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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지휘 · 러시아 제국 인물 24명

조건 모두 해제

드미트리 알렉세예비치 밀류틴

Дмитрий Алексеевич Милютин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16–1912 ○ 자연사

20년간 전쟁장관으로 러시아 군대를 근대 상비군으로 탈바꿈시킨 대개혁의 군사 설계자

1877년 9월 13일, 플레브나 세 차례 공격 실패 후 대공과 차르가 철수를 결정하자 군사회의에서 단독으로 포위 지속을 주장했다. 그의 설득으로 전선은 유지되었고, 두 달 후 플레브나는 함락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 치하에서 20년간(1861–1881) 전쟁장관을 지내며 러시아 제국군의 근본적 재편을 주도했다. 1874년 전군 징병제를 도입해 25년 귀족 중심 징집을 전 계급 6년 복무로 대체했고, 15개 군관구 체제·사관학교 근대화·병사 기초교육으로 군대를 근대 상비군으로 전환시켰다. 형 니콜라이 밀류틴과 함께 대개혁 시대 자유주의 관료의 전형이었으나, 체르케스인 강제이주를 '적대적 요소를 제거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 옹호한 어두운 유산도 남겼다. 말년에는 러시아 제국 최후의 야전원수(1898)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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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36–1845근위대 장교, 캅카스 전쟁 참전, 중상
  • 1845–1856육군대학 교수, 『1799년 전쟁사』(5권)로 데미도프상
  • 1856–1860캅카스군 주임참모, 샤밀 체포 작전 수행
  • 1861–1881전쟁장관: 전군 징병제, 군관구제, 사관학교 근대화, 병사 기초교육
  • 1877–1878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플레브나 포위 지속 주장, 승리 견인
  • 1878백작 수여, 전후 부패 조사 위원회 설치
  • 1881–1912알렉산드르 3세 즉위 후 사임, 시메이즈에서 회고록 집필
  • 1898제국 최후의 야전원수 진급

표도르 바실리예비치 두바소프

Фёдор Васильевич Дубасов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러시아인 1845–1912 ○ 병사

모스크바 12월 봉기를 포격으로 진압한 제정 러시아 해군 제독

「두바소프 자신이 모스크바 수비대 1만 5천 명 중 신뢰할 수 있는 병력은 5천 명뿐이라고 선언했다」: 레닌, 「모스크바 봉기의 교훈」에서 인용

러일전쟁기의 제독이자 모스크바 총독으로, 1877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두 척의 기뢰정을 이끌고 터키 장갑함을 격침해 전역 첫 성 게오르기 훈장을 받은 해군 장교였다. 1905년 11월 모스크바 총독에 임명되어 12월 무장봉기를 바리케이드 포격과 세묘놉스키 근위연대 투입으로 진압했으며, 레닌이 인용한 바와 같이 모스크바 수비대 1만 5천 명 중 신뢰할 수 있는 병력은 5천 명뿐이라고 솔직히 인정했다. 사회혁명당의 두 차례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았으나 부상으로 휴유증을 앓다 1912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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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0해군사관학교 졸업
  • 1877기뢰정으로 터키 장갑함 격침, 성 게오르기 4급 훈장 수훈
  • 1897–1899태평양함대 사령관, 뤼순항 점령
  • 1901–1905해군기술위원회 의장
  • 1905–1906모스크바 총독, 12월 무장봉기 진압
  • 1906국가평의회 위원; 두 차례 암살 시도에서 생존하고 해군 대장 진급

지노비 페트로비치 로제스트벤스키

Зиновий Петрович Рожественский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러시아인 1848–1909 ○ 심장마비

쓰시마 해전에서 발트함대를 이끈 제정 러시아 해군 제독

훗날 그는 이렇게 썼다: '시민적 용기가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이 마지막 함대를 학살터로 보내지 말라고 온 세상에 외쳤어야 했다. 그러나 내게는 그런 불꽃이 없었다.'

제정 러시아 해군의 중장으로, 러일전쟁에서 제2태평양함대를 지휘해 발트해에서 극동까지 철갑함대를 이끄는 전례 없는 항해를 완수했으나, 쓰시마 해전에서 도고 헤이하치로의 일본 함대에 궤멸적 패배를 당했다. 그는 이 원정이 무모한 모험임을 처음부터 직감했지만, '여론을 만족시켜야 한다'며 출항을 강행했고, 훗날 '시민적 용기가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이 마지막 함대를 학살터로 보내지 말라고 온 세상에 외쳤어야 했다'고 토로했다.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된 그는 귀환 후 군법회의에 회부되었으나 부상으로 인해 무죄 판결을 받고 은둔 속에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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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8–1873해군사관학교 및 미하일롭스키 포병학교 졸업
  • 1877–1878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베스타호 포병장교로 터키 철갑함과 교전
  • 1883–1885불가리아 해군 사령관
  • 1891–1893주영국 해군무관
  • 1898–1903소장 진급, 발트함대 포병훈련대 사령관, 해군참모총장
  • 1904–1905중장, 제2태평양함대 사령관: 발트해에서 쓰시마까지 18,000해리 항해, 쓰시마 해전 참패
  • 1906군법회의에서 부상으로 인한 무죄 판결, 퇴역
  • 1909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

블라디미르 빅토로비치 사하로프

Владимир Викторович Сахаров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러시아 (모스크바 귀족) 1853–1920 ✕ 처형

브루실로프 공세의 11군 사령관이자 백군에 합류한 기병대장

1917년 3월,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낸 전보에서 국가두마를 '범죄적 무리'라 맹비난한 뒤 이렇게 끝맺었다: "폐하의 충성스러운 신하로서 흐느끼며 말씀드립니다. 가장 고통 없는 탈출구는 이미 제시된 조건들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블라디미르 빅토로비치 사하로프는 제정 러시아의 기병대장으로, 러시아-튀르크 전쟁, 의화단 진압,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50년 군 경력에서 제국 군사 엘리트의 전형적 궤적을 밟았다. 1915년 11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보조 축을 맡아 브로디를 점령하고 수만 명의 포로를 확보했다. 1916년 가을 루마니아 전선의 두너이군 사령관으로 파견되어 페르디난드 1세의 보좌관으로 사실상 전선을 지휘했다. 2월 혁명 직후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낸 전보에서 국가두마를 맹비난하면서도 퇴위를 권고한 장면은 군주제 장교단의 분열된 충성을 보여준다. 혁명 후 해임되었고 내전기 크림에서 백군에 가담, 1920년 녹색군에게 체포·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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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9–1878육군 입대, 파블롭스크 군사학교 졸업, 참모본부 아카데미 졸업
  • 1877–1878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 1880–1897군사학교 교관, 참모직, 기병연대장 역임
  • 1900–1901의화단 진압 작전 중 북만주 주둔군 사령관
  • 1904–1905러일전쟁: 만주군 야전참모장, 총사령관 참모장
  • 1906–1914제7군단장, 제11군단장, 기병대장 진급 (1908)
  • 1914–1915제11군단 이끌고 갈리치아 전투 및 고를리체-타르누프 전투 참전
  • 1915–1916제11군 사령관,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브로디 점령
  • 1916–1917두너이군 사령관, 루마니아 전선 총사령관 보좌관
  • 19172월 혁명 후 구치코프에 의해 해임
  • 1918–1920백군에 가담, 크림반도에서 녹색군에게 체포·처형

알렉세이 알렉세예비치 브루실로프

Алексей Алексеевич Брусилов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53–1926 ○ 심부전

브루실로프 공세의 설계자, 혁명 후 붉은 군대에 합류한 제정 러시아 최후의 명장

12기병사단은 죽어야 한다. 단번에 죽지 말고 저녁까지 죽어라 — 1914년 8월 29일, 카레딘 사단장에게 내린 브루실로프의 명령

제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군이 거둔 최대의 승리로 평가되는 1916년 브루실로프 공세의 설계자이자 지휘관이다. 전선 전역에 동시 타격을 가하는 새로운 돌파 전술을 고안해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궤멸 직전까지 몰아넣었으며, 이 공세는 이후 소련 군사학에서 교과서적 사례로 연구되었다. 1917년 혁명기에는 러시아군 최고사령관을 지냈으나 군대 해체를 막지 못했고, 러시아 내전 후 볼셰비키의 적군에 합류해 기병 감찰관으로 복무했다. 제정 장교단 출신으로 소비에트 체제에 협력한 그의 행보는 망명 백군 진영에서 배신으로, 소비에트 측에서는 실용적 애국으로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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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215트베리 용기병연대 소위로 임관
  • 1877–1878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아르다한·카르스 공략에서 두각
  • 1902–1906기병장교학교 교장, 러시아 기병 교육의 중심 인물
  • 1914–1916제8군 사령관 → 남서전선 총사령관, 브루실로프 공세 지휘
  • 1917.5–7러시아군 최고사령관, 6월 공세 실패 후 경질
  • 1920–1924붉은 군대 기병 감찰관, 혁명군사평의회 특임

니콜라이 블라디미로비치 루즈스키

Николай Владимирович Рузский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54–1918 ✕ 살해

프스코프에서 차르의 퇴위를 강요한 북부전선 사령관

니콜라이 2세는 유형지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모든 적과 박해자를 용서할 힘을 신에게서 받았지만, 루즈스키 부관장군만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갈리치아 정복자라는 명성을 얻은 제정 러시아의 보병대장으로, 1차 세계대전에서 제3군과 북서전선·북부전선을 지휘했다. 1917년 2월 혁명 당시 프스코프에 주둔한 북부전선 사령관으로서 니콜라이 2세의 열차를 맞았고, 알렉세예프 참모총장과 전선 사령관들의 만장일치 전보를 전달하며 차르에게 책임내각 도입과 퇴위를 압박했다. 한 시간 반에 걸친 논쟁 끝에 니콜라이 2세의 뜻을 꺾은 결정적 순간은, 군부가 더 이상 왕조를 지키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전쟁 말기 붉은 군대 입대를 '러시아인끼리의 전쟁'이라 거부하고 광천수 휴양지에 머물다, 1918년 백인민 체카에 의해 인질로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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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7–1878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고르니 두브냐크 요새 공격 중 부상
  • 1881니콜라예프 참모대학 졸업, 이후 키예프·빌노 군관구 참모 역임
  • 1904–1905제2만주군 야전참모장으로 러일전쟁 참전
  • 1909보병대장 진급, 군사평의회 위원, 1912년 야전규정 공동 저자
  • 1914.07–09제3군 사령관, 갈리치아 전투에서 리보프 점령
  • 1914.09–1915.03북서전선 총사령관
  • 1915.08–1917.04북부전선 총사령관, 1917년 3월 프스코프에서 니콜라이 2세의 퇴위를 압박
  • 1917.04임시정부와의 군기 유지 갈등으로 사임, 캅카스 광천으로 이주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Романов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56–1929 ○ 병사

차르 앞에서 권총을 꺼내 입헌군주제를 강요한 대공

1905년 10월, 니콜라이 2세가 군사독재를 택하려 하자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은 권총을 꺼내 들고 이렇게 외쳤다. "폐하께서 비테의 안을 받아들이지 않으시면, 제가 이 자리에서 제 머리에 총을 쏘겠습니다."

니콜라이 1세의 손자이자 니콜라이 2세의 숙부였던 그는 로마노프 왕조 말기 군부에서 가장 신망을 얻은 대공이었다. 1905년 혁명 당시 차르가 군사독재를 택하려 하자, 권총을 꺼내 들고 자살하겠다며 맞서 니콜라이 2세가 비테의 개혁안과 10월 선언을 수용하게 한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 최고사령관에 임명되어 동부전선을 지휘했으나 탄넨베르크 참패와 보급난 속에 1915년 차르에게 직책을 넘겨주고 캅카스 총독 겸 전선 사령관으로 전임되었다. 혁명 후 크림반도에 은거하다 1919년 영국 전함으로 탈출했고, 망명 중 백군 잔존 세력에 의해 잠시 황제로 추대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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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7–78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성 게오르기 훈장 수훈
  • 1884근위 후사르 연대장
  • 1895–1905기병 총감
  • 1905군사독재 거부, 니콜라이 2세에게 10월 선언 수용 촉구
  • 1905–14페테르부르크 군관구 사령관 겸 국방평의회 의장
  • 1914–15제1차 세계대전 최고사령관
  • 1915–17캅카스 총독 겸 캅카스 전선 사령관
  • 1922백군 잔존 세력에 의해 전러시아 황제로 추대

미하일 바실리예비치 알렉세예프

Михаил Васильевич Алексеев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러시아인 1857–1918 ○ 심부전

동부전선을 지휘하고 백군 의용군의 기초를 놓은 차르의 마지막 참모총장

1917년 3월 2일, 알렉세예프는 전 전선 사령관들의 퇴위 권고 전보를 한데 모아 차르에게 전송하며 '폐하께서 무릎을 꿇고 간청하옵니다… 왕위에서 물러나소서'라고 썼다.

러시아 제국군의 참모 장군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1915년부터 1917년까지 최고사령부(스타프카) 참모총장을 맡아 동부전선 전체 작전을 실질적으로 지휘했다. 갈리치아 공세를 입안하고 1915년 대후퇴를 조직적으로 이끌어 러시아군을 붕괴에서 구한 전략가였으며, 2월 혁명 당시 전선 사령관들의 퇴위 요구 전보를 니콜라이 2세에게 전달해 퇴위를 이끌어냈다. 혁명 후 남러시아에서 의용군의 모체인 '알렉세예프 조직'을 창설해 백군 운동의 군사적·정치적 기반을 놓았으나, 내전이 본격화되기 전 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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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6–189064 카잔 연대 장교, 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니콜라이 참모아카데미 수석 졸업
  • 1890–1904참모본부 근무, 니콜라이 아카데미 교수
  • 1904–1905제3 만주군 병참총감 (러일전쟁)
  • 1908–1912키예프 군관구 참모장
  • 1912–1914제13 군단장
  • 1914–1915남서전선 참모장 (갈리치아 공세 입안)
  • 1915북서전선 총사령관, 대후퇴 조직적 지휘
  • 1915–1917최고사령부(스타프카) 참모총장 — 전 러시아군 실질적 총지휘
  • 1917 3–5월임시정부 최고사령관
  • 1917–1918의용군(알렉세예프 조직) 창설자·최고지도자

세르게이 세묘노비치 하발로프

Сергей Семёнович Хабалов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러시아 (오세티야계) 1858–1929 ○ 사망

2월 혁명 당시 시위대 발포를 명령하고 수비대 통제력을 상실한 마지막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2월 26일 하발로프는 도심을 봉쇄하고 시위대를 향해 발포를 명령했으나, 다음날 볼린스키 연대가 이를 거부하며 수비대 전체가 봉기했다.

오세티야계 출신의 제정 러시아 군인으로, 미하일롭스코예 포병학교와 니콜라예프 참모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러시아-튀르크 전쟁에 참전했다. 모스크바 군사학교와 파블롭스크 군사학교 교장을 거쳐 1916년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나, 1917년 2월 혁명 당시 니콜라이 2세의 진압 명령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수비대의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혁명 후 체포되어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었고, 내전 후 남러시아에 남아 예센투키에서 빈곤 속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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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8미하일롭스코예 포병학교 졸업, 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 1886니콜라예프 참모아카데미 졸업, 근위대 참모 근무
  • 1903–1905모스크바 군사학교 교장
  • 1905–1914파블롭스크 군사학교 교장
  • 1914–1916우랄주 군사령관 겸 우랄 코사크군 아타만
  • 1916–1917.02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 1917.02시위 진압 명령 수행 중 수비대 통제력 상실, 체포
  • 1917.10–1929석방 후 남러시아에서 생활, 예센투키에서 사망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칼레딘

Алексей Максимович Каледин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61–1918 ✕ 자살

돈에서 첫 백군 거점을 연 카자크 아타만

1918년 2월 11일, 마지막 정부회의에서 방어를 위한 총검이 147자루뿐임을 듣고 사임한 그날, 알렉세예프에게 남긴 유서: 「카자크가 자기 아타만을 따르지 않는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브루실로프 공세의 선봉을 맡아 루츠크를 돌파한 제국 육군 기병대장. 1917년 6월 돈 카자크 최초의 선출 아타만이 되었고, 10월 혁명 후 소비에트 권력을 전면 거부하며 돈 지역을 독립시켜 남부 백군의 첫 거점을 열었다. 그러나 전선에서 돌아온 카자크들은 중립을 선언했고, 1918년 2월 의용군마저 돈을 떠나려 하자 「카자크가 아타만을 따르지 않는다」는 유서를 남기고 권총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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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06노보체르카스크 카자크 사관학교장
  • 1912–15제12기병사단장, 제1차 세계대전 초기 지휘
  • 1915–16제12군단장, 제8군 사령관,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루츠크 돌파
  • 1916–17기병대장 승진, 제8군 사령관직 유지
  • 1917.6돈 카자크 아타만에 선출 (1709년 이후 첫 선거)
  • 1917.10–11소비에트 권력 불인정, 돈 지역 독립 선포, 백군 장교 수용
  • 1918.1–2카자크 중립 선언으로 전선 붕괴, 사임 후 권총 자살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유데니치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Юденич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62–1933 ○ 폐결핵

캅카스 전선을 승리로 이끌고 백군 페트로그라드 공세를 지휘한 제국 러시아의 마지막 명장

러시아 백위대에는 단 하나의 목표가 있다 — 볼셰비키를 러시아에서 몰아내는 것이다... 유일한 강령은 볼셰비키 타도뿐이다!

니콜라이 유데니치는 제1차 세계대전 러시아 육군에서 가장 꾸준한 승리를 거둔 지휘관으로, 캅카스 전선에서 사르카미시·에르주룸·트레비존드 전투를 지휘하며 오스만 제3군을 궤멸시켰다. 2월 혁명 후 케렌스키 임시정부에 의해 해임되었고, 내전기에는 북서군을 이끌고 1919년 가을 페트로그라드 외곽 풀코보 고지까지 진격했으나 적군의 반격으로 에스토니아로 패주했다. 러시아 제국 최후의 성 게오르기 2급 훈장 수훈자로, 망명 후에는 백계 정치에서 물러나 프랑스 리비에라에서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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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1–87알렉산드롭스크 군사학교 졸업, 니콜라옙스크 참모본부 아카데미 수료
  • 1904–05제18소총연대장으로 러일전쟁 참전, 산데푸·무크덴 전투에서 부상
  • 1913–15캅카스 군관구 참모장 → 캅카스군 참모장 → 보병대장 진급 및 캅카스군 사령관
  • 1916에르주룸·트레비존드·에르진잔 점령, 러시아 제국 최후의 성 게오르기 2급 훈장 수훈
  • 1917.5캅카스 전선 총사령관에서 케렌스키 임시정부에 의해 '불복종'으로 해임
  • 1919.6–10북서군 총사령관으로 페트로그라드 공세, 풀코보 고지까지 진격 후 패퇴
  • 1920.1북서군 해산 명령, 에스토니아에서 체포 후 석방, 프랑스로 망명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코즐롭스키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Козловский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소비에트 러시아인 1864–1940 ○ 사망

크론시타트 포병대장으로 봉기했고, 볼셰비키가 '반란의 주모자'로 지목한 구제국 장군

"공산주의자들은 크론시타트 봉기를 백위대 음모로 보이게 만들기 위해 내 이름을 이용했다. 내가 요새에 있던 유일한 장군이었기 때문이다."

제정 러시아 포병 장교로 30년간 복무하며 제1차 세계대전에서 시베리아 포병 여단을 지휘했다. 2월 혁명 후 예편했다가 1918년 붉은 군대에 군사전문가로 입대했고, 1920년 12월 크론시타트 요새 포병대장에 임명되었다. 1921년 3월 크론시타트 봉기 당시 봉기군의 방어를 조직했으나, 볼셰비키는 3월 2일 포고에서 봉기를 '코즐롭스키 전 장군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그를 법외자로 선언했으며, 가족과 지인 27명을 인질로 체포했다. 봉기 진압 후 8천여 명의 크론시타트 수병과 함께 핀란드로 탈출했고, 망명지에서 교사와 정비공으로 일하다 1940년 헬싱키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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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2블라디미르 키예프 사관생도단 입대
  • 1884미하일롭스키 포병학교 졸업
  • 1890미하일롭스키 포병아카데미 1등급 졸업
  • 1905–1912제33포병여단 제2대대장
  • 1912소장 진급; 제11시베리아 포병여단장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참전; 제34군단 포병감
  • 1918–1920적군 군사전문가로 복무
  • 1920.12–1921.03크론시타트 요새 포병대장; 봉기 중 방어 지휘
  • 1921–1940핀란드 망명: 교사, 도로 노동자, 정비공

블라디미르 제노노비치 마이-마옙스키

Владимир Зенонович Май-Маевский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67–1920 ✕ 자살

의용군을 이끌고 모스크바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으나, 무리한 전선과 알코올 의존으로 무너진 백군 장군

1919년 여름, 영국 사절단은 '하리코프 장군'에게 수여하라는 훈장을 들고 의용군 사령부에 도착했다. 하리코프는 도시의 이름일 뿐이었고, 세인트마이클·세인트조지 훈장은 하리코프 주둔 사령관인 마이-마옙스키에게 주어졌다.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친 제정 러시아 중장으로, 1918년 의용군에 사병으로 입대한 뒤 빠르게 사단장으로 올랐고 1919년 5월 의용군 사령관이 되었다. 모스크바 공세에서 하리코프·쿠르스크·오룔을 연이어 점령하며 백군 중 가장 깊숙이 볼셰비키 수도 방면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과도하게 늘어진 전선과 돈군과의 협조 실패, 후방의 마흐노 봉기로 공세는 붕괴했고, 악화된 알코올 의존 탓에 1919년 11월 데니킨이 브란겔로 교체했다. 1920년 11월 크림 철수 중 세바스토폴에서 사망했으며, 권총 자살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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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5–96제1사관학교·니콜라옙스크 공병학교 졸업, 참모본부 아카데미 수료
  • 1904–05러일전쟁 참전, 대령 진급
  • 1914–17제1차 세계대전에서 제1근위군단 지휘, 중장 진급
  • 1918의용군 사병 입대, 드로즈돕스키 사후 제3소총사단장 취임
  • 1919.5의용군 사령관 임명, 하리코프 점령 후 지역 총사령관 겸임
  • 1919.6–10모스크바 공세 주도, 쿠르스크·오룔 점령
  • 1919.11공세 붕괴로 해임, 브란겔이 승계
  • 1920크림에서 후위부대 지휘, 세바스토폴 철수 중 사망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크라스노프

Пётр Николаевич Краснов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69–1947 ✕ 처형

반볼셰비키 돈 카자크 국가를 세우고 나치와 협력한 백군 아타만이자 노벨상 후보 작가

1917년 11월 트로츠키에게 체포되어 '소비에트 정권에 대항하지 않겠다'는 가석방 약속을 하고 풀려났으나, 이튿날 바로 돈 지역으로 탈출해 반소비에트 투쟁에 합류했다.

돈 카자크 군인 가문 출신의 제국 육군 중장으로, 1916년 브루실로프 공세의 루츠크 돌파를 설계한 인물 중 하나였다. 1918년 5월 돈 카자크군 아타만에 선출되어 독일의 지원을 받는 독자적 반볼셰비키 국가 돈 공화국을 세웠고, 돈의 자치를 고수하며 백군 통합 지휘를 두고 데니킨과 대립했다. 망명 후 대작 『쌍두 독수리에서 붉은 깃발로』 등 20권이 넘는 책을 낸 다작 소설가·회고록 작가로 1926년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치하 카자크 중앙관리국을 이끌며 소련에 맞설 카자크 부대를 조직했고, 1945년 영국군에 인도되어 1947년 모스크바에서 재판 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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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1914파블롭스크 군사학교 졸업, 근위 아타만 연대 복무, 러일전쟁 종군기자, 제10돈 코사크 연대장
  • 1914–1917제2복합 코사크 사단장 겸 제3기병군단장, 루츠크 돌파 주도, 소장 진급
  • 1917.10–11케렌스키-크라스노프 봉기: 700명의 카자크로 페트로그라드 진격, 실패 후 체포되었다가 트로츠키에 의해 석방
  • 1918.5–1919.2돈 카자크 아타만 당선, 독일 지원으로 돈 군대 조직, '전대돈군주' 수립
  • 1919–1936도임 후 북서군 신문 편집, 독일·프랑스 망명, 반소비에트 망명 정치 활동
  • 1921–1939『쌍두독수리에서 붉은 기까지』 3부작 등 20여 편 집필, 1926년 노벨 문학상 후보
  • 1943–1945나치 동부점령지부 카자크 중앙관리국장, 대소련 카자크 부대 조직
  • 1945–1947영국군에 체포되어 소련 송환, 모스크바에서 재판 후 1947년 1월 16일 교수형

라브르 게오르기예비치 코르닐로프

Лавр Георгиевич Корнилов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카자흐스탄 1870–1918 ✕ 전사

「강한 손」을 자처한 장군

1914년 11월 야간 전투에서 코르닐로프가 직접 이끈 기습으로 오스트리아군 포로 1,200명과 함께 사로잡힌 라프트 장군: 「코르닐로프는 사람이 아니라 자연의 힘이오.」

카자크 병사의 아들로 태어나 총사령관까지 오른 입지전의 군인. 1917년 8월 소비에트를 부수러 수도로 군단을 보냈으나, 철도 노동자와 선동가들 앞에서 군대는 도착하기도 전에 녹았다. 내전 초기 백군 의용군을 이끌다 1918년 예카테리노다르 공격 중 포탄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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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6사단장, 오스트리아 포로가 되었다 탈출해 전국적 명성
  • 1917.3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황후의 연금을 집행
  • 1917.7총사령관 임명
  • 1917.8수도로 군단 이동, 실패, 비호프 수도원 연금
  • 1917.11–1918.4탈출, 백군 의용군 창설, 예카테리노다르에서 전사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크리모프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Крымов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계 1871–1917 ✕ 자살

코르닐로프의 페트로그라드 진군을 이끈 제정 러시아 기병 장군

1917년 8월 31일(구력, 신력 9월 13일) 케렌스키 앞에서 권한 이양을 요구받은 크리모프는 함정에 빠졌다고 판단하고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부상한 채 니콜라이 군병원에서 사망했다. 자살이라는 공식 설명 외에 다른 설명도 전한다.

알렉산드르 크리모프는 제정 러시아군의 기병 장군이다. 바르샤바 현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프스코프 생도단과 파블롭스크 군사학교를 거쳐 1902년 니콜라이 참모본부 아카데미를 졸업했고,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에서 기병 부대를 지휘하며 결단력 있는 지휘관으로 명성을 얻었다. 1917년 4월 제3기병군단장이 되었고, 8월 코르닐로프 사건에서 페트로그라드 진군을 이끌었으나 철도 노동자들의 저지와 병사들의 동요로 좌절되었다. 케렌스키와 면담한 뒤 자해했고 니콜라이 군병원에서 사망했다. 자살이라는 공식 설명 외에 다른 사망 설명도 전하며, 코르닐로프 사건의 성격을 둘러싼 평가도 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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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1892파블롭스크 군사학교 생도, 졸업 후 제6포병여단 소위
  • 1902니콜라이 참모본부 아카데미 졸업
  • 1904–1905러일전쟁 참전, 제4시베리아군단 사령부 복무
  • 1911–1913자바이칼 카자크군 제1아르군 연대 지휘
  • 1915–1916우수리 기병여단장, 1915년 12월 사단으로 확대된 뒤 우수리 기병사단장
  • 1917제3기병군단장, 코르닐로프의 페트로그라드 진군 지휘
  • 1917코르닐로프가 임명한 별개 페트로그라드군 사령관

안톤 이바노비치 데니킨

Антон Иванович Деникин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72–1947 ○ 심장마비

볼셰비키 정권을 모스크바 400km 앞까지 몰아붙인 백군 최대 규모 군대의 총사령관

1899년 참모본부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나 부당하게 명단에서 제외되자 황제에게 탄원했다. 주변에서 청원을 취하하면 조용히 배려해 주겠다고 했을 때의 답: "나는 은혜를 구하지 않는다. 내 권리인 것만을 요구할 뿐이다."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친 제국 육군 중장으로, '철의 여단'을 이끌며 브루실로프 공세의 선봉에 섰다. 1918년 코르닐로프 사후 의용군 사령관을 이어받아 남러시아군 총사령관으로 백위대 최대 병력을 지휘했고, 1919년 여름 모스크바 공세로 오룔까지 진격해 소비에트 정권을 가장 위기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통일되고 불가분의 러시아'라는 경직된 구호로 민족·농민 문제에 실패했고, 통제 불능의 포그롬은 국제적 신뢰를 무너뜨렸다. 망명 후 5권의 『러시아 혼란기 수기』를 집필해 혁명과 내전의 기초 사료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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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05러일전쟁 참전, 참모 장교로 무공을 세워 대령 진급
  • 1914–16제4소총 '철의 여단'(후 사단) 지휘,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루츠크 2회 점령
  • 1917.4–5최고사령관 알렉세예프의 참모장, 군의 민주화에 반대
  • 1917.8–11코르닐로프 지지로 체포, 비호프 수도원에 수감
  • 1918.4코르닐로프 전사 후 의용군 사령관 승계
  • 1919.1남러시아군 총사령관, 백군 최대 병력 편성
  • 1919.7–10모스크바 공세, 오룔 점령 후 적군 반격으로 패퇴
  • 1920.4브란겔에게 지휘권 이양, 망명길에 오름
  • 1923–275권의 『러시아 혼란기 수기』 출간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콜차크

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Колчак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74–1920 ✕ 처형

북극에서 총살형장까지, 제정의 마지막 무장 방어자

"파리에 있는 내 아내에게 내가 아들을 축복한다고 전해주실 수 있겠소?" — 1920년 2월 7일, 총살 집행대 앞에서 사령관에게 마지막 부탁을 남겼다.

북극 탐험가이자 해양학자로 이름을 떨친 제정 러시아 해군 제독. 제1차 세계대전에서 발트함대와 흑해함대를 지휘했고 함대 사령관 중 유일하게 니콜라이 2세의 퇴위에 반대했으며, 1918년 11월 옴스크 쿠데타로 '전러시아 최고 통치자'에 추대되어 시베리아 백군을 이끌었으나 1920년 2월 볼셰비키에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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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해군사관학교 졸업, 소위 임관
  • 1900–1902러시아 북극 탐험대 수문학자 겸 지도제작자
  • 1904–1905러일전쟁 참전, 구축함 세르디티 함장 → 뤼순 포대 지휘, 부상·포로
  • 1906콘스탄틴 메달 수상, 해군 참모본부 근무
  • 1914–1915발트함대 작전부장 → 기뢰부대 사령관, 4급 성 게오르기 훈장
  • 1916–1917흑해함대 사령관, 해군 중장
  • 1918–1919전러시아 최고 통치자 겸 러시아군 최고사령관 (옴스크)
  • 1920체코슬로바키아 군단에 넘겨져 이르쿠츠크에서 총살

미하일 콘스탄티노비치 디테릭스

Михаил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Дитерихс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74–1937 ○ 사망

콜차크의 참모장이자 로마노프 일가 수사 책임자, 백색 프리아무르의 마지막 통치자

“러시아는 오직 그리스도의 러시아일 수밖에 없다”: 1922년 8월, 젬스키 소보르에서 프리아무르 통치자 취임 연설.

콜차크 정권의 참모장을 지낸 제정 러시아 장군이자 독실한 군주주의자. 1차 세계대전에서 브루실로프 공세의 작전 기획에 참여했고, 사로니카 전선의 러시아 원정군을 지휘했다. 내전기에는 시베리아 백군 동부전선을 지휘하고 콜차크의 마지막 성공적 공세인 토볼스크 작전을 이끌었으며, 니콜라이 2세 일가 처형에 대한 소콜로프 수사를 감독했다. 1922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마지막 젬스키 소보르를 소집해 로마노프 왕조 복위를 선언하고 프리아무르 지방 통치자에 취임했으나, 그해 10월 붉은 군대에 패해 상하이로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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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파제스키 군단 졸업, 근위포병여단 임관
  • 1900니콜라옙스크 참모대학 졸업
  • 1904–1905러일전쟁: 랴오양·사허·봉천 전투 참전, 중령 진급
  • 1914–1916제3군 참모장, 브루실로프 공세 기획 참여
  • 1916–1917사로니카 전선 러시아 원정군 사령관
  • 1919로마노프 일가 처형 수사 감독 → 동부전선 사령관, 콜차크 참모장, 토볼스크 공세 지휘
  • 1922프리아무르 젬스키 소보르 소집, 프리아무르 지방 통치자 → 패배 후 상하이 망명
  • 1930–1937러시아 전군연합(ROVS) 극동부 의장

보리스 알렉산드로비치 엥겔하르트

Борис Александрович Энгельгардт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소련 러시아 1877–1962 ○ 자연사

수비대를 막사로 돌려보내라는 명령으로 명령 제1호를 촉발한 두마 군사위원회 위원장

1916년 파리에서 옛 동창에게 "혁명적인 수단을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좌파'가 우리를 집어삼키지 않을까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발트 독일계 귀족 가문 출신으로, 파제스키 군단과 참모본부 아카데미를 졸업한 참모장교였으며, 러일전쟁에 참전한 뒤 건강 문제로 제대했다가 1912년 제4대 국가두마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17년 2월 혁명 당시 두마 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서 2월 28일 밤 병사들에게 막사 복귀와 장교 복종을 명령하는 포고문을 기초해 로댠코 명의로 발표했고, 이 명령은 수비대를 공포에 빠뜨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명령 제1호를 급히 채택하게 한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첫 혁명 사령관을 지냈고, 10월 이후 백군 선전부에서 활동했으며, 프랑스와 라트비아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소련에 체포되어 중앙아시아 유형을 거친 뒤 리가에서 통역사로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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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1903파제스키 군단·참모본부 아카데미 졸업, 근위 울란 연대 복무
  • 1904–1905러일전쟁 참전, 제1만주군 사령부 근무
  • 1908건강 문제로 제대, 모길료프 현 지방 자치 활동
  • 1912–1917제4대 국가두마 의원, 10월당·진보블록
  • 1917.02두마 군사위원회 위원장, 페트로그라드 혁명 사령관
  • 1918–1919백군 의용군 대표부 정치부장(키예프·오데사), 남러시아군 선전부
  • 1920–1940프랑스·라트비아 망명, 택시 기사·경마 조련사
  • 1940–1962소련 체포·호레즘 유형(1946년까지), 이후 리가에서 통역사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

Михаи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Романов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78–1918 ✕ 살해

하루 동안의 차르가 될 수 있었으나 제헌의회에 양보한 마지막 로마노프

1917년 3월 16일, 미하일은 선언문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오직 우리 위대한 국민이 보통선거로 선출한 제헌의회가 정부 형태를 결정하여 나에게 그 권력을 부여할 때에만 최고 권력을 장악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알렉산드르 3세의 막내아들로, 형 니콜라이 2세의 아들 알렉세이가 혈우병을 앓으면서 오랫동안 제위 계승 1순위에 있었으나, 평민과의 모르가나틱 결혼을 감행해 스스로 왕조의 변방으로 물러났다. 1917년 3월 15일 니콜라이 2세가 아들 대신 그에게 양위했을 때, 이튿날 그는 제헌의회가 국민 투표로 정부 형태를 결정할 때까지 제위 수락을 유보한다는 선언문에 서명했다. 이로써 로마노프 왕조 300년은 사실상 끝났고, 그는 가치나로 물러나 더 이상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1918년 6월 페름에서 현지 체카 요원들에게 납치·살해되어 볼셰비키 손에 죽은 첫 로마노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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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1904황태제(추정상속인), 국무회의 의원
  • 1912나탈리야 브라소바와 모르가나틱 결혼, 모든 공직 해임과 국외 추방
  • 1914–1916카프카스 원주민 기병사단('야생사단') 및 제2기병군단 지휘, 성 게오르기 훈장 수훈
  • 1917.1–3기병 총감
  • 1917.3.15–16니콜라이 2세의 양위로 미하일 2세로 선포됐으나 제헌의회까지 제위 수락 유보
  • 1918.3–6페름 유형, 체카에 납치·살해됨

스타니스와프 부와크-바와호비치

Stanisław Bułak-Bałachowicz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폴란드 벨로루시·폴란드계 1883–1940 ✕ 살해

에스토니아에서 벨로루시까지 진영을 옮겨 다닌 반소비에트 유격 지휘관

필수드스키는 그를 '도둑이지만 도둑만은 아니고, 오늘은 러시아인, 내일은 폴란드인, 모레는 벨로루시인'이라고 평했다.

붉은 군대에서 백군으로 넘어가 1919년 프스코프를 점령하고 유데니치와 갈라져 에스토니아 편에 섰다가 1920년 폴란드로 옮겨 벨로루시 원정을 벌였다. 부대의 반유대인 폭력이 기록되어 있으며 1940년 독일 점령 바르샤바에서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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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차르 군대에 징집되어 게오르기 십자훈장·성 게오르기 훈장 수훈
  • 1918붉은 군대에 입대, 트로츠키의 승인으로 루가 기병연대 편성
  • 1918-11약 4백 명을 이끌고 백군으로 전향
  • 1919대령에서 소장으로 승진, 유데니치 공세에서 프스코프 점령
  • 1920-01유데니치를 체포하고 에스토니아 편에 섬
  • 1920폴란드 군에서 핀스크 점령, 러시아 인민의용군 편성
  • 1920-11소비에트 벨로루시로 침입해 스스로 벨로루시 국가 수반이라 선언, 패배 후 폴란드로 도피
  • 1939바르샤바 방어에 참가, 1940년 5월 살해

티모페이 이바노비치 키르피치니코프

Тимофей Иванович Кирпичников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인 1892–1917/1918 ✕ 처형

제정군의 명령을 거부한 병사 지도자

“노동자들에게 발포하겠는가? 나는 가지 않겠다.”

티모페이 키르피치니코프는 제정 러시아군의 하급지휘자였지만, 전선의 경험과 병사들 사이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명령의 정당성을 스스로 판단했다. 1917년 2월 26일 시위 진압 뒤 부하들에게 노동자에게 발포하지 말자고 설득하고, 다음 날 볼린스키 연대의 봉기를 이끌어 페트로그라드 수비대의 연쇄적인 가담을 촉발했다. 그는 임시정부에게 혁명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게오르기 십자훈장을 받았으나, 10월 이후에는 볼셰비키에 맞섰고 백군 내부의 처형으로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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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6제1차 세계대전 참전, 오스트리아 전선에서 복무하고 부상
  • 1916–1917페트로그라드 주둔 예비부대, 볼린스키 연대 훈련대 선임 하사관
  • 1917.02.27볼린스키 연대 훈련대의 명령 불복종과 페트로그라드 수비대 봉기 주도
  • 1917.04임시정부에 의해 혁명의 영웅으로 선전되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에 선출
  • 1917.04–05임시정부 지지 병사 시위 조직, подпрапорщик 및 прапорщик으로 승진
  • 1917.10–1918볼셰비키에 맞서 남부로 이동, 백군 진영에서 처형됨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수보로프

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Суворов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러시아 귀족 가문 1729/1730–1800 ○ 병사

제정 러시아의 원수·대원수, '러시아의 하니발'

1799년 제2차 대동맹전쟁의 이탈리아·스위스 원정에서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을 지휘해 프랑스군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내고 대원수가 되었다. 그러나 스위스에서는 프랑스가 이겼고 원정 목표는 달성되지 못했다.

러시아 제국의 장군·군사이론가로 1794년 원수, 1799년 대원수에 올랐다. 푸가초프 반란과 코시치우슈코 봉기를 진압하고 크림·쿠반 병합에 관여했으며, 주요 교전에서 패하지 않았다. 1729년 또는 1730년 출생으로 확정되지 않았고, 1800년 5월 18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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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62러시아 제국 육군 대령
  • 1770소장
  • 1783보병대장
  • 1794원수(general-feldmarshal)
  • 1799대원수(generalissim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