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 조사에서 자신의 특별부서 근무를 이렇게 진술했다. "1934년 가을부터 부서는 체계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소규모 반혁명 분자 집단을 적발하고 제거해 왔다. 부서는 거의 항상 백 명의 체포자를 보유하고 있었다."
1922년 GPU에 입문해 군사방첩 특별부서에서 경력을 쌓았으며, 1937~1938년 '폴란드 작전' 당시 GUGB NKVD 제3(방첩)부서 부책임자로 소련 전역의 폴란드계 시민에 대한 대량 체포·고문·처형을 지휘했다. 1938년 3월부터 10월까지 소련 대외정보국(제5부서) 책임자로 전임되었으나, 예조프 숙청의 파고 속에서 체포되어 1940년 2월 총살되었다. 1957년과 2013년 두 차례 사법 심사에서 사건 조작과 불법 수사 방법을 이유로 재활이 거부된 몇 안 되는 NKVD 고위 간부 중 한 명이다.
나세트킨은 1944년 8월 베리야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전쟁 3년간 GULAG 수감자 97만 5천 명을 붉은군대에 넘겼으며 '다섯 명의 전직 수감자가 소련 영웅 칭호를 받았다'고 적었다.
소련 국가보안기관 간부로, 1941년부터 1947년까지 GULAG(교정노동수용소 본부) 책임자를 지냈다. 교사의 아들로 헤르손에서 태어나 15세에 붉은군대에 입대했고 1921년부터 체카-OGPU-NKVD 체계에서 수송·경제 부문 요직을 거쳤다. 독소전쟁 발발 직후 전선 인근 수용소 27곳과 식민지 210곳, 수감자 75만 명을 후방으로 소개시켰으며, GULAG 수감자들을 군수 생산에 총동원했다. 전시 내내 수감자들을 '완전 노동 활용' 원칙 아래 혹사시키면서도 1944년 베리야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GULAG의 전쟁 기여를 상세히 기록했다. 1945년 국가보안 중장이 되었으나 전후 쇠락하여 1948년 예비역으로 밀려나고 1950년 사망했다.
1950년 9월 29일 법정에서 자백을 거부하며: "나는 볼셰비키이며, 내가 받은 판결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로 남을 것이다. 역사가 우리를 정당화할 것이다."
보로비치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소비에트 당 간부로, 콤소몰 조직가에서 출발해 대숙청기에 레닌그라드 제2서기로 급부상했다. 이 시기 특별 삼인조의 일원으로 스탈린적 탄압에 가담한 책임이 있고, 레닌그라드 포위전에서는 도시 방어를 조직했다. 전후에는 중앙위 서기 겸 간부국장으로 즈다노프와 함께 스탈린 사후 승계 구도의 한 축을 이루었으나,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되었고 1954년 사후 복권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1924–1932노브고로드·레닌그라드 지역 콤소몰 조직가
1932–1937레닌그라드 시 당 기구에서 승진, 스몰니·제르진스키 구당 서기
1937–1938레닌그라드 주당 제2서기 — 대숙청기 즈다노프의 부관
1941–1944레닌그라드 포위전: 방어위원회 부의장, 방어시설·식량 위원회 주재, 전선군사평의회 위원
1945–1946레닌그라드 주·시당 제1서기, 즈다노프의 후임
1946–1949중앙위 서기·간부국장·조직국 위원 — 전후 서기국의 실질적 제2인자로 국가보안기관 감독
1949년 8월 13일, 라주틴은 동료 레닌그라드 지도부와 함께 게오르기 말렌코프의 집무실로 호출되어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오늘날 카자흐스탄 페트로파블롭스크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4세에 철도 정비공으로 노동을 시작했다. 콤소몰 간부를 거쳐 1937년 레닌그라드로 옮겼고, 포위전 당시 무역·공업 담당 시당 서기로 도시 보급을 책임졌다. 1946년부터 1949년까지 레닌그라드 시 집행위원장으로 재임하며 전후 도시 재건 계획, 텔레비전 방송 재개, 아브로라 순양함 기념화를 진두지휘했다. 1949년 8월 말렌코프 집무실에서 동료 지도부와 함께 체포되어, '레닌그라드 사건'의 주요 피고인 6인 중 하나로 사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10월 처형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1919–1925페트로파블롭스크에서 철도 정비공으로 노동
1925–1931콤소몰 서기·노동부장 등 카자흐 자치공화국 콤소몰·교육인민위원부 간부
1931–1937레닌그라드 냉동공업대학 수학; 프룬제 구당 위원회 지도원
1937–1941레닌그라드 시당 무역부장, 식품·무역부 부장
1941–1944레닌그라드 시당 무역·공업 담당 서기, 포위전 중 도시 보급 책임
1944–1946레닌그라드 시 집행위원회 제1부의장
1946–1949레닌그라드 시 집행위원회 위원장 (사실상 시장)
1949–1950레닌그라드 사건: 8월 13일 체포, 1950년 9월 30일 사형 선고, 10월 1일 처형; 1954년 복권
수감자들은 그를 '돌 손님(카멘니 고스티)'이라 불렀다. 낮고 냉담한 목소리, 굳은 표정으로 심문실에 들어서는 그 앞에서 누구도 끝까지 버티지 못했다.
베리야의 최측근 수사 책임자로, 스탈린 시대 말기 가장 민감한 정치 사건을 도맡았다. 1939년 NKVD 수사부장, 1943년 NKGB 특별중요사건 수사부장으로 적군 공군 지휘부 사건과 메이예르홀트 심문을 지휘했고, 가혹한 심문으로 악명 높았다. 1946년 실각해 6년간 대외재산총국 서류직으로 전락했으며, 1953년 베리야에 의해 MVD 특별수사부장으로 복귀해 의사들의 음모 사건 반전을 맡았다. 베리야 체포 직후 기소되어 그해 12월 총살됐고, 2000년 사후 복권도 거부됐다.
1939년, 어제까지 온 나라가 이름만으로 떨던 '피의 난쟁이' 예조프가 심문 조서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조서를 쓰는 손은 에사울로프의 것이었다.
베리야의 수사선에서 몰락한 예조프의 자백을 받아내며 두각을 드러낸 NKVD 수사관. 뱌트카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10세에 고아가 되어 일터로 나갔고, 로도스와 함께 베리야의 '특별 임무'를 수행했으며, MGB 특별협의회 서기국장까지 올랐으나 1954년 자연사하여 흐루쇼프 시기 심판대에 서지 않았다.
1930년대 말 가그라 NKVD 지구부장으로서 심문 중 구타를 일상화하며 공공연히 말했다: "때리지 않는 자야말로 인민의 적이다!"
그루지야 보안기관에서 성장한 루하제는 1937년 압하지야 가그라 NKVD 지구부장으로서 '간이 수사' 방식의 대규모 체포를 지휘했다. 전쟁기에는 자캅카스 전선 특별부장과 스메르시 방첩 책임자를 거쳐, 1948년 그루지야 국가보안장관에 올랐다. 이 자리에서 베리야 파벌을 겨냥한 조작 사건인 '밍그렐리아 사건'을 주도한 핵심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스탈린 사망 수개월 전인 1952년 11월 스스로 체포되었고, 1955년 역설적으로 베리야 집단 일원으로 재판받아 총살되었다.
트빌리시 처형장에서 사비츠키와 NKVD 간부들은 '사슬에 묶인 개처럼 죄수들에게 달려들어 권총 손잡이로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 1954년 목격자 증언.
타슈켄트 출신의 NKVD 장교로, 차르 군대 대령이자 백위대 조직가의 아들이었다. 1931년 그루지야 NKVD에 들어가 보그단 코불로프의 후원 아래 빠르게 승진했으며, 대숙청기에는 제4부에서 수감자 고문과 사건 조작에 직접 가담했다. 이후 코불로프의 개인 비서로 전속되어 NKGB 서기국, 대외재산관리국을 거치며 베리야 파벌의 핵심 실무자로 활동했다. 대령 계급에 그쳤으나 1953년 베리야 몰락 직후 체포되어 2년 뒤 총살형을 받았다.
핵무기 설계국 KB-11의 초대 소장이자 소련 원자폭탄의 행정적 기반을 닦은 군수산업 조직자
베리야가 원자폭탄 기한을 못 맞춘다고 압박하자, 제르노프는 "과학자들이 게으른 게 아니라 문제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라고 맞섰다.
모스크바 바우만 공과대학에서 내연기관을 전공한 공학자 출신 군수산업 조직가. 1946년 4월 KB-11(아르자마스-16)의 초대 소장으로 임명되어 폐쇄도시 건설과 설계국 운영의 행정적 기반을 닦았고, 수석설계자 율리 하리톤과 함께 1949년 첫 소련 원자폭탄 RDS-1을 성공시켰다. 전쟁 중에는 전차공업 부인민위원으로서 공장 대피와 생산 재개를 지휘했고, 이후 중형기계공업부 차관으로 핵무기 산업 전반을 관장하며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스탈린이 물었다: "어떤 바보가 우리에게 비밀을 팔겠는가?" 그 바보는 영국 노동당 정부였다. 미코얀은 1946년 제트 엔진을 사러 런던으로 날아갔고, 롤스로이스 닌의 역설계가 곧 MiG-15의 심장이 되었다.
아르메니아 산골 마을 출신 선반공에서 소련 최대 전투기 설계국의 창립자로 거듭난 인물. 1939년 미하일 구레비치와 OKB-155(MiG)를 창설, MiG-15로 한국전쟁의 제공권을 장악하고 MiG-21이라는 사상 최다 생산 초음속 전투기를 내놓았다. 정치국원 아나스타스 미코얀의 동생이지만,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과 여섯 차례 스탈린상, 레닌상을 받으며 스스로 기술관료의 정점에 올랐다. 그의 설계국 항공기들은 55개 세계 기록을 수립했다.
1941년 5월, 충칭 주재 파뉴시킨 휘하 정보거점이 독일 무관에게서 입수한 독일 최고사령부의 대소 침공 작전계획을 모스크바로 타전했다. 기록에 따르면 이는 개전 약 한 달 반 전에 전달된, 침공 주공 방향에 관한 정보였다.
1905년 사마라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20년 붉은군대에 자원입대했고, 1927년 당에 입당한 뒤 극동 국경부대에서 복무했다. 1938년 NKVD에 배치되어 제3특별부장을 지냈으며 1939년부터 1944년까지 충칭 주재 대사 겸 정보총책으로 최대 12개 정보거점을 지휘했고, 1941년 5월 독일 무관에게서 입수한 대소 침공 작전계획을 모스크바로 타전했다. 1947년부터 1952년까지 워싱턴 주재 대사 겸 정보총책을 지냈고, 1953년 내무부 대외정보국장, 1954년부터 1955년까지 KGB 제1총국장으로 소련 해외정보를 총괄했다. 1974년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20–1922붉은군대 자원입대, 말라리아로 제대 후 사마라 철도에서 수리공으로 일함
1927–1935극동 국경부대 복무, 초소장 보좌에서 국경구역 사령관까지 진급
1935–1938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후 NKVD 배치
1938–1939NKVD 제3특별부장 (1938년 12월 23일 임명, 예조프 체포에 참여)
1939–1944주중 소련 전권대표 겸 정보총책 (충칭)
1944–1947중앙위원회 국제정보부 제1부장
1947각료회의 정보위원회 주임비서
1947–1952주미 소련 대사 겸 정보총책 (워싱턴)
1952–1953주중 소련 대사 (베이징)
1953–1954내무부 제2총국(대외정보) 국장
1954–1955KGB 제1총국(해외정보) 국장 (1954년 3월 17일~1955년 6월 23일)
«우리에겐 다른 숫자가 없습니다. 스타롭스키 동무는 아주 신중한 사람입니다. 나는 그에게서 숫자를 받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연방 회계부서입니다. 나는 그를 신뢰합니다.» — 흐루쇼프, 중앙위원회 상임간부회, 1964년 8월 19일.
1940년부터 1975년까지 소련 중앙통계국(ЦСУ)을 이끌며 35년간 국가 통계를 총괄했다. 1939년 인구총조사를 시작으로 소련의 모든 공식 인구·경제 통계를 관장했으며, 고스플란이 국가계획을 세우는 기초 데이터를 생산하는 기관의 수장으로서 명령경제의 정보 기반을 구축했다. 경제학 박사이자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으로서 수리통계 방법론의 기초를 닦았고, 흐루쇼프가 공개적으로 신뢰를 선언한 유일한 통계 책임자였다. 그러나 1960년대에는 글루시코프의 국가전산망(OGAS) 구상을 저지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여 소련 정보기술의 경로에 논란의 여지가 큰 전환점을 남겼다.
상세 이력 보기
1919–1923우스티시솔스크 현 통계국 사무원·통계사
1924–1926최고경제회의(VSNKh) 통계사, 모스크바국립대 법학부 졸업
1926–1930소련 중앙통계국(ЦСУ) 통계사·연구원; RANION 경제연구소 대학원 수료
파블리토는 망설임 없이 포화 속으로 뛰어들어 선두 전차 장갑 위로 올라타 해치를 두드리며 방향을 바꾸라고 외쳤다. 그가 지휘소로 돌아왔을 때, 외투에는 총알과 파편 구멍이 열 개도 넘었지만 몸에는 생채기 하나 없었다.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구두 수선공 도제로 일하던 로딤체프는 1927년 붉은 군대에 입대하여 두각을 나타냈다. 1936년 자원하여 스페인 내전에 '파블리토 대위'라는 가명으로 참전, 공화파 편에서 마드리드 방어전과 하라마·과달라하라 전투에서 뛰어난 용맹을 보여 첫 번째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1942년 9월 13근위소총사단을 이끌고 맹렬한 포화 속에서 볼가 강을 도하, 스탈린그라드 중심부 마마예프 쿠르간을 탈환하여 전세의 전환점을 마련했으며, 이후 32근위소총군단장으로 쿠르스크·비스와-오데르·베를린·프라하 작전을 지휘하며 두 번째 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에는 여러 군관구에서 지휘관을 역임하고 회고록 여러 권을 남겼다.
회의에서 많은 부처가 반대했지만, 스탈린은 집무실을 서성인 뒤 '해야 한다'고 말했다. 카프타노프의 회고.
소련 고등교육과 과학행정을 관장한 국가관리로, 국방위원회(GKO) 과학 담당 전권위원으로서 이오페와 함께 1942년 스탈린에게 원자폭탄 연구 재개를 건의해 9월 28일 결의를 이끌어냈다. 전쟁 전에는 전연방 고등교육위원회 의장으로 소비에트 고등교육 체계를 총괄했고, 전후 초대 고등교육부 장관을 지냈다. 1950년대에는 문화부 제1차관과 방송·텔레비전 국가위원회 의장을 거쳐 모교인 멘델레예프 화학기술대학 총장으로 학계에 복귀했다.
레오니트 네메노프는 핵물리학과 입자가속기 기술을 연구한 소비에트 물리학자였다. 그는 쿠르차토프의 지시로 포위된 레닌그라드에 들어가 피지테흐 사이클로트론의 핵심 부품을 회수했고, 실험실 2에서 1944년 가동한 사이클로트론 건설을 이끌었다. 이 장치는 최초의 미량 플루토늄을 얻어 화학적 분석을 진행하는 데 필요한 기반이 되었다.
스탈린에게 직통으로 보고한 전시 GRU 수장, 전략정보로 소련의 승리를 뒷받침한 정찰총국장
한밤 3시, 스탈린의 직통 전화가 울렸다. 손자들이 책상 위 연필을 모두 가져가 버린 탓에, 그는 몇 분 동안 이어진 스탈린의 긴급 지시를 오로지 기억력에만 의존해 받아 적어야 했다.
소련 군사정보의 핵심 인물로, 1942년 8월부터 1945년 7월까지 참모본부 정보총국(GRU)을 이끌며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베를린 공세에 이르는 모든 주요 작전의 정보 지원을 총괄했다. 농민 출신으로 콤소몰과 군사정치학교를 거쳐 1938년 정보기관에 투입되었고, 당에서 제명되었다가 복권된 이력을 지닌 채 33세에 스탈린의 직접 면접을 받았다. GRU 수장으로서 베리야를 거치지 않고 스탈린에게 직통 보고했으며, 해독반의 에니그마 암호 해독 가능성 발견(1942)과 클라우스 푹스를 통한 원자폭탄 정보 입수 등 전략정보 성과를 거두었다. 전후 외교관으로 전환하여 주오스트리아·주덴마크 대사를 지냈다.
처칠이 구세프에 대해 묻자, 주소 영국대사 클라크 커는 이렇게 답했다: '무례하고, 경험 없고, 교양 없는 자입니다.'
표도르 구세프는 스탈린 시대 외교관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소련의 대영국 대사(1943~1946)를 지내며 테헤란·얄타·포츠담 회담에 모두 참가했다. 레닌그라드 법학을 전공하고 1935년 외무인민위원부에 입부한 그는, 캐나다 공사(1942~1943)를 거쳐 전시 동맹 외교의 핵심 실무자로 부상했다. 영국 측은 그를 '무뚝뚝하고 경험 없는 인물'로 평가했지만, 스탈린과 몰로토프는 전쟁 말기 연합국과의 협상에서 요구를 밀어붙일 강경한 외교관을 원했다. 종전 후 외무차관(1946~1952)을 지내며 냉전 초기 외교 정책에 관여했고, 1956~1962년 스웨덴 대사를 끝으로 은퇴했다.
1978년 '어류 마피아' 사건으로 부하 리토프가 총살형을 선고받았지만, 브레즈네프가 직접 개입했다. 이시코프는 그저 연금으로 보내졌다.
소련 수산업을 거의 40년간 이끈 정치인으로, 1940–1950년과 1954–1979년 수산장관을 지내며 소련 수산업 역사상 최장수 수장을 기록했다. 그의 지도 아래 소련은 북극에서 남극까지 전 해역을 누비는 원양 어선단을 구축했고 연간 어획량을 130만 톤에서 930만 톤으로 끌어올려 세계 최대 수산국이 되었다. 대형 냉동 트롤 어선(BMRT) 도입, 오케안(Okean) 전문 판매망, 수산업자의 날 제정도 그의 작품이다. 말년에 부하 블라디미르 리토프가 '어류 마피아' 스캔들로 처형됐지만 브레즈네프의 비호로 무사히 은퇴했다.
1942년 2월 새벽 4시, 스탈린이 전화를 걸었다. 'T-34는 깊은 눈밭을 제비처럼 난다. 니즈니 타길로 가서 당장 생산하라.' 33일 만에 개조된 공장에서 T-34가 쏟아져 나왔다.
유대인 재단사 아들로 오데사 공업대학 졸업 후 키로프 공장에 입사, 33세에 공장장이 되었다. KV 중전차 양산을 주도했고 봉쇄 초기 포격 속에서도 생산을 이어갔다. 1941년 공장을 첼랴빈스크로 대피시켜 '탱코그라드'를 건설했으며, 1942년 전차공업 인민위원으로 전국 전차 생산을 총괄했다. 1943년 키로프 공장장으로 복귀해 IS-2를 투입, 전쟁 기간 18,000대의 전차와 자주포를 생산했다. 1949년 비리와 '레닌그라드 사건' 연루로 당 제명되었으나 체포는 면했고, 평범한 공장 직을 전전하다 1986년 은퇴했다.
스탈린은 1943년 8월 2~5일 전선 후방 시찰의 준비와 안전을 세로프에게 전적으로 맡겼다. 세로프는 그와 사흘을 함께했고, 이는 전시 스탈린이 수도에서 가장 멀리 나간 행차였다. 스탈린은 정치국에도 알리지 않았고, 세로프는 이를 일기에 남겼다.
1905년 볼로그다 주 농가에서 태어났다. 표준 인사기록은 민족을 러시아인으로 적었고 출생일은 8월 25·26일, 사망일은 7월 1일로 전한다. 1939년 NKVD 중앙기구에 들어가 우크라이나 인민위원과 부인민위원을 지내며 서우크라이나 병합과 1944년 북캅카스 강제이주를 집행했다. 베를린 함락과 독일 항복 조인식에 참여했고, 1953년 베리야 체포에 가담한 뒤 초대 KGB 의장이 되어 스탈린 시대 정치범 재활성화에 착수했다. 1956년 헝가리 봉기를 현장에서 진압했고, 1963년 펜콥스키 사건으로 해임돼 계급과 영웅칭호를 잃었으며 1965년 제명됐다.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중 페고프는 인도 외무부를 찾아가 이렇게 선언했다. "소련 함대는 이미 인도양에 있으며, 소련은 제7함대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스탈린 집권 말년에 당 중앙위 서기 겸 상임위 후보위원까지 올랐다가 흐루쇼프 집권 후 외교 일선으로 옮겨간 소련의 당·국가 간부이다. 1952년 10월 스탈린 부재 시 말렌코프·수슬로프와 함께 서기국 회의를 번갈아 주재하는 핵심 3인에 들었으나, 스탈린 사망 직후 상임위와 서기직에서 동시에 밀려났다. 이후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서기로 국가기구 실무를 총괄하다 1956년 이란 대사를 시작으로 알제리·인도 대사를 거쳐 외무차관으로 외교 경력을 마무리했다.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당시 인도 외무부에 미 제7함대 개입을 막겠다고 공개 약속해 소련 해군의 억지력을 과시했다.
흐루쇼프가 '검투사 사건'에서 외친 말: "알렉산드로프는 젊으니 이해하겠다. 그런데 너는 그 나이에 거길 왜 갔느냐?" — 크루슈코프와 이념 관료들은 이 한 방에 모조리 직위에서 사라졌다.
소련의 철학자이자 당 이념 관료. 러시아 고전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으며, 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장(1944~1949)으로서 스탈린의 공식 단평전(1947)을 공동 집필하고 마르크스주의 정전 편찬을 총괄했다. 중앙위원회 문학예술부장(1950~1953)과 선전선동부장(1953~1955)을 역임하며 후기 스탈린 시기 문화 통제와 즈다노프슈치나 노선의 집행자로 활동했다. 1955년 이른바 '검투사 사건'으로 불리는 성 스캔들에 연루되어 모든 당직에서 해임되었고, 우랄 지방으로 좌천된 후 학계로 복귀하여 소련 예술사연구소장(1961~1973)을 지냈다.
흐루쇼프 시대의 레닌그라드 당 수장, 스탈린 시신 이장을 제안하고 당 기구의 충성 시험에 걸려 넘어진 인물
중앙위 간부회의에서 흐루쇼프가 사임 의사를 내비치자 침묵이 흘렀다. 스피리도노프가 일어나 "동지들, 니키타 세르게예비치의 바람을 지지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흐루쇼프의 얼굴이 굳었고 며칠 뒤 그는 모든 당직을 잃었다.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야간 공업학교를 마친 후 공장 노동자로 출발해 레닌그라드에서 기업 간부로 성장한 소련의 당·국가 지도자이다. 1957년 프롤 코즐로프의 후임으로 레닌그라드 지역당 제1서기에 올라 대규모 주택 건설(소위 '흐루쇼프카')과 과학·방위 산업 단지 확장을 주도했다. 1961년 제22차 당대회에서 레닌그라드 대표단장으로서 스탈린 시신의 레닌 묘역 이장을 공식 제안해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를 극적으로 추동했다. 곧 중앙위원회 서기로 발탁되었으나, 중앙위 간부회의에서 흐루쇼프의 위장 사임 제의를 진심으로 지지하는 실수를 범해 실각, 1962년부터 1970년까지 연방회의 의장이라는 의전적 직책으로 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