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술로프 사후 금고를 열자 저축 통장에 4,200루블과 수년치 개인 경비 영수증 뭉치가 나왔다. 보좌관은 '자동차 한 대 값도 안 되는 돈으로 21년간 공화국을 다스렸다'고 회고했다.
후잔트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타슈켄트 중앙아시아면화대학을 졸업한 농학자다. 바흐시 계곡 개간에서 출발해 타지크 SSR 농업인민위원(1941~1945)과 각료회의 의장(1946~1955)을 지내며 전후 복구를 지휘했고, 소련 농업부 제1차관과 초대 주토고 대사를 역임한 뒤 1961년 4월 타지크 공산당 제1서기에 올라 사망까지 21년간 공화국을 이끌었다. 재임기 누레크 수력발전소, 알루미늄 제련소 등 400여 개 공업 기업이 세워져 농업 중심 구조가 다부문 산업 구조로 전환했다. 9개 레닌 훈장을 받았으나 평생 양복 두 벌만 소유하고 출장에 도시락을 싸 다닌 청렴한 인물로 동시대인의 기억에 남았다.
참모 아카데미에서 한 동기가 1941년 아군 Su-2를 격추한 소련 전투기 이야기를 하자 포크리시킨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그게 나였소."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군 최고 득점 에이스이자 최초의 세 차례 소비에트 연방 영웅. 항공 정비사로 입대해 39통의 전입 신청 끝에 조종사가 된 집요함으로, 1941년 구식 전술에 무너지는 공군을 보며 공중전 데이터를 기록·분석해 '고도-속도-기동-사격' 공식과 3층 '쿠반 계단' 편대, 진자 순찰 등 수직 전투 교리를 정립했다. 1943년 쿠반 공중전에서 입증된 이 전술은 소련 전투기 교리의 전환점이 되었다(공식 전과 650회 출격 53기 격추). 솔직하고 완고해 상관과 평생 마찰을 겪었고 스탈린 사후에야 장성 진급. 방공군 부총사령관·DOSAAF 의장을 지냈으며 브레즈네프의 전쟁 역할 과장을 끝내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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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1933제3페름 항공기술학교 졸업, 항공 정비사
1934–1938제74소총병사단 항공통신대 선임 항공기술사
1939카친 군사항공학교 졸업, 제55전투항공연대 전입
1941–1944제55(→제16근위)전투항공연대 비행대장·부연대장
1944–1945제9근위전투항공사단장, 베를린·프라하 작전 참가
1948프룬제 군사대학 졸업
1949–1955제33(→제88)전투항공군단 부사령관·사령관 (르제프)
1955–1956북캅카스 방공군 전투항공 사령관
1957참모 아카데미 졸업
1958–1968제52전투항공군 사령관 → 제8독립방공군 사령관 겸 키예프 군관구 방공부사령관
1949년 RDS-1 개발 당시, 플료로프는 플루토늄 임계질량을 직접 손으로 측정하는 실험을 자청했다. 동료들은 방사능 피폭을 우려했지만 그는 '데이터를 믿으려면 내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며 실험대에 올랐다.
소련 핵물리학자. 1940년 콘스탄틴 페트르자크와 함께 우라늄 자발 핵분열을 공동 발견했고, 1942년 전선에서 스탈린에게 서한을 보내 소련 원자폭탄 계획 재개를 촉구했다. RDS-1 개발 과정에서 직접 플루토늄 임계질량 실험을 수행했으며, 1957년 두브나에 핵반응연구소(FLNR)를 설립해 102번부터 106번까지 초중원소 합성을 주도했다. 그의 이름은 114번 원소 플레로븀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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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1941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LFTI), 쿠르차토프 연구실
1940콘스탄틴 페트르자크와 우라늄 자발 핵분열 공동 발견
1942스탈린에게 서한 — 서방 핵과학 침묵 경고, 원자폭탄 계획 재개 촉구
1943–1954소련 원자폭탄 프로젝트 참여, RDS-1 플루토늄 임계질량 실험 직접 수행
1957–1990두브나 핵반응연구소(FLNR) 설립자 겸 과학지도자, 102~106번 원소 합성 주도
각 공산당은 자기 인민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주의 나라들과 전 세계 공산주의 운동에 대해서도 책임을 진다.
모스크바철학문학역사연구소와 고등당학교를 거쳐 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국 선전부장을 지낸 소련의 철학자이자 당 이론가이다. 1965년부터 『프라우다』 선전부문 편집위원으로 재직하며 1968년 9월 26일 「사회주의 나라들의 주권과 국제적 의무」를 기고, 바르샤바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사회주의 공동체 수호'라는 국제주의적 의무로 정당화하는 논리를 제시했다. 이 글은 브레즈네프 독트린의 최초이자 가장 권위 있는 정식화로 받아들여졌으며, 이후 그는 『소비에트 대백과사전』 제1부편집장과 중앙위 부설 사회과학아카데미 교수를 역임하며 윤리학·공산주의 교양론 분야의 저작을 남겼다.
동시대인의 회고: "좁은 자리에서 친구들은 그를 '비챠-크로슈카(꼬마 비챠)'라 불렀다 — 그는 여섯 명의 수석설계자 중 가장 키가 컸다. 그리고 아마 가장 말이 없었다." — 야로슬라프 골로바노프
레닌그라드 공업대학 출신의 자이로스코프 공학자. 2차대전 중 함포 사격통제용 자이로 안정화 장치로 스탈린상을 받았고, 1946년 코롤료프의 '위대한 6인'에 합류해 소련 로켓의 관성항법을 확립했다. R-7(스푸트니크·가가린), R-16, R-36, UR-100 등 모든 소련 대륙간탄도미사일과 살류트·미르 우주정거장, 에네르기야-부란까지, 그의 자이로스코프 없이 발사된 소련 우주로켓은 없다. 1956년부터 이끈 NII-944은 현재 그의 이름을 딴 응용역학연구소(НИИ ПМ)로 남아 러시아 우주항법의 핵심이다. 가장 키가 컸지만 가장 말이 없었던 그를 동료들은 '비챠-크로슈카(꼬마 비챠)'라 불렀다.
사빈킨이 3년 넘게 부장 대행에 머물자 부서 평직원들조차 조바심을 냈다. 경찰 중장 치간니크는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 같은 평범한 직원들조차 그의 임명이 이례적으로 지연되는 데 지쳐 초조하게 결정을 기다렸습니다."
1968년부터 1987년까지 CPSU 중앙위 행정기관부장을 지내며 KGB·내무부·국방부·검찰·법원의 고위 간부 임명을 통제한 군사정치 간부다. 1935년 붉은 군대 입대 후 정치장교로 참전했고, 1950년부터 중앙위 기구에서 행정기관 부문 경력을 쌓았다. 1964년 전임자 미로노프의 급사로 부장 대행이 되었고, 3년 넘는 대행 끝에 1968년 정식 부장으로 임명되었다. 지나치게 신중한 성격으로 기억되며, 국방부 인사에 집중했고 1987년 퇴직할 때까지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 세 서기장을 거치며 전력 기관 인사 시스템의 보이지 않는 기둥이었다.
1980년 1월, 15년간 이끌어온 GKNT 의장직에서 스스로 물러나 과학아카데미 고온연구 부문으로 돌아갔다. 정치적 축출이 아닌, 연구 현장으로의 자발적 복귀였다.
열물리학자로 스탈린상(1951)과 레닌상(1959)을 수상한 키릴린은, 1965년부터 15년간 국가과학기술위원회(GKNT) 의장 겸 각료회의 부의장으로서 소비에트 민간 R&D 전체를 총괄했다. CPSU 중앙위 과학부장(1955–1962)과 과학아카데미 부총재를 거친 그는, 과학기술혁명기 소련의 국가혁신전략을 입안·집행한 핵심 인물이었다. GKNT가 군산복합체의 R&D 예산을 통제하지 못하는 구조적 한계 속에서도, 아카데미·산업·정부를 잇는 전방위 조정자로 활동했다.
1962년 5월 크렘린에서 흐루쇼프가 물었다. '카스트로가 핵미사일 배치를 받아들일까?' 알렉세예프는 회고했다. '당혹감을 애써 누르며 나는 피델이 그 제안에 동의하지 않으리라는 의심을 말했다.'
본명은 알렉산드르 시토프. 모스크바대학 역사학부를 졸업하고 1939년 NKVD에 들어가 이란·프랑스·아르헨티나에서 정보장교로 활동했다. 1959년 TASS 특파원 신분으로 쿠바에 도착해 피델 카스트로 및 체 게바라와 개인적 신뢰를 쌓았고, 1962년 5월 소련의 초대 주쿠바 대사로 임명되었다. 임명 직후 흐루쇼프에게 카스트로가 핵미사일 배치를 거부할 것이라고 경고했으나 흐루쇼프는 이를 무시했으며, 쿠바 미사일 위기 동안 카스트로의 핵 선제타격 주장을 진정시키고 모스크바와 아바나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했다.
BBC와의 인터뷰에서 외쳤다: "나는 스탈린의 인민위원이었다. 내가 '안 돼!'라고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소비에트 작곡가 동맹 서기장(1948–1991)으로 43년간 소련 음악계를 통제한 작곡가. 1948년 지하노프의 '형식주의 반대' 캠페인에서 프로코피예프·쇼스타코비치를 비판하는 연설로 스탈린의 신임을 얻어 발탁되었다. 흐루쇼프 시기 1948년 결정을 철회시키는 한편 젊은 음악가들을 후원한 이중적 인물로, 만년에는 페레스트로이카를 '배신'으로 규탄했다. 오페라 8편·교향곡 3편·영화음악 30편과 유행가 '모스크바의 창가'를 남겼으며, 사회주의 노동 영웅·레닌상·스탈린상 3회를 수상했다.
브레즈네프가 솔로멘체프를 러시아 각료회의 의장에 임명하며: "러시아에는 별도 공산당이 없으니, 내가 러시아 당 조직을 직접 이끌고 자네는 러시아 연방 담당 내 대리 역할을 해주게."
레닌그라드 공업대학 출신 기계기사로 방위공업 현장에서 시작해 1971년부터 12년간 러시아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을 지내며 소련 최대 공화국의 경제를 관장했고, 브레즈네프로부터 '러시아 연방 담당 부사령탑'이라는 비공식 위임을 받은 인물이다. 1983년 정치국원 겸 당통제위원장이 되어 1930~50년대 탄압 희생자 재활 위원회를 이끌었으나, 1988년 9월 고르바초프의 정치국 숙청으로 전격 해임되었다.
2009년 임종을 앞두고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 "이제 됐다. 안녕." 그리고 눈을 감았다.
소련 아동문학의 거장이자, 1944년판·1977년판 소련 국가와 2000년 러시아 국가 가사를 쓴 시인이다. 장편시 〈스표파 아저씨〉로 수십 년간 소련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았고, 풍자 뉴스릴 《피틸》의 창간자 겸 편집장으로도 이름을 남겼다. 1970년부터 1990년까지 러시아공화국 작가동맹 의장으로서 소비에트 문학 행정의 정점에 서 있었으며, 사회주의노동영웅·레닌상·세 차례 스탈린상을 받았다. 파스테르나크와 솔제니친 배척 운동에 가담한 문학 관료로서 비판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수많은 작가의 주거·구직·의료·구금 문제를 뒤에서 해결해 준 후원자이기도 했다.
1966년 2월 3일, 루나 9호가 인류 최초로 달에 연착륙하자 바바킨은 환호했다. "어떻게 착륙했는지 봤어?! 요람에 내려놓듯이!"
라보치킨 설계국(OKB-301) 수석설계자(1965–1971). 코롤료프에게서 무인 달·행성 탐사선 프로그램을 이관받아 세계 최초의 달 연착륙(루나 9호), 최초의 월면 로버(루노호트 1호), 최초의 로봇 월면 표본 귀환(루나 16호), 최초의 금성 착륙(베네라 7호)을 잇달아 성공시켰다. 라디오 기술자로 출발해 43세에야 학위를 받은 늦깎이였지만, 철저한 지상시험으로 코롤료프도 이루지 못한 탐사선 신뢰성을 이끌어냈다. 1971년 심장발작으로 급서. 달과 화성의 크레이터에 그의 이름이 붙었다.
1955년 젤도비치가 하리톤에게 보낸 메모는 이렇게 적었다. “원자 폭축 아이디어는 빅토르 알렉산드로비치 다비덴코의 것이다.”
빅토르 다비덴코는 소련의 핵·열핵무기 개발을 이끈 이론물리학자이자 실험 연구자였다. 그는 중성자 기폭장치 개발과 첫 소련 원자폭탄·수소폭탄 시험에 참여했으며, 1953년 말 원자폭발을 열핵 단계의 압축에 이용하는 2단계 구상의 출발점을 제시했다. 이 공로는 사하로프와 젤도비치의 후속 설계 및 소련 열핵무기 체계의 성립으로 이어졌지만, 그의 활동은 군사적 비밀과 국가 주도 과학의 틀 안에서 이루어졌다.
1958년 3월 8일, 첼로메이는 흐루쇼프의 아들 세르게이를 OKB-52의 엔지니어로 채용했다. 이 한 건의 인사로 그는 소련 최고 권력자의 눈과 귀를 직접 확보했고, 이후 6년간 코롤료프조차 넘볼 수 없는 정치적 후원 아래 소련 우주 계획의 정점으로 치솟았다.
소련의 대표적 로켓·우주기술 설계자로, OKB-52(후일 NPO 마시노스트로예니야)를 이끌며 프로톤 발사체, UR-100 대륙간탄도미사일, 알마즈 군사우주정거장, TKS 우주선을 만들었다. 1961년 코롤료프를 대신해 수석설계자회의 의장이 되었으나, 흐루쇼프의 아들 세르게이가 첼로메이 밑에서 일했던 인연 덕에 정치적 후원이 단단했다. 흐루쇼프 실각 후 우스티노프에게 밀려났고, 1981년에는 그의 우주 사업이 전면 중단되었다. 프로톤 로켓은 지금도 운용 중이며, UR-100은 소련 역사상 가장 많이 배치된 ICBM이다.
1956년 부다페스트, 대사관에서 헝가리 비밀경찰이 가로등에 매달리는 것을 보았고 군사 개입을 주장했다. 그 장면은 그를 평생 사로잡았고, 프라하와 카불과 바르샤바에서 그가 본 해답은 무력뿐이었다.
1914년 6월 15일(구력 6월 2일) 출생. 공식 자료는 스타브로폴 지방 출생으로 적지만 출생지와 혈통을 둘러싼 사료는 서로 어긋난다. 리빈스크 수운기술학교(1936년 졸)를 거쳐 카렐리야에서 콤소몰 활동을 했고, 주헝가리 대사(1954~57), 중앙위 사회주의국가 관계 부장(1957~67), KGB 의장(1967~82)을 지냈다. 반체제 탄압을 지휘해 1967년 제안으로 제5국을 만들고 1980년 사하로프를 고리키로 유배했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개입을 지지했고 1979년 아프간 진입의 주도자 중 한 명이었다. 1982년 11월 서기장이 되어 부패 간부를 숙청하고 개혁 구상에 착수했으며, 1984년 2월 9일 사망했다.
겨울전쟁 중 쿠타호프의 I-15bis 전투기가 아군기에게 핀란드기로 오인되어 피격됐다. 그는 만신창이가 된 기체를 소련 영토까지 끌고 와 불시착했고, 기체는 수리 불능이었지만 곧 다시 비행에 복귀했다.
파벨 쿠타호프는 1969년부터 사망한 1984년까지 15년간 소련 공군 총사령관을 지낸 최장기 재임자다. 독소전쟁에서 367회 출격, 79회 공중전을 치르며 13기 이상을 격추한 에이스로 1943년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되었고, 북극 호송선단 호위 공로로 영국 대영제국 훈장을 받았다. 총사령관으로서 MiG-23, MiG-25, Su-24, Tu-22M3, Tu-160 등 신형기를 도입하고 장거리 레이더 체계를 구축해 소련 공군을 전투기 13,000여 대 규모로 키웠다. 60세까지 직접 비행했고 1984년 70세 생일에 두 번째 영웅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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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1940제7전투항공연대 비행중대장 — 겨울전쟁 131회 출격
1941–1944제19근위전투항공연대 비행중대장 → 연대 부지휘관 — 367회 출격, HSU 1943
1987년 12월 8일 고르바초프와 레이건이 INF 조약으로 그의 RSD-10 Pioneer(SS-20) 728기를 폐기했을 때, 나디라제는 9월 3일 이미 사망해 이를 알지 못했다. 그가 설계한 Topol(SS-25)은 2023년 퇴역했다.
그루지야 고리에서 태어나 1938년부터 사망 때까지 모스크바의 방위 연구기관에서 일한 로켓 설계자. 1944년 당에 입당해 소련 시민으로 살았다. 세르게이 코롤료프의 추천으로 1958년 NII-1로 옮겨 특별설계국장을 맡았고, 1965년 MITT로 개칭된 연구소의 소장 겸 총설계자를 1987년까지 지냈다(사료에 따라 1961년부터). RT-21 Temp-2S(SS-16), RSD-10 Pioneer(SS-20), RT-2PM Topol(SS-25)을 설계해 전략로켓군에 이동식 고체연료 전력을 세웠다. 220건 이상의 발명과 100편 이상의 논문을 남겼고, 1987년 9월 3일 심장마비로 사망해 노보데비치 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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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41TsAGI에서 항공기 착륙장치 연구, Tu-2 개발 참여
1941–45대전차탄 개발, 로켓 설계로 전환
1945–53OKB 수석설계자: 소련 최초 기상로켓 MR-1, 유도폭탄 '차이카'
1958–61NII-1 수석설계자, 고체연료 전술미사일 Temp-S
1961–87MITT 소장 겸 총설계자(사료에 따라 1965년부터로도 기록): Temp-2S(SS-16), Pioneer(SS-20) 실전 배치, Topol(SS-25) 개발
1976–82사회주의노동영웅 2회 수훈(1976, 1982), Pioneer-UTTH 배치, 1981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1949년 8월 29일, 첫 소련 원자폭탄 실험 후 젤도비치가 떠올린 장면: "놀란 것은 풀이었다. 놀라운 정적이 흐르다가 갑자기 풀이 눕는 것이 보였다 — 충격파가 도착한 것이다. 정적과 쓰러진 풀, 그것이 핵폭발의 가장 강렬한 인상이었다."
민스크 유대인 가정 출신의 독학형 물리학자. 1939–1941년 하리톤과 우라늄 연쇄반응을 세계 최초로 계산했고, 아르자마스-16 이론부장으로 첫 소련 핵실험과 수소폭탄 계산을 주도했다. 1963년 핵무기 연구를 떠나 천체물리학으로 전환, 효과, 우주 대규모 구조, 블랙홀 증발의 기초를 개척했다. 1955년 '300인의 편지'에 서명, 영국 왕립학회·미국 국립과학원 외국회원.
1983년 3월 25일, 톨룹코는 중간 계급인 포병원수를 건너뛰고 대장에서 포병주력원수로 직접 진급했다. 소련 역사상 유일한 사례다.
독소전에서 전차장교로 단련되고 1972년부터 1985년까지 전략로켓군(RVSN)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으로 재임하며 MIRV 탑재 3세대 대륙간탄도미사일과 이동식 미사일 «피오네르»의 실전 배치를 주도하여 소련의 대미 전략적 균형을 완성한 군인이다. 1983년 대장에서 포병주력원수로 바로 진급한 유일한 사례로, 1962년 쿠바 미사일 배치 작전 「아나디리」 조직에도 핵심 역할을 했다.
보스토크 5호 발사 직전, 3단 'Go' 신호등이 들어오지 않자 위원회는 발사 중지 쪽으로 기울었다. 튤린은 코롤료프 편에 섰다 — 계측 오류다. 카운트다운을 재개했고, 발사는 완벽했다.
소련의 로켓우주 과학자이자 중장으로, GKOT 제1부의장(1963–1965)과 일반기계공업부 제1차관(1965–1976)을 지냈다. 국가위원회 의장으로서 테레시코바의 보스토크 6호, 레오노프의 첫 우주유영(보스호트 2호), 세계 최초 달 연착륙(루나 9호)과 루노호트(루나 17호) 등 역사적 발사마다 최종 발사 명령을 내렸다. 1974~1975년 아폴로-소유즈 계획의 소련 측 정부 책임자로서 공동 임무의 최종 책임을 맡았다. 14세 선반공으로 출발해 카추샤 로켓부대에서 복무한 포병장교 출신으로, 소련 로켓 프로그램을 제도화된 국가 역량으로 전환시킨 군사기술 관리자 중 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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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1944카추샤 로켓부대 포대장에서 근위박격포부대 작전반장까지, 서부·북서·제2발트 전선
1964년 10월, 흐루쇼프 실각 당시 그리신은 일리초프와 함께 흐루쇼프의 사임 성명 초안을 작성했다. 흐루쇼프는 자신의 정치적 죽음이 담긴 그 서류에 서명했고, 이후 브레즈네프 시대가 열렸다.
브레즈네프 시대 보수파의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로 18년간(1967~1985) 수도를 통치했다. 1971년 정치국 정위원이 되었고, 브레즈네프와 체르넨코 사후 두 차례 서기장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1985년 고르바초프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모스크바 인근 원전 건설을 저지해 체르노빌 이후 선견지명을 인정받았고, 1980년 올림픽 인프라를 총괄했다. 1992년 연금 재등록을 위해 구청 사회보장과를 찾았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후기 소비에트 체제의 안정과 정체를 동시에 체현했다.
1983년 12월 8일, 인권의 날 기자회견에서 루벤스는 고리키에 유배된 사하로프에 대해 "재능은 있지만 아픈 사람"이며 유배가 "무엇보다도 그 자신의 정신적 평화를 위해 필요했다"고 말했다.
모스크바 출신의 라트비아계 소비에트 정치인으로, 라트비아 SSR 각료회의 의장과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을 거쳐 브레즈네프 시기 소련 민족소비에트 의장(1974~1984)을 10년간 지냈다. 비러시아 공화국 출신 간부가 연방 의회 핵심직을 안정적으로 장기 수행한 보기 드문 사례로, 1959년 라트비아 민족공산주의자 숙청 이후 아르비트 펠셰가 발탁한 충성파 기술관료의 전형이었다.
1964년 10월, 프라하의 소련 대사관. 지먀닌은 모스크바에서 막 돌아와 수화기를 들고 크렘린 쿠데타의 성공을 자랑했다. 상대는 흐루쇼프의 아내 니나였다. '친애하는 레오니트 일리치가 제1서기에 취임했습니다!' 답이 없는 수화기 너머로, 니나는 그 순간 남편의 실각을 알게 되었다.
벨라루스 출신의 당 관료로, 11년간 『프라우다』 편집장을 지내며 소련 언론의 방향을 통제했다. 1976년 중앙위 서기에 올라 수슬로프의 지휘 아래 과학·교육·문화·체육·매체 전반을 관장하는 이념 제2인자가 되었다. 브레즈네프기 후반 보수적 이념 통제의 핵심 집행자였으며, 고르바초프 집권 2년차인 1987년 퇴진할 때까지 당 선전 기구의 연속성을 체현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