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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 인물 50명

드미트리 알렉세예비치 밀류틴

Дмитрий Алексеевич Милютин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16–1912 ○ 자연사

20년간 전쟁장관으로 러시아 군대를 근대 상비군으로 탈바꿈시킨 대개혁의 군사 설계자

1877년 9월 13일, 플레브나 세 차례 공격 실패 후 대공과 차르가 철수를 결정하자 군사회의에서 단독으로 포위 지속을 주장했다. 그의 설득으로 전선은 유지되었고, 두 달 후 플레브나는 함락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 치하에서 20년간(1861–1881) 전쟁장관을 지내며 러시아 제국군의 근본적 재편을 주도했다. 1874년 전군 징병제를 도입해 25년 귀족 중심 징집을 전 계급 6년 복무로 대체했고, 15개 군관구 체제·사관학교 근대화·병사 기초교육으로 군대를 근대 상비군으로 전환시켰다. 형 니콜라이 밀류틴과 함께 대개혁 시대 자유주의 관료의 전형이었으나, 체르케스인 강제이주를 '적대적 요소를 제거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 옹호한 어두운 유산도 남겼다. 말년에는 러시아 제국 최후의 야전원수(1898)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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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36–1845근위대 장교, 캅카스 전쟁 참전, 중상
  • 1845–1856육군대학 교수, 『1799년 전쟁사』(5권)로 데미도프상
  • 1856–1860캅카스군 주임참모, 샤밀 체포 작전 수행
  • 1861–1881전쟁장관: 전군 징병제, 군관구제, 사관학교 근대화, 병사 기초교육
  • 1877–1878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플레브나 포위 지속 주장, 승리 견인
  • 1878백작 수여, 전후 부패 조사 위원회 설치
  • 1881–1912알렉산드르 3세 즉위 후 사임, 시메이즈에서 회고록 집필
  • 1898제국 최후의 야전원수 진급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2세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II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18–1881 ✕ 암살

농노해방과 대개혁으로 구체제를 위로부터 현대화하려 했던 차르, 혁명가들의 표적이 되다

1856년 모스크바 귀족들에게 한 연설: "현행 농노 소유 질서는 그대로 유지될 수 없습니다. 아래로부터 저절로 폐지되기를 기다리느니, 위로부터 폐지하는 편이 낫습니다."

1855년 크림전쟁의 패배 속에 즉위한 알렉산드르 2세는 '아래로부터 폐지되기를 기다리느니 위로부터 폐지하는 편이 낫다'며 1861년 농노제를 폐지하고, 젬스트보 자치·사법 개혁·병역 개혁을 차례로 단행했다. '해방자 차르'로 불렸으나, 개혁은 급진파에게는 불충분했고 보수파에게는 지나쳤으며, 1866년 암살 미수 이후 반동으로 기울었다. 1881년 3월 13일, 로리스멜리코프 헌법 초안에 서명한 바로 그날, 인민의 의지 당원이 던진 폭탄에 치명상을 입고 겨울궁전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죽음은 대개혁 시대의 종말이자 알렉산드르 3세의 반동으로 이어졌으며, 혁명적 테러를 러시아 정치의 결정적 방법으로 확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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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25아버지 니콜라이 1세 즉위로 황태자(체사레비치)가 되다
  • 1855차르 즉위; 크림전쟁 패배 속에 즉위
  • 1856파리 조약으로 크림전쟁 종결; 대관식에서 정치범 사면
  • 1861농노해방령 — 2,300만 농노 해방
  • 1863–64폴란드 봉기 진압; 핀란드 의회 재소집
  • 1864젬스트보(지방자치) 개혁, 사법 개혁
  • 1874전계급 징병제 도입 — 군제 개혁
  • 1877–78러시아-튀르크 전쟁; 불가리아 해방
  • 1880로리스멜리코프에게 헌법 초안 위임
  • 1881.3.13인민의 의지(나로드나야 볼랴) 소속 이그나치 그리네비츠키의 폭탄에 치명상, 겨울궁전에서 사망

미하일 타리엘로비치 로리스-멜리코프

Михаил Тариелович Лорис-Меликов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아르메니아 1824–1888 ○ 개혁안 폐기 후 은퇴

"마음의 독재"라 불린 아르메니아 출신의 개혁적 내무장관

1881년 3월 13일 아침, 알렉산드르 2세는 로리스-멜리코프의 개혁안에 서명하며 말했다: "나는 승인했다. 그러나 이것이 헌법을 향한 첫걸음임을 스스로 숨기지 않는다." 몇 시간 후 차르는 암살당했다.

아르메니아 귀족 출신으로 캅카스 전쟁과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낸 기병 장군이었으나, 그의 역사적 무게는 군사적 공적보다 정치 개혁에 있다. 1880년 겨울궁전 폭파 사건 이후 전제적 권한을 위임받아 '마음의 독재'로 불린 온건 노선을 펼쳤으며, 혁명 탄압과 동시에 검열 완화·지방 자치·선거 대표제 도입을 골자로 한 개혁안을 추진했다.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한 1881년 3월 13일 아침, 차르는 로리스-멜리코프의 선거 자문위원회 구상을 승인했으나, 알렉산드르 3세가 즉위 후 콘스탄틴 포베도노스체프의 조언으로 개혁안을 폐기하고 전제정치를 선언했다. 러시아 최초의 헌정 실험을 설계했으나 반동에 좌절된 그는 개혁과 전제의 분기점에서 상실된 개혁의 순간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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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7캅카스로 전속, 체첸·다게스탄 전투 참전
  • 1853–1856크림 전쟁 참전, 바얀두르·바슈카드클라르 전투
  • 1855카르스 지역 사령관
  • 1863–1875테레크주 총독 겸 테레크 카자크군 아타만
  • 1877–1878러시아-튀르크 전쟁 캅카스 전선 사령관, 아르다한·카르스 점령
  • 1879하리코프 임시 총독
  • 1880최고행정위원회 위원장
  • 1880–1881내무장관

콘스탄틴 페트로비치 포베도노스체프

Константин Петрович Победоносцев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27–1907 ○ 자연사

전제정치를 신앙으로 삼은 '대심문관'

니콜라이 2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현 체제의 연장은 나라를 얼어붙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봄기운이 조금만 스며들어도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다."

알렉산드르 3세 시대 제정 러시아의 최고 보수 이데올로그이자 1880~1905년 성무원 검사장. 1881년 4월 '전제정치 불가침 선언'을 기초해 로리스-멜리코프의 입헌 개혁안을 폐기시켰고, 교구학교 확대·검열 강화·비정교도 탄압의 반동적 반개혁을 주도했다. 3권의 『민법 강의』를 집필한 법학자이며, 『러시아 정치가의 성찰』에서 의회제를 '우리 시대의 위대한 거짓말'로 규정했다. 알렉산드르 3세와 니콜라이 2세 두 차르의 스승이었고, 1901년 톨스토이 파문도 그의 재임 중 단행되었다. 1905년 10월 선언 후 물러났지만 그가 평생 지킨 전제 권력은 혁명 세대가 타도할 구체제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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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6제국 법률학교 졸업, 원로원 근무
  • 1860–1865모스크바 대학 민법 교수
  • 1861황태자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법률 교사
  • 1865미래의 알렉산드르 3세 법률 교사
  • 1868–1880『민법 강의』 3권 출간, 민법학 박사
  • 1872국가평의회 의원
  • 1880–1905성무원 검사장, 러시아 정교회 실질적 수장
  • 1881.4'전제정치 불가침 선언' 기초, 개혁안 폐기
  • 1884교구학교 개혁 (273개 → 1902년 43,696개)
  • 1896『모스크바 선집』, 의회제·민주주의 비판
  • 1901암살 미수 생존, 재임 중 톨스토이 파문 단행
  • 1905.1010월 선언 후 사임, 국가평의회·원로원직만 유지

이반 로그기노비치 고레미킨

Иван Логгинович Горемыкин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39–1917 ✕ 살해

무위(無爲)로 전제를 지켰다 믿은 제국 최후의 수석대신

"폐하께서는 제 관 주위에 이미 촛불이 켜졌고, 의식을 완료하는 데 필요한 것은 저 자신뿐임을 보지 못하십니다." — 1914년 재소환된 74세 총리가 자신의 노쇠함에 대해 남긴 말.

제정 러시아 최후의 제1급 추밀고문이자 두 차례 총리를 지낸 평생 관료. 1906년 제1두마를 해산시키고, 1914년 74세에 다시 소환되어 전시 내각을 이끌었으나 무능과 두마 적대, 라스푸틴 일파에 대한 굴종으로 체제 붕괴의 상징이 되었다. 반의회적 전제 고수를 '신이 기름 부은 자'에 대한 충성이라 여겼고, 이 완고함이 바로 입헌 실험을 좌초시킨 능동적 요인이었다. 혁명 후 소치의 별장에서 강도에게 가족과 함께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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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0제국 법률학교 졸업, 원로원에서 변호사로 관직 시작
  • 1866–1869폴란드 입헌왕국 프워츠크·키엘체 부지사
  • 1891법무차관
  • 1895–1899내무장관 — 농민·젬스트보 문제에 보수적 접근, 1899년 축출
  • 1906.4–7각료회의 의장(총리) — 제1두마와의 대립 끝에 두마 해산, 스톨리핀에게 교체
  • 1914.1–1916.1각료회의 의장(총리) — 전시 내각, 두마·진보블록과 적대, 라스푸틴 측근으로 전락
  • 1916제1급 추밀고문(제국 최후의 수훈자), 해임
  • 1917.12소치 별장에서 강도에게 가족과 함께 살해됨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3세

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III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45–1894 ○ 신장염

부친의 대개혁을 되돌리고 전제정치를 재확립한 '평화를 만드는 자'

오스트리아 대사가 전쟁을 위협하자 알렉산드르 3세는 은제 포크를 매듭으로 구부려 대사의 접시 위에 던지며 말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그대의 두세 개 군단에게 할 일이다.'

1881년 부친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직후 즉위한 알렉산드르 3세는 개혁이 혁명을 낳는다는 신념 아래 포베도노스체프의 '전제정치 불가침 선언'으로 개혁안을 폐기하고, 젬스트보 약화·검열 강화·토지대장을 통한 농촌 통제 등 체계적 반개혁을 단행하며 '정교·전제·국민성'을 국시로 러시아화와 유대인 박해를 전개했다. 대외적으로는 큰 전쟁을 피해 '미로트보레츠(평화를 만드는 자)'로 불렸으나, 그의 프랑스-러시아 동맹은 훗날 러시아를 세계대전으로 끌어들이는 지정학적 틀이 되었다. 그가 재건해 아들 니콜라이 2세에게 물려준 전제 권력은 1905년과 1917년 혁명이 산산조각낼 구체제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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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5형 니콜라이 황태자의 죽음으로 황태자(체사레비치)가 되다
  • 1866포베도노스체프에게 법률 교육을 받기 시작하다
  • 1877–78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루슈크 분견대 지휘
  • 1881.3.13부친 암살 후 즉위
  • 1881.4.29'전제정치 불가침 선언' 공포, 반개혁 시작
  • 1889토지대장(zemsky nachalnik) 제도 도입으로 농촌 귀족 통제 강화
  • 1892프랑스-러시아 동맹 체결

표도르 바실리예비치 두바소프

Фёдор Васильевич Дубасов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러시아인 1845–1912 ○ 병사

모스크바 12월 봉기를 포격으로 진압한 제정 러시아 해군 제독

「두바소프 자신이 모스크바 수비대 1만 5천 명 중 신뢰할 수 있는 병력은 5천 명뿐이라고 선언했다」: 레닌, 「모스크바 봉기의 교훈」에서 인용

러일전쟁기의 제독이자 모스크바 총독으로, 1877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두 척의 기뢰정을 이끌고 터키 장갑함을 격침해 전역 첫 성 게오르기 훈장을 받은 해군 장교였다. 1905년 11월 모스크바 총독에 임명되어 12월 무장봉기를 바리케이드 포격과 세묘놉스키 근위연대 투입으로 진압했으며, 레닌이 인용한 바와 같이 모스크바 수비대 1만 5천 명 중 신뢰할 수 있는 병력은 5천 명뿐이라고 솔직히 인정했다. 사회혁명당의 두 차례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았으나 부상으로 휴유증을 앓다 1912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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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0해군사관학교 졸업
  • 1877기뢰정으로 터키 장갑함 격침, 성 게오르기 4급 훈장 수훈
  • 1897–1899태평양함대 사령관, 뤼순항 점령
  • 1901–1905해군기술위원회 의장
  • 1905–1906모스크바 총독, 12월 무장봉기 진압
  • 1906국가평의회 위원; 두 차례 암살 시도에서 생존하고 해군 대장 진급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두르노보

Пётр Николаевич Дурново

1905년 혁명을 무력 진압하고 세계대전의 파국을 예견한 제정 내무장관

두르노보는 1914년 각서에서 경고했다: '러시아에서 정치혁명은 불가능하며, 모든 혁명운동은 필연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으로 변질될 것이다.'

표트르 두르노보는 러시아 제국 경찰국장(1884~1893)과 내무장관(1905~1906)을 지낸 보수 관료로, 1905년 혁명을 무력 진압해 '반혁명의 도살자'로 불렸다. 해군 장교에서 경찰 수장으로 변신한 특이한 이력을 지녔으며, 내무장관 시절 비테 총리와 대립하다 함께 퇴진했다. 1914년 니콜라이 2세에게 올린 각서에서 독일과의 전쟁이 제정의 붕괴와 사회혁명을 초래하리라 예측했고, 이 예언은 1917년 혁명으로 실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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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0해군사관학교 졸업, 태평양·발트 함대 복무
  • 1870군사법률학교 졸업 후 법무성 검사보로 전임
  • 1884–1893내무성 경찰국장
  • 1893–1900원로원 의원
  • 1900–1905내무차관 (우편·전신 담당)
  • 1905.10–1906.04내무장관 (비테 내각)
  • 1906–1915국무회의 의원, 우파 그룹 지도자

뱌체슬라프 콘스탄티노비치 폰 플레베

Вячеслав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фон Плеве

짜르 체제를 지키려 "작은 승리의 전쟁"을 요구한 최후의 강경파 내무장관

"혁명을 막으려면 작은 승리의 전쟁이 필요합니다" — 러일전쟁을 앞두고 세르게이 비테에게 했다고 전해지는 말.

독일계 귀족 가문 출신이나 러시아 정교도로 성장한 플레베는 1881년 알렉산드르 2세 암살 후 경찰국장으로 발탁되어 '인민의 의지'를 분쇄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1902년 내무장관에 오른 그는 농민 봉기를 무력 진압하고 지방 자치기관(젬스트보)을 옥죄었으며, 경찰 주도의 노동운동(주바토프시나)을 시험했다가 곧 폐기하는 등 일관된 강경 노선으로 체제를 방어했다. 1904년 7월 사회혁명당 전투조직의 예고르 사조노프가 던진 폭탄에 암살당했고, 그의 죽음은 스뱌토폴크-미르스키의 '신뢰의 시대'로 가는 문을 열어 피의 일요일 직전의 정치적 전환을 촉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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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7법무부 입부, 검사보로 임관
  • 1879페테르부르크 사법부 검사
  • 1881경찰국장
  • 1884원로원 의원
  • 1885내무차관
  • 1894국무장관 겸 법전편찬 총괄
  • 1899핀란드 대공국 담당 장관-국무비서관
  • 1902내무장관 겸 헌병단장

지노비 페트로비치 로제스트벤스키

Зиновий Петрович Рожественский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러시아인 1848–1909 ○ 심장마비

쓰시마 해전에서 발트함대를 이끈 제정 러시아 해군 제독

훗날 그는 이렇게 썼다: '시민적 용기가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이 마지막 함대를 학살터로 보내지 말라고 온 세상에 외쳤어야 했다. 그러나 내게는 그런 불꽃이 없었다.'

제정 러시아 해군의 중장으로, 러일전쟁에서 제2태평양함대를 지휘해 발트해에서 극동까지 철갑함대를 이끄는 전례 없는 항해를 완수했으나, 쓰시마 해전에서 도고 헤이하치로의 일본 함대에 궤멸적 패배를 당했다. 그는 이 원정이 무모한 모험임을 처음부터 직감했지만, '여론을 만족시켜야 한다'며 출항을 강행했고, 훗날 '시민적 용기가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이 마지막 함대를 학살터로 보내지 말라고 온 세상에 외쳤어야 했다'고 토로했다.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된 그는 귀환 후 군법회의에 회부되었으나 부상으로 인해 무죄 판결을 받고 은둔 속에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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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8–1873해군사관학교 및 미하일롭스키 포병학교 졸업
  • 1877–1878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베스타호 포병장교로 터키 철갑함과 교전
  • 1883–1885불가리아 해군 사령관
  • 1891–1893주영국 해군무관
  • 1898–1903소장 진급, 발트함대 포병훈련대 사령관, 해군참모총장
  • 1904–1905중장, 제2태평양함대 사령관: 발트해에서 쓰시마까지 18,000해리 항해, 쓰시마 해전 참패
  • 1906군법회의에서 부상으로 인한 무죄 판결, 퇴역
  • 1909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

세르게이 율리예비치 비테

Сергей Юльевич Витте
경제·재정·계획 러시아 제국 러시아 그루지야 1849–1915 ○ 자연사

차르가 미워한 구원투수

1888년, 측근들 앞에서 "화물 기관차 두 대로 황실 열차를 끌면 위험하다"고 직언했다. 며칠 후 보르키 탈선 사고. 알렉산드르 3세는 그를 국철 책임자로 발탁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금본위제를 주도한 제국 근대화의 설계자. 1905년 일본과 강화를 맺고 10월 선언을 받아냈으나, 차르는 위기를 넘겨준 그를 평생 용서하지 않았다. 한직에서 회고록을 쓰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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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2–1903재무장관, 금본위제, 시베리아 횡단철도, 공업화 드라이브
  • 1905.9포츠머스에서 일본과의 강화 협상 타결
  • 1905.10초대 총리, 10월 선언 기초
  • 1906.4해임, 이후 국가평의회 한직

니콜라이 드미트리예비치 골리친

Николай Дмитриевич Голицын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50–1925 ✕ 처형

스스로 무능을 고백한 제국의 마지막 총리

1925년, 반신불수 상태로 총살되러 가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인생에 지쳤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총리. 1917년 1월 황제의 임명을 받았을 때 스스로 '무능력'을 이유로 사양했으나, 충신으로서 받아들인 뒤로도 2월 혁명의 파고 앞에서 결정적인 행동을 하지 못했다. 혁명 후 사수공과 공동 농장 경비원으로 생계를 잇다가, 1925년 '리체이스트 사건'에 연루되어 반신불수 상태로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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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1–1879내무부 관료, 폴란드령에서 농민 담당
  • 1879–1885아르한겔스크 부지사, 내무부 경제국 부국장
  • 1885–1903아르한겔스크·칼루가·트베리 지사
  • 1903–1915원로원 의원, 국가평의회 의원
  • 1915–1916러시아 포로구호위원회 의장
  • 1917.01–03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총리

블라디미르 빅토로비치 사하로프

Владимир Викторович Сахаров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러시아 (모스크바 귀족) 1853–1920 ✕ 처형

브루실로프 공세의 11군 사령관이자 백군에 합류한 기병대장

1917년 3월,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낸 전보에서 국가두마를 '범죄적 무리'라 맹비난한 뒤 이렇게 끝맺었다: "폐하의 충성스러운 신하로서 흐느끼며 말씀드립니다. 가장 고통 없는 탈출구는 이미 제시된 조건들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블라디미르 빅토로비치 사하로프는 제정 러시아의 기병대장으로, 러시아-튀르크 전쟁, 의화단 진압,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50년 군 경력에서 제국 군사 엘리트의 전형적 궤적을 밟았다. 1915년 11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보조 축을 맡아 브로디를 점령하고 수만 명의 포로를 확보했다. 1916년 가을 루마니아 전선의 두너이군 사령관으로 파견되어 페르디난드 1세의 보좌관으로 사실상 전선을 지휘했다. 2월 혁명 직후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낸 전보에서 국가두마를 맹비난하면서도 퇴위를 권고한 장면은 군주제 장교단의 분열된 충성을 보여준다. 혁명 후 해임되었고 내전기 크림에서 백군에 가담, 1920년 녹색군에게 체포·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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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9–1878육군 입대, 파블롭스크 군사학교 졸업, 참모본부 아카데미 졸업
  • 1877–1878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 1880–1897군사학교 교관, 참모직, 기병연대장 역임
  • 1900–1901의화단 진압 작전 중 북만주 주둔군 사령관
  • 1904–1905러일전쟁: 만주군 야전참모장, 총사령관 참모장
  • 1906–1914제7군단장, 제11군단장, 기병대장 진급 (1908)
  • 1914–1915제11군단 이끌고 갈리치아 전투 및 고를리체-타르누프 전투 참전
  • 1915–1916제11군 사령관,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브로디 점령
  • 1916–1917두너이군 사령관, 루마니아 전선 총사령관 보좌관
  • 19172월 혁명 후 구치코프에 의해 해임
  • 1918–1920백군에 가담, 크림반도에서 녹색군에게 체포·처형

알렉세이 알렉세예비치 브루실로프

Алексей Алексеевич Брусилов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53–1926 ○ 심부전

브루실로프 공세의 설계자, 혁명 후 붉은 군대에 합류한 제정 러시아 최후의 명장

12기병사단은 죽어야 한다. 단번에 죽지 말고 저녁까지 죽어라 — 1914년 8월 29일, 카레딘 사단장에게 내린 브루실로프의 명령

제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군이 거둔 최대의 승리로 평가되는 1916년 브루실로프 공세의 설계자이자 지휘관이다. 전선 전역에 동시 타격을 가하는 새로운 돌파 전술을 고안해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궤멸 직전까지 몰아넣었으며, 이 공세는 이후 소련 군사학에서 교과서적 사례로 연구되었다. 1917년 혁명기에는 러시아군 최고사령관을 지냈으나 군대 해체를 막지 못했고, 러시아 내전 후 볼셰비키의 적군에 합류해 기병 감찰관으로 복무했다. 제정 장교단 출신으로 소비에트 체제에 협력한 그의 행보는 망명 백군 진영에서 배신으로, 소비에트 측에서는 실용적 애국으로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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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215트베리 용기병연대 소위로 임관
  • 1877–1878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아르다한·카르스 공략에서 두각
  • 1902–1906기병장교학교 교장, 러시아 기병 교육의 중심 인물
  • 1914–1916제8군 사령관 → 남서전선 총사령관, 브루실로프 공세 지휘
  • 1917.5–7러시아군 최고사령관, 6월 공세 실패 후 경질
  • 1920–1924붉은 군대 기병 감찰관, 혁명군사평의회 특임

니콜라이 블라디미로비치 루즈스키

Николай Владимирович Рузский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54–1918 ✕ 살해

프스코프에서 차르의 퇴위를 강요한 북부전선 사령관

니콜라이 2세는 유형지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모든 적과 박해자를 용서할 힘을 신에게서 받았지만, 루즈스키 부관장군만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갈리치아 정복자라는 명성을 얻은 제정 러시아의 보병대장으로, 1차 세계대전에서 제3군과 북서전선·북부전선을 지휘했다. 1917년 2월 혁명 당시 프스코프에 주둔한 북부전선 사령관으로서 니콜라이 2세의 열차를 맞았고, 알렉세예프 참모총장과 전선 사령관들의 만장일치 전보를 전달하며 차르에게 책임내각 도입과 퇴위를 압박했다. 한 시간 반에 걸친 논쟁 끝에 니콜라이 2세의 뜻을 꺾은 결정적 순간은, 군부가 더 이상 왕조를 지키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전쟁 말기 붉은 군대 입대를 '러시아인끼리의 전쟁'이라 거부하고 광천수 휴양지에 머물다, 1918년 백인민 체카에 의해 인질로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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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7–1878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고르니 두브냐크 요새 공격 중 부상
  • 1881니콜라예프 참모대학 졸업, 이후 키예프·빌노 군관구 참모 역임
  • 1904–1905제2만주군 야전참모장으로 러일전쟁 참전
  • 1909보병대장 진급, 군사평의회 위원, 1912년 야전규정 공동 저자
  • 1914.07–09제3군 사령관, 갈리치아 전투에서 리보프 점령
  • 1914.09–1915.03북서전선 총사령관
  • 1915.08–1917.04북부전선 총사령관, 1917년 3월 프스코프에서 니콜라이 2세의 퇴위를 압박
  • 1917.04임시정부와의 군기 유지 갈등으로 사임, 캅카스 광천으로 이주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트레포프

Дмитрий Фёдорович Трепов
보안·정보·치안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러시아인 1855–1906 ○ 심부전

진압 명령과 개혁 약속을 한 손에 쥔 1905년의 얼굴

「탄약을 아끼지 말라」는 초안을 읽은 모솔로프가 "제정신이냐"고 묻자, 트레포프는 답했다. "제정신이네. 내일이면 발포해야 할 거야. 지금까지 나는 피를 흘리지 않았어. 이 불행을 막을 유일한 방법이 이 문구라네."

악명 높은 페테르부르크 시장의 아들로 태어나 모스크바 경찰을 거쳐 1905년 혁명기 제국 최고의 실력자로 부상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총독, 내무차관, 경찰 및 헌병대 사령관을 동시에 겸하며 독재적 권한을 행사했다. 1905년 10월 "빈 총알 쓰지 말고 실탄을 아끼지 말라"는 명령은 혁명의 상징이 되었고, 바로 그 순간 그가 밀어붙인 10월 선언은 시민적 자유를 약속했다. 선언 이후 궁정 경비사령관으로 밀려났지만 니콜라이 2세의 가장 신임받는 조언자로 남았고, 1906년 심부전으로 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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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4파제스키 군단 졸업, 근위기마연대 배속
  • 1877–78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텔리시 전투에서 부상
  • 1896–1905모스크바 경찰총감
  • 1900소장 진급
  • 1905.1–10상트페테르부르크 총독 (비상대권)
  • 1905.5–10내무차관, 경찰·헌병대 사령관
  • 1905.10–1906.9황실 궁정 경비사령관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Романов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56–1929 ○ 병사

차르 앞에서 권총을 꺼내 입헌군주제를 강요한 대공

1905년 10월, 니콜라이 2세가 군사독재를 택하려 하자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은 권총을 꺼내 들고 이렇게 외쳤다. "폐하께서 비테의 안을 받아들이지 않으시면, 제가 이 자리에서 제 머리에 총을 쏘겠습니다."

니콜라이 1세의 손자이자 니콜라이 2세의 숙부였던 그는 로마노프 왕조 말기 군부에서 가장 신망을 얻은 대공이었다. 1905년 혁명 당시 차르가 군사독재를 택하려 하자, 권총을 꺼내 들고 자살하겠다며 맞서 니콜라이 2세가 비테의 개혁안과 10월 선언을 수용하게 한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 최고사령관에 임명되어 동부전선을 지휘했으나 탄넨베르크 참패와 보급난 속에 1915년 차르에게 직책을 넘겨주고 캅카스 총독 겸 전선 사령관으로 전임되었다. 혁명 후 크림반도에 은거하다 1919년 영국 전함으로 탈출했고, 망명 중 백군 잔존 세력에 의해 잠시 황제로 추대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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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7–78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성 게오르기 훈장 수훈
  • 1884근위 후사르 연대장
  • 1895–1905기병 총감
  • 1905군사독재 거부, 니콜라이 2세에게 10월 선언 수용 촉구
  • 1905–14페테르부르크 군관구 사령관 겸 국방평의회 의장
  • 1914–15제1차 세계대전 최고사령관
  • 1915–17캅카스 총독 겸 캅카스 전선 사령관
  • 1922백군 잔존 세력에 의해 전러시아 황제로 추대

표트르 드미트리예비치 스뱌토폴크-미르스키

Пётр Дмитриевич Святополк-Мирский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57–1914 ○ 자연사

"신뢰의 시대"를 약속했으나 피의 일요일로 끝난 비운의 내무장관

1904년 9월 16일 내무부 관료들 앞에서: "행정의 성과는 공공기관과 국민에 대한 진실로 호의적이며 신뢰하는 태도에 달려 있다." 이 한 마디가 '신뢰의 시대'를 열었다.

플레베 암살 후 내무장관에 올라 '신뢰의 시대'를 선언하고 검열 완화·유배자 사면·젬스트보 대회 허용으로 자유주의 여론에 호응했으나, 국무회의에 선출직 대표를 도입하려던 개혁안은 니콜라이 2세에게 거부당했다. 1905년 1월, 가폰 신부의 평화 청원 행진에 대한 그의 무대응은 피의 일요일 학살로 귀결됐고, 사흘 뒤 사임했다. 정직하고 선의에 찼으나 정치적 결단력이 부족했던 그는 개혁과 반동 사이에 끼어 역사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인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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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1897펜자 주지사
  • 1897–1900예카테리노슬라프 주지사
  • 1900–1902내무차관 겸 헌병단장
  • 1902–1904빌나·코브노·그로드노 총독
  • 1904.8–1905.1내무장관, '신뢰의 시대'
  • 1905.1피의 일요일 후 사임, 정계 은퇴

미하일 바실리예비치 알렉세예프

Михаил Васильевич Алексеев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러시아인 1857–1918 ○ 심부전

동부전선을 지휘하고 백군 의용군의 기초를 놓은 차르의 마지막 참모총장

1917년 3월 2일, 알렉세예프는 전 전선 사령관들의 퇴위 권고 전보를 한데 모아 차르에게 전송하며 '폐하께서 무릎을 꿇고 간청하옵니다… 왕위에서 물러나소서'라고 썼다.

러시아 제국군의 참모 장군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1915년부터 1917년까지 최고사령부(스타프카) 참모총장을 맡아 동부전선 전체 작전을 실질적으로 지휘했다. 갈리치아 공세를 입안하고 1915년 대후퇴를 조직적으로 이끌어 러시아군을 붕괴에서 구한 전략가였으며, 2월 혁명 당시 전선 사령관들의 퇴위 요구 전보를 니콜라이 2세에게 전달해 퇴위를 이끌어냈다. 혁명 후 남러시아에서 의용군의 모체인 '알렉세예프 조직'을 창설해 백군 운동의 군사적·정치적 기반을 놓았으나, 내전이 본격화되기 전 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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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6–189064 카잔 연대 장교, 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니콜라이 참모아카데미 수석 졸업
  • 1890–1904참모본부 근무, 니콜라이 아카데미 교수
  • 1904–1905제3 만주군 병참총감 (러일전쟁)
  • 1908–1912키예프 군관구 참모장
  • 1912–1914제13 군단장
  • 1914–1915남서전선 참모장 (갈리치아 공세 입안)
  • 1915북서전선 총사령관, 대후퇴 조직적 지휘
  • 1915–1917최고사령부(스타프카) 참모총장 — 전 러시아군 실질적 총지휘
  • 1917 3–5월임시정부 최고사령관
  • 1917–1918의용군(알렉세예프 조직) 창설자·최고지도자

세르게이 세묘노비치 하발로프

Сергей Семёнович Хабалов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러시아 (오세티야계) 1858–1929 ○ 사망

2월 혁명 당시 시위대 발포를 명령하고 수비대 통제력을 상실한 마지막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2월 26일 하발로프는 도심을 봉쇄하고 시위대를 향해 발포를 명령했으나, 다음날 볼린스키 연대가 이를 거부하며 수비대 전체가 봉기했다.

오세티야계 출신의 제정 러시아 군인으로, 미하일롭스코예 포병학교와 니콜라예프 참모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러시아-튀르크 전쟁에 참전했다. 모스크바 군사학교와 파블롭스크 군사학교 교장을 거쳐 1916년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나, 1917년 2월 혁명 당시 니콜라이 2세의 진압 명령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수비대의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혁명 후 체포되어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었고, 내전 후 남러시아에 남아 예센투키에서 빈곤 속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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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8미하일롭스코예 포병학교 졸업, 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 1886니콜라예프 참모아카데미 졸업, 근위대 참모 근무
  • 1903–1905모스크바 군사학교 교장
  • 1905–1914파블롭스크 군사학교 교장
  • 1914–1916우랄주 군사령관 겸 우랄 코사크군 아타만
  • 1916–1917.02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 1917.02시위 진압 명령 수행 중 수비대 통제력 상실, 체포
  • 1917.10–1929석방 후 남러시아에서 생활, 예센투키에서 사망

미하일 블라디미로비치 로댠코

Михаил Владимирович Родзянко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우크라이나 1859–1924 ○ 자연사

차르에게 '뚱보'라 불린 의회주의자, 제국의 마지막 두마 의장

1917년 2월, 참수부에 보낸 전문에서: "수도는 무정부 상태. 정부는 마비되었다. 지체는 죽음이다. 왕조의 운명이 걸린 마지막 시간이다." 니콜라이 2세는 읽고 나서 시종장에게 말했다. "이 뚱보 로댠코가 또 무슨 헛소리를 써 보냈군."

우크라이나계 귀족 출신으로, 1905년 10월당을 공동 창립하여 입헌군주제와 의회주의라는 두 축에서 차르 체제의 점진적 개혁을 추구했다. 1911년부터 1917년까지 제3·4대 국가두마 의장을 지내며 라스푸틴을 공개 비판하고 전시 정부의 무능에 맞섰다. 1917년 2월 혁명기에는 국가두마 임시위원회를 이끌며 니콜라이 2세 퇴위를 결정적으로 추동했으나, 미하일 대공이 즉위를 거부하며 입헌군주제 구상은 무너졌다. 1920년 유고슬라비아로 망명하여 빈곤 속에서 회고록 『라스푸틴의 통치』를 남겼고, 망명 군주주의자들에게 배척당한 채 숨졌다. 혁명 이전 러시아 의회 정치의 가능성과 한계를 한 몸에 체현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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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0월당(옥탸브리스트) 공동 창립, 입헌군주제 노선
  • 1907–1911제3대 국가두마 의원, 부의장(1909~)
  • 1911–1912제3대 국가두마 의장(구치코프 후임)
  • 1912–1917제4대 국가두마 의장, 진보블록 참여
  • 1917.2–3국가두마 임시위원회 의장, 니콜라이 2세 퇴위 협상 주도
  • 1917 여름구치코프와 자유공화당 창당
  • 1917.10–1920백군 지역(돈·크림)에서 반볼셰비키 활동
  • 1920–1924유고슬라비아 망명, 『라스푸틴의 통치: 제국의 붕괴』 집필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칼레딘

Алексей Максимович Каледин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61–1918 ✕ 자살

돈에서 첫 백군 거점을 연 카자크 아타만

1918년 2월 11일, 마지막 정부회의에서 방어를 위한 총검이 147자루뿐임을 듣고 사임한 그날, 알렉세예프에게 남긴 유서: 「카자크가 자기 아타만을 따르지 않는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브루실로프 공세의 선봉을 맡아 루츠크를 돌파한 제국 육군 기병대장. 1917년 6월 돈 카자크 최초의 선출 아타만이 되었고, 10월 혁명 후 소비에트 권력을 전면 거부하며 돈 지역을 독립시켜 남부 백군의 첫 거점을 열었다. 그러나 전선에서 돌아온 카자크들은 중립을 선언했고, 1918년 2월 의용군마저 돈을 떠나려 하자 「카자크가 아타만을 따르지 않는다」는 유서를 남기고 권총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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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06노보체르카스크 카자크 사관학교장
  • 1912–15제12기병사단장, 제1차 세계대전 초기 지휘
  • 1915–16제12군단장, 제8군 사령관,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루츠크 돌파
  • 1916–17기병대장 승진, 제8군 사령관직 유지
  • 1917.6돈 카자크 아타만에 선출 (1709년 이후 첫 선거)
  • 1917.10–11소비에트 권력 불인정, 돈 지역 독립 선포, 백군 장교 수용
  • 1918.1–2카자크 중립 선언으로 전선 붕괴, 사임 후 권총 자살

게오르기 예브게니예비치 리보프

Георгий Евгеньевич Львов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61–1925 ○ 사망

류리크 왕조의 후예, 제국의 마지막 자유주의 총리

"정부는 권위 없는 권력이고, 소비에트는 권력 없는 권위다." — 임시정부 총리로서 리보프는 자신이 이끄는 정부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사이의 이중권력 현실을 이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게오르기 리보프 공작은 류리크 왕조의 후예로, 제국 말기 젬스트보 자유주의 운동의 상징적 지도자였다. 러일전쟁 시기 의료여단을 이끌어 전국적 명성을 얻었고,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전러시아 젬스트보 연합과 젬고르를 이끌며 군수·의료 지원을 조직했다. 1917년 2월 혁명 후 임시정부 초대 총리 겸 내무장관에 취임하여 보통선거·언론의 자유·사형 폐지·종교·계급·인종 차별 철폐 등 자유주의 개혁을 단행했으나, 소비에트와의 이중권력 속에서 실질적 권위를 확보하지 못하고 7월에 사임했다.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에게 정권을 넘긴 후, 10월 혁명으로 체포되었다 탈출하여 미국을 거쳐 프랑스로 망명, 파리에서 가난하게 회고록을 쓰다 1925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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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1–1893툴라 현 젬스트보, 기근 구호 활동
  • 1900–1906툴라 현 젬스트보 행정위원회 의장
  • 1904–1905러일전쟁: 젬스트보 의료여단 조직·지휘, 전국적 영웅
  • 1906제1대 국가두마 의원(카데트), 의료·식량위원회 위원장
  • 1914–1917전러시아 젬스트보 연합 의장, 육군 의료·보급망
  • 1915–1917젬고르 공동위원회 지도자, 전시 군수·구호 총괄
  • 1917.3–7임시정부 총리 겸 내무장관: 보통선거·사형폐지 등 개혁
  • 1918–1925체포·탈출, 미국 거쳐 파리 망명, 회고록 집필

표트르 아르카디예비치 스톨리핀

Пётр Аркадьевич Столыпин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독일 1862–1911 ✕ 암살

교수대와 개혁을 한 손에 쥔 총리

1907년 5월 10일, 제2두마 연설에서 혁명세력을 향해 "여러분은 대격변이 필요하겠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위대한 러시아다"라고 선언했다.

1905년 혁명을 야전군법회의로 진압하는 동시에, 공동체 농지를 해체하는 농업개혁으로 체제의 새 지지 기반을 만들려 한 제정 러시아의 총리. 1911년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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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내무장관을 거쳐 총리
  • 1906–07야전군법회의로 혁명 진압
  • 1906–11농업개혁, 공동체 탈퇴와 자영농 육성
  • 1907.6「6월 3일 체제」, 선거법 개정으로 두마 장악
  • 1911.9키예프 오페라 극장에서 피격,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