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활동과 국가·세력

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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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공산당·볼셰비키 인물 182명

세르게이 이오시포비치 마냐킨

Сергей Иосифович Манякин

26년간 옴스크를 통치한 소련 최장수 지역당 서기

1961년 10월 볼셰레치예에서 아침 일찍, 당위원회 앞 광장에서 파란색 운동복 차림으로 체조를 하던 남자—그가 바로 옴스크 주의 새 제1서기, 39세의 마냐킨이었다.

소련 역사상 가장 오래 지역당 제1서기를 지낸 인물로, 1961년부터 1987년까지 26년간 옴스크 주당위원회 제1서기를 역임했다. 흐루쇼프가 농업 위기에 대응해 직접 임명했으며,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옴스크는 정유·중공업·농공복합단지를 갖춘 시베리아의 주요 산업도시로 성장했다. 1987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소련 인민통제위원회 의장으로 발탁되어 개혁기 국가 감독 기구를 이끌었고, 이후 당통제위원회 제1부의장을 지냈다. 1961년부터 1990년까지 29년간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재임하며 흐루쇼프·브레즈네프·고르바초프 3대를 관통한 전형적인 브레즈네프기 지역당 보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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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3붉은군대 병사, 부상으로 제대
  • 1948–1957농업경제인: 농업기사 → MTS 소장 → 콜호즈 의장 (스타브로폴)
  • 1957–1960스타브로폴 지방당위 농업부장
  • 1960–1961스타브로폴 지방집행위원회 의장
  • 1961CPSU 중앙위원회 감찰관
  • 1961–1987옴스크 주당위원회 제1서기
  • 1987–1989소련 인민통제위원회 의장
  • 1989–1990CPSU 중앙위 당통제위원회 제1부의장

에발트 바실리예비치 일리옌코프

Эвальд Васильевич Ильенков

마르크스의 『자본』에서 변증법적 논리를 발굴한 소비에트 유럽인

“관념론은 순진한 학생이 유령을 상상한 기본적인 실수가 아니다. 관념론은 이상적 형식의 객관성 — 개인의 의지와 의식으로부터 독립하여 인간 문화의 공간에 존재한다는 사실 — 에 대한 사변적 해석이다.” — 『이상적인 것의 변증법』, 1976년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철학에서 가장 독창적인 사유를 남긴 철학자. 『자본』의 논리에서 추상에서 구체로 상승하는 변증법적 방법을 정식화했고, '이상적인 것'이 개별 뇌의 산물이 아니라 문화·언어·기호 속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인간 활동의 형식임을 논증하여 격렬한 학술 논쟁을 촉발했다. 빌헬름 다비도프의 발달교육 이론과 메시체랴코프의 자고르스크 농맹아 실험에 철학적 기초를 제공했으며, 주저 『변증법적 논리』(1974)로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을 인식론에서 문화철학으로 확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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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1945포병소위, 제1·2벨로루시 전선군에서 베를린까지 진격
  • 1950모스크바대학 철학과 우등 졸업, 대학원 진학
  • 1953소련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연구원 (종신)
  • 1955모스크바대학에서 '헤겔주의'로 교수직 박탈
  • 1960『『자본』에서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의 변증법』 출간
  • 1962「철학백과사전」에 「이상적인 것」 논문 발표
  • 1968박사학위 논문 통과, 『우상과 이상에 관하여』 출간
  • 1974주저 『변증법적 논리: 역사와 이론』 출간

카렌 네르세소비치 브루텐츠

Карен Нерсесович Брутенц

브레즈네프 시대 제3세계 정책을 설계한 국제부 이론가

브루텐츠와 국제부 전문가들은 1979년 아프가니스탄 파병이 '어리석은 짓'이라고 판단했다. 그 의견을 전달할 부서장 포노마료프는 중대한 12월 회의에서 아예 배제되었다.

아르메니아계 소비에트 국제부 이론가로, 브레즈네프-고르바초프 시기 소련의 제3세계 정책을 실무적으로 설계했다. 중앙위 국제부 제1부부장으로서 '민족민주주의' 개념의 정립을 주도했고, 1979년 아프가니스탄 파병 결정을 내부에서 반대한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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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6–1948바쿠 정신병원 의사
  • 1950–1954바쿠 시당 위원회 강사
  • 1954–1958사회과학아카데미 대학원생, 1958년 학위 취득
  • 1961–1969『평화와 사회주의의 제문제』(프라하) 민족해방운동부장
  • 1961–1976중앙위 국제부 책임직, 제3세계 정책 기획
  • 1976–1986중앙위 국제부 제1부부장
  • 1986–1990중앙위 후보위원
  • 1997–2017러시아 외교정책협회 부회장

유리 표도로비치 오를로프

Юрий Фёдорович Орлов
이념·선전 소련 공산당·볼셰비키 소련 러시아 1924–2020 → 국적 박탈 · 강제 추방 1986

소련이 서명한 헬싱키 인권 약속을 내부에서 감시한 물리학자

1978년 5월 폐쇄 재판의 최후 진술에서 그는 말했다: "이런 재판으로는 헬싱키 그룹의 문서가 증언하는 사회의 병폐와 결함을 없앨 수 없습니다."

입자가속기 물리학자에서 소련 최초의 인권감시 조직을 세운 반체제 운동가로 선 인물. 1956년 당 회의에서 스탈린과 베리야를 '권력을 쥔 살인자'라 칭해 제명·해고당했고, 그로부터 20년 뒤인 1976년 5월 헬싱키 최종의정서의 인권 조항 이행을 감시하는 모스크바 헬싱키 그룹을 창립했다. 이는 소련 스스로 서명한 제3바스켓의 약속을 내부에서 뒤집어 맞대결시키는 일이었다. 1977년 2월 체포되어 7년 수용소와 5년 유형을 선고받고, 1986년 국적을 박탈당한 채 미국으로 추방되어 코넬대 물리학 교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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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56보안 원자력 연구소(훗날 이테프) 물리학자
  • 1956스탈린·베리야를 격렬히 비판, 당 제명과 해고
  • 1956–72예레반 물리연구소, 1963년 이학박사
  • 1968아르메니아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73소련 최초 국제앰네스티 그룹 창립 참여
  • 1976.5모스크바 헬싱키 그룹 창립, 초대 의장
  • 1977–86체포, 7년 수용소와 5년 유형 선고
  • 1986국적 박탈·미국 추방, 코넬대 교수

유리 필리포비치 솔로비요프

Юрий Филиппович Соловьёв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레닌그라드를 이끈 리가초프 측근

1989년 3월 정치국 회의에서 솔로비요프는 레닌그라드 당 지도부 7명 전원이 낙선했다고 보고하며, 유권자들이 후보 개인이 아니라 페레스트로이카 자체에 반대표를 던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레닌그라드 지하철 건설 현장에서 20년 넘게 일하며 기술 관료로 성장한 후 당 기구로 옮겨갔다. 1985년 레닌그라드 주당위 제1서기와 정치국 후보위원에 오르며 페레스트로이카 초기 소련 제2도시를 책임졌다. 1989년 3월 소련 인민대표대회 선거에서 단독 출마했으나 유권자 60%가 그의 이름을 지워버리는 충격적 패배를 당했으며, 레닌그라드 당 지도부 7명 전원이 낙선한 이 사건은 당 권위 붕괴를 상징하는 분수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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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1973렌메트로스트로이 근무, 수석기술자 거쳐 국장
  • 1973–1974레닌그라드 시집행위원회 부의장
  • 1974–1975레닌그라드 주당위 서기
  • 1975–1978레닌그라드 주당위 제2서기
  • 1978–1984레닌그라드 시당위 제1서기
  • 1984–1985소련 산업건설부 장관
  • 1985–1989레닌그라드 주당위 제1서기 (1986년부터 정치국 후보위원 겸임)

예프렘 예브세예비치 소콜로프

Яфрэм Евсеевич Сакалоў

농업 개발과 말기 개혁을 조율한 벨로루시아 당 지도자

그는 자신을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부르며 혁신을 위한 혁신에는 제동을 걸었다.

농업 전문가 출신인 예프렘 소콜로프는 벨로루시아의 지역 행정과 당 조직을 거쳐 공화국의 당 지도자가 된 실무형 정치인이었다. 그는 대규모 축산 단지와 도로 건설을 추진해 브레스트 지역의 생산 기반을 확장했으며, 1986년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페레스트로이카기에는 공화국의 소유권과 경제 권한을 더 분명히 하자고 주장하고 체르노빌 방사능 오염 지도의 공개를 지시했지만, 스스로를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부르며 급진적 혁신에는 신중했다. 1990년 벨로루시아 당 제1서기에서 물러났고 그해 잠시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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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1950붉은군대 제5독립예비공병연대 복무
  • 1956–1958브레스트주 농업 전문가와 농업감사관
  • 1958–1961이바노보 지구당 제2서기
  • 1961–1965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우를류튜프 지구당 제1서기 등
  • 1969–1977벨로루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농업부 부부장·부장
  • 1977–1987브레스트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87–1990벨로루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90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

바딤 발렌티노비치 자글라딘

Вадим Валентинович Загладин

브레즈네프의 총애를 받은 유로코뮤니즘 대화의 얼굴

"브레즈네프의 총애를 받은 인물은 포노마료프의 제1부부장 바딤 자글라딘이었다. 사냥 트로피를 선물받고, 공식 사진에서 항상 총비서 바로 뒤에 자리했다." — 경제학자 스타니슬라프 멘시코프

중앙위 국제부에서 24년, 그중 13년을 보리스 포노마료프 아래 제1부부장으로 지내며 서유럽 공산당을 상대한 소련의 핵심 창구였다. 유로코뮤니즘 시대에 미테랑, 브란트, 나폴리타노와 교류하며 사회민주주의에 수렴하는 개혁된 공산주의를 주창했고, 고르바초프 '신사고' 외교의 이론적 토대를 이반 프롤로프와 함께 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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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2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MGIMO) 졸업 후 동 대학에서 교편
  • 1954–1964《노보예 브레먀》 및 프라하 《평화와 사회주의의 문제들》 저널리스트
  • 1964–1967중앙위 국제부 고문(콘술탄트)
  • 1967–1975중앙위 국제부 부부장
  • 1975–1988중앙위 국제부 제1부부장 — 포노마료프 아래 서유럽 공산당 관계 총괄
  • 1988–1991미하일 고르바초프 고문
  • 1992–2006고르바초프 재단 고문, 유럽대서양협력협회 부회장

니콜라이 예피모비치 크루치나

Николай Ефимович Кручина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당 금고를 지킨 마지막 재무관

1990년 7월 9일 제28차 당대회 연단에서 크루치나는 당 중앙위가 49억 루블의 예비 기금을 보유하고 있다고 처음 공개했다. 소련 공산당 역사상 당 재정의 실체가 대의원들 앞에 드러난 유일한 순간이었다.

알타이 농촌 출신의 농학도로 콤소몰과 당 농업 부문에서 경력을 쌓아, 1965년부터 13년간 첼리노그라드 주당 제1서기로 카자흐 초원의 처녀지 개간을 지휘하며 사회주의 노동 영웅이 되었다. 1983년 고르바초프의 신임으로 당 중앙위 업무관리국장에 올라 당의 방대한 재산과 해외 원조 자금, 이른바 '당의 금'을 총괄했다. 1990년 제28차 당대회에서 처음으로 당 예산을 공개해 49억 루블의 예비 기금을 밝혔으나, 쿠데타 실패 며칠 후 모스크바 자택 발코니에서 떨어져 숨졌다. 그의 죽음과 전임자 파블로프·국제부 간부 리소볼리크의 연이은 추락사는 당 자금의 행방을 둘러싼 미스터리의 중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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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59콤소몰 노보체르카스크·카멘스크·스몰렌스크 시·주 위원회 제1서기
  • 1959–1962콤소몰 중앙위 농촌청년부장
  • 1962–1963중앙위 농업부 지도원
  • 1963–1965카자흐스탄 공산당 첼리니 크라이 위원회 서기
  • 1965–1978카자흐스탄 공산당 첼리노그라드 주 위원회 제1서기
  • 1978–1983중앙위 농업부 제1부장
  • 1983–1991중앙위 업무관리국장 (당 재무·재산 총괄)

야코프 페트로비치 포그레브냐크

Яков Петрович Погребняк

반알코올 캠페인을 이끌며 리가초프의 마산드라 비노테카 파괴 명령을 폭로한 우크라이나 공산당 서기

나는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잔의 내용물을 테이블 밑에 쏟아버렸다. 옆에 있던 당 서기가 속삭였다. '이봐, 내 바지가 벌써 다 젖었어. 구두 속에도 보드카야!'

도네츠크 공업대학을 졸업한 금속공학자 출신으로, 1957년부터 당에 들어가 크라마토르스크, 이바노프란코프스크, 니콜라예프 주당 제1서기를 거쳐 1971년부터 16년간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를 지냈다. 1985년 고르바초프의 반알코올 캠페인이 시작되자 우크라이나 내 시행을 감독했으며, 후일 예고르 리가초프가 마산드라 와인 공장의 150년 역사 비노테카를 파괴하라고 요구했고 블라디미르 셰르비츠키의 개입으로 이를 막았다고 증언했다. 1987년 민족주의 정서가 고조되던 리보프로 발령받아 1990년까지 제1서기를 지냈고, 소련 붕괴 후에는 '우크라이나-폴란드 협회' 회장을 맡으며 회고록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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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1960크라마토르스크 시당 제2서기
  • 1960–1962크라마토르스크 시당 제1서기
  • 1963–1964폴타바 공업주당 제1서기
  • 1966–1969이바노프란코프스크 주당 제1서기
  • 1969–1971니콜라예프 주당 제1서기
  • 1971–1987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통상·반알코올 캠페인)
  • 1987–1990리보프 주당 제1서기

야코프 페트로비치 랴보프

Яков Петрович Рябов

옐친의 정치적 후견인, 국방산업을 관장한 당 서기, 우스티노프를 꺾고 T-72를 관철시킨 실무형 관료

T-72 전차가 시속 70킬로미터로 질주하며 불꽃을 튀기자, 그레치코 원수가 말했다. "보고할 것도 없네. 생산에 들어가야 해." 곧바로 브레즈네프에게 전화를 걸어 덧붙였다. "우스티노프? 엿이나 먹으라지, 그 작자 헛소리랑 같이!"

야코프 랴보프는 스베르들롭스크 주당위 제1서기(1971–1976)와 CPSU 중앙위원회 서기(1976–1979)로서 소련 군수산업을 총괄한 당-국가 관료다. 우랄 기술자 출신으로 키릴렌코의 발탁을 받아 스베르들롭스크 당 조직을 장악했고, 보리스 옐친을 발굴해 후계자로 추천했다. 중앙당 서기로 옮겨 국방을 담당하자 우스티노프와 T-72 전차 채택을 두고 정면 충돌했으며, 그레치코 원수의 지지로 T-72를 소련 주력 전차로 관철시켰다. 이후 국가계획위 제1부의장, 대외경제관계위 의장, 각료회의 부의장, 주프랑스 대사를 역임하고 페레스트로이카 말기 고르바초프 및 리즈코프와의 갈등으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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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1944제9공장 선반공
  • 1946–1960스베르들롭스크 터보모터 공장 기술자·설계국장·공장장·당위서기
  • 1960–1963CPSU 스베르들롭스크 오르조니키제 구당위 제1서기
  • 1963–1966CPSU 스베르들롭스크 시당위 제1서기
  • 1966–1971CPSU 스베르들롭스크 주당위 제2서기
  • 1971–1976CPSU 스베르들롭스크 주당위 제1서기
  • 1971–1990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76–1979CPSU 중앙위원회 서기 (국방·군수산업 담당)
  • 1979–1983소련 국가계획위원회(Gosplan) 제1부의장
  • 1983–1984소련 대외경제관계위원회(GKES) 의장
  • 1984–1986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화학공업 담당)
  • 1986–1990주프랑스 소련 특명전권대사

예브게니 미하일로비치 탸젤니코프

Евгений Михайлович Тяжельников

브레즈네프 시대 청년 간부 파이프라인의 전형

안드로포프가 서기장이 되자 탸젤니코프는 브레즈네프에게 통했던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젊은 안드로포프가 카렐리야에서 썼다는 시를 찾아 나선 것이다. 안드로포프는 그런 찬양이 필요 없었다. 탸젤니코프는 루마니아 대사로 떠났다.

브레즈네프 시대에 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1968–1977), CPSU 중앙위원회 선전부장(1977–1982), 주루마니아 소련 대사(1982–1990)를 지낸 소비에트 당-국가 엘리트의 전형이다. 콤소몰 지도자로서 바이칼-아무르 간선철도(BAM) 건설을 비롯한 대규모 청년 동원 사업을 총괄했으며, 1971년부터 19년간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첼랴빈스크 교육대학 총장에서 지역 당 이념비서를 거쳐 전국 청년 조직의 수장으로 발탁된 그의 경로는 후기 소비에트 노멘클라투라의 표준 궤적을 보여준다. 브레즈네프에 대한 개인적 충성으로 승진했으나, 안드로포프 집권 후에는 같은 방식이 통하지 않아 루마니아 대사로 전출되었고 차우셰스쿠 정권 말기까지 부쿠레슈티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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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첼랴빈스크 교육대학 물리·수학부 우등 졸업, 마르크스-레닌주의 강좌 조교
  • 1950–1952첼랴빈스크 교육대학 콤소몰 위원회 비서
  • 1952–1954첼랴빈스크 주 콤소몰 위원회 선전선동부 부장
  • 1956–1961첼랴빈스크 교육대학 마르크스-레닌주의 강좌 선임교원, 당위원회 비서
  • 1961–1964첼랴빈스크 교육대학 총장
  • 1964–1968첼랴빈스크 주 CPSU 위원회 이념담당 비서
  • 1968–1977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77–1982CPSU 중앙위원회 선전부장
  • 1982–1990주루마니아 소련 특명전권대사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파블로프

Сергей Павлович Павлов

반反해빙 노선의 콤소몰 수장이자 모스크바 올림픽을 이끈 체육 장관

밤중에 브레즈네프가 직접 전화를 걸었다: "들어봐, 심판이 왜 '니스트루'를 편파 판정한 거야? 조치를 취해." 또 다른 고위 인사가 전화해 말했다: "프라하에 연결돼 있나? 당장 전화해서 하키 선수들에게 골대를 향해 슛을 날리라고 해."

셸레핀의 후원 아래 30세에 콤소몰 제1서기가 되어 9년간 청년동맹을 이끌었다.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에 맞서 ≪프라우다≫를 통해 솔제니친·에렌부르크를 공개 공격하고, 1930년대를 어두운 색으로만 그리는 풍조를 비판한 강경파였다. 1968년 브레즈네프가 셸레핀 계열을 숙청할 때 체육위원회 의장으로 밀려났으나, 오히려 15년간 소련 스포츠의 황금기를 진두지휘하며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1972년 슈퍼시리즈를 성사시켰다. 안드로포프 집권 후 몽골·버마 대사로 전출되어 사실상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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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59콤소몰 전임 간부로 활동, 모스크바 시당 콤소몰 제2서기·제1서기
  • 1959–1968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 셸레핀의 후계자로 청년동맹 지휘
  • 1961–1971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63≪프라우다≫ 기사로 ≪노비 미르≫·솔제니친·에렌부르크 공격
  • 1965≪프라우다≫ 기사에서 1930년대를 부정적 일변도로 보는 풍조 비판
  • 1968–1983소련 체육·스포츠 위원회 의장, 15년간 스포츠 행정 총괄
  • 1972소련-캐나다 아이스하키 슈퍼시리즈 성사 주도
  • 1977–1983소련 올림픽 위원회 초대 위원장
  • 1980모스크바 하계 올림픽 조직 총괄
  • 1983–1985주몽골 소련 대사
  • 1985–1989주버마 소련 대사, 이후 강제 은퇴

유리 니콜라예비치 흐리스토라드노프

Юрий Николаевич Христораднов

고리키 지역을 14년간 이끈 당 간부, 소련 말기 종교정책의 마지막 책임자

1990년 6월, 흐리스토라드노프는 러시아 정교회 지방공의회에서 소비에트 정부를 대표해 연단에 섰다. 그가 인사말을 전한 바로 그 공의회는 알렉시 2세를 새 총대주교로 선출했다.

유리 흐리스토라드노프는 브레즈네프 시대 고리키(니즈니노브고로드) 주 당위원회 제1서기로 14년간 재임하며 도시의 대규모 주택 건설과 지하철 착공을 주도한 소련의 지역 당 간부였다. 고리키 자동차 공장의 주물 공장에서 노동자로 출발하여 당 기구를 따라 승진했고, 1976년부터 1990년까지 CPSU 중앙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는 최고소비에트 연방회의 의장(1988~1989)을 거쳐 소련 각료회의 산하 종무위원회의 마지막 의장(1989~1991)으로서 고르바초프 치하의 종교 자유화 국면에서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관장했다. 1990년 러시아 정교회 지방공의회에서 소비에트 정부를 대표하여 인사말을 전했으며, 이 공의회는 알렉시 2세 총대주교를 선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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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고리키 자동차 공장 주물 공장 작업반장
  • 1952주물 공장 부책임자 보좌
  • 1958주물 공장 부책임자
  • 1960자동차 공장 주물 단지 당위원회 서기
  • 1962고리키 시 아브토자보츠크 구 당위원회 서기
  • 1963고리키 시 아브토자보츠크 구 당위원회 제1서기
  • 1966고리키 시 당위원회 제2서기
  • 1968고리키 시 당위원회 제1서기
  • 1974고리키 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76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88소련 최고소비에트 연방회의 의장
  • 1989소련 각료회의 종무위원회 의장

니콜라이 니키토비치 슬륀코프

Николай Никитович Слюньков

트랙터 공장장 출신 정치국원, '당 중앙위의 디렉터'

1983년 1월 안드로포프가 급서한 키셀료프의 후임으로 그를 긴급 소환했을 때, 슬륀코프는 당 경험 부족을 들어 사양했다. 안드로포프의 답은 짧았다: '오늘날 가장 큰 정치는 경제요. 가서 그 정치를 하시오.'

민스크 트랙터 공장에서 노동자로 시작해 공장장·총감독을 거쳐 벨로루시 공산당 제1서기(1983~1987)와 고르바초프 치하 정치국원 겸 중앙위 서기(1987~1990)를 지낸 소비에트 경제 관료 출신 정치인. 벨로루시 당 책임자 시절 농업 생산량을 30% 끌어올리고 적자 농장을 완전 해소해 '당 중앙위 디렉터'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실무형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1987년 중앙위 경제부장으로 발탁되어 페레스트로이카 초기 계획경제에서 시장 지향 개혁으로의 이행을 주도했으나, 정부 수반 니콜라이 리시코프와의 마찰과 건강 악화로 1990년 정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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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1960민스크 트랙터 공장 보조기사·기사·상급기사·부책임자·책임자·노조위원장
  • 1960–1965민스크 트랙터 예비부품공장 책임자
  • 1965–1972민스크 트랙터 공장장·민스크 트랙터제조 생산연합 총감독
  • 1972–1974민스크 시당위 제1서기
  • 1974–1983소련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 1983–1987벨로루시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87–1990CPSU 중앙위 서기 겸 정치국원; 1987~1988 경제부장, 1988~1990 사회경제정책위원회 위원장

바딤 안드레예비치 메드베데프

Вадим Андреевич Медведев

이념을 해체한 마지막 이념비서: 검열의 특별보관고를 열고 당의 정통 교리를 폐기하다

1988년 가을, KGB를 통해 솔제니친 전 작품을 입수했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인정했지만 〈수용소 군도〉는 주관적 논쟁서라 판단했다. 그러면서도 특별보관고를 열어 솔제니친의 기출판 저작을 모두 일반 서가로 돌려보냈다.

야로슬라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레닌그라드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가치법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당 엘리트. 중앙위 선전부와 과학·교육부를 거쳐 1986년 중앙위 서기로 발탁, 1988년 정치국원 겸 이념위원회 의장이 되었다. 즈다노프의 1946년 문예지 탄압 결의를 폐기하고, 정기간행물 구독 제한을 철폐했으며, 솔제니친과 트로츠키의 저작을 포함한 특별보관고 도서를 일반 서가로 되돌렸다. 대학에서 당사와 과학적 공산주의 강좌를 20세기 사회정치사로 대체했고, 스탈린 시대 탄압 재심의 위원회에도 참여했다. 고르바초프의 측근이었으나 소련 붕괴와 함께 모든 공직을 떠나 고르바초프 재단 연구원으로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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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68레닌그라드 대학 경제학부 졸업, 교수, 경제학 박사
  • 1968–70레닌그라드 시당 서기
  • 1970–78중앙위 선전부 부장
  • 1978–83중앙위 사회과학아카데미 총장
  • 1983–86중앙위 과학·교육기관부장
  • 1986–90중앙위 서기, 이후 이념위원회 의장·정치국원
  • 1990–91소련 대통령자문회의 위원
  • 1992–2025고르바초프 재단·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연구원

리차르트 이바노비치 코솔라포프

Ричард Иванович Косолапов

브레즈네프 시대 '발전된 사회주의' 교리의 주요 설계자

1986년 1월, 고르바초프에게 "당신이 시작한 뻬레스트로이까는 필연적 실패를 맞을 것"이라고 경고하는 편지를 보냈다. 며칠 후 그는 《꼼무니스트》 편집장에서 해임되었다.

소련의 사회철학자이자 이론가로, 1976년부터 1986년까지 CPSU의 핵심 이론지 《꼼무니스트》의 편집장을 지냈다. 브레즈네프 시대의 공식 이념인 '발전된 사회주의' 개념을 체계화한 주역으로, 소련이 사회주의의 성숙한 단계에 도달했으며 공산주의로의 급속한 이행보다는 장기적 공고화가 필요하다는 논리를 정립했다. 그의 정통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은 아나톨리 부텐코, 알렉산드르 찌쁘꼬 등 개혁 성향 이론가들과 충돌했고, 고르바초프가 뻬레스트로이까를 개시하자 가장 먼저 숙청 대상이 되었다. 1986년 1월 고르바초프에게 개혁의 실패를 예측하는 편지를 보낸 직후 《꼼무니스트》 편집장에서 해임되었으며, 이후 모스크바 대학에서 연구와 강의를 이어가며 스탈린 전집의 속간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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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철학과 졸업
  • 1955–1958브랸스크주 콤소몰 위원회
  • 1958–1959아르마비르 사범대학 강사
  • 1961–1964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철학과 강사
  • 1966–1974CPSU 중앙위 선전선동부 컨설턴트 → 부장
  • 1974–1976《쁘라우다》 제1부편집장
  • 1976–1986《꼼무니스트》 편집장
  • 1976–1986CPSU 중앙위원회 정위원
  • 1979–1987소련 최고회의 대의원 (타지크 SSR)
  • 1986–2015모스크바 국립대학교 교수 · 주임연구원

빅토르 세르게예비치 마카렌코

Виктор Сергеевич Макаренко

크림의 당 관료이자 마산드라를 지킨 실무 정치가

반알코올 운동 때 셰르비츠키와 함께 마산드라의 와이너리와 에노테카를 지키는 데 개입했다.

빅토르 마카렌코는 공장 노동자에서 출발해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지역 당 지도자로 올라선 당 관료였다. 세바스토폴과 크림에서 산업·농업·관광을 조정하며, 중앙의 지시와 지역의 생산·문화 유산 사이의 긴장을 다뤘다. 1980년대 반알코올 운동 때 그는 블라디미르 셰르비츠키와 함께 마산드라 와이너리와 그 에노테카를 보존하는 쪽에 섰다. 그의 회고는 후기 소비에트 지역 통치가 중앙 정책을 그대로 집행하는 일만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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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7크리보이로크 지역 주택관리국 노동자
  • 1955드니프로페트롭스크 금속공업대학 졸업, 크리보이로크 제철소 근무
  • 1967–1969크리보이로크 시 당위원회 제2서기
  • 1969–1972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감찰관
  • 1972–1977세바스토폴 시 당위원회 제1서기
  • 1977–1987우크라이나 공산당 크림주위원회 제1서기
  • 1982–1989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 1987–2007연금 생활, 회고록 집필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

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Горбачёв

체제를 고치려다 체제를 끝낸 사람

1985년 3월 11일 서기장 선출을 앞둔 새벽, 정치국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고르바초프는 정원에서 라이사에게 말했다. "이렇게 더는 살 수 없어." 개혁은 그 한마디에서 시작되었다.

체제가 스스로 뽑은 개혁가.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로 체제를 구하려 했고, 1989년 동유럽에서 쏘지 않기로 결정했으며, 1991년 포로스 별장에 사흘간 연금되었다가 자신의 자리가 사라지는 문서에 서명했다. 서방의 갈채와 국내의 원망을 동시에 받으며, 자신이 끝낸 나라보다 31년을 더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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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0–78스타브로폴 지방 당 제1서기
  • 1978–85농업 담당 서기, 49세에 정치국원
  • 1985.3서기장 선출
  • 1986–88글라스노스트·페레스트로이카, 체르노빌 대응
  • 1987–89중거리핵조약, 아프간 철군, 동유럽 불개입
  • 1990초대 대통령, 노벨평화상
  • 1991.12.25사임 연설, 소련 국기 하강

1988년 6월 니카라과에서 소환되어 에스토니아 주권 선언을 이끈 공산당 제1서기

「우리 대의원들은 에스토니아가 소련 내에서 주권적이고 평등한 구성원으로 남기를 바라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1988년 11월 주권 선언 직후

에스토니아 히우마섬 출신으로 1950년대부터 콤소몰과 당 기구에서 경력을 쌓아 1970년대에는 에스토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까지 올랐다. 에스토니아 민족주의에 동정적이라는 이유로 1980년 모스크바에 의해 외교직으로 밀려나 베네수엘라와 니카라과 대사를 지냈다. 1988년 6월 16일 강경파 카를 바이노의 후임으로 소환되어 에스토니아공산당 제1서기가 되었고, 인민전선과 협력하며 그해 11월 에스토니아의 주권 선언을 이끌었다. 1991년 8월 에스토니아 독립 회복 선언에 찬성표를 던졌고, 독립 후에는 에스토니아 민주노동당 의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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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5콤소몰 각급 기관 근무; 타르투국립대학교 졸업(1955)
  • 1955–1961에스토니아 레닌주의청년공산주의자동맹(ELKNÜ)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61–1971에스토니아공산당 탈린시위원회 제1서기
  • 1963–1967에스토니아 SSR 제6기 최고회의 의장
  • 1971–1980에스토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80–1988소련 대사, 베네수엘라(1980–1986) 및 니카라과(1986–1988)
  • 1988–1990에스토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92–1995에스토니아 민주노동당 의장

블라디미르 안토노비치 이바시코프

Владимир Антонович Ивашко

해체 직전 공산당의 마지막 부서기장

1991년 8월 21일 아침, 쿠데타가 무너지는 것이 확실해지자 이바시코는 중앙위원회 청사에서 야나예프에게 전화해 "고르바초프를 만나러 갈 비행기를 달라"고 요구했다. 거절당한 그는 결국 자신이 지지하지 않은 쿠데타 주역들—야조프, 루키야노프 등—과 같은 비행기에 올라 포로스로 향해야 했다.

하르키우 광산대학 출신의 경제학자로, 우크라이나 당 기구에서 20년간 경력을 쌓은 뒤 1989년 셰르비츠키의 후임으로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가 되었다. 1990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신설된 부서기장직에 선출되어 모스크바로 옮겼다. 1991년 8월 쿠데타 직후 고르바초프가 총서기직을 사임하자 당 역사상 마지막 지도자가 되었으나, 불과 닷새 만에 당 활동이 정지되면서 소비에트 공산당은 그와 함께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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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90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
  • 1990–91공산당 부서기장
  • 1991.8고르바초프 사임 뒤 며칠간 서기장 대행

보리스 니콜라예비치 파스투호프

Борис Николаевич Пастухов

콤소몰의 마지막 거물이자 고스코미즈다트 수장

1967년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예고리체프브레즈네프의 국방 정책을 공개 비판한 다음 날, 파스투호프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예고리체프가 답했다. "보랴, 왜 그랬나? 네 인생을 망쳤어."

1977년부터 1982년까지 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를 지내며 4천만 대원의 청년 조직을 이끈 소비에트 당-국가 간부이다. 재임 중 바이칼-아무르 간선철도(BAM) 건설과 북극점 스키 횡단 등 대규모 청년 동원 사업을 총괄했고, 1978년 CPSU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 소련 국가출판·인쇄·서적거래위원회(고스코미즈다트) 의장으로서 검열 체계와 출판 산업을 관장했으며, 이후 덴마크(1986–1989)와 아프가니스탄(1989–1992) 주재 대사를 지냈다. 소련 해체 후에도 러시아 외무차관, CIS 담당 장관, 국가두마 의원을 역임하며 후기 소비에트 엘리트의 연속성을 대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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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바우만 고등기술학교 졸업 (기계공학), 바우만 구 콤소몰 제2비서
  • 1959–1961바우만 구 콤소몰 제1비서
  • 1961–1962모스크바 시 콤소몰 제2비서
  • 1962–1964모스크바 시 콤소몰 제1비서
  • 1964–1977콤소몰 중앙위원회 서기
  • 1977–1982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82–1986소련 국가출판·인쇄·서적거래위원회 의장
  • 1986–1989주덴마크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89–1992주아프가니스탄 소련/러시아 특명전권대사
  • 1992–1996러시아 연방 외무차관
  • 1996–1998러시아 연방 외무제1차관
  • 1998–1999러시아 연방 CIS 담당 장관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자소호프

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Дзасохов

국제주의와 지역 통치를 잇댄 정치가

1978년 2월 니코시아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 인민연대 회의 도중 '검은 9월' 대원들이 그를 인질로 잡았지만, 40분 만에 이집트·팔레스타인 대표를 뺀 모두가 풀려났다.

알렉산드르 자소호프는 청년조직과 아시아·아프리카 연대 운동에서 경력을 쌓은 소련의 당·외교 정치가였다. 시리아 대사를 거쳐 북오세티야 당 조직을 이끌었고, 소련 말기의 민족문제와 국제정치를 함께 다루는 위치에 올랐다. 제28차 당대회에서 정치국원과 중앙위원회 서기로 선출되었으며, 연방의 개혁과 해체가 교차한 마지막 소비에트 권력층의 한 인물이었다. 이후 러시아 국가두마 의원을 거쳐 북오세티야 공화국 대통령이 되어 지역의 연방관계와 민족 간 긴장을 관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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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오르조니키제 시 콤소몰위원회 제1서기
  • 1967–1986소련 아시아·아프리카 국가연대위원회 제1서기, 제1부위원장
  • 1986–1988소련의 시리아 대사
  • 1988–1990북오세티야주 공산당 지역위원회 제1서기
  • 1989–1991소련 인민대표, 최고회의 국제문제위원회 위원장
  • 1990–1991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서기
  • 1993–1998러시아 국가두마 의원
  • 1998–2005북오세티야 공화국 대통령

발레리 이바노비치 볼딘

Валерий Иванович Болдин

고르바초프의 문서를 관리하다 그를 배반한 당 기구 수호자

1991년 8월 18일, 볼딘은 10년간 보좌했던 고르바초프에게 최후통첩을 전하기 위해 바클라노프·바렌니코프·셰닌과 함께 포로스로 날아갔다.

티미랴제프 농업대학과 중앙위 사회과학원을 졸업한 경제학자 출신으로, 1961년부터 중앙위 기구에서 일했으며 1969년부터 《프라우다》에서 농업부장과 경제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1981년 고르바초프의 보좌관이 되었고, 1987년부터 중앙위 총무부장으로서 정치국과 서기국의 전체 문서 흐름을 통제하는 자리에 올랐으며, 1990년에는 대통령 비서실장까지 겸임했다. 그러나 1991년 8월 쿠데타에서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에 가담하여 바클라노프·바렌니코프·셰닌과 함께 포로스의 고르바초프를 찾아간 4인방 중 한 명이 되었고, 쿠데타 실패 후 체포·구금되었다가 1994년 사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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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1–65중앙위 기구 근무
  • 1969–81《프라우다》 농업부장·경제논설위원
  • 1981–87고르바초프 중앙위 서기·서기장 보좌관
  • 1987–91중앙위 총무부장
  • 1990–91소련 대통령 비서실장
  • 1991GKChP 가담·체포·구금
  • 1994–2006은행 고문

이반 쿠지미치 폴로스코프

Иван Кузьмич Полозков

러시아 공화당을 세운 보수파 당간부

고르바초프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나는 폴로스코프를 아주 오래전부터 안다. 정직하고 성실한 사내지만, 멍청하고 무식하다. 누군가 써주면 그대로 읊을 뿐이다."

러시아 SFSR 역사상 최초의 공화국 수준 공산당인 КП РСФСР의 창립 제1서기(1990–1991)로,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에 맞서는 당내 보수 반대파의 얼굴이었다. 1990년 5월 러시아 최고회의 의장 선거에서 보리스 옐친과 맞붙어 초기 집계에서 앞섰으나 정치국의 명령으로 후보에서 물러났고, 한 달 뒤 창립대회에서 러시아 공산당을 이끌게 되었다. 크라스노다르 당 조직을 5년간 이끈 지방 당료 출신으로, 정치국 위원까지 올랐으나 당내 개혁파와 강경파 양쪽의 압박 속에 1991년 8월 심장마비로 사임했다. 쿠데타 실패와 당 해산 후에도 КПРФ 자문기구에서 활동하며 러시아 공산당 운동의 상징적 원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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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1962콤소몰 · 쿠르스크주 솔른체보 구 당 간부
  • 1969–1972쿠르스크주 당 부서 부장
  • 1972릴스크 구 집행위원회 의장
  • 1973–1978, 1980–1983CPSU 중앙위 기구 근무
  • 1983–1984크라스노다르 지방당 이념 담당 서기
  • 1984–1985CPSU 중앙위 조직당사업부 과장
  • 1985–1990크라스노다르 지방당 제1서기
  • 1990–1991КП РСФСР 중앙위 제1서기 · CPSU 정치국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