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1년 3월 13일 아침, 알렉산드르 2세는 로리스-멜리코프의 개혁안에 서명하며 말했다: "나는 승인했다. 그러나 이것이 헌법을 향한 첫걸음임을 스스로 숨기지 않는다." 몇 시간 후 차르는 암살당했다.
아르메니아 귀족 출신으로 캅카스 전쟁과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낸 기병 장군이었으나, 그의 역사적 무게는 군사적 공적보다 정치 개혁에 있다. 1880년 겨울궁전 폭파 사건 이후 전제적 권한을 위임받아 '마음의 독재'로 불린 온건 노선을 펼쳤으며, 혁명 탄압과 동시에 검열 완화·지방 자치·선거 대표제 도입을 골자로 한 개혁안을 추진했다.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한 1881년 3월 13일 아침, 차르는 로리스-멜리코프의 선거 자문위원회 구상을 승인했으나, 알렉산드르 3세가 즉위 후 콘스탄틴 포베도노스체프의 조언으로 개혁안을 폐기하고 전제정치를 선언했다. 러시아 최초의 헌정 실험을 설계했으나 반동에 좌절된 그는 개혁과 전제의 분기점에서 상실된 개혁의 순간을 상징한다.
니콜라이 2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현 체제의 연장은 나라를 얼어붙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봄기운이 조금만 스며들어도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다."
알렉산드르 3세 시대 제정 러시아의 최고 보수 이데올로그이자 1880~1905년 성무원 검사장. 1881년 4월 '전제정치 불가침 선언'을 기초해 로리스-멜리코프의 입헌 개혁안을 폐기시켰고, 교구학교 확대·검열 강화·비정교도 탄압의 반동적 반개혁을 주도했다. 3권의 『민법 강의』를 집필한 법학자이며, 『러시아 정치가의 성찰』에서 의회제를 '우리 시대의 위대한 거짓말'로 규정했다. 알렉산드르 3세와 니콜라이 2세 두 차르의 스승이었고, 1901년 톨스토이 파문도 그의 재임 중 단행되었다. 1905년 10월 선언 후 물러났지만 그가 평생 지킨 전제 권력은 혁명 세대가 타도할 구체제 그 자체였다.
"폐하께서는 제 관 주위에 이미 촛불이 켜졌고, 의식을 완료하는 데 필요한 것은 저 자신뿐임을 보지 못하십니다." — 1914년 재소환된 74세 총리가 자신의 노쇠함에 대해 남긴 말.
제정 러시아 최후의 제1급 추밀고문이자 두 차례 총리를 지낸 평생 관료. 1906년 제1두마를 해산시키고, 1914년 74세에 다시 소환되어 전시 내각을 이끌었으나 무능과 두마 적대, 라스푸틴 일파에 대한 굴종으로 체제 붕괴의 상징이 되었다. 반의회적 전제 고수를 '신이 기름 부은 자'에 대한 충성이라 여겼고, 이 완고함이 바로 입헌 실험을 좌초시킨 능동적 요인이었다. 혁명 후 소치의 별장에서 강도에게 가족과 함께 살해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1860제국 법률학교 졸업, 원로원에서 변호사로 관직 시작
1866–1869폴란드 입헌왕국 프워츠크·키엘체 부지사
1891법무차관
1895–1899내무장관 — 농민·젬스트보 문제에 보수적 접근, 1899년 축출
1906.4–7각료회의 의장(총리) — 제1두마와의 대립 끝에 두마 해산, 스톨리핀에게 교체
1914.1–1916.1각료회의 의장(총리) — 전시 내각, 두마·진보블록과 적대, 라스푸틴 측근으로 전락
1925년, 반신불수 상태로 총살되러 가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인생에 지쳤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총리. 1917년 1월 황제의 임명을 받았을 때 스스로 '무능력'을 이유로 사양했으나, 충신으로서 받아들인 뒤로도 2월 혁명의 파고 앞에서 결정적인 행동을 하지 못했다. 혁명 후 사수공과 공동 농장 경비원으로 생계를 잇다가, 1925년 '리체이스트 사건'에 연루되어 반신불수 상태로 총살당했다.
1904년 9월 16일 내무부 관료들 앞에서: "행정의 성과는 공공기관과 국민에 대한 진실로 호의적이며 신뢰하는 태도에 달려 있다." 이 한 마디가 '신뢰의 시대'를 열었다.
플레베 암살 후 내무장관에 올라 '신뢰의 시대'를 선언하고 검열 완화·유배자 사면·젬스트보 대회 허용으로 자유주의 여론에 호응했으나, 국무회의에 선출직 대표를 도입하려던 개혁안은 니콜라이 2세에게 거부당했다. 1905년 1월, 가폰 신부의 평화 청원 행진에 대한 그의 무대응은 피의 일요일 학살로 귀결됐고, 사흘 뒤 사임했다. 정직하고 선의에 찼으나 정치적 결단력이 부족했던 그는 개혁과 반동 사이에 끼어 역사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인물로 남았다.
1917년 2월, 참수부에 보낸 전문에서: "수도는 무정부 상태. 정부는 마비되었다. 지체는 죽음이다. 왕조의 운명이 걸린 마지막 시간이다." 니콜라이 2세는 읽고 나서 시종장에게 말했다. "이 뚱보 로댠코가 또 무슨 헛소리를 써 보냈군."
우크라이나계 귀족 출신으로, 1905년 10월당을 공동 창립하여 입헌군주제와 의회주의라는 두 축에서 차르 체제의 점진적 개혁을 추구했다. 1911년부터 1917년까지 제3·4대 국가두마 의장을 지내며 라스푸틴을 공개 비판하고 전시 정부의 무능에 맞섰다. 1917년 2월 혁명기에는 국가두마 임시위원회를 이끌며 니콜라이 2세 퇴위를 결정적으로 추동했으나, 미하일 대공이 즉위를 거부하며 입헌군주제 구상은 무너졌다. 1920년 유고슬라비아로 망명하여 빈곤 속에서 회고록 『라스푸틴의 통치』를 남겼고, 망명 군주주의자들에게 배척당한 채 숨졌다. 혁명 이전 러시아 의회 정치의 가능성과 한계를 한 몸에 체현한 인물이다.
"정부는 권위 없는 권력이고, 소비에트는 권력 없는 권위다." — 임시정부 총리로서 리보프는 자신이 이끄는 정부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사이의 이중권력 현실을 이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게오르기 리보프 공작은 류리크 왕조의 후예로, 제국 말기 젬스트보 자유주의 운동의 상징적 지도자였다. 러일전쟁 시기 의료여단을 이끌어 전국적 명성을 얻었고,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전러시아 젬스트보 연합과 젬고르를 이끌며 군수·의료 지원을 조직했다. 1917년 2월 혁명 후 임시정부 초대 총리 겸 내무장관에 취임하여 보통선거·언론의 자유·사형 폐지·종교·계급·인종 차별 철폐 등 자유주의 개혁을 단행했으나, 소비에트와의 이중권력 속에서 실질적 권위를 확보하지 못하고 7월에 사임했다.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에게 정권을 넘긴 후, 10월 혁명으로 체포되었다 탈출하여 미국을 거쳐 프랑스로 망명, 파리에서 가난하게 회고록을 쓰다 1925년 사망했다.
자신이 초안한 세 가지 선거법 중 채택된 두 번째 안을 두고 크리자놉스키는 「뻔뻔한」 것이라 불렀다. 노동자·농민 쿠리아에 의석을 배정해놓고 실제로는 지주들이 그 대표를 골라내도록 설계했기 때문이다.
세르게이 크리자놉스키는 러시아 제국의 법률가이자 관료로, 1905년과 1907년의 국가두마 선거법을 설계한 인물이다. 내무차관으로서 그는 1907년 선거법 초안을 세 가지 작성했고, 그중 채택된 안을 스스로 「뻔뻔한」 것이라 불렀다. 노동자·농민 쿠리아에 최소 의석을 보장하면서도 실제 대의원 선출권은 지주가 장악한 도 선거회에 넘겼기 때문이다. 1911년부터 제정이 무너질 때까지 제국 국무장관을 지냈고, 혁명 후 망명하여 파리에서 군주제 회고록을 편집하며 생을 마감했다.
10월 25일 오후 4시, 각료회의는 키시킨에게 수도 전역의 군·민 기관을 지휘할 전권을 부여했다. 그는 즉시 폴콥니코프 대령을 "무활동"으로 해임하고 바그라투니 장군을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에 임명했다.
모스크바 출신 의사에서 카데트 좌파의 중앙위원이 된 정치인으로, 1차 세계대전 중 전러시아 도시연합의 부총책임자로 활동했다. 1917년 2월 혁명 후 모스크바 임시정부 코미사르를 거쳐 9월 마지막 내각의 사회복지 장관으로 입각했다. 10월 25일 오후 페트로그라드 치안 회복의 특별 전권을 부여받아 폴콥니코프를 해임하고 바그라투니를 군관구 사령관에 임명했으나, 그날 밤 안토노프-옵세옌코에게 겨울궁전에서 체포되었다. 내전 후 의사로 복귀했고 1921년 프로코포비치·쿠스코바와 함께 전러시아 기근 구제 위원회를 조직했으나, 체포와 유배를 거듭하다 1930년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05–1917.2카데트당 중앙위원, 모스크바 시두마 의원, 전러시아 도시연합 부총책임자
1917.3–9모스크바 임시정부 코미사르
1917.9–10임시정부 사회복지 장관
1917.10.25페트로그라드 질서 회복 특별 전권자, 폴콥니코프 해임·바그라투니 임명, 겨울궁전에서 체포
1918–21석방 후 의사 복귀, 1919년 '전술중앙' 사건으로 체포·석방
1921–23전러시아 기근 구제 위원회(포모골) 공동 조직, 체포·볼로그다 유배 후 사면
1923–30보건인민위원부 요양부서 근무, 연금·식량 배급 박탈, 1930년 모스크바에서 사망
1915년, 니콜라이 2세 앞에서 라스푸틴의 주벽과 황실 모독 발언을 낱낱이 보고했다. 황제의 유일한 반응은 "경질"이었다.
제국 근위대 장교에서 모스크바 주지사로, 다시 제국 정치경찰의 수장으로 승진한 실무형 귀족 관료. 1913년 헌병대 사령관에 취임하자 지방 오흐라나 지부를 대폭 폐지하고 군대·학교 내 비밀정보원 제도를 금지하는 개혁을 단행했다. 1915년 라스푸틴의 추문을 황제에게 직보했다가 해임되었고, 혁명 후에는 오게페우(OGPU)의 비밀 고문으로 「트레스트」 작전을 자문했다. 그의 방대한 회고록은 제정 말기 정치사와 경찰 제도의 1차 사료로 남았다.
1917년 2월 26일, 시노드 부총장이 페트로그라드의 소요를 묻자 프로토포포프는 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러시아에 혁명이 일어난다 해도 50년은 더 있어야 합니다.'
프로토포포프는 섬유 재벌이자 10월당 두마 의원으로, 관료·경찰 경력이 전혀 없었지만 알렉산드라 황후와 라스푸틴의 후원으로 제국 최후의 내무장관(1916–1917)에 임명되었다. 진행성 매독으로 환각과 정신병 증세를 겪으면서도 혁명의 위협을 무시하고 페트로그라드 식량 위기를 풀지 못했으며, 각료들과 총리의 사임 요구에도 자리를 지켰다. 2월혁명 중 타브리다 궁전에 자진 출두해 임시정부에 투옥되었고, 1918년 10월 체카에 처형되었다. 그의 몰락과 오판은 300년 왕조의 붕괴를 앞당겼다.
1917년 3월 16일, 미하일은 선언문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오직 우리 위대한 국민이 보통선거로 선출한 제헌의회가 정부 형태를 결정하여 나에게 그 권력을 부여할 때에만 최고 권력을 장악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알렉산드르 3세의 막내아들로, 형 니콜라이 2세의 아들 알렉세이가 혈우병을 앓으면서 오랫동안 제위 계승 1순위에 있었으나, 평민과의 모르가나틱 결혼을 감행해 스스로 왕조의 변방으로 물러났다. 1917년 3월 15일 니콜라이 2세가 아들 대신 그에게 양위했을 때, 이튿날 그는 제헌의회가 국민 투표로 정부 형태를 결정할 때까지 제위 수락을 유보한다는 선언문에 서명했다. 이로써 로마노프 왕조 300년은 사실상 끝났고, 그는 가치나로 물러나 더 이상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1918년 6월 페름에서 현지 체카 요원들에게 납치·살해되어 볼셰비키 손에 죽은 첫 로마노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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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1904황태제(추정상속인), 국무회의 의원
1912나탈리야 브라소바와 모르가나틱 결혼, 모든 공직 해임과 국외 추방
1914–1916카프카스 원주민 기병사단('야생사단') 및 제2기병군단 지휘, 성 게오르기 훈장 수훈
1917.1–3기병 총감
1917.3.15–16니콜라이 2세의 양위로 미하일 2세로 선포됐으나 제헌의회까지 제위 수락 유보
1917년 3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연단에서 법무장관 취임을 알리며 외쳤다. "나는 인민 없이 살 수 없다. 여러분이 나를 의심하기 시작하는 순간, 나를 죽여라!" 광장을 가득 메운 노동자와 병사들은 열광했다.
1917년 임시정부의 얼굴이자 마지막 총리. 8월에는 코르닐로프를 막기 위해 감옥의 볼셰비키까지 무장시켰고, 10월에는 그를 지키러 올 군대가 어디에도 없었다. 여장 탈출설은 소비에트의 날조다. 그는 반세기를 망명지에서 「무엇이 잘못이었는가」를 강연하며 살다 뉴욕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