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활동과 국가·세력

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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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국가기관 인물 1086명

갈리나 블라디미로브나 세묘노바

Галина Владимировна Семёнова

페레스트로이카기의 여성·가족 정책 설계자, 정치국 네 번째 여성

“나는 그저 한계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단 1분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 정치국 입성 후 ‘여성 담당’이라는 낙인에 맞서

갈리나 세묘노바는 소련 역사상 정치국 정위원에 오른 네 명의 여성 중 한 명으로, 고르바초프 시기 말기 가족·여성·인구정책을 총괄한 당 중앙위 서기였다. 1981년부터 10년간 잡지 《크레스티얀카》(농촌 여성)의 편집장으로 재임하며 발행부수를 600만 부에서 2,200만 부로 끌어올렸고, 패션·가족·문화 기사로 편집 방향을 전환해 수백만 소비에트 여성의 일상 담론에 접속했다. 1990년 제28차 당 대회에서 정치국원 겸 서기국원으로 발탁되었으며, 여성위원회 신설과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한 중앙위 결정을 주도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에는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몇 안 되는 당 지도부 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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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오데사 지역신문 《콤소몰스코예 플레먀》 문예부원
  • 1963우크라이나 콤소몰 중앙위 기관지 《콤소몰스카야 이스크라》 부장
  • 1965–1974콤소몰 중앙위 기관지 《콤소몰스카야 지즌》 문예부원 → 부장 → 책임비서
  • 1974–1981《콤소몰스카야 지즌》 편집장
  • 1978–1981CPSU 중앙위 부설 사회과학 아카데미(AON) 대학원생
  • 1981–1990《크레스티얀카》(농촌 여성) 편집장
  • 1990–1991CPSU 중앙위 서기 · 정치국 위원
  • 1991소련 대통령 비서실 고문

빅토르 블라디미로비치 게라셴코

Виктор Владимирович Геращенко

소련 말기와 러시아 초기의 중앙은행가

1994년 10월 11일 '검은 화요일', 루블화가 하루 만에 27% 폭락했다. 사흘 뒤 게라셴코의 중앙은행은 환율을 거의 원상 복구시키며 통화 투기세력을 응징했다. 동료 은행가는 "중앙은행도 이를 드러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것"이라고 평했다.

소련 고스방크 총재와 러시아 중앙은행 총재를 각각 두 차례씩 지내며 네 번에 걸쳐 국가 주요 은행을 이끈 러시아 역사상 유일한 인물이다. 1989년 고스방크 총재로 취임해 소련 해체기의 통화 체계를 관리했고, 1992년 러시아 중앙은행 초대 총재로서 1993년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1998년 금융위기 때 다시 중앙은행 수장으로 복귀해 IMF 협상과 루블 안정화를 추진했으며, 푸틴 집권 초기까지 중앙은행을 이끌었다. 은퇴 후에는 블록 '로디나' 소속으로 국가두마 의원과 대통령 후보로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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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s–1970s소련 대외은행과 국제금융 부문에서 성장
  • 1980s브네슈토르그방크 등 대외금융기관을 거쳐 국가은행 지도부로 진입
  • 1988–1991국가은행 총재, 말기 소련 통화체계와 공화국 금융분열을 관리
  • 1991 이후러시아 중앙은행에서 전환기 금융위기를 다룸
  • 1998 이후러시아 금융위기 뒤 다시 중앙은행 수장으로 복귀

니콜라이 미하일로비치 골루시코

Николай Михайлович Голушко

소련·우크라이나·러시아 3개국 보안기관을 두루 거친 KGB 우크라이나 공화국 KGB의 마지막 의장

그는 회고록 제목처럼 소련·우크라이나·러시아 3개국 보안기관에서 근무했다. 1994년 10월 사태 관련자 사면을 막으라는 옐친의 요구를 거부하고 “러시아 장교로서 국민에게 한 맹세를 지켰다”며 사임했다.

소련 국가보안기관에서 경력을 쌓아 우크라이나 공화국 KGB의 마지막 의장(1987–1991)을 지낸 인물이다. KGB 제5총국(이념적 방첩 및 반체제 탄압)에서 오래 근무하며 민족주의 감시와 반소 활동 단속을 전담하다가, 페레스트로이카기 우크라이나 공화국 보안기관 수장으로 발탁되었다. 소련 해체 후에는 잠시 독립 우크라이나의 국가안보국(SBU)을 이끌었고, 이후 러시아로 옮겨 보안장관과 연방방첩국(FSK) 국장을 역임하며 3개국 보안기관에서 근무한 특이한 이력을 남겼다. 러시아 보안장관 시절 1993년 10월 사태 수감자 사면 문제로 옐친 대통령과 갈등하다 사임하였으며, 회고록 『3개국의 특별기관에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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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1963케메로보 검찰청 수사관
  • 1963–1974케메로보주 KGB, 작전요원 → 제5과 부과장
  • 1974–1983KGB 제5총국 제2과(민족주의 담당) 과장
  • 1983–1984KGB 제5총국 부총국장
  • 1984–1987KGB 사무국 제1부국장 겸 당직근무국장
  • 1987–1991우크라이나 공화국 KGB 의장, KGB Collegium 위원
  • 1991우크라이나 국가안보국(SNBU) 의장 대행
  • 1992–1993러시아 보안부 제1차관
  • 1993러시아 보안장관
  • 1993–1994러시아 연방방첩국(FSK) 국장

예고르 세묘노비치 스트로예프

Егор Семёнович Строев

고르바초프 시기 마지막 농업 정치국원, 페레스트로이카 농정의 실무 책임자

1991년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가 발족되자 스트로예프는 이를 승인하기를 거부했다 — 페레스트로이카기 정치국원 중 쿠데타에 동조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1937년 오룔 지역 집단농장의 목동으로 일을 시작해 미추린스크 원예대학을 졸업한 농업 테크노크라트다. 30년간 오룔 주 당조직에서 성장하여 1985년 주당 제1서기가 되었고, 1989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중앙위원회 농업 담당 비서로 발탁되어 1990년 정치국 위원에 올랐다. 농공복합체 개편과 식량 위기 대응 등 페레스트로이카기 농업 정책의 최고 실무 책임자로 활동했으며,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국가비상사태위원회 승인을 거부했다. 소련 해체 후 오룔 주지사(1993~2009)와 연방평의회 의장(1996~2001)을 지내며 탈소비에트 러시아 지역 엘리트로 재편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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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1984오룔 주당위원회 농업 담당 비서
  • 1984–1985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지도원
  • 1985–1989오룔 주당위원회 제1서기
  • 1986–1991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 1989–1991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비서 (농업)
  • 1990–1991소련 공산당 정치국 위원
  • 1993–2009오룔 주지사
  • 1996–2001러시아 연방평의회 의장

이리나 바야노브나 솔로비요바

Ирина Баяновна Соловьёва

테레슈코바의 예비 우주비행사, 카마닌이 신체적 최고라 했지만 대중역할엔 내성적이었던 낙하산 국가대표

「우리는 해볼 가치가 있다고 결정했다」: 비밀경찰로부터 우주비행사단 입단 제의를 받고, 약혼자와 함께 단골 카페에서 문 닫을 때까지 고민한 끝에.

우랄 공과대학을 졸업한 기계공학자이자 국가대표 낙하산 선수로, 1962년 소련 최초 여성 우주비행사단 5인에 선발되었다. 1963년 보스토크 6호 비행에서 발렌티나 테레슈코바의 주예비 비행사로 훈련받았으며, 니콜라이 카마닌은 그녀를 신체적으로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했으나 대외 선전에 필요한 외향성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이후 포노마료바와 함께 보스호트 계획 최초 여성 우주유영 임무를 준비했으나 계획 취소로 무산되었고, 1969년 여성 비행사단 해체 후 우주비행사훈련센터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며 심리학 후보학위를 취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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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59우랄 공과대학 건설학부 졸업, 기계공학 전공
  • 1955–62국가대표 낙하산 선수, 스포츠 마스터(1959), 약 700회 강하
  • 1959–62우랄에네르고몬타주 설계국 엔지니어
  • 1962.3여성 우주비행사단 선발, 우주비행사 훈련 이수
  • 1963.5보스토크 6호 테레슈코바의 주예비 비행사
  • 1964–67주콥스키 공군공학아카데미 졸업, 조종사-우주비행사-기사 자격
  • 1966포노마료바와 보스호트 여성 우주유영 임무 훈련 (취소)
  • 1969–91우주비행사훈련센터 연구원·선임연구원, 심리학 후보학위(1980), 대령 퇴역

빅토르 스테파노비치 체르노미르딘

Виктор Степанович Черномырдин

가스공업부를 가스프롬으로 바꾼 소련 마지막 가스공업 장관

오르스크 시당이 그를 공장에서 당 기관으로 데려가려 하자, 그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생산직 인간이라고 느꼈고 고향 공장에 남고 싶었다. 그러나 삶은 다르게 정했다." 평생 자신을 당료가 아닌 '생산자'로 여겼다.

오렌부르크 코사크 가정 출신으로 오르스크 정유공장 기계공에서 시작해 오렌부르크 가스처리공장장을 거쳐 1985년 소련 가스공업 장관에 올랐다. 장관 재임 중 CPSU 중앙위원(1986~1990)과 연방·공화국 최고회의 대의원을 지내며 소련 후기 에너지 행정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1989년 자신의 부처를 폐지하고 세계 최대 국영 가스 독점기업이 될 '가스프롬'을 창설해 초대 회장을 맡았다. 이는 계획경제 부처를 국가 독점 주식회사로 바꾼 선구적 전환이었으며 이후 러시아 경제의 근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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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1973오르스크 정유공장 기계공·운전기사, 오렌부르크 가스처리공장 부주임기사·공장장
  • 1973–1982오르스크 시당·CPSU 중앙위 중공업부에서 산업 행정
  • 1982–1985소련 가스공업 차관, 튜멘가스프롬 청장
  • 1985–1989소련 가스공업 장관
  • 1989–1992국영 가스 콘체른 가스프롬 창설·초대 이사회 의장
  • 1984–1990소련 최고회의·RSFSR 최고회의 대의원, CPSU 중앙위원

푸아트 엔베르 오글루 무사예프

Fuad Ənvər oğlu Musayev

바쿠 시당위원회 제1서기, 바쿠로 가는 버스를 막아 폭력을 숨가이트로 돌린 인물

“나는 이것이 포그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정착지들에서 도시로 통하는 모든 도로를 봉쇄하라고 명령했다. 명령은 실행됐다. 버스들은 숨가이트로 향했다.”

소련 및 아제르바이잔의 당·국가 관료로, 건설 분야에서 경력을 쌓아 1983년 바쿠 시당위원회 제1서기가 되었다. 1988년 2월 아르메니아에서 쫓겨난 아제르바이잔인 난민들이 버스로 바쿠에 몰려들자 시내 진입로를 봉쇄했고, 이 조치는 바쿠의 폭력적 충돌을 막았으나 버스 행렬이 숨가이트로 방향을 돌리게 만들었다. 소련 해체 후에는 독립 아제르바이잔의 첫 축구협회 회장(1992~2003)을 지내며 아제르바이잔 축구의 UEFA·FIFA 가입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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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5–1977아제르바이잔 SSR 농촌건설부 제1차관
  • 1977–1981아제르바이잔 SSR 국가계획위원회 제1부위원장
  • 1981아제르바이잔 SSR 각료회의 부의장
  • 1981–1983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건설 담당 서기
  • 1983–1988바쿠 시당위원회 제1서기
  • 1989–1990소련 산업안전·광산감독 국가위원회 의장
  • 1990–1991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산업 담당 서기
  • 1992–2003아제르바이잔 축구협회 연합(AFFA) 회장

아야즈 니야지 오글루 무탈리보프

Ајаз Нијази оғлу Мүтәллибов

연방 재편과 독립 사이에 선 마지막 소비에트 지도자

연방은 공화국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신연방조약을 지지했다.

아야즈 무탈리보프는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의 관료에서 공화국의 마지막 공산당 지도자이자 초대 대통령으로 올라선 정치가였다. 1991년 노보오가료보 9+1 회의에서 그는 공화국의 주권을 보장하는 새로운 연방을 지지하며, 연방은 공화국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관점을 내세웠다. 자치공화국의 지위와 권한을 둘러싼 협상에도 적극 참여했지만, 카라바흐 전쟁과 국내 권력투쟁 속에서 통치 기반을 잃었다. 1992년 축출된 뒤 모스크바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2012년 귀국했고 2022년 바쿠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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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4–1977바쿠 냉장고 공장장, 바쿠 전기생활용품 생산회사 총괄
  • 1977–1979바쿠 나리마노프구 당위원회 제2서기
  • 1979–1982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공화국 지방산업장관
  • 1982–1989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공화국 국가계획위원장 겸 각료회의 부의장
  • 1989–1990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90–1991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 대통령
  • 1991–1992아제르바이잔 초대 대통령
  • 1992–2012축출 뒤 모스크바 망명, 2012년 귀국

올레크 안토노비치 고르디옙스키

Олег Антонович Гордиевский
보안·정보·치안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38–2025 → 1985년 망명 · 궐석 사형 선고

서방에 망명한 최고위 KGB 장교이자 1983년 전쟁 공포의 결정적 증언자

PR 계열 동료들은 랴얀(РЯН) 작전에 회의적이었지만, 아무도 제1총국의 평가에 이의를 달아 중앙에서 체면을 잃고 싶어 하지 않았다.

서방으로 망명한 KGB 장교 중 최고위 인물로, 제1총국 대령이자 1974년부터 11년간 MI6의 정보원 '오베이션(Ovation)'으로 이중 활동했다. 런던 주재관으로서 랴얀(РЯН) 작전과 1983년 에이블 아처 훈련에 대한 소련 지도부의 경계를 영국·미국 정보기관에 전달한 핵심 정보원이었고, 이 증언은 1983년 핵전쟁 위기를 낮추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CIA 내통자 올드리치 에임스에게 배신당해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약물 심문을 받다가 1985년 외교 차량 트렁크에 실려 탈출했고, 궐석 재판에서 반역죄 사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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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2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MGIMO) 졸업, KGB 제1총국 S국(비합법 첩보) 입직
  • 1966–1970코펜하겐 KGB 레지덴투라 장교 (영사부 위장)
  • 1972–1978코펜하겐 부레지던트(정치정보), 1976년 레지던트 대행
  • 1978–1982제1총국 영국·스칸디나비아부 근무
  • 1982–1985런던 레지덴투라 (대사관 참사관 위장), 1984년 부레지던트, 1985년 레지던트 대행
  • 1974–1985MI6 정보원 '오베이션'으로 이중 활동
  • 1985망명, 소련에서 궐석 사형 선고

발레리 미하일로비치 사블린

Валерий Михайлович Саблин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39–1976 ✕ 처형

브레즈네프 시대에 레닌주의 원칙을 내걸고 반란을 일으킨 해군 장교

처형 직전 아들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강인하게 살아라. 그리고 인생은 아름답다는 것을 믿어라. 긍정적으로 살아라. 그리고 혁명은 언제나 승리한다는 것을 믿어라."

소련 해군 3등 대위이자 정치장교(잠폴리트)로, 1975년 11월 대잠호위함 스토로제보이호에서 반란을 주도했다. 브레즈네프 시대의 부패와 정체를 비판하며 레닌주의 원칙으로의 복귀와 새로운 혁명을 촉구하는 방송을 송출하기 위해 함선을 리가에서 레닌그라드로 향하게 했으나, 소련 공군의 공습으로 진압되었다. 반란은 실패했고 사블린은 반역죄로 총살형에 처해졌으나, 훗날 톰 클랜시의 소설 《붉은 10월》에 영감을 준 이 사건은 체제 내부에서 제기된 가장 극적인 레닌주의적 저항 중 하나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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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레닌그라드에서 해군 장교 가문의 아들로 출생
  • 1956–1960M.V. 프룬제 고등해군학교에서 수학, 우등 졸업 및 입당
  • 1960–1969북방함대 및 흑해함대에서 구축함·초계함 장교로 복무
  • 1963흐루쇼프에게 당내 부패를 비판하는 서한 발송, 무르만스크 당위원회로부터 견책
  • 1969–1973V.I. 레닌 군사정치아카데미에서 수학, 우등 졸업
  • 1973발트함대 대잠호위함 스토로제보이호 정치부함장(잠폴리트)으로 부임
  • 1975.11.8–9스토로제보이호 반란 주도, 레닌그라드 항해 중 소련 공군에 진압됨
  • 1976.7소련 대법원 군사합의부에서 반역죄로 사형 선고
  • 1976.8.3레포르토보 교도소에서 총살형 집행
  • 1994러시아 대법원 군사합의부, 반역죄를 군사범죄로 재분류하여 부분 복권

알렉산드르 필리포비치 카투세프

Александр Филиппович Катусев

숨가이트 포그롬의 불씨를 당긴 소련 부검찰총장

1988년 2월 27일 중앙텔레비전에서 그는 아스케란 충돌로 숨진 두 청년이 '아제르바이잔인'이라 밝혔고, 그날 밤 숨가이트 포그롬이 터졌다.

벨로루시 출신의 소련 군사법률가로, 1987년 소련 부검찰총장에 임명되어 우즈베키스탄 등 주요 부패사건 수사를 지휘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역사에 남은 것은 1988년 2월 27일 중앙텔레비전 방송에서 아스케란 인근 충돌로 사망한 두 아제르바이잔인 청년의 이름과 국적을 거론한 순간이다: 이 발표는 몇 시간 뒤 숨가이트 포그롬의 직접적 방아쇠가 되었다. 1989년부터 주임군사검사로 재임하며 판필로프 28영웅 신화의 허구성을 폭로했으나, 8월 쿠데타 이후 강제 퇴진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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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s드네프로제르진스크 야금학교 졸업, 드네프르 야금 콤비나트 노동자
  • 1965하리코프 법학대학 졸업
  • 1966자바이칼 군관구 수비대 검찰 수사관
  • c. 1970s–1987소련 검찰청 수사관, 선임수사관, 수사부서장, 주임수사국장 역임
  • 1987–1989소련 부검찰총장
  • 1989–1991소련 주임군사검사 겸 부검찰총장
  • 19918월 쿠데타 이후 강제 퇴진

스타니슬라프 예브그라포비치 페트로프

Станислав Евграфович Петр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939–2017 ○ 폐렴

핵전쟁을 막은 소련 방공군 중령, 세르푸호프-15의 오경보를 직감으로 간파한 당직 장교

경보 사이렌이 울부짖었지만, 나는 '발사'라고 적힌 커다란 붉은 화면을 몇 초 동안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소련 방공군 중령. 1983년 9월 26일 세르푸호프-15 조기경보사령부에서 오코 위성이 미 본토에서 발사된 ICBM 5기를 탐지했다고 경보했으나, 1차 타격치고는 규모가 너무 작고 지상레이더가 이를 확인하지 못한다는 점을 근거로 오경보로 판단했다.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시스템 오류로 처리하여 소련의 핵 보복 발사를 막았으며, 훗날 '세계를 구한 사람'으로 불렸다. 사건 후 불명예도 표창도 받지 못했고 1984년 조기 퇴역했으며, 2017년 폐렴으로 사망할 때까지 모스크바 교외에서 은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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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키예프 방공무선기술학교 입학
  • 1957–1967방공군 복무, 레이더 체계 정비
  • 1967–1972키예프 방공 고등공병무선기술학교 수학
  • 1973세르푸호프-15 조기경보사령부 배치
  • 1983.09.26오코 위성 오경보 당직 근무, 핵 보복 발사 저지
  • 1984중령으로 퇴역
  • 1984–1990s조기경보체계 개발 연구소 근무

유리 아나톨리예비치 프로코피예프

Юрий Анатольевич Прокофьев

소련 말기의 모스크바 당 조직자

그의 삶은 공산당 금지 전후로 갈라졌다고 회고되었다.

유리 프로코피예프는 모스크바의 당·행정 조직에서 성장한 소비에트 당 간부였다. 그는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로서 개혁과 당의 해체가 충돌한 마지막 시기를 관리했고, 1990년 정치국에 들어갔다. 1991년 국가비상사태위원회 활동에 관여했지만 위원은 아니었으며, 소련과 공산당의 금지 뒤에는 회고록과 기술 기업 활동으로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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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모스크바 학교 선구자단 지도원
  • 1960소련 공산당 입당
  • 1968모스크바 시당 조직·당무 부문 간부
  • 1977–1985모스크바 쿠이비셰프 구당위 서기·제1서기
  • 1986–1988모스크바 시 집행위원회 서기
  • 1988–1989모스크바 시당 서기·제2서기
  • 1989–1991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
  • 1990–1991소련 공산당 중앙위원·정치국원

줌베르 일리치 파티아슈빌리

ჯუმბერ ილიას ძე პატიაშვილი

트빌리시 비극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그루지야 공산당 제1서기

파티아슈빌리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고르바초프가 전화로 말했다. '즉시 광장을 비워야 한다. 군대가 처리할 것이다.' 나는 그가 작전을 알고 지지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셰바르드나제의 후임으로 1985년 그루지야 공산당 제1서기에 올랐으나, 전임자의 개혁 실험을 거의 모두 폐기하고 반대파를 지하로 몰아넣었다. 1989년 4월, 아프하스 자치 문제로 촉발된 독립 요구 시위 앞에서 모스크바에 군대 파견을 요청했고, 4월 8일 공화국 국방위원회를 소집해 시위대 강제 해산을 결정했다. 다음날 새벽 삽과 독가스로 무장한 소련군이 비무장 시민을 덮쳐 21명이 숨졌고, 그 책임을 지고 보름 만에 물러났다. 퇴진 후에도 그루지야 정치에 남아 두 차례 대선에 출마했고, 2003년 장미혁명을 지지했으나 이후 사카슈빌리를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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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1973그루지야 콤소몰 간부, 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
  • 1973–1974고리 지구당 제1서기
  • 1974–1985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 농업 담당 서기
  • 1985–1989.4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89–1991과학생산연합·농업연구소 소장
  • 1995, 2000그루지야 대선 출마, 셰바르드나제에 이어 2위

콘스탄틴 이바노비치 코베츠

Константин Иванович Кобец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939–2012 ○ 사망

8월 쿠데타 당시 옐친 편에 선 최고위 장성, 백악관 방어를 지휘했다

"군대는 국민에게 총을 겨누지 않을 것입니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기자회견)

소련 통신병대 총책임자이자 참모총장 차장으로 체르노빌 사고 수습에도 참가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에 맞서 보리스 옐친 편에 선 최고위 현역 장성으로, 모스크바 백악관 방어본부를 조직하고 8월 20일 러시아 연방 국방장관에 임명되었으며 24일 대장으로 진급했다. 아이러니하게도 1993년 10월 헌정위기 때는 자신이 방어했던 같은 건물을 공격하는 쪽에 섰으며, 1997년 부패 혐의로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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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6체르노빌 원전 사고 수습 참가
  • 1987–1991소련 국방부 통신병대 총책임자 겸 참모총장 차장
  • 1990RSFSR 인민대표로 선출
  • 1991.01RSFSR 국가방위안보위원회 위원장
  • 1991.08.20RSFSR 국방장관 임명, 8월 24일 대장 진급
  • 1993–1997러시아 연방 국방차관
  • 1997부패 혐의 체포, 유죄 판결

미하일 알렉세예비치 모이세예프

Михаил Алексеевич Моисее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39–2022 ○ 자연사

마지막 소련 총참모장, 8월 쿠데타로 몰락하다

1991년 8월 22일, GKChP 쿠데타가 무너지고 야조프가 체포되자 모이세예프는 단 하루 동안 소련 국방장관 대행을 맡았다. 이튿날 그 역시 해임되었다.

소련군의 마지막 총참모장(1988~1991). 드미트리 야조프의 측근으로 극동군관구에서 빠르게 승진하여 군 2인자 자리에 올랐으며, 아프가니스탄 철수 계획을 지휘하고 미소 군축 협상에도 참여했으나, 1991년 8월 쿠데타에서 야조프를 지지했다가 실패 후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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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1962군 복무, 극동전차학교 졸업
  • 1962–1972전차소대장·중대장, 독일주둔 소련군 및 카르파티아 군관구
  • 1972–1980전차연대장, 제50·27근위차량화소총사단장
  • 1982–1985극동군관구 제15군 부사령관, 이후 사령관
  • 1985–1987극동군관구 참모장·제1부사령관
  • 1987–1988극동군관구 사령관
  • 1988–1991소련군 총참모장·국방제1차관
  • 1991.8.22–23소련 국방장관 대행
  • 2011–2016국가두마 의원(통합 러시아)

사파르무라트 아타예비치 니야조프

Saparmyrat Ataýewiç Nyýazow

소련 말기에서 독립국의 개인통치를 세운 투르크멘 지도자

1991년 9+1 회의에서 연방의 재편을 논의하면서도 투르크메니스탄의 독자성을 끝까지 저울질했다.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는 소련 말기 투르멘 공화국의 당·정부 지도자에서 독립 투르크메니스탄의 초대 대통령으로 전환한 정치가였다. 그는 1991년 신연방조약을 둘러싼 9+1 회의에 투르크메니스탄 대표단을 이끌고 참여했지만, 공화국의 독자 노선을 지키려는 계산 속에서 협상 자체에는 제한적으로 관여했다. 독립 뒤에는 중립과 국가 주권을 내세우면서 권력을 대통령 개인에게 집중하고, 루흐나마와 광범한 개인숭배를 통해 사회를 통제했다. 그의 통치는 탈소비에트 국가 건설과 권위주의적 고착이 결합한 사례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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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2소련 공산당 입당
  • 1970–1980투르크멘 공화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간부
  • 1980–1984아시하바트 시 당위원회 제1서기
  • 1985투르크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85–1991투르크멘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90–1991투르크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
  • 1990–2006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
  • 1991신연방조약 9+1 회의 투르크메니스탄 대표단 수석

빌뉴스 1월 사태에서 국가구원위원회를 선포한 모스크바파 리투아니아공산당 이념서기

1991년 1월 13일 소련군 BMP 확성기에서 그의 육성이 흘러나왔다: 「리투아니아 형제들이여, 인민에게 맞섰던 민족주의·분리주의 정부는 전복되었다!」

리투아니아 남부 농가 출신으로 빌뉴스대학과 레닌그라드 고등당학교를 마친 뒤, 20년간 당 역사연구소에서 학자로 일하며 종교·무신론을 연구했다. 1990년 친모스크바 리투아니아공산당(CPSU 강령파) 이념부장이 되어 리투아니아 독립에 격렬히 반대했고, 1991년 1월 11일 '리투아니아 국가구원위원회' 창설을 발표해 소련군 작전의 정치적 명분을 제공했다. 1999년 반국가조직 활동과 폭력적 정권 전복 선동으로 8년형을 선고받았고, 출소 후 러시아로 이주해 사망할 때까지 소련 체제를 옹호하는 저술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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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2소련공산당 입당
  • 1970–1990리투아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산하 당역사연구소 연구원
  • 1990–1991리투아니아공산당(CPSU 강령파) 중앙위원회 이념부장
  • 1994–2002반국가 활동 혐의로 수감 (8년형)
  • 2002–2012러시아국립사회대학 교수, 공산당연합-CPSU 평의회 부의장

렘비트 아누스

Lembit Annus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에스토니아 에스토니아인 1941–2018 ○ 자연사

소련 유지를 택한 에스토니아 공산당 지도자

1991년, 그는 에스토니아의 독립이 다가오던 때에도 소련 연방을 지지하는 정치국에 합류했다.

렘비트 아누스는 소련 말기 에스토니아 공산당의 모스크바계 지도자로, 민족 독립과 연방 유지를 둘러싼 분열의 한복판에 섰다. 그는 1990년 12월부터 1991년 8월 당이 금지될 때까지 КПСС 강령을 지지한 에스토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를 맡았고, 1991년에는 КПСС 정치국원이 되었다. 당의 해체 뒤에도 프라우다 특파원과 지방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공산주의 정치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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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코흐틀라얘르베에서 출생
  • 1963소련 공산당 입당
  • 1983–1989잡지 《에스티 코무니스트》 편집장
  • 1990에스토니아 공산당 칼리닌 지구위원회 제1서기
  • 1990–1991КПСС 강령계 에스토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91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
  • 1991–1999《프라우다》 에스토니아 특파원, 탈린 시의회 의원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구벤코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Губенко
이념·선전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941–2020 ○ 자연사

소련의 마지막 문화장관

히틀러 역을 맡은 졸업 공연에서, 구벤코는 부모를 죽인 자를 향한 모든 증오를 배역에 쏟아부었다. 공연을 본 류비모프는 곧바로 그를 타간카 극장으로 영입했다.

전쟁 고아에서 인민예술가로 성장한 배우·영화감독. 루나차르스키 이래 처음으로 현역 예술인이 소련 문화장관(1989–1991)에 오른 인물이다. 소련 붕괴 후에는 좌파 정치인으로 전향하여 국가두마 문화위원장과 모스크바 시의회 부의장을 지내며 소비에트 문화유산 수호에 앞장섰다. 타간카 극장 분열 후에는 「타간카 배우 동지회」를 창설해 2020년까지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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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1991문화장관

아나톨리 미하일로비치 코르누코프

Анатолий Михайлович Корнук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942–2014 ○ 사망

KAL 007 격추를 직접 지시하고 러시아 공군 총사령관이 된 방공 장성

「옳은 명령을 내렸다고 나는 영원히 확신한다」 KAL 007 격추에 대한 그의 변함없는 입장.

우크라이나 광부의 아들로 자란 아나톨리 코르누코프는 1983년 9월 사할린 방공 지휘소에서 대한항공 007편 격추 명령을 내린 방공 장성이다. 상부가 책임을 거부하자 그는 오시포비치 소령에게 '목표 파괴'를 직접 지시했고, 죽을 때까지 이를 국제법과 소련법에 부합하는 정당한 명령이라 주장했다. 격추 사건으로 상도 벌도 받지 않았고 승진을 계속해 1998년 러시아 공군 초대 총사령관이 되어 공군과 방공군의 통합을 주도했다. 그 결정은 민간인 269명의 죽음과 맞물렸고, 그는 훗날 '옳은 명령을 내렸다고 영원히 확신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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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소련군 입대, 비행학교 입교
  • 1964전투기 조종사 자격 취득, 제54근위전투항공연대 배속
  • 1974–1976제777전투항공연대장(사할린)
  • 1980–1985제40전투항공사단장(극동·사할린·쿠릴)
  • 1983.09KAL 007 요격기 오시포비치에게 격추 지시
  • 1985–1988제71전투항공군단장(주동독소련군)
  • 1990–1991제11방공군 사령관(하바롭스크)
  • 1998–2002러시아 공군 총사령관, 공군·방공군 통합 주도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샤포시니코프

Евгений Иванович Шапошник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42–2020 ○ 자연사

소련 최후의 국방장관, 마지막 항공원수

1991년 12월 25일, 고르바초프의 사임 후 핵가방이 옐친에게 이양되던 날 샤포시니코프는 말했다: "핵버튼은 믿음직한 손에 있습니다."

소련 공군에서 30년 넘게 복무하며 전투기 조종사에서 공군 총사령관까지 오른 직업군인이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공군 총사령관으로서 야조프에게 모스크바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고 비상사태위원회를 해산하라고 제안했으며, 쿠데타 실패 후 고르바초프에 의해 소련 최후의 국방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91년 8월 26일 항공원수 계급을 받아 소련 역사상 마지막으로 '원수' 칭호가 붙은 군인 계급을 수여받은 인물이 되었다. 소련 해체 후 CIS 연합군 총사령관으로서 핵무기 통제권 이양을 감독했으며, 러시아 안전보장회의 서기와 아에로플로트 사장을 거쳐 수호이에서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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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3하리코프 고등군사항공학교 졸업, 전투기 조종사로 임관
  • 1969가가린 공군사관학교 졸업
  • 1985–1987오데사 군관구 공군 사령관
  • 1987–1988소련군 주독 집단군 공군 사령관
  • 1990–1991소련 공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
  • 1991.8–1992.2소련 국방장관 (최후)
  • 1992–1993CIS 연합군 총사령관
  • 1993.6–9러시아 안전보장회의 서기
  • 1995–1997아에로플로트 사장
  • 1997–2004러시아 대통령 보좌관 (항공·우주 담당)

니콜라이 티모페예비치 안토시킨

Николай Тимофеевич Антошкин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모르드바계) 1942–2021 ○ 코로나19

체르노빌 원자로 상공에서 1,927회의 헬기 투하를 직접 지휘한 소련 공군 장군

원자로 안에서 수톤의 흑연이 타고 있었다. 소방관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우리는 헬기로 불구덩이를 끄기로 했다.

모르드바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오렌부르크 군사항공학교를 거친 정찰비행 장교로,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진압과 1969년 중소 국경분쟁, 1979년 아프가니스탄 상공 정찰에 모두 참전했다. 1986년 4월 26일 키예프 군관구 공군 참모장으로서 체르노빌 폭발 소식을 받고 즉시 현장으로 날아가, 10일간 헬기 조종사들을 이끌며 200m 상공에서 불타는 원자로에 4,925톤의 모래, 납, 붕소를 퍼부었다. 방사선에 노출된 몸으로도 퇴역하지 않고 1998년까지 복무한 뒤 통합 러시아당 소속 국가두마 의원으로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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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1970정찰비행 연대 조종사, 편대장
  • 1973–1979비행대대장, 정찰항공연대장 (오데사·투르키스탄 군관구)
  • 1980–1983제20근위군 항공사령관, 중부군집단 항공사령관
  • 1985–1988키예프 군관구 공군 참모장, 체르노빌 공중작전 지휘
  • 1988–1989중앙아시아 군관구 공군사령관
  • 1989–1993모스크바 군관구 공군사령관
  • 1993–1997러시아 공군 전선항공대 사령관
  • 2014–2021러시아 연방 국가두마 의원 (통합 러시아당)

보리스 프세볼로도비치 그로모프

Борис Всеволодович Громов

아프가니스탄을 떠난 마지막 소련 군인, 소련군 철수의 얼굴

1989년 2월 15일, 우정의 다리 위에서 소련 TV 기자에게 말했다. "내 뒤에는 단 한 명의 소련 군인도 남아 있지 않다."

소련군 장성으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세 차례 복무하며 마지막 제40군 사령관(1987–1989)으로 소련군 철수를 지휘했다. 1988년 포위된 호스트를 구출한 '마기스트랄 작전'의 성공으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1989년 2월 15일 우정의 다리를 걸어 소련 영토로 들어온 마지막 소련 군인이 되어, 9년간 지속된 전쟁의 공식적 종결을 상징했다. 이후 키예프 군관구 사령관, 소련 내무부 제1차관, 러시아 국방차관을 거쳐 1991년 니콜라이 리시코프의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탈냉전기에는 모스크바주 지사로 12년간 재임하며 러시아 권력구조 안에서 군 엘리트의 정치적 전환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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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1969발트 군관구 차량화소총 소대장·중대장
  • 1972–1978대대장→연대장→제9차량화소총사단 참모장, 북카프카스 군관구
  • 1980–1982제5근위차량화소총사단장, 제40군, 아프가니스탄 (1차 파병)
  • 1984제38군 제1부사령관, 프리카르파티아 군관구
  • 1985–1986소련군 총참모부 대표, 아프가니스탄 (2차 파병)
  • 1986–1987제28군 사령관, 벨로루시 군관구
  • 1987–1989제40군 사령관, 아프가니스탄 (3차 파병) — 소련군 철수 지휘
  • 1989키예프 군관구 사령관
  • 1990–1991소련 내무부 제1차관
  • 1991러시아 대통령선거 부통령 후보 (니콜라이 리시코프와 함께 출마)
  • 1991–1992소련 지상군 총사령관 제1대리
  • 1992–1995러시아 국방차관
  • 2000–2012모스크바주 지사 (3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