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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국가기관 인물 1086명

니콜라이 드미트리예비치 쿠즈네초프

Николай Дмитриевич Кузнец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11–1995 ○ 자연사

NK-12부터 NK-33까지: 소련 하늘과 우주를 움직인 엔진 총설계자

N-1 달로켓 계획이 취소된 뒤 쿠즈네초프는 NK-33 엔진 수십 기를 폐기 명령을 어기고 사마라 창고에 보관했다. 30년 후 미국 엔지니어들이 시험해 보고 '지금까지 만들어진 가장 효율적인 로켓 엔진'이라 평했다.

소련의 항공기·로켓 엔진 총설계자로, OKB-276을 이끌며 세계 항공사에 남을 터보프롭·터보팬·액체로켓 엔진을 개발했다. 그의 NK-12는 오늘날까지 세계 최강 터보프롭으로 Tu-95 전략폭격기와 An-22 수송기에 동력을 공급하며, NK-32는 Tu-160 초음속 전략폭격기의 심장이 되었다. 세르게이 코롤료프의 요청으로 소련 달로켓 N-1의 1단용 NK-33 엔진을 개발했으며, 폐쇄회로 방식을 채택한 이 고효율 엔진은 계획 취소 후 보존되었다가 1990년대 미국 안타레스 로켓에 사용되었다.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레닌상,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에 올랐고, RSFSR 최고소비에트 의원(1963–1990)으로 과학·산업 정책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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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3모스크바 항공기술학교 야간부·제24공장 기계공
  • 1933–1938주콥스키 공군공학아카데미 (우등 졸업)
  • 1938–1942주콥스키 아카데미 교편·연구; 1941년 후보학위 논문 방어
  • 1942제6공군 제239전투기사단 선임기사 (전선 근무)
  • 1943–1949우파 제26항공공장 → 부수석설계자 → 수석설계자
  • 1949–1994OKB-276 (후일 쿠즈네초프 명명 SNTK) 수석설계자·총설계자, 쿠이비셰프/사마라
  • 1963–1990RSFSR 최고소비에트 의원
  • 1974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미하일 티모페예비치 예프레모프

Михаил Тимофеевич Ефремов

볼가 강변 고아원 소년에서 코시긴 내각 부의장이 된 당 조직인사 전문가

1952년 11월 19일, 건설이 지연되던 쿠이비셰프 수력발전소 간부회의에서 사회를 본 예프레모프는 현 상황을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라 규정하고, "성공의 열쇠는 동지적 지원, 즉 팔꿈치 감각에 있다"고 선언했다.

사마라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11세에 아버지를 잃고 고아원에서 자란 예프레모프는 기술학교와 산업대학을 거쳐 전기기술자로 출발했다. 1942년 쿠이비셰프 당 기구에 들어간 뒤 10년 만에 제1서기로 도약했고, 볼가 수력발전소 건설을 진두지휘하며 지역경제 지도자로 입지를 굳혔다. 1959년 중앙위 러시아공화국 당기관부장으로 발탁되어 연방 차원의 간부 인사를 관장했고, 첼랴빈스크와 고리키(니즈니노브고로드)의 제1서기를 거쳐 1965년 코시긴의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임명돼 6년간 경제행정을 총괄했다. 말년에는 동독과 오스트리아 대사를 지내며 외교무대로 전환했고, 75세까지 현역으로 일하다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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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33사마라 에너지콤비나트 기술전기검사소장
  • 1933–34붉은 군대 복무 (볼가 군관구 사령부)
  • 1934–38쿠이비셰프 목재가공콤비나트 부기계장·주임동력기사
  • 1941–42차파옙스크 제15공장 건설 주임동력기사
  • 1942–51쿠이비셰프 주당: 강사·부서장·서기 대리·중공업부장
  • 1951–52쿠이비셰프 주당 제2서기
  • 1952–59쿠이비셰프 주당 제1서기 (볼가 수력발전소 건설 진두지휘)
  • 1959–61중앙위 러시아공화국 당기관부장 · 중앙위 러시아공화국 뷰로 위원
  • 1961–62첼랴빈스크 주당 제1서기
  • 1962–65고리키 공업주당 제1서기 → 고리키 주당 제1서기 (소브나르호스 분할·통합기)
  • 1965–71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코시긴 내각)
  • 1971–75주동독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75–86주오스트리아 소련 특명전권대사

니콜라이 콘스탄티노비치 바이바코프

Никола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Байбаков

장기 정체기의 고스플란 의장

함께 일했던 이들이 배신하고 나를 '인민의 적'으로 몰아가려 했다. 그 더러운 수사를 피해 붉은 군대로 도망쳤다.

바쿠 유전 지대에서 성장한 석유 기술자로, 30대에 소련 석유산업을 이끌며 '바이바코프 공법'으로 불리는 고압 시멘트 주입 기술을 개발했다. 전시에는 코카서스 유전 방어의 극적인 임무를 수행했고, 전후에는 로마슈키노 유전 개발을 주도하며 소련의 산유 대국화에 기여했다. 1965년부터 20년간 고스플란 의장으로 코시긴 개혁 이후의 중앙계획경제를 상징했으며, 브레즈네프 시대 계획 관료제의 핵심 축으로서 고르바초프 초기까지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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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s석유산업 인민위원/장관으로 전시 에너지 공급을 관리
  • 1942독일 진격기 코카서스 유전 파괴 대비와 석유 생산 이전 임무 수행
  • 1955–1957고스플란 의장으로 처음 중앙계획을 지휘
  • 1965–1985국가계획위원회 의장, 코시긴 개혁 이후 장기 계획경제 운영
  • 1985 이후고르바초프 초기 교체, 장기 정체기 계획관료의 상징으로 남음

세르게이 레오니도비치 소콜로프

Сергей Леонидович Сокол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11–2012 ↓ 해임 1987

마티아스 루스트 사건으로 해임된 국방장관

1987년 5월 28일, 19세 서독 조종사 마티아스 루스트가 경비행기로 소련 방공망을 뚫고 붉은 광장에 착륙했다. 이틀 뒤 정치국에서 고르바초프가 소콜로프의 해임을 제안하자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55년 복무한 원수는 한 소년의 비행 한 방에 물러났다.

하산 호 전투와 독소전에서 기갑부대를 지휘하며 성장한 소비에트 군사 엘리트로, 1967년부터 17년간 국방부 제1차관으로 군부의 제도적 중추 역할을 했다. 1978년 소비에트 연방 원수로 진급했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는 작전조 책임자로서 소련군의 실질적 지휘를 맡았다. 1984년 국방장관에 올랐으나, 1987년 마티아스 루스트의 붉은 광장 착륙 사건으로 고르바초프에 의해 해임되었다. 101세까지 생존한 유일한 소비에트 연방 원수로, 소련군의 전성기와 종말을 모두 목도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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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독소전 참전, 기갑·기계화 지휘 경험 축적
  • 1960s–1970s레닌그라드 군관구와 국방부 제1차관으로 승진
  • 1979–1980s아프가니스탄 전쟁 지휘·감독에 깊이 관여
  • 1984–1987국방장관, 고르바초프 초기 군부의 보수적 얼굴
  • 1987마티아스 루스트 모스크바 착륙 사건 뒤 해임

마리나 미하일로브나 라스코바

Марина Михайловна Раскова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12–1943 ✕ 추락사

여성 전투비행연대를 창설한 소련의 기록비행사

1938년 '로디나' 호 비행 중 연료 부족으로 타이가에 불시착해야 했을 때, 기수 조종석에 탄 라스코바는 충돌 시 가장 위험한 위치였다. 그리조두보바가 낙하산 탈출을 명령하자 그녀는 초콜릿 두 조각만 지닌 채 시베리아 타이가로 뛰어내렸고, 열흘 동안 홀로 생존 끝에 구조되었다.

소련 최초의 여성 항법사이자 1938년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영웅 칭호를 받은 3인 중 한 명. 1938년 모스크바-극동 무착륙 비행으로 여성 세계 거리 신기록을 수립했다. 1941년 스탈린에게 직접 여성 전투부대 편성을 설득해 586전투연대·587폭격연대·588야간폭격연대 등 3개 여성 항공연대를 창설했으며, 588연대는 '밤의 마녀들'로 불리며 전설이 되었다. 587폭격연대를 직접 지휘하던 중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선으로 향하던 비행에서 악천후로 추락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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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 항법연구소 제도사
  • 1933소련 공군 최초의 여성 항법사 자격 취득
  • 1934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 교관 — 여성 최초
  • 1935계기비행 교관 자격 취득, 중앙비행클럽 졸업
  • 1937–1939NKVD 특별과 전속 자문관
  • 1937–1938다수의 여성 세계항공기록 수립 (항법사)
  • 1938'로디나' 호 모스크바-극동 무착륙 비행, 소비에트연방영웅 수훈
  • 1941여성항공연대 창설 — 586·587·588연대 조직
  • 1942–1943587폭격항공연대장, Pe-2 폭격기 전환 훈련 지휘

이반 이그나티예비치 야쿠봅스키

Иван Игнатьевич Якубовский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벨라루스 1912–1976 ○ 병사

바르샤바조약군을 9년간 지휘한 벨라루스계 원수

1941년 민스크 방어전에서 야쿠봅스키의 전차부대는 시가로 밀려든 독일 오토바이 부대를 전차로 들이받아 분쇄했다.

벨라루스 농민 가정의 여섯째로 태어나 1932년 적군에 입대해 1934년 민스크의 칼리닌 벨라루스 통합군사학교를 졸업했다. 독소전쟁 내내 전차부대를 지휘하며 민스크 방어전, 모길료프 방어전,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키예프 해방, 베를린·프라하 공세까지 싸워 소련영웅 칭호를 두 번 받았다. 1967년 국방 제1차관 겸 소련원수에 올라 바르샤바조약 연합군 총사령관으로서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의 군사 준비를 총괄했으나, 작전 개시 직전 현장 지휘권은 이반 파블롭스키에게 넘어갔다. 1976년 11월 30일 모스크바에서 병으로 사망해 유해가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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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0폴란드 동부 진주·겨울전쟁에 전차중대장으로 참전
  • 1941–1945독소전에서 전차대대장에서 근위전차군단 부사령관까지, 두 차례 소련영웅 수훈
  • 1948참모본부 아카데미 졸업
  • 1960–1961, 1962–1965독일 주둔 소련군 총사령관 (1961년 8월부터 코네프의 부사령관으로 실무 주도, 1962년 4월 복귀)
  • 1965–1967키예프 군관구 사령관
  • 1967–1976국방 제1차관 겸 바르샤바조약군 총사령관, 소련원수

세르게이 알렉세예비치 즈베레프

Сергей Алексеевич Зверев

브레즈네프 시대 소련 재래식 군수 생산을 13년간 총괄한 국방공업장관

1942년, 30세의 공장 수석기사였던 즈베레프는 전시 광학장비 생산 공로로 첫 훈장인 적성훈장을 받았다. 36년 뒤 그가 사망했을 때, 노동자로 출발했던 크라스노고르스크 공장은 그의 이름을 따 '즈베레프 공장'으로 개칭되었다.

광학기사로 출발해 소련 국방공업장관(1965–1978)까지 오른 군수 행정가다. 전시에는 카잔과 요시카르올라 공장에서 붉은군대의 조준경과 광학장비 생산을 이끌었고, 종전 후 군비부 본부장과 차관을 거쳐 국방기술 국가위원회 위원장으로 고체연료 로켓무기와 우주체계 개발까지 관장했다. 1965년 국방공업부 재창설과 함께 장관에 올라 전차·화포·소화기·탄약 등 재래식 무기 생산 전체를 13년간 지휘하며 냉전 군비경쟁의 물적 토대를 관리했다. 국가 과제에서는 원칙에 단호했지만 부하에게는 한결같이 정중했으며, 사회주의노동영웅·레닌상·국가상을 수상하고 레닌 훈장만 6회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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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노동자로 출발, 레닌그라드 광학기계공장에서 광학기사 훈련
  • 1936레닌그라드 정밀기계·광학연구소(LITMO) 졸업, 광학기사로 설계·기술직 근무
  • 1939–1944카잔·요시카르올라 광학공장 주임기술자·수석기사, 전시 광학장비 생산 주도
  • 1944–1947크라스노고르스크 기계공장 수석기사·부소장
  • 1947–1958군비부·국방공업부에서 본부장, 차관 역임
  • 1958–1963국방기술 국가위원회 부위원장, 제1부위원장
  • 1963–1965국방기술 국가위원회 위원장 — 대신급, 고체연료 로켓·우주체계 개발 관장
  • 1965–1978소련 국방공업장관 — 전차·화포·소화기·탄약 생산 총괄

사비트 아타예비치 오루제프

Сабит Атаевич Оруджев

바쿠 유전에서 시작해 소련 가스 산업을 세계 최대로 키운 아제르바이잔인 공학자

1973년, 우렌고이 예정지의 맨땅에 내린 오루제프가 말했다. "나는 표트르 대제가 아니지만 그의 말을 빌리겠소. 여기에 도시가 세워질 것이오." 이 한마디에서 오늘날 '러시아의 가스 수도' 노비 우렌고이가 시작되었다.

바쿠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소련 가스 산업을 세계 최대로 키운 아제르바이잔인 공학자. 1972년 가스공업부 장관에 취임해 서시베리아 우렌고이·메드베지예 초거대 가스전을 개발하고 통합가스공급시스템(ЕСГ)을 구축했으며, 이 시스템은 오늘날까지 러시아 가스 산업의 골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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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1939오르조니키제네프티 트러스트 기계공, 작업반장
  • 1939–1946아즈네프티 계열 트러스트 관리자·트러스트장
  • 1946–1949크라스노다르네프티 주임기사, 아즈네프테라즈베드카 청장
  • 1949–1955소련 석유공업부 해양·서부지역 총국장
  • 1955–1957소련 석유공업부 차관
  • 1957–1959아제르바이잔 SSR 인민경제회의 의장·각료회의 부의장
  • 1965–1972소련 석유채취공업부 제1차관
  • 1972–1981소련 가스공업부 장관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트라페즈니코프

Сергей Павлович Трапезников

브레즈네프 시대 학문 정통성의 문지기

1966년 아카데미 정회원 선거에서 역사학부는 그를 통과시켰지만, 총회에서 노벨상 수상자 이고리 탐이 반대 연설을 하자 표결은 부결되었다. 10년 뒤 통신회원 선출은 '절대 정회원 후보로 나서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가능했다.

1965년부터 1983년까지 18년간 중앙위 과학·교육기관부장을 지내며 소련 학계의 인사·교과과정·출판을 통제한 브레즈네프 시대 이념 관료였다. 박사 학위 논문과 주요 저작들은 집단화의 공식 역사서술을 형성했고, 1960년대 중반 스탈린 복권 캠페인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다. 모스크바 고등당학교 부학장과 몰도바 공화당학교 교장을 거쳐 브레즈네프의 개인 비서관을 지냈으며, 그 인연으로 과학·교육 부문의 최고 행정직에 올랐다. 지식인 사회에서는 1966년 아카데미 정회원 선거에서 노벨상 수상자 이고리 탐의 반대로 낙선할 정도로 불신을 샀으나, 10년 후 통신회원으로 선출되며 학계 내 입지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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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1934중부볼가 지방 콤소몰 활동, 1931년 당 입당
  • 1935–1944펜자주 당 간부, 세르돕스크 지역위 제1서기, 펜자주당 농업부장
  • 1948–1956몰도바 공화당학교 교장 겸 『몰도바 공산주의자』 편집장
  • 1956–1960중앙위 서기 L.I. 브레즈네프 보좌관
  • 1960–1965중앙위 고등당학교 연구부학장
  • 1965–1983중앙위 과학·교육기관부장 — 학계 인사·교육과정·출판의 최종 심판관

콘스탄틴 우스티노비치 체르넨코

Константин Устинович Черненко

브레즈네프 체제의 마지막 서기장

1985년 2월, 병상에서 투표용지를 받아든 최초의 서기장 — 선거운동도, 연설도 없는 승리

브레즈네프의 비서 출신으로 안드로포프 사후 서기장이 되었지만, 건강 악화로 통치 능력은 제한적이었다. 그의 짧은 집권은 고르바초프 등장의 막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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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4–1985서기장
  • 1984–1985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레오니트 비탈리예비치 칸토로비치

Леонид Витальевич Канторович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12–1986 ○ 자연사

중앙계획을 수학으로 최적화하려 한 노벨상 수상자

1941년 12월, 레닌그라드 포위전 속에서 칸토로비치는 라도가 호수 얼음 위를 직접 걸으며 얼음 두께와 기온에 따른 차량 간 최적 거리를 계산했다. '생명의 길'이었다.

소련 유일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1975). 1939년 합판 공장의 배분 문제를 풀며 선형계획법의 기초를 정립했고, 최적해에서 도출되는 '해소 승수'가 계획경제 내 객관적 가격 신호로 기능할 수 있음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22세에 레닌그라드 대학 교수, 1935년 무방어로 물리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그림자 가격 이론은 중앙계획 아래 분권화된 의사결정을 위한 이론적 토대였으나, 마르크스 노동가치론과 충돌하여 소련 경제관료에게 오래 배척당했다. 1960년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수리경제연구소를 창설하며 계획경제의 수학적 합리화를 평생 과제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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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9레닌그라드 산업건설기술자 연구소 교수
  • 1934–1960레닌그라드 대학 교수 (22세에 임용)
  • 1939–1948군사공학기술대학 수학 주임
  • 1948–1960레닌그라드 대학 수학·역학 연구소 부서장
  • 1960–1971소련 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 지부 수리경제 부문 창설·지도
  • 1971–1976국가과학기술위원회 산하 국민경제운영연구소
  • 1976–1986전연방 시스템연구소 (ВНИИСИ)

블라디미르 일리치 스테파코프

Владимир Ильич Степаков

레닌 테제 오류로 축출된 브레즈네프기 아지트프롭 수장

1970년 레닌 탄생 100주년 테제에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문구를 레닌의 말로 잘못 인용한 사건은 스테파코프가 아지트프롭에서 축출되는 공식 명분이자 셸레핀 계열 숙청의 신호탄이었다.

브레즈네프 초기 5년간 중앙위 선전선동부장을 맡아 당의 일상적 이념 장치를 운영했다. 수슬로프·데미체프가 서기국에서 이념을 총괄하는 동안 레닌 탄생 100주년과 프라하의 봄 대응 선전을 지휘한 실무자였다. 역사학 박사로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선전론을 체계화했으며, 셸레핀 계열로 분류되어 1970년 레닌 테제 오류 사건으로 축출된 후 유고슬라비아 대사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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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53모스크바주 MGB 부국장
  • 1957–1961모스크바 시당 선전선동부장 → 제2서기
  • 1964–1965이즈베스티야 편집장
  • 1965–1970중앙위 선전선동부장 — 브레즈네프기 일상 이념 장치 총괄
  • 1967역사학 박사 학위 취득
  • 1971–1978주유고슬라비아 소련 대사

세르게이 게오르기예비치 라핀

Сергей Георгиевич Лапин
이념·선전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912–1990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 15년간 소련 TV·라디오를 장악한 방송 총책

“나는 어제 레오니트 일리치와 점심을 함께 했네.” — 라핀이 부하와 동료들에게 무언가 지시하기 전에 건네던 상투적인 첫마디로, 이 말이 나온 뒤에는 브레즈네프와 아침이나 저녁을 함께한 사람 외에는 아무도 감히 반대하지 못했다.

1970년부터 1985년까지 소련 국가방송위원회(고스텔레라디오) 의장을 지내며 브레즈네프 시대 방송을 총괄한 언론 관료다. 레닌그라드 신문기자로 출발해 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국에서 훈련받았고, 외교관으로 전환하여 오스트리아·중국 대사와 외무차관을 거쳐 TASS 사장을 지냈다. 고스텔레라디오 의장 재임 동안 올림픽 텔레비전센터 건설과 위성 방송망 확충으로 기술적 기반을 크게 넓혔으나, 동시에 생방송을 철폐하고 유대계 예술가들을 체계적으로 배제하는 엄격한 이념 검열을 시행했다. 브레즈네프의 개인적 신임을 등에 업고 당 선전부의 지시조차 거부할 만큼 독자적인 권력을 행사했으며, 고르바초프 집권 직후인 1985년 12월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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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1944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선전선동국 출판부 선임지도원·부문장
  • 1944–1949전연방 방송위원회 정치방송 주필
  • 1949–1953소련 각료회의 방송위원회 부의장
  • 1953–1955주동독 소련대사관 참사관
  • 1955–1956소련 외무부 제3유럽국장·당위원회 서기
  • 1956–1960주오스트리아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60–1962러시아소비에트연방공화국(RSFSR) 외무장관
  • 1962–1965소련 외무차관
  • 1965–1967주중국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67–1970TASS(타스) 사장
  • 1970–1985소련 각료회의 방송·텔레비전 국가위원회 의장(1978년부터 고스텔레라디오)

딘무하메드 아흐메트울리 쿠나예프

Дінмұхамед Ахметұлы Қонае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카자흐스탄 1912–1993 ○ 자연사

24년간 카자흐스탄을 브레즈네프의 동반자로 이끌고, 해임으로 젤톡산 봉기를 촉발한 공화국 건설자

1986년 2월, 나자르바예프의 비판 보고가 있은 후 쿠나예프는 고르바초프를 찾아가 나자르바예프의 해임을 요청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가 오히려 쿠나예프 자신에 대한 불만을 전하자, 24년간 카자흐스탄을 이끌어온 노지도자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럴 필요 없소. 내가 직접 물러나겠소."

광산 기술자로 출발하여 카자흐스탄 공산당 제1서기로 24년 가까이 재임한, 소련 공화국 지도자 중 가장 오래 권좌에 있던 인물이다. 브레즈네프와의 친교를 바탕으로 카자흐스탄을 소련 3대 경제권으로 끌어올렸고, 흐루쇼프의 남부 영토 이전 시도를 저지하여 공화국의 영토 보전을 지켰다. 전연방 정치국 정위원(1971–1987)으로서 중앙 무대에도 진출했으나, 1986년 12월 고르바초프에 의해 전격 해임되면서 알마아타에서 대규모 민중 시위: 젤톡산(12월) 사건이 촉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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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1939프리발하시스트로이 광산 수석기사
  • 1942–1952카자흐 SSR 인민위원회/각료회의 부의장
  • 1952–1955카자흐 SSR 과학아카데미 총재
  • 1955–1960카자흐 SSR 각료회의 의장 (1차)
  • 1960–1962카자흐스탄 공산당 제1서기 (1차)
  • 1962–1964카자흐 SSR 각료회의 의장 (2차)
  • 1964–1986카자흐스탄 공산당 제1서기 (2차, 22년)
  • 1971–1987CPSU 정치국 정위원

알렉세이 파블로비치 시티코프

Алексей Павлович Шитико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12–1993 ○ 자연사

하바롭스크 변경당 위원장에서 연방회의 의장으로: 브레즈네프 시대 연방 입법의 제도적 얼굴

1965년 하바롭스크 변경에 레닌훈장이 수여되자 시티코프는 말했다. '변경의 훈장 수훈을 우리는 중앙위원회와 소비에트 정부가 극동인들에게 베푼 큰 관심의 표현으로 받아들입니다.'

코스트로마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축산기술자로 출발한 소련의 당·국가 지도자이다. 하바롭스크 변경당 기구에서 25년간 근무하며 캄차카·유대자치주 당서기를 거쳐 1957년 하바롭스크 변경당 제1서기에 올랐고, 재임 13년간 도시 기반시설과 공업화를 추진했다. 1970년 소련 최고소비에트 연방회의 의장에 선출되어 14년간 재임하며 브레즈네프 시대 연방 입법의 제도적 중심을 형성했고, 소비에트 유럽안보협력위원회 의장으로서 데탕트와 헬싱키 프로세스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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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1939축산기술사 → 아르다토프 콤소몰 지구위 제1서기
  • 1941–1945붉은 군대 복무 (소령)
  • 1945–1952하바롭스크 변경당 기구 → 캄차카 주당위 서기
  • 1952–1955유대자치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55–1957하바롭스크 변경당위 서기 → 제2서기
  • 1957–1970하바롭스크 변경당위원회 제1서기
  • 1970–1984소련 최고소비에트 연방회의 의장
  • 1984–1991재외동포문화교류 소비에트협회 상임위 의장

보리스 표도로비치 브랏첸코

Борис Фёдорович Братченко

브레즈네프 시대 20년간 소련 탄광을 이끈 석탄공업 장관

『나는 석탄공업을 사랑한다. 내 의식적인 삶 전부를 거기에 바쳤고, 다른 길은 상상할 수도 없다.』 — 브랏첸코, 2004년 마지막 인터뷰에서.

쿠반 카자크 후손으로 모스크바 광산대학을 졸업한 광산기사-경제학자로, 키젤·로스토프 탄광 갱도에서 출발해 카라간다 콤비나트 수석기사, 카자흐 공화국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을 거쳐 1965년 소련 석탄공업장관이 되었다. 1985년까지 20년간 재임하며 라스파드스카야·보르가쇼르스카야 탄광, 보가티리 노천광, 칸스크-아친스크·에키바스투스·남야쿠티아 연료에너지 콤플렉스 등을 진두지휘해 소련 석탄 생산량을 7억 1,800만 톤까지 끌어올렸다. 강력한 채탄기 개발로 1949년 스탈린상을 받았고 1982년 사회주의 노동 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1971년부터 1986년까지 CPSU 중앙위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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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1942키젤·로스토프 탄광에서 광산기사, 구역장, 수석기사로 승진
  • 1942–1943석탄공업인민위원부 및 인민위원회의 사무국에서 근무
  • 1943–1949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탄광장, 샤흐탄트라치트 트러스트 수석기사
  • 1949–1953카라간다우골 콤비나트 수석기사
  • 1953–1957소련 석탄공업 차관
  • 1957–1959카멘스크·로스토프 소브나르호스 의장, 고스플란 석탄부장
  • 1959–1961카라간다 소브나르호스 의장
  • 1961–1965카자흐 SSR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계획위원회 의장
  • 1965–1985소련 석탄공업장관

레오니트 니콜라예비치 예프레모프

Леонид Николаевич Ефремов

고르바초프에게 스타브로폴을 넘겨주고 그를 배신자라 부른 당원

은퇴 후 그는 『배신자 고르바초프』라는 회고록에서, 자신이 스타브로폴에서 길을 열어준 후임자를 향해 "양면적인 자들의 동맹"이라 쏘아붙였다.

농업기계화 기술자로 출발한 예프레모프는 전시 항공공업과 쿠이비셰프 당 기구를 거쳐 흐루쇼프 시기 쿠르스크·고리키·스타브로폴 당 조직을 차례로 이끈 지역 간부로 성장했다. 전성기에는 CPSU 상임위 후보위원과 중앙위 러시아공화국 뷰로 제1부의장을 지내며, 연방 구조 안에서 러시아 공화국을 별도 관리하려는 당 구도 중심에 섰다. 흐루쇼프 실각 후 스타브로폴로 되돌아갔고, 1970년 그 자리를 미하일 고르바초프에게 넘겨준 것이 가장 역사적인 순간이 되었다. 훗날 그는 회고록 『배신자 고르바초프』에서 후임자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후 18년간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제1부의장으로 일하다 1988년 연방급 연금생활자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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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41보로네시 농업기계화연구소 졸업 → 항공공장 기술자, 독일 통상대표부 장비 인수원
  • 1941–46보로네시 제18항공공장 주임기사, 당 조직자 (Il-2 생산)
  • 1946–52쿠이비셰프 당 간부 → 주 집행위원장
  • 1952–58쿠르스크 주당 제1서기 (1957년 주에 레닌훈장 수여)
  • 1958–62고리키 주당 제1서기
  • 1962–65중앙위 러시아공화국 뷰로 제1부의장 · 상임위 후보위원
  • 1964–70스타브로폴 지방당 제1서기 (후임: 미하일 고르바초프)
  • 1970–88국가과학기술위원회 제1부의장

바실리 필리모노비치 샤우로

Василий Филимонович Шауро
이념·선전 소련 국가기관 소련 벨라루스 1912–2007 ○ 은퇴 1986

21년간 소련 문화의 당 문지기로 군림한 '위대한 무언가'

그는 전축 옆에 서서 천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하이든 소나타의 마지막 화음을 듣고 있었다. 음악이 멈추자 '신성한 작품이군요'라고 중얼거리며 손님들에게 자리를 권했다.

바실리 샤우로는 브레즈네프 체제 21년간 중앙위 문화부장으로서 어떤 문학·영화·음악이 소련 대중에게 닿는지를 결정한 문화의 당 문지기였다. 벨라루스 교사 출신의 그는 보수 진영의 지지를 업고 1973년 선전부장 대행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를 중앙위에서 몰아내, 고르바초프 등장까지 이념 개혁을 늦추는 데 한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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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42비쳅스크 지역 교사·학교장
  • 1942–1947중앙위 선전선동국 지도원·분과장
  • 1948–1956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기구 → 민스크 주당위 제1서기
  • 1960–1965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서기 겸 최고회의 간부회의 의장 (1963–1965)
  • 1965–1986중앙위 문화부장
  • 1986연금 은퇴

표트르 안드레예비치 아브라시모프

Пётр Андреевич Абрасимов

냉전 베를린을 관리한 소련의 '통치 대사'

1971년 9월 3일, 아브라시모프가 베를린 4국 협정에 서명한 뒤 남긴 말: '가시 없는 장미는 없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향한 말이자, 냉전 최전선에서 10년 가까이 협상해온 외교관의 솔직한 표현이었다.

벨라루스 출신의 소련 직업 외교관이자 당 관료. 조국전쟁에서 벨라루스 파르티잔 정치장교로 복무했고, 전후 벨라루스 각료회의 제1부의장과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를 지냈다. 1957년 외교로 전환하여 동독 주재 대사를 두 차례(1962–1971, 1975–1983) 역임하며 냉전기 소련의 대독 정책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1966년 서베를린 시장 빌리 브란트와 비밀 회담을 가졌고, 1971년 9월 베를린 4국 협정에 소련 대표로 서명했다. 두 번째 동독 임기 중 동독 내정에 적극 개입하여 '통치 대사'라 불렸고, 결국 호네커의 요청으로 1983년 소환되었다. 국가대외관광위원회 의장과 주일 대사를 끝으로 1986년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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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6–1948벨라루스 SSR 각료회의 소련 각료회의 상임대표
  • 1948–1950벨라루스 SSR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50–1952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52–1955벨라루스 SSR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55–1957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57–1961주폴란드 소련 대사
  • 1961–1962스몰렌스크 주당위원회 제1서기
  • 1962–1971주동독 소련 대사 (1차)
  • 1971–1973주프랑스 소련 대사 (마다가스카르 겸임)
  • 1973–1975CPSU 중앙위원회 해외간부·출국 담당 부장
  • 1975–1983주동독 소련 대사 (2차)
  • 1983–1985소련 국가대외관광위원회 의장
  • 1985–1986주일본 소련 대사

보리스 옙세예비치 체르토크

Борис Евсеевич Черток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폴란드 1912–2011 ○ 자연사

스푸트니크의 두뇌를 설계하고 소련 우주사를 기록한 코롤료프의 대리인

1945년 5월 2일, 붉은군대 소령 보리스 체르토크는 베를린 함락 직후 독일의회 의사당 벽에 자기 이름을 써넣었다. 평생 그 순간을 '가장 행복한 성취'라 불렀다. 석 달 뒤 그는 독일의 V-2 로켓 잔해 속에서 소련 우주 프로그램의 첫 페이지를 열고 있었다.

코롤료프의 최측근 대리인으로, 대륙간탄도미사일 R-7부터 스푸트니크·보스토크·소유스·미르까지 소련 우주 로켓의 유도제어 시스템을 50년간 설계했다. 사회주의노동영웅(1961)이자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으로, 은퇴 후 회고록 『로켓과 사람들』 4권을 펴내 소련 우주 프로그램의 속내를 생생히 기록했으며 99세까지 집필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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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38제22항공공장 전기기사, 항공기 특수장비·무장 설계
  • 1940–45볼호비티노프 설계국(OKB)에서 군용기 전기·무선 장비 담당
  • 1945–47독일 파견: V-2 유도제어 연구, 라베 연구소·노르트하우젠 연구소 근무
  • 1946–56NII-88 제어시스템 부서장 → 부수석 엔지니어, 코롤료프와 협업 시작
  • 1956–74OKB-1 부수석 설계자: R-7, 스푸트니크, 보스토크, 소유스 제어계 설계
  • 1974–92NPO 에네르기야 부총설계자: 미르 정거장, 에네르기야 로켓 제어계
  • 1994–994권의 회고록 『로켓과 사람들』 출간, NASA 영역본 발행
  • 2000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академик) 선출

바실리 미하일로비치 비네비틴

Василий Михайлович Виневитин
보안·정보·치안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13–1938 ✕ 아군 오인사격

프리놉스키 명령으로 일본 헌병을 쏜 NKVD 저격 소위

자오제르나야에 오른 비네비틴은 프리놉스키의 개인 명령에 따라 한 발의 정확한 사격으로 국경을 넘어 온 일본 헌병을 그 자리에서 쓰러뜨렸다.

NKVD 포시예트 국경분견대 소위로, 저격 교관을 거쳐 공병대장을 맡았다. 1938년 7월 15일 자오제르나야 고지에서 제1부인민위원 프리놉스키의 개인 명령으로 만주 영토에 들어온 일본 헌병을 저격 사살해 하산 호 분쟁의 도화선이 됐다. 부상 뒤 병원을 이탈해 전선에 복귀했고, 8월 1일 새벽 지뢰 통로 개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다 초병에게 잘못된 암호를 대어 아군 총에 맞아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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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2리스키 철도 직업기술학교 수학
  • 1932–1935철도 도로기사·구간장, 우리유핀스크 제5공사구간장
  • 1935NKVD 국경수비대 소집
  • 1935–1938저격 교관, 이후 포시예트 국경분견대 공병대장 (소위)
  • 1938.07.15프리놉스키 명령으로 자오제르나야에서 일본 헌병 사살
  • 1938.08.01아군 초병의 오인 사격으로 전사
  • 1938.10.25소비에트 연방 영웅·레닌 훈장 추서

미하일 드미트리예비치 류민

Михаил Дмитриевич Рюмин

의사들 음모 조작자, NKVD 회계사 출신 부역장

베리야가 류민에게 남긴 마지막 말: '더 이상 당신과 나는 서로 보지 않을 것이오. 우리는 당신을 청산할 것이오.' 1953년 3월 28일.

NKVD 회계사에서 MGB 부역장까지 오른 인물. 아바쿠모프를 고발해 '의사들 음모'를 조작, 스탈린 말기 반유대 숙청을 주도했다. 스탈린 사후 체포·총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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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NKVD 회계사로 입문
  • 1948MGB 특별중요사건부 배속
  • 1951MGB 특별중요사건부장 → 부역장, 의사들 음모 조작
  • 1952해임
  • 1954재판 후 총살형

니키타 아르카디예비치 크리먄

Никита Аркадьевич Кримян

서른한 살에 아르메니아 국가보안장관이 된 수사관

1937년, 시인 티치안 타비제를 두 달 고문해 자백을 받아냈다. 타비제가 공범으로 17세기 민족영웅 사카제를 지목하자, 크리먄은 그 유명한 이름을 몰라본 채 조서에 그대로 기재했다.

1913년 카르스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8세에 자캅카스 GPU 견습으로 보안기관에 투신했다. 트빌리시에서 대숙청기 그루지야 NKVD 수사관으로 급부상해 수사부장까지 올랐으며, 1937년 오라헬라슈빌리 사건 수사를 지휘했다. 1945년 서른한 살의 나이로 아르메니아 국가보안장관에 임명되었으나, 1947년 '당적이지 않은 행동'으로 해임되고 울리야놉스크로 좌천되었다. 1951년 불법 수사와 체포로 보안기관에서 축출된 뒤, 베리야 몰락 후 체포되어 1955년 트빌리시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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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5자캅카스 GPU 경제부 견습, 이어 담당관
  • 1935–1937그루지야 NKVD 국가보안관리국 선임요원, 이어 과 부책임자
  • 1937–1938그루지야 NKVD 국가보안관리국 과장
  • 1938–1940그루지야 NKVD 수사부 부부장, 이어 부장
  • 1940–1941리보프주 NKVD 관리국 부국장
  • 1941–1943야로슬라블주 NKGB·NKVD 관리국 부국장
  • 1943–1945야로슬라블주 NKGB 관리국장
  • 1945–1947아르메니아 국가보안인민위원, 이어 장관
  • 1947–1950울리야놉스크주 MGB 관리국장
  • 1951–1953아르메니아 식품공업부 인사부장
  • 1953–1955체포, 트빌리시 재판과 처형

니콜라이 로마노비치 미로노프

Николай Романович Миронов

흐루쇼프 축출을 조직한 당의 '권력 부처' 담당자

KGB 의장 세미차스트니는 훗날 회고했다: “내가 맡고 있던 KGB 의장 자리는 원래 니콜라이 로마노비치 미로노프를 위해 준비된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당 조직 출신으로 브레즈네프의 청년기 친구였으며, 중앙위원회 행정기관부장(1959–1964)으로서 KGB·내무·군·검찰·법원을 총괄 감독한 흐루쇼프 시대 후기의 실세였다. 1964년 반흐루쇼프 음모에서 중앙위원과 군·보안 간부들을 직접 포섭하며 쿠데타의 실무를 조직했고, 브레즈네프 집권 후 KGB 의장으로 내정되었으나 취임 직전 베오그라드 근교 아발라 산 항공사고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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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45정치장교·군 선전선동 담당, 255소총병사단에서 복무하며 부상, 소령으로 종전
  • 1945–1951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당 선전부, 키로보그라드 주당 서기 등 우크라이나 당직 역임
  • 1951–1956MGB·KGB 제3총국(군 방첩) 부국장, 소장 진급
  • 1956–1959레닌그라드주 KGB 국장
  • 1959–1964중앙위 행정기관부장 — KGB·내무·군·검찰·법원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