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14근위전차여단장이 전사하자 부하였던 쿠르콧킨이 지휘를 인수했다. 군단장 폴루보야로프는 이렇게 적었다: "쿠르콧킨이 여단을 맡아 복잡한 전투임무를 훌륭히 수행했으며, 적에게 큰 타격을 입혔고 자군은 단 한 대의 전차도 잃지 않았다."
농민 출신으로 정치장교에서 출발해 독소전에서 전차여단장으로 두각을 나타낸 탱크 지휘관이었다. 1972년부터 1988년까지 16년간 국방차관 겸 소련군 후방(Тыл) 책임자로 재임하며, 1970년대 말 후방 구조를 기동성 있고 효율적인 현대 물류체계로 전환하는 대대적 개혁을 주도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소련 파견군의 모든 물자 보급을 직접 지휘했고, 체르노빌 원전 사고와 스피타크 지진 등 재난 대응에서도 후방 조직을 총괄했다. 1983년 소비에트 연방 원수로 진급, 1981년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브레즈네프기부터 페레스트로이카까지 당 중앙위원으로 군 물류의 제도적 중추 역할을 했다.
참모총장 오가르코프는 아프가니스탄 파병 논의에서 우스티노프 국방장관과 정면으로 맞섰다. "폭탄과 포탄으로 아프가니스탄에 질서를 세울 수 없습니다. 이 문제는 오직 정치적 방법으로만 해결해야 합니다."
1977~84년 소련군 참모총장을 지낸 원수. 농민 출신으로 독소전에 공병장교로 참전했고, SALT 협상에서 군사전문가로 활약했다. 정밀유도무기·자동화지휘체계를 중심으로 '군사문제의 혁명' 이론을 정립해 소련 군사교리에 큰 영향을 남겼으며, 아프가니스탄 파병에 현실주의적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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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1941군입대, 군사공학아카데미 졸업 후 요새화 공사에 배치
1941–1945독소전 참전: 카렐리야·우크라이나 전선에서 공병장교로 복무, 부다페스트 공세에서 부상
1947–1968극동·벨로루시 군관구 참모, 사단장, 군관구 사령관으로 승진
1968–1974참모총장 제1차장, 전략무기제한협상(SALT)에 군사전문가로 참여
1974–1977국방차관 겸 국가기술위원회 의장, 군사기술 현대화 추진
1977–1984참모총장·국방제1차관, '군사혁명' 이론 정립, 대규모 작전훈련 '서방-81' 주관
소련 국경군 사상 최초로 대장 계급에 오른 수장이었던 마트로소프는, 아프가니스탄 전쟁 중 직접 국경 부대를 방문해 작전을 조율했다. 훗날 국경군 원로들은 그를 '국경군 역사상 가장 뛰어난 지휘관'으로 꼽았다.
스몰렌스크 지방 시골 교사 가정 출신으로, 1938년 NKVD 국경군에 입대해 이란 접경에서 복무하다 독소전쟁 발발 후 카렐리야 전선에서 핀란드군 후방으로 10차례의 장거리 정찰을 감행했다. 1972년부터 1989년까지 KGB 국경군 총사령관을 지내며 소련 국경수비대 역사상 최장기 지휘관으로 군 복무했고, 국경군 수장 최초로 대장 계급에 올랐다. 안드로포프·페도르추크·체브리코프 3대 KGB 의장 아래에서 아프가니스탄 북부 국경 작전을 직접 지휘했으며, 소련 전 국경의 군사화를 총괄한 국가보안 기관의 핵심 군사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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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1941NKVD 국경군 입대, 아제르바이잔 렌코란 분견대에서 이란 국경 경비
1941–1944모스크바 방어전 참전 후 카렐리야 전선에서 정찰 장교로 10차례 핀란드군 후방 정찰
1948–1963국경군 본부에서 참모 경력, 북부·자캅카스 국경관구 근무
1967–1972국경군 참모장 겸 제1부사령관
1972–1989KGB 국경군 총사령관 (1984년부터 KGB 부의장 겸직), 아프가니스탄 국경 작전 지휘
1966년 1월 14일, 코롤료프가 수술대에서 사망했다. 크렘린은 미신에게 전화를 걸었고, 해질녘에는 그가 소련 우주계획 전체를 짊어지고 있었다.
모스크바 근교 이탄촌에서 태어나 ЦАГИ 견습공으로 출발했다. 1945년 독일에서 V-2를 조사하며 코롤료프를 만난 후 오랜 제1부수석설계자로 일했고, 1966년 코롤료프 사후 OKB-1(ЦКБЭМ) 수석설계자가 되었다. 그의 지휘 아래 소유즈 우주선, 살류트 우주정거장, 달로켓 N-1이 개발되었다. N-1은 네 차례 발사 모두 실패했고, 1974년 동료들의 서한으로 해임되면서 소련 달탐사 계획도 함께 종결되었다. 이후 모스크바항공대학에서 30년간 교수로 후학을 길렀다.
1970년, 아무런 외교 경력도 없던 레닌그라드 당 수장이 갑자기 주중 대사로 발령받았다. 브레즈네프는 그의 독립적 성향과 전쟁 영웅으로서의 권위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레닌그라드 철도기술원을 졸업한 토목기사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 전후 레닌그라드 복구사업에 투신했다. 1962년 흐루쇼프에 의해 레닌그라드 주당위원회 제1서기로 발탁되어 1965년 경제개혁의 도시 적용을 주도하고 대규모 건설 사업을 추진했다. 1970년 느닷없이 주중 소련 대사로 전출되었는데, 이는 그의 독자적 권위를 견제하려는 브레즈네프의 의중이 작용한 결과로 평가된다. 외교 경험이 전무했음에도 베이징에서 중소관계 정상화를 위한 실무적 대화 통로를 유지했으며, 이후 주네덜란드 대사를 끝으로 은퇴했다.
1961년 4월 12일, 가가린은 인류 최초 우주비행을 앞두고 편안히 잠들었다. 침대 센서로 이를 확인하던 케리모프는, 로켓에 오를 남자보다 더 긴장된 밤을 보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카추샤 로켓을 검수하고 독일에서 V-2 로켓 정보를 수집하며 경력을 시작했다. 스푸트니크 1호와 보스토크 계획의 국가위원회 위원을 거쳐, 1966년부터 1991년까지 25년간 국가위원회 의장으로서 소련의 모든 유인우주선 발사를 승인했다. 살류트, 소유스-아폴로, 미르까지 소련 유인우주비행 전성기의 관문을 지킨 행정가였으나 페레스트로이카 이전까지 그의 존재는 철저히 비밀이었다.
1960년대 말, CEMI는 소련 경제의 성장 둔화를 예측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고스플란 의장은 폴리트뷰로 송부를 거부했고, '이데올로기적 이단' 혐의를 피하기 위해 연구소는 네스쿠치니 정원에서 보고서를 모닥불에 태웠다.
소련 계획경제에 수학적 최적화 방법론을 제도화한 경제학자. 1963년 넴치노프의 추천으로 중앙경제수학연구소(CEMI)의 초대 소장에 취임하여 22년간 이끌며, 칸토로비치의 선형계획법을 전국 계획 체계로 확장한 '경제의 최적 기능 체계(SOFE)'의 이론적 토대를 수립했다. 과학아카데미 경제학부 아카데믹-서기(1971–1986)로서 수리경제학을 소련 경제과학의 공식 의제로 격상시켰고, 고스플란의 자동화된 계획계산체계(ASPR)의 과학적 지도를 맡아 프로그램-목표·부문별·지역 계획을 통합하는 방법론을 추진했다. 2차대전에 화학부대 장교로 참전해 베를린에서 종전을 맞았고, 1970년 화학공업 경제학 연구로 국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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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1956모스크바 정밀화학기술대학(MITKhT) 화학공업 경제학 강사·부교수·교수·학과장
1956년 10월 타슈켄트 제1차 우즈베크 지식인대회에서 소련 최초로 스탈린 시기 대량 탄압의 실상과 피해자 이름을 공개석상에서 밝혔다.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이 아직 공개되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우즈베크 농민 가정 출신으로, 통신으로 협동조합대학을 졸업하고 붉은군대에서 정치·무선정찰 장교로 복무하며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전했다. 전후 우즈베키스탄 당에서 급속히 승진해 1955년 우즈베크 당 제1서기가 되었고, 1957년 중앙아시아 출신 최초로 CPSU 프레지디움 정위원 겸 중앙위 서기에 올랐다. 흐루쇼프 해빙기 동안 우즈베크 내 대규모 정치 재활, 강제이주 민족 귀환, 타슈켄트 핵물리연구소 설립을 주도하며 민족정책을 현장에서 실행했다. 1961년 흐루쇼프와의 정책적 이견으로 중앙직을 떠난 뒤 시리아 대사 등을 지내고 90세로 사망했다.
1961년 10월, 모스크바 시당 국 회의에서 데미체프는 단호히 말했다. '스탈린의 시신을 마우솔레움에 두는 것은 신성모독입니다.' 며칠 뒤 10월 31일 밤, 시신은 비밀리에 옮겨져 크렘린 벽 아래 묻혔다.
흐루쇼프의 보좌관에서 출발해 24년간 정치국 후보위원을 지낸 핵심 이념 관료였다. 1961년 스탈린 시신의 마우솔레움 철거를 직접 발의한 탈스탈린화의 주역이었으나, 브레즈네프기 문화장관으로서는 보수적 통제를 행사했다. 셸레핀 계열로 분류되면서도 글라주노프·솔로우힌 같은 향토주의 문인들을 후원하는 복합적 면모를 지녔으며, 소련 말기까지 문화·이념 영역의 핵심 관리자로 남았다.
1978년 3월, 지지가 탈환 작전: 페트로프는 정면 공격으로 속이고 주력은 헬기강습으로 북쪽에서 진입하는 계획을 세웠다. 3월 4일 지지가가 해방되었고, 2주 안에 소말리아군은 에티오피아 영토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2차대전을 최전선에서 싸운 소련 원수. 오데사·세바스토폴·캅카스 방어전에서 시작해 우크라이나 해방, 루마니아·헝가리 전역까지 종군했으며 소위에서 소령까지 진급했다. 전후 프룬제 아카데미를 거쳐 극동에서 참모·지휘관으로 성장, 1972년 극동군관구 사령관에 올랐다. 1977–78년 오가덴 전쟁 당시 에티오피아 주재 소련 작전그룹을 지휘하며 지지가 탈환 작전을 입안해 전황을 결정지었다. 1980년 소련 지상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 1985년 국방제1차관을 지냈으며 1983년 소련원수로 진급했다. 브레즈네프 후기 소련 지상군의 중추를 이끈 전략가로, 냉전 말기 지상전력 현대화를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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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붉은 군대 입대
1941–1945소위에서 소령까지 진급, 오데사·세바스토폴·캅카스 방어전 및 우크라이나·루마니아·헝가리 전역 참전
1978년 4월 농업 전원회의 준비 위원회를 구성하면서, 농업 담당 정치국원 겸 서기인 쿨라코프를 위원회에조차 넣지 않았다. 석 달 뒤 그는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농민 출신으로 농업 전문가 경로를 밟아 올라온 당 간부로, 1965년부터 중앙위 농업 담당 서기를 맡으며 브레즈네프·수슬로프·키릴렌코와 함께 서기국과 정치국을 겸한 4인 중 하나였다. 스타브로폴 제1서기 시절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발탁해 후원했으며, 1971년 정치국 위원에 오른 후 서방 분석가들은 그를 유력한 후계자로 꼽았다. 그러나 1978년 농업 정책을 둘러싼 당내 비판 속에 급서하면서 그의 서기국 자리는 고르바초프에게 넘어갔고, 이는 소련 지도부 세대교체의 분수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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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1941탐보프 주 사탕무 국영농장 조수, 펜자 주 사탕공장 농업기사
1941–1944펜자 주 지구 콤소몰 제1서기, 지구 집행위원회 의장, 현급 당위 제1서기
스스로 알고 할 줄 아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의 좋은 점을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러면 자신도 많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수학·물리 교사 출신으로, 위대한 조국전쟁에서 벨라루스 파르티잔 운동을 조직하여 1944년 소비에트 연방 영웅이 되었다. 1965년부터 벨라루스 공산당 제1서기로 15년간 재임하며 민스크 메트로, 대규모 화학공장, 브레스트 요새·하틴 기념관을 추진하여 전후 농업 공화국을 소련의 첨단 산업 거점으로 탈바꿈시켰다. 정치국 후보위원(1966–1980)이자 코시긴 개혁을 지지한 실용적 개혁파였으며, 1980년 교통사고로 사망할 당시 코시긴의 후임 각료회의 의장으로 유력시되었다.
헬기에서 쿠바 중서부를 내려다본 스타첸코 소장은 깨달았다: 이 정도 야자수로는 90마일 북쪽 초강대국의 눈을 피할 수 없다.
소련 전략로켓군 소장.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제51로켓사단을 지휘, 36기 R-12 핵미사일을 쿠바에 배치하고 10월 20일 전투 태세를 완료했다. 사후 보고서에서 정찰 부족과 현지 조건 무시 같은 참모본부의 '아나디리' 계획 결함을 솔직히 기술했다. 이후 페름 고등군사공병학교장과 우주추적센터장을 지냈다.
«도대체 어떤 바보가 페레스트로이카라는 말을 만들어냈나? 집이 무너지지도 않는데 왜 다시 지어야 하나? 우리는 잘 살고 있다!» — 고르바초프의 개혁에 대한 셰르비츠키의 반응.
드네프로제르진스크·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공업 지구에서 당 간부로 성장하여, 1972년부터 1989년까지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와 18년간 CPSU 정치국원(1971–1989)을 겸했다. 브레즈네프와 드네프르 인맥을 공유하며 17년간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진두지휘했고, 공화국 경제 규모를 4배 이상 키웠다. 흐루쇼프의 분권 실험에 반대하여 일시 좌천되었으나 브레즈네프 집권 후 복귀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정보 통제와 키예프 메이데이 행진 강행으로 비판받았으며, 1989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교체된 마지막 구세대 공화국 수반이었다.
KGB 도청 부서가 감청 중인 스위스 주재원의 전화에 누군가 망을 봐주었다. 추적 결과, 발신자는 다름 아닌 제1총국장 모르틴 자신이었다. 그는 그해 휴가를 떠난 뒤 다시는 루뱐카로 돌아오지 못했다.
사하롭스키의 13년 오른팔로 냉전기 KGB 제1총국의 대외첩보 실무를 지휘하다 1971년 총국장이 된 소련의 첩보 장군이다. 재임 중 PGU 본부를 야세네보로 옮기고 과학기술 첩보를 확충하며, 브란트 정부와의 비밀 채널이 가동되던 데탕트 초기의 해외 정보활동을 총괄했으나 부하 간부를 감청에서 지키려 한 전화 한 통으로 불과 2년 반 만에 크류치코프에게 자리를 넘겼다.
1941년 12월 4일, 독일 전차 부대가 서부전선군 사령부를 포위하기 직전 — 대위 이바놉스키가 지휘하는 27전차대대가 돌파구를 막아 사령부를 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소령으로 시작해 26세에 대령으로 종전한 전차 장교로, 모스크바 방어전부터 동프로이센까지 종군했다. 1972년부터 1980년까지 소련군 독일주둔군(GSFG) 총사령관을 역임하며(역대 최장인 8년간) 바르샤바 조약기구 최정예 전력을 지휘해 냉전기 NATO와의 군사적 대치 최전선을 책임졌다. 이후 벨로루시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1985년 소련 지상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에 올라 말년의 재래식 전력 증강을 주도했으며, 같은 해 대조국전쟁과 전후 군사력 건설의 공로로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소련 체제에서 나와 가장 비슷한 사람이다” — 도브리닌 대사가 키신저에게 알렉산드로프-아겐토프를 설명하며, 1972년.
스웨덴 문헌학도 출신으로 타스 통신원과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주재 스웨덴 소련 공사관 보좌관을 거쳐 외교 경력을 시작했다. 1961년 브레즈네프의 국제문제 보좌관이 된 이래 안드로포프, 체르넨코, 고르바초프까지 네 명의 서기장을 연속으로 보좌하며 데탕트 시대 소련 외교정책의 핵심 실무자로 활약했다. 브레즈네프의 외교 연설문을 직접 집필하고 미소 정상회담과 헬싱키 협정(1975년) 체결에 배석했으며, 자신의 외교 경력 중 최대 성과로 전후 유럽 국경 승인을 꼽았다. 1986년 은퇴 후 회고록 《콜론타이에서 고르바초프까지》를 남겼다.
사망 몇 시간 전, 아내에게 "녀석들에게 전화해야겠어. 내가 문제를 풀었는데, 그들이 내게 맡긴 문제 말이야"라고 말했다.
소련의 전파물리학자이자 미사일 방어 체계의 개척자. S-25 베르쿠트와 S-75 대공 미사일 체계 개발에 참여한 후, 1956년부터 세계 최초의 실전형 탄도미사일 방어 체계인 시스템 A의 수석설계자를 맡아 1961년 3월 4일 사상 최초로 비행 중인 탄도미사일을 요격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모스크바 방어를 위한 A-35 및 A-35M 체계의 총설계자로서 소련의 전략적 방어 우위를 확립했으며, 레닌상과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1975년 무선공업부 지도부와의 갈등 속에 자신이 설계한 체계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해임되었고, 말년에는 은퇴 후 회고록 『비밀 구역』을 집필하며 역사 속에 묻힌 자신의 작업을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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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337독립무선대대, 모스크바 방공군 — 소대장 보좌관·소대장·중대 기술장교
1944–1950부됸니 통신사관학교 — 레이더 이론 교관·부학과장
1950KB-1 — 초고주파 부문장, S-25 베르쿠트 체계 유도 레이더 시험 부기술책임자
1989년 11월 9일 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코체마소프는 고르바초프와 셰바르드나제에게 전화 지시를 구했으나 둘 다 연결되지 않았다. 그는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소련의 정치인·외교관으로, 1962년부터 21년간 러시아공화국 각료회의 부의장을 지내며 문화·사회 정책을 총괄했고, 전러시아 역사문화기념물보호협회 중앙위원회 의장(1966~1983)으로서 문화유산 보존 운동을 이끌었다. 1983년 동독 주재 소련 대사로 임명되어 1990년까지 냉전 최전선인 동베를린에서 근무했으며,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 모스크바의 지시를 받지 못한 채 현장을 지켰다. 1990년 4월 동독의 로타어 드 메지에르 총리에게 독일 통일에 관한 소련의 11개 조건을 담은 비공식 문건을 전달하며 통일 과정에서 소련의 이해관계를 대변했다.
소련의 모든 가격을 11년간 관리한 그가 사후에 남긴 자서전의 제목은 『마법 같은 숫자, 혹은 부름받지 못한 러시아』였다.
소련 국가가격위원회 의장(1975~1986)으로서, 11년간 계획경제의 도매·소매 가격 체계 전체를 총괄한 인물이다. 뱟카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4세에 촌락 회계사로 일을 시작했고, 노릴스크 광산·제련 콤비나트에서 재무 책임자로 성장한 뒤 크라스노야르스크 국민경제회의와 비철금속부에서 경력을 쌓았다. 그가 가격위원회를 이끌던 시기는 공식 가격이 수십 년째 동결되는 한편 억압된 인플레이션과 만성적 부족이 누적되던 '정체의 시대'였으며, 이 모순을 관리하는 일 자체가 정치적으로 민감한 과제였다. 퇴임 후 사후 출간된 자전적 저서에 '마법 같은 숫자, 혹은 부름받지 못한 러시아'라는 제목을 붙였다.
1950년대 크렘린 회의에서 베리야가 수개월 안에 군용 로켓 생산을 시작하라고 지시했다. 젊은 기술자였던 아파나시예프는 비현실적이라며 시간을 더 요구했고, 회의 뒤 한 참석자만이 그를 두둔했다. 체포령이 첫 반응이었다는 세부는 영문 자료에만 있다.
1918년 8월 30일 모스크바주 클린에서 태어나 1941년 바우만 고등기술학교를 졸업한 소련 국가 활동가다. 전쟁 중에는 몰로토프(페름)의 제172포병공장에서 성형작약탄 생산에 참여했고, 국방산업부 기술총국의 선임기사·과장·부국장을 거쳐 국장을 지냈다. 1957~1965년 레닌그라드와 러시아연방 경제회의를 이끌었고 러시아연방 각료회의 부의장을 겸했다. 1965년 3월 2일부터 1983년 4월 8일까지 일반기계공업부 장관, 1983~1987년 중공업·수송기계공업부 장관을 지냈다. 사회주의노동영웅(2회), 레닌상·스탈린상·소련국가상 수상자이며 1961~1989년 당 중앙위원, 1962~1989년 최고소비에트 대의원이었다. 2001년 5월 13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1943년 말 키이우 서쪽에서, 야코블레프는 자신의 대전차포 대대와 두 개의 대전차소총 소대로 50대의 적 전차를 포위사격으로 맞아 17대를 격파하고 공세를 저지했다.
소련 내무부(MVD) 내부군 총사령관을 1968년부터 1986년까지 18년간 역임한 육군대장이다. 스타브로폴의 코사크 가정에서 태어나 1939년 붉은 군대에 입대, 위대한 조국전쟁에서 중위에서 소령까지 진급하며 여섯 개의 전투훈장을 받고 세 차례 부상당했다. 내부군 사령관으로서 영토 기반의 준군사 조직을 항공·해상 부대까지 갖춘 기동타격 부대로 재편하고 특수차량화경찰부대와 지역 사령부 체계를 도입했으며,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1만 5천 명의 병력을 동원해 오염 구역 경계 작전을 직접 지휘했다. 1986년 12월 우파 공항에서 내부군 호송연대 병사들이 여객기를 납치해 여러 명을 살해한 사건의 책임을 지고 해임되었으나, 말년까지 내부군 고문과 참전용사협의회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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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1940케메로보 박격포·포병학교 졸업, 소련-핀란드 전쟁 참전 (부상)
1941–1945대조국전쟁: 소대장→대대장, 중위→소령, 6개 전투훈장, 3차례 부상
1949–1958스탈린 기갑군사학교·참모대학 졸업, 독일 주둔군 전차연대장, 루마니아 주둔 사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