1951년 베트남으로 돌아가 공산당을 지지하며 일했다. 그러나 1956년 많은 사망자를 낸 토지 개혁을 비판했다가 지식인들을 공개 비판한 냔반-자이팜 사건에 휘말렸고, 1958년 요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작업은 자크 데리다, 장프랑수아 리오타르, 루이 알튀세르가 호의적으로 인용했다.
카렐 코시크. 체코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카렐 코시크는 1963년 『구체성의 변증법』에서 하이데거의 현상학에 비추어 마르크스의 사상을 독창적으로 재해석했다. 그는 헤겔, 마르크스, 하이데거의 영향을 함께 받았다. 그의 ‘사이비 구체성’(pseudokonkret) 개념은 뒷날 독일 사회교육학자 한스 티르시가 일상의 생활세계를 분석하는 데 빌려 쓰기도 했다. 이 책으로 그는 인간주의적 마르크스주의의 대표 철학자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1968년 ‘프라하의 봄’ 때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대변했다가 1970년 대학에서 쫓겨나고 공산당에서도 제명되었다.
메라브 마마르다슈빌리. 조지아 출신의 소련 철학자 메라브 마마르다슈빌리는 의식을 철학의 궁극 주제로 보았다. 그의 연구 주제에는 사회적 존재 속에서 의식이 하는 역할도 들어 있었다. 그는 “현상학은 모든 철학에 따라붙는 특징”이라는 말을 남겼다.
얀 파토치카. 파토치카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지만, 동구권에서 현상학이 어떤 자리에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그는 1933년부터 프라이부르크에서 후설과 하이데거에게 직접 배웠다. 1936년에는 체코어로 된 첫 체계적 현상학 연구인 『철학적 문제로서의 자연적 세계』로 교수 자격을 얻었다. 공산 정권 아래서 대학에서 쫓겨났다가 ‘프라하의 봄’ 때 잠시 복귀했지만, 1972년 강제로 은퇴당했다. 1977년 바츨라프 하벨 등과 함께 「77 헌장」의 대변인이 되었다. 그 뒤 비밀경찰에게 거듭 심문을 받다가 1977년 3월 13일 숨졌다.
하버마스와 사회학은 현상학을 어떻게 받아들였나?
사회학은 알프레트 슈츠를 통해 현상학을 받아들였다. 슈츠는 후설의 생활세계 개념을 사회학에 도입해 일상과 상식의 세계를 분석했다. 이는 이후 민속방법론 같은 연구로 이어졌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과학이 스스로를 객관적인 사실의 거울로 여기는 ‘객관주의’에 대한 후설의 비판을 공유했다. 다만 그 대신 또 다른 객관주의에 빠져 인식을 이끄는 관심을 놓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는 생활세계 개념을 고립된 의식이 아니라 의사소통의 배경으로 바꾸어 썼다. 이 흐름은 생활세계 항목과 의사소통 행위 이론 항목에서 다룬다.
현상학에는 어떤 한계가 지적되었나?
현상학 안에서도 의문이 나왔다. 후설이 직접 인정한 해석자였던 오이겐 핑크는 1951년 브뤼셀 학회에서 후설의 방법이 내세운 만큼 ‘전제 없는’ 것은 아니라고 선언했다. 현상, 존재, 대상에 대한 생각이 방법보다 먼저 있다는 것이다. 에포케로 존재를 괄호 친 뒤에도 의식 내용이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지도 오래된 난제다.
마르크스주의 쪽에서 보면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의식의 구조를 아무리 정밀하게 기술해도 그 의식이 어떤 계급, 어떤 노동, 어떤 역사적 사회 속에 놓여 있는지가 빠지면 추상에 머문다는 것이다. 쩐득타오가 현상학의 결함을 노동으로 메우려 한 것도, 마르쿠제가 하이데거의 ‘구체성’이 가짜라고 결론지은 것도 이 지점과 관련된다. 반대로 현상학 쪽에서는 마르크스주의가 개인의 체험과 자유를 놓친다고 보았다. 사르트르가 후기에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명시적으로 결합하려 한 것도 이 간극을 메우려는 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