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 테러
White Terror
러시아 내전(1917–1922) 동안 백군과 반볼셰비키 세력이 자행한 폭력과 대량 살상을 가리킨다. 적색 테러와 달리 단일 포고령으로 시작되지는 않았으나, 군사독재 체제 아래에서 군사재판·방첩 기관의 즉결 처형, 그리고 무엇보다 유대인을 겨냥한 대규모 포그롬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백색 테러는 '우발적 과잉'이라는 평가와 '조직적 이데올로기 폭력'이라는 평가 사이에서 오늘날까지 첨예한 역사학적 논쟁의 대상이다.
상세
범위와 시기
'백색 테러'는 1917년 10월 혁명 직후부터 내전이 끝나는 1922년까지 백군과 그 정부들, 그리고 더 넓게는 반볼셰비키 세력이 자행한 폭력과 대량 살상을 가리킨다. 볼셰비키 권력에 대한 개별적 테러 행위는 1917년 말 이미 시작되었고, 규모 있는 폭력은 1918년 초부터 본격화되어 1920~1922년 백군이 적군에 패배할 때까지 이어졌다. 적색 테러가 1918년 9월 5일 인민위원회 포고령으로 공식 선포된 것과 달리, 백색 테러를 개시한 단일 포고령은 없었다. 이 용어는 혁명과 내전기의 정치 용어로 등장했으며, 반볼셰비키 진영 안에 백군 외에도 다양한 세력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건적이고 포괄적인 명칭으로 쓰인다.
형식과 행위 주체
백색 테러는 군사독재 체제가 세워진 지역에서 전개되었다. 백군 정부들은 사법·국가보호·내무 기구와 군 방첩 기관, 야전 군사재판소를 통해 대개 재판 없이 또는 약식 절차로 처형을 집행했고, 군사령부의 통제를 벗어난 부대와 지역 아타만(카자크 군벌)의 자의적 폭력도 광범위했다. 콜차크 정부는 1918년 12월 3일 형법 조항을 개정해 최고통치자에 대한 암살 시도와 정권 전복 시도에 사형을 규정했고, 1919년 4월 11일에는 볼셰비키 봉기와의 연계를 이유로 공공질서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된 자에게 징역 5년을 규정하는 법령을 채택했다. 옴스크에서는 2,500명 이상이, 우파 사회혁명당원 D. 라코프의 증언에 따르면 시신 수레가 도시로 실려 나갔다. 동부 전선에서는 카자크 아타만 세묘노프, 안넨코프, 두토프, 칼미코프 등의 부대가 극단적 잔혹행위로 악명을 떨쳤다.
유대인 포그롬
백색 테러의 가장 특징적인 형태는 유대인을 겨냥한 대규모 포그롬이었다. 유대인에 대한 폭력은 '유대-볼셰비키 음모'라는 선전과 결합했으며, 올드림프(옛 체제)의 차별적 억압과도 이어졌다. 1918~1921년 우크라이나 524개 도시에서 유대인에 대한 포그롬 1,236건이 기록되었고, 이 가운데 493건은 페틀류라 휘하의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병력, 307건은 독립 아타만, 213건은 데니킨 군대, 106건은 적군, 32건은 폴란드군이 저질렀다. 이 포그롬에서 희생된 유대인 수는 3만~6만 명으로 추산되며, 로널드 수니는 내전기 유대인 사망자 3만 5천~15만 명 가운데 약 17%를 백군에, 40%를 페틀류라 휘하 우크라이나 병력에, 25%를 기타 우크라이나 세력에, 8.5%를 볼셰비키에 돌린다. 특히 파스토프에서는 데니킨의 의용군이 1,500명 이상의 유대인을 학살했고, 1919년 7월 예카테린부르크 포그롬에서는 약 2,200명이 희생되었는데 대부분 유대인이었다.
피해 규모
백색 테러의 사망자 수 추산은 출처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디트리히 바이라우는 포그롬 희생자를 제외하고 2만~10만 명으로, 조너선 스멜은 러시아 역사가 V. 예를리흐만의 추산인 30만 명을 인용하며 적색 테러의 120만 명과 대비시킨다. 니키타 라트코프스키는 포그롬을 제외하면 50만 명을 넘을 수 있다고 보며, 1920년 콜차크 장관 재판에서 체카가 제시한 추산에 따르면 예카테린부르크 주만 해도 1918~1919년에 최소 2만 5천 명이 콜차크 정권에 의해 처형되었다. 수니는 백군이 저지른 폭력만 따지면 적색 테러(5만~14만 명 추정)보다 적지만 반소비에트 민중 폭력과 유대인 포그롬을 포함하면 이를 넘어선다고 보았다. 1985년 유엔 휘태커 보고서는 2,000건 이상의 포그롬에서 10만~25만 명의 유대인이 백군·카자크·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혼성 세력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집계했다.
역사학적 논쟁
백색 테러의 성격은 오늘날까지 첨예한 논쟁의 대상이다. 리처드 파이프스와 니콜라 베르트 같은 서구 역사가들은 적색 테러를 계급 전체를 겨냥한 체계적·조직적 정치 전략으로, 백색 테러를 기존 질서 회복을 위한 임시적·자의적 '억압적 폭력'으로 대비시켰다. 베르트는 백색 테러가 결코 그런 방식으로 체계화되지 않았고 통제를 벗어난 부대들의 소행이었으며, 포그롬을 제외하면 대개 군사 방첩 기능을 겸한 경찰의 보복 조치였다고 썼다. 반면 피터 홀퀴스트와 조슈아 샌본은 이를 반박한다. 홀퀴스트는 백색 폭력이 덜 중앙집권적·체계적이었을지라도 이데올로기적 토대가 결여되어 있지는 않았다고 보며, 반소비에트 사령관과 병사들이 유대인·발트인·중국인·공산주의자를 '여과'라는 이름으로 집단 처형했다고 지적한다. 샌본은 러시아 제국군과 백군의 테러가 적군에 못지않게 '혁명적'이었다고 평가한다. 러시아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백군이 체카·혁명재판소 같은 기구를 만들지 않았고 지도부가 대량 테러를 공개적으로 호소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백색 테러의 비조직적·자발적 성격을 강조하는 견해와, 백군 고위 인사들의 명령과 백군 정부의 입법이 억압 행위를 승인했고 그것이 군사독재 체제의 필연적 귀결이었다는 견해가 맞선다. G. A. 트루칸은 소비에트 저자들이 백색 테러에, 백군에 동조하는 현대 저자들이 적색 테러에 각각 치우친다고 지적하면서, 백군 점령지의 만행이 소비에트 러시아 못지않았다고 평가한다. 이처럼 백색 테러는 '우발적 과잉'이라는 평가와 '조직적 이데올로기 폭력'이라는 평가 사이에서 규정되고 있다.
관련 역사 사건
출처
- 위키백과 (영문) general definition, comparison with Red Terror, estimated death tolls (20,000–300,000 depending on inclusion of pogrom victims), historiographical debate between Pipes/Werth and Holquist/Sanborn
- 위키백과 (러시아어) Russian-language article confirming the term's scope: repressive acts by White governments, military counter-intelligence, field courts, and uncontrolled pogroms; notes that unlike Red Terror, no single decree initiated it
- sciencespo.fr Nicolas Werth (2008), Sciences Po: contextualizes White Terror alongside Red Terror within the civil war's broader mass violence; notes Denikin's forces' responsibility for 213 of the 1,236 recorded anti-Jewish pogroms in Ukraine
- 위키백과 (영문)
- 위키백과 (러시아어)
- sciencespo.f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