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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국가기관 인물 1086명

자보르 라술로비치 라술로프

Джабар Расулович Расуло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타지키스탄 1913–1982 ○ 자연사

21년간 타지키스탄을 이끈 농학자 출신 지도자, 검소와 청렴의 공산주의자

라술로프 사후 금고를 열자 저축 통장에 4,200루블과 수년치 개인 경비 영수증 뭉치가 나왔다. 보좌관은 '자동차 한 대 값도 안 되는 돈으로 21년간 공화국을 다스렸다'고 회고했다.

후잔트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타슈켄트 중앙아시아면화대학을 졸업한 농학자다. 바흐시 계곡 개간에서 출발해 타지크 SSR 농업인민위원(1941~1945)과 각료회의 의장(1946~1955)을 지내며 전후 복구를 지휘했고, 소련 농업부 제1차관과 초대 주토고 대사를 역임한 뒤 1961년 4월 타지크 공산당 제1서기에 올라 사망까지 21년간 공화국을 이끌었다. 재임기 누레크 수력발전소, 알루미늄 제련소 등 400여 개 공업 기업이 세워져 농업 중심 구조가 다부문 산업 구조로 전환했다. 9개 레닌 훈장을 받았으나 평생 양복 두 벌만 소유하고 출장에 도시락을 싸 다닌 청렴한 인물로 동시대인의 기억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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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1938타지크 SSR 바흐시 계곡 면화 재배 농업국 농학자
  • 1938–1940타지크 SSR 농업인민위원부 곡물관리국장
  • 1940–1941타지크 SSR 농업부인민위원
  • 1941–1945타지크 SSR 농업인민위원
  • 1946타지크 SSR 공예작물인민위원
  • 1946–1955타지크 SSR 각료회의 의장, 외무장관 겸임
  • 1955–1958소련 농업부 제1차관
  • 1958–1960타지크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60–1961주토고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61–1982타지크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포크리시킨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Покрышкин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913–1985 ○ 자연사

소련 전투기 전술을 다시 쓴 에이스, 전시에 세 번의 영웅 금성을 단 유일한 군인

참모 아카데미에서 한 동기가 1941년 아군 Su-2를 격추한 소련 전투기 이야기를 하자 포크리시킨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그게 나였소."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군 최고 득점 에이스이자 최초의 세 차례 소비에트 연방 영웅. 항공 정비사로 입대해 39통의 전입 신청 끝에 조종사가 된 집요함으로, 1941년 구식 전술에 무너지는 공군을 보며 공중전 데이터를 기록·분석해 '고도-속도-기동-사격' 공식과 3층 '쿠반 계단' 편대, 진자 순찰 등 수직 전투 교리를 정립했다. 1943년 쿠반 공중전에서 입증된 이 전술은 소련 전투기 교리의 전환점이 되었다(공식 전과 650회 출격 53기 격추). 솔직하고 완고해 상관과 평생 마찰을 겪었고 스탈린 사후에야 장성 진급. 방공군 부총사령관·DOSAAF 의장을 지냈으며 브레즈네프의 전쟁 역할 과장을 끝내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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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3제3페름 항공기술학교 졸업, 항공 정비사
  • 1934–1938제74소총병사단 항공통신대 선임 항공기술사
  • 1939카친 군사항공학교 졸업, 제55전투항공연대 전입
  • 1941–1944제55(→제16근위)전투항공연대 비행대장·부연대장
  • 1944–1945제9근위전투항공사단장, 베를린·프라하 작전 참가
  • 1948프룬제 군사대학 졸업
  • 1949–1955제33(→제88)전투항공군단 부사령관·사령관 (르제프)
  • 1955–1956북캅카스 방공군 전투항공 사령관
  • 1957참모 아카데미 졸업
  • 1958–1968제52전투항공군 사령관 → 제8독립방공군 사령관 겸 키예프 군관구 방공부사령관
  • 1968–1972소련 방공군 부총사령관
  • 1972–1981DOSAAF 중앙위원회 의장
  • 1976–1985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 1979–1984소비에트 연방 최고회의 간부위원회 위원
  • 1981–1985국방부 감찰총감단 감찰관·고문

게오르기 니콜라예비치 플료로프

Георгий Николаевич Флёр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13–1990 ○ 자연사

스탈린을 깨운 편지 한 통, 주기율표에 이름을 새긴 핵물리학자

1949년 RDS-1 개발 당시, 플료로프는 플루토늄 임계질량을 직접 손으로 측정하는 실험을 자청했다. 동료들은 방사능 피폭을 우려했지만 그는 '데이터를 믿으려면 내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며 실험대에 올랐다.

소련 핵물리학자. 1940년 콘스탄틴 페트르자크와 함께 우라늄 자발 핵분열을 공동 발견했고, 1942년 전선에서 스탈린에게 서한을 보내 소련 원자폭탄 계획 재개를 촉구했다. RDS-1 개발 과정에서 직접 플루토늄 임계질량 실험을 수행했으며, 1957년 두브나에 핵반응연구소(FLNR)를 설립해 102번부터 106번까지 초중원소 합성을 주도했다. 그의 이름은 114번 원소 플레로븀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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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41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LFTI), 쿠르차토프 연구실
  • 1940콘스탄틴 페트르자크와 우라늄 자발 핵분열 공동 발견
  • 1942스탈린에게 서한 — 서방 핵과학 침묵 경고, 원자폭탄 계획 재개 촉구
  • 1943–1954소련 원자폭탄 프로젝트 참여, RDS-1 플루토늄 임계질량 실험 직접 수행
  • 1957–1990두브나 핵반응연구소(FLNR) 설립자 겸 과학지도자, 102~106번 원소 합성 주도
  • 1968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선출

세르게이 미트로파노비치 코발료프

Сергей Митрофанович Ковалёв

프라우다 지면에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정식화한 소련 이념가

각 공산당은 자기 인민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주의 나라들과 전 세계 공산주의 운동에 대해서도 책임을 진다.

모스크바철학문학역사연구소와 고등당학교를 거쳐 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국 선전부장을 지낸 소련의 철학자이자 당 이론가이다. 1965년부터 『프라우다』 선전부문 편집위원으로 재직하며 1968년 9월 26일 「사회주의 나라들의 주권과 국제적 의무」를 기고, 바르샤바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사회주의 공동체 수호'라는 국제주의적 의무로 정당화하는 논리를 제시했다. 이 글은 브레즈네프 독트린의 최초이자 가장 권위 있는 정식화로 받아들여졌으며, 이후 그는 『소비에트 대백과사전』 제1부편집장과 중앙위 부설 사회과학아카데미 교수를 역임하며 윤리학·공산주의 교양론 분야의 저작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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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8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국 선전부장
  • 1948–1951전연방공산당 쿠르스크주위원회 서기
  • 1951–1956국영정치출판사(고스폴리티즈다트) 사장
  • 1960–1965『평화와 사회주의의 제문제』(프라하) 편집자
  • 1965–1971『프라우다』 선전부문 편집위원
  • 1971–1980『소비에트 대백과사전』 제1부편집장
  • 1980–1990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설 사회과학아카데미 교수

빅토르 이바노비치 쿠즈네초프

Виктор Иванович Кузнец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13–1991 ○ 자연사

'위대한 6인' 중 가장 키 크고 말 없는, 소련 로켓의 눈을 만든 자이로스코프의 아버지

동시대인의 회고: "좁은 자리에서 친구들은 그를 '비챠-크로슈카(꼬마 비챠)'라 불렀다 — 그는 여섯 명의 수석설계자 중 가장 키가 컸다. 그리고 아마 가장 말이 없었다." — 야로슬라프 골로바노프

레닌그라드 공업대학 출신의 자이로스코프 공학자. 2차대전 중 함포 사격통제용 자이로 안정화 장치로 스탈린상을 받았고, 1946년 코롤료프의 '위대한 6인'에 합류해 소련 로켓의 관성항법을 확립했다. R-7(스푸트니크·가가린), R-16, R-36, UR-100 등 모든 소련 대륙간탄도미사일과 살류트·미르 우주정거장, 에네르기야-부란까지, 그의 자이로스코프 없이 발사된 소련 우주로켓은 없다. 1956년부터 이끈 NII-944은 현재 그의 이름을 딴 응용역학연구소(НИИ ПМ)로 남아 러시아 우주항법의 핵심이다. 가장 키가 컸지만 가장 말이 없었던 그를 동료들은 '비챠-크로슈카(꼬마 비챠)'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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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40레닌그라드 제212공장(전기계기) 연구기사, 함선용 자이로컴퍼스 개발
  • 1940–43모스크바 NII-10 자이로스코프 부장, 함포 사격통제 안정화 장치로 스탈린상(1943)
  • 1943–46MNI-1 특별설계국 수석설계자, 전차 주포용 안정기 개발
  • 1946–56NII-10 수석설계자, '위대한 6인' 합류 — R-1·R-2·R-5 유도장치 개발
  • 1956NII-944(현 응용역학연구소) 주임기사 겸 수석설계자 — R-7 유도장치, 사회주의노동영웅(1차)
  • 1957/1961스푸트니크·보스토크(가가린) 발사 성공, 레닌상, 사회주의노동영웅(2차)
  • 1960s–80sR-16·R-36·UR-100 ICBM, 루나·베네라·마스 탐사선, 살류트·미르·에네르기야-부란 유도장치
  • 1968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1958 준회원, 1949 포병과학아카데미 준회원)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사빈킨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Савинкин

브레즈네프 시기 19년간 소련 전력 기관들의 인사 문지기

사빈킨이 3년 넘게 부장 대행에 머물자 부서 평직원들조차 조바심을 냈다. 경찰 중장 치간니크는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 같은 평범한 직원들조차 그의 임명이 이례적으로 지연되는 데 지쳐 초조하게 결정을 기다렸습니다."

1968년부터 1987년까지 CPSU 중앙위 행정기관부장을 지내며 KGB·내무부·국방부·검찰·법원의 고위 간부 임명을 통제한 군사정치 간부다. 1935년 붉은 군대 입대 후 정치장교로 참전했고, 1950년부터 중앙위 기구에서 행정기관 부문 경력을 쌓았다. 1964년 전임자 미로노프의 급사로 부장 대행이 되었고, 3년 넘는 대행 끝에 1968년 정식 부장으로 임명되었다. 지나치게 신중한 성격으로 기억되며, 국방부 인사에 집중했고 1987년 퇴직할 때까지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 세 서기장을 거치며 전력 기관 인사 시스템의 보이지 않는 기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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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붉은 군대 입대, 무선통신대대 사병 및 하급 지휘관
  • 1937적군 화학연구소 콤소몰 서기
  • 1939–1941군사정치 아카데미 수학, 서부전선 제33군 정치부 선전담당 고등교관
  • 1942–1944자바이칼 전선: 여단 정치부장, 전선 정치부 간부부 차장, 총정치국 간부국 고등교관
  • 1947–1950군사정치 아카데미 복학 및 졸업
  • 1950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행정부 교관
  • 1952–1959중앙위 행정부문 육군 부문장, 부문 차장 등 역임
  • 1959–1968중앙위 행정기관부 차장 → 제1차장, 1964년 10월부터 부장 대행
  • 1968–1987CPSU 중앙위원회 행정기관부장

블라디미르 알렉세예비치 키릴린

Владимир Алексеевич Кириллин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13–1999 ○ 자연사

과학기술혁명기 소련 민간 R&D의 총괄 설계자

1980년 1월, 15년간 이끌어온 GKNT 의장직에서 스스로 물러나 과학아카데미 고온연구 부문으로 돌아갔다. 정치적 축출이 아닌, 연구 현장으로의 자발적 복귀였다.

열물리학자로 스탈린상(1951)과 레닌상(1959)을 수상한 키릴린은, 1965년부터 15년간 국가과학기술위원회(GKNT) 의장 겸 각료회의 부의장으로서 소비에트 민간 R&D 전체를 총괄했다. CPSU 중앙위 과학부장(1955–1962)과 과학아카데미 부총재를 거친 그는, 과학기술혁명기 소련의 국가혁신전략을 입안·집행한 핵심 인물이었다. GKNT가 군산복합체의 R&D 예산을 통제하지 못하는 구조적 한계 속에서도, 아카데미·산업·정부를 잇는 전방위 조정자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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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1954모스크바동력학원(MPEI) — 기술자, 대학원, 교수, 부원장
  • 1954–1955소련 고등교육부 차관
  • 1955–1962CPSU 중앙위원회 과학·고등교육·학교부장
  • 1963–1965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65–1980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과학기술위원회(GKNT) 의장
  • 1980–1988과학아카데미 물리기술학·에너지학부 아카데미크-서기, 이후 상임간부회 고문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알렉세예프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Алексеев

카스트로의 신뢰를 얻은 소련 정보장교 출신 초대 주쿠바 대사

1962년 5월 크렘린에서 흐루쇼프가 물었다. '카스트로가 핵미사일 배치를 받아들일까?' 알렉세예프는 회고했다. '당혹감을 애써 누르며 나는 피델이 그 제안에 동의하지 않으리라는 의심을 말했다.'

본명은 알렉산드르 시토프. 모스크바대학 역사학부를 졸업하고 1939년 NKVD에 들어가 이란·프랑스·아르헨티나에서 정보장교로 활동했다. 1959년 TASS 특파원 신분으로 쿠바에 도착해 피델 카스트로 및 체 게바라와 개인적 신뢰를 쌓았고, 1962년 5월 소련의 초대 주쿠바 대사로 임명되었다. 임명 직후 흐루쇼프에게 카스트로가 핵미사일 배치를 거부할 것이라고 경고했으나 흐루쇼프는 이를 무시했으며, 쿠바 미사일 위기 동안 카스트로의 핵 선제타격 주장을 진정시키고 모스크바와 아바나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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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39스페인 내전 소련 군사고문단 통역
  • 1941–1943이란 주재 NKVD 정보장교
  • 1944–1951파리 주재 NKVD/KI 레지던트 (공식 직함: 대사관 아타셰)
  • 1954–1958아르헨티나 주재 KGB 레지던트 겸 대사관 1등서기관
  • 1959–1960쿠바 주재 TASS 특파원 겸 KGB 레지던트
  • 1960–1962주쿠바 소련 대사관 문화고문
  • 1962–1968주쿠바 소련 대사
  • 1974–1980주마다가스카르 소련 대사

티혼 니콜라예비치 흐레니코프

Тихон Николаевич Хренников
이념·선전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913–2007 ○ 자연사

43년간 소비에트 음악의 문지기

BBC와의 인터뷰에서 외쳤다: "나는 스탈린의 인민위원이었다. 내가 '안 돼!'라고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소비에트 작곡가 동맹 서기장(1948–1991)으로 43년간 소련 음악계를 통제한 작곡가. 1948년 지하노프의 '형식주의 반대' 캠페인에서 프로코피예프·쇼스타코비치를 비판하는 연설로 스탈린의 신임을 얻어 발탁되었다. 흐루쇼프 시기 1948년 결정을 철회시키는 한편 젊은 음악가들을 후원한 이중적 인물로, 만년에는 페레스트로이카를 '배신'으로 규탄했다. 오페라 8편·교향곡 3편·영화음악 30편과 유행가 '모스크바의 창가'를 남겼으며, 사회주의 노동 영웅·레닌상·스탈린상 3회를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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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1932그네신 음악전문학교 작곡·피아노 전공
  • 1932–1936모스크바 음악원 셰발린(작곡)·네이가우스(피아노) 사사
  • 1935교향곡 1번 초연, 스토코프스키·토스카니니 해외 연주
  • 1941–1967붉은군대 중앙극장 음악감독
  • 1948–1991소비에트 작곡가 동맹 서기장 (1957년까지 총서기, 이후 제1서기)
  • 1961–2007모스크바 음악원 교수 (1966년부터 정교수)
  • 1962–1989소비에트 최고회의 대의원
  • 1976–1990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솔로멘체프

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Соломенце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13–2008 ○ 자연사

러시아 공화국을 12년간 이끈 브레즈네프 시대의 산업 테크노크라트

브레즈네프가 솔로멘체프를 러시아 각료회의 의장에 임명하며: "러시아에는 별도 공산당이 없으니, 내가 러시아 당 조직을 직접 이끌고 자네는 러시아 연방 담당 내 대리 역할을 해주게."

레닌그라드 공업대학 출신 기계기사로 방위공업 현장에서 시작해 1971년부터 12년간 러시아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을 지내며 소련 최대 공화국의 경제를 관장했고, 브레즈네프로부터 '러시아 연방 담당 부사령탑'이라는 비공식 위임을 받은 인물이다. 1983년 정치국원 겸 당통제위원장이 되어 1930~50년대 탄압 희생자 재활 위원회를 이끌었으나, 1988년 9월 고르바초프의 정치국 숙청으로 전격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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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레닌그라드 공업대학 졸업, 방위공업 공장 배치
  • 1941–1948우랄 대피 공장에서 당 조직원으로 활동
  • 1948–1954즐라토우스트·첼랴빈스크 공장 주임기사 → 공장장
  • 1955–1959첼랴빈스크 주당위 서기 → 제2서기 → 소브나르호스 의장
  • 1959–1962카자흐스탄 카라간다 주당위 제1서기
  • 1962–1964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
  • 1964–1966로스토프 주당위 제1서기
  • 1966–1971CPSU 중앙위 서기 겸 중공업부장
  • 1971–1983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각료회의 의장
  • 1983–1988CPSU 중앙위 당통제위원장, 정치국 정위원
  • 1987–1988정치국 1930~50년대 탄압 희생자 재활 위원회 위원장
  • 19889월 중앙위 총회에서 전격 해임, 은퇴

세르게이 블라디미로비치 미할코프

Сергей Владимирович Михалков
이념·선전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13–2009 ○ 자연사

스탈린부터 푸틴까지 국가를 쓴 시인

2009년 임종을 앞두고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 "이제 됐다. 안녕." 그리고 눈을 감았다.

소련 아동문학의 거장이자, 1944년판·1977년판 소련 국가와 2000년 러시아 국가 가사를 쓴 시인이다. 장편시 〈스표파 아저씨〉로 수십 년간 소련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았고, 풍자 뉴스릴 《피틸》의 창간자 겸 편집장으로도 이름을 남겼다. 1970년부터 1990년까지 러시아공화국 작가동맹 의장으로서 소비에트 문학 행정의 정점에 서 있었으며, 사회주의노동영웅·레닌상·세 차례 스탈린상을 받았다. 파스테르나크솔제니친 배척 운동에 가담한 문학 관료로서 비판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수많은 작가의 주거·구직·의료·구금 문제를 뒤에서 해결해 준 후원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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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장편시 〈스표파 아저씨〉 발표
  • 1937소련 작가동맹 가입
  • 1941–1945군사통신원으로 복무, 오데사·세바스토폴 방어전 참전
  • 1944엘레기스탄과 공동으로 소련 국가 가사 집필 (스탈린판)
  • 1950CPSU 입당
  • 1962–2008풍자 뉴스릴 《피틸》 창간·편집장
  • 1965–1970소련 작가동맹 모스크바 지부 제1서기 · 소련 작가동맹 이사회 서기
  • 1970–1990러시아공화국(RSFSR) 작가동맹 의장
  • 1977소련 국가 가사 개정판 집필 (스탈린 언급 삭제)
  • 2000러시아 연방 국가 가사 집필 (푸틴판)

게오르기 니콜라예비치 바바킨

Георгий Николаевич Бабакин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14–1971 ○ 심장마비

루나 9호·루노호트의 수석설계자, 달과 금성에 최초로 닿은 자동탐사선을 만든 사람

1966년 2월 3일, 루나 9호가 인류 최초로 달에 연착륙하자 바바킨은 환호했다. "어떻게 착륙했는지 봤어?! 요람에 내려놓듯이!"

라보치킨 설계국(OKB-301) 수석설계자(1965–1971). 코롤료프에게서 무인 달·행성 탐사선 프로그램을 이관받아 세계 최초의 달 연착륙(루나 9호), 최초의 월면 로버(루노호트 1호), 최초의 로봇 월면 표본 귀환(루나 16호), 최초의 금성 착륙(베네라 7호)을 잇달아 성공시켰다. 라디오 기술자로 출발해 43세에야 학위를 받은 늦깎이였지만, 철저한 지상시험으로 코롤료프도 이루지 못한 탐사선 신뢰성을 이끌어냈다. 1971년 심장발작으로 급서. 달과 화성의 크레이터에 그의 이름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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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모스크바 시 전화국 라디오 서비스 기술자
  • 1937전연방 통신기술학교 연구원
  • 1943자동화연구소(VSNITO) 레이더·유도체계 연구실장, 수석기술자
  • 1949NII-88 체르톡 부서 지대공미사일·유도체계 연구
  • 1952OKB-301(라보치킨) 순항미사일 부랴·V-300 대공미사일 개발
  • 1965OKB-301 / NPO 라보치킨 수석설계자 — 무인 달·행성 탐사선 총괄
  • 1966루나 9호 세계 최초 달 연착륙, 루나 10호 최초 달 인공위성
  • 1970루나 16호 로봇 표본 귀환, 루노호트 1호 월면 로버, 베네라 7호 금성 착륙
  • 1971마르스 2·3호 발사 — 8월 3일 심장발작으로 급서

빅토르 알렉산드로비치 다비덴코

Викто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Давиденко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계 1914–1983 ○ 자연사

열핵무기 2단계 구상의 선구자

1955년 젤도비치하리톤에게 보낸 메모는 이렇게 적었다. “원자 폭축 아이디어는 빅토르 알렉산드로비치 다비덴코의 것이다.”

빅토르 다비덴코는 소련의 핵·열핵무기 개발을 이끈 이론물리학자이자 실험 연구자였다. 그는 중성자 기폭장치 개발과 첫 소련 원자폭탄·수소폭탄 시험에 참여했으며, 1953년 말 원자폭발을 열핵 단계의 압축에 이용하는 2단계 구상의 출발점을 제시했다. 이 공로는 사하로프와 젤도비치의 후속 설계 및 소련 열핵무기 체계의 성립으로 이어졌지만, 그의 활동은 군사적 비밀과 국가 주도 과학의 틀 안에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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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7레닌그라드 산업대학, 학생
  • 1937–1940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 연구원
  • 1943–1948소련 과학아카데미 제2연구소, 연구원
  • 1948–1952KB-11, 연구원·부서장
  • 1952–1963KB-11, 부문장·과학 부책임자
  • 1963–1983쿠르차토프 원자력연구소 및 합동핵연구소, 연구자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첼로메이

Владимир Николаевич Челомей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폴란드 1914–1984 ○ 자연사

흐루쇼프의 후원으로 코롤료프를 넘었으나, 후원자가 몰락하자 밀려난 미사일 설계자

1958년 3월 8일, 첼로메이는 흐루쇼프의 아들 세르게이를 OKB-52의 엔지니어로 채용했다. 이 한 건의 인사로 그는 소련 최고 권력자의 눈과 귀를 직접 확보했고, 이후 6년간 코롤료프조차 넘볼 수 없는 정치적 후원 아래 소련 우주 계획의 정점으로 치솟았다.

소련의 대표적 로켓·우주기술 설계자로, OKB-52(후일 NPO 마시노스트로예니야)를 이끌며 프로톤 발사체, UR-100 대륙간탄도미사일, 알마즈 군사우주정거장, TKS 우주선을 만들었다. 1961년 코롤료프를 대신해 수석설계자회의 의장이 되었으나, 흐루쇼프의 아들 세르게이가 첼로메이 밑에서 일했던 인연 덕에 정치적 후원이 단단했다. 흐루쇼프 실각 후 우스티노프에게 밀려났고, 1981년에는 그의 우주 사업이 전면 중단되었다. 프로톤 로켓은 지금도 운용 중이며, UR-100은 소련 역사상 가장 많이 배치된 ICB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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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키예프 항공대학 졸업, 진동 이론 논문으로 주목
  • 1941중앙항공발동기연구소(CIAM) 입소, VKP(b) 입당
  • 1944–53OKB-51 소장 겸 수석설계자: V-1 기반 순항미사일 10Х 개발
  • 1955OKB-52(현 NPO 마시노스트로예니야) 수석설계자
  • 1961–64수석설계자회의 의장으로 코롤료프 계승
  • 1965프로톤 발사체 첫 비행, UR-100 ICBM 배치 시작
  • 1970s알마즈 군사우주정거장 · TKS 수송선 개발
  • 1981–84우주 사업 중단 명령; 모교에서 강의하며 조용히 말년을 보냄

유리 블라디미로비치 안드로포프

Юрий Владимирович Андропов

KGB에서 개혁가를 길러 낸 역설

1956년 부다페스트, 대사관에서 헝가리 비밀경찰이 가로등에 매달리는 것을 보았고 군사 개입을 주장했다. 그 장면은 그를 평생 사로잡았고, 프라하와 카불과 바르샤바에서 그가 본 해답은 무력뿐이었다.

1914년 6월 15일(구력 6월 2일) 출생. 공식 자료는 스타브로폴 지방 출생으로 적지만 출생지와 혈통을 둘러싼 사료는 서로 어긋난다. 리빈스크 수운기술학교(1936년 졸)를 거쳐 카렐리야에서 콤소몰 활동을 했고, 주헝가리 대사(1954~57), 중앙위 사회주의국가 관계 부장(1957~67), KGB 의장(1967~82)을 지냈다. 반체제 탄압을 지휘해 1967년 제안으로 제5국을 만들고 1980년 사하로프를 고리키로 유배했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개입을 지지했고 1979년 아프간 진입의 주도자 중 한 명이었다. 1982년 11월 서기장이 되어 부패 간부를 숙청하고 개혁 구상에 착수했으며, 1984년 2월 9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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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57부다페스트 주재 대사: 1956년 개입의 현장
  • 1957–67중앙위 사회주의국가 관계 부장
  • 1967–82KGB 의장: 반체제 단속, 제5국 신설
  • 1979아프가니스탄 개입 결정의 핵심 3인
  • 1982–84서기장: 규율 캠페인, 고르바초프 등 신진 발탁

파벨 스테파노비치 쿠타호프

Павел Степанович Кутах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러시아인 1914–1984 ○ 뇌졸중

소련 공군 최장기 총사령관, 냉전기 공군력을 정점으로 이끈 에이스 출신 지휘관

겨울전쟁 중 쿠타호프의 I-15bis 전투기가 아군기에게 핀란드기로 오인되어 피격됐다. 그는 만신창이가 된 기체를 소련 영토까지 끌고 와 불시착했고, 기체는 수리 불능이었지만 곧 다시 비행에 복귀했다.

파벨 쿠타호프는 1969년부터 사망한 1984년까지 15년간 소련 공군 총사령관을 지낸 최장기 재임자다. 독소전쟁에서 367회 출격, 79회 공중전을 치르며 13기 이상을 격추한 에이스로 1943년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되었고, 북극 호송선단 호위 공로로 영국 대영제국 훈장을 받았다. 총사령관으로서 MiG-23, MiG-25, Su-24, Tu-22M3, Tu-160 등 신형기를 도입하고 장거리 레이더 체계를 구축해 소련 공군을 전투기 13,000여 대 규모로 키웠다. 60세까지 직접 비행했고 1984년 70세 생일에 두 번째 영웅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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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0제7전투항공연대 비행중대장 — 겨울전쟁 131회 출격
  • 1941–1944제19근위전투항공연대 비행중대장 → 연대 부지휘관 — 367회 출격, HSU 1943
  • 1944–1948제20근위전투항공연대장
  • 1954–1957제71전투항공군단장 (주독 소련군)
  • 1961–1967제48항공군 사령관
  • 1967–1969소련 공군 제1부총사령관
  • 1969–1984소련 공군 총사령관 · 국방부 차관

알렉산드르 다비도비치 나디라제

Александр Давидович Надирадзе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그루지야 1914–1987 ○ 심장마비

소련 이동식 ICBM 전력의 창시자, 그루지야 태생의 비밀 설계자

1987년 12월 8일 고르바초프레이건이 INF 조약으로 그의 RSD-10 Pioneer(SS-20) 728기를 폐기했을 때, 나디라제는 9월 3일 이미 사망해 이를 알지 못했다. 그가 설계한 Topol(SS-25)은 2023년 퇴역했다.

그루지야 고리에서 태어나 1938년부터 사망 때까지 모스크바의 방위 연구기관에서 일한 로켓 설계자. 1944년 당에 입당해 소련 시민으로 살았다. 세르게이 코롤료프의 추천으로 1958년 NII-1로 옮겨 특별설계국장을 맡았고, 1965년 MITT로 개칭된 연구소의 소장 겸 총설계자를 1987년까지 지냈다(사료에 따라 1961년부터). RT-21 Temp-2S(SS-16), RSD-10 Pioneer(SS-20), RT-2PM Topol(SS-25)을 설계해 전략로켓군에 이동식 고체연료 전력을 세웠다. 220건 이상의 발명과 100편 이상의 논문을 남겼고, 1987년 9월 3일 심장마비로 사망해 노보데비치 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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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41TsAGI에서 항공기 착륙장치 연구, Tu-2 개발 참여
  • 1941–45대전차탄 개발, 로켓 설계로 전환
  • 1945–53OKB 수석설계자: 소련 최초 기상로켓 MR-1, 유도폭탄 '차이카'
  • 1958–61NII-1 수석설계자, 고체연료 전술미사일 Temp-S
  • 1961–87MITT 소장 겸 총설계자(사료에 따라 1965년부터로도 기록): Temp-2S(SS-16), Pioneer(SS-20) 실전 배치, Topol(SS-25) 개발
  • 1976–82사회주의노동영웅 2회 수훈(1976, 1982), Pioneer-UTTH 배치, 1981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77–87Topol(SS-25) 설계, 국가상 수상(1987), 심장마비로 사망

야코프 보리소비치 젤도비치

Яков Борисович Зельдович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벨라루스 1914–1987 ○ 자연사

스스로 배운 물리학자에서 소련 핵무기 이론가·우주론의 거인이 된 세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1949년 8월 29일, 첫 소련 원자폭탄 실험 후 젤도비치가 떠올린 장면: "놀란 것은 풀이었다. 놀라운 정적이 흐르다가 갑자기 풀이 눕는 것이 보였다 — 충격파가 도착한 것이다. 정적과 쓰러진 풀, 그것이 핵폭발의 가장 강렬한 인상이었다."

민스크 유대인 가정 출신의 독학형 물리학자. 1939–1941년 하리톤과 우라늄 연쇄반응을 세계 최초로 계산했고, 아르자마스-16 이론부장으로 첫 소련 핵실험과 수소폭탄 계산을 주도했다. 1963년 핵무기 연구를 떠나 천체물리학으로 전환, 효과, 우주 대규모 구조, 블랙홀 증발의 기초를 개척했다. 1955년 '300인의 편지'에 서명, 영국 왕립학회·미국 국립과학원 외국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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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1934화학물리연구소 실험조수, 레닌그라드 대학 청강
  • 1936이학준박사 취득 — 흡착이론
  • 1939이학박사 취득 — 질소산화열역학(Zeldovich mechanism)
  • 1939–1941하리톤과 우라늄 연쇄반응 최초 동역학 계산
  • 1943–1946쿠르차토프 원자폭탄 팀 합류, 모스크바 비밀연구소
  • 1946–1963아르자마스-16(KB-11) 이론부장 — 핵·열핵무기 계산 주도
  • 1958–1987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63–1987천체물리학·우주론 전념 — 모스크바대 교수, 슈테른베르크 천문연구소

블라디미르 표도로비치 톨룹코

Владимир Фёдорович Толубко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914–1989 ○ 자연사

소련 전략로켓군을 대미 전략적 균형으로 이끈 사령관

1983년 3월 25일, 톨룹코는 중간 계급인 포병원수를 건너뛰고 대장에서 포병주력원수로 직접 진급했다. 소련 역사상 유일한 사례다.

독소전에서 전차장교로 단련되고 1972년부터 1985년까지 전략로켓군(RVSN)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으로 재임하며 MIRV 탑재 3세대 대륙간탄도미사일과 이동식 미사일 «피오네르»의 실전 배치를 주도하여 소련의 대미 전략적 균형을 완성한 군인이다. 1983년 대장에서 포병주력원수로 바로 진급한 유일한 사례로, 1962년 쿠바 미사일 배치 작전 「아나디리」 조직에도 핵심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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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독소전 참전, 전차여단 지휘 및 4근위기계화군단 작전과장
  • 1951–1960주동독 제19근위기계화사단장 → 제1근위전차군 → 제8근위군 사령관
  • 1960–1968전략로켓군 제1부사령관, 작전 「아나디리」(쿠바 미사일 배치) 조직 참여
  • 1968–1972시베리아·극동 군관구 사령관
  • 1972–1985전략로켓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 3세대 미사일 배치 주도
  • 1983대장에서 포병주력원수로 직접 진급 (소련 역사상 유일)

키릴 트로피모비치 마주로프

Кирилл Трофимович Мазуро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벨라루스 1914–1989 ○ 자연사

파르티잔 출신 벨라루스 지도자, 브레즈네프 정치국원 겸 연방 부총리

오늘날 내가 같은 작전을 지휘하라는 제안을 받는다면, 나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체코인들에게 우리를 용서해 달라고 부탁한다.

벨라루스 파르티잔 지도자로 1956년 벨라루스 공산당 제1서기, 1965년부터 소련 정치국 정위원 겸 제1부총리로 13년간 경제를 총괄했으며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의 정치감독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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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1936파리치 지역 도로부 기술자, 고멜 자동차도로기술학교 졸업
  • 1936–1938붉은 군대 복무, 이후 벨라루스 철도 정치부 근무
  • 1940–1941고멜 시 콤소몰 비서 → 브레스트 주 콤소몰 제1서기
  • 1942–1943중앙유격대본부 대표로 벨라루스 파르티잔 운동 지도 (중령 → 대령)
  • 1943–1947벨라루스 콤소몰 중앙위 제2서기 → 제1서기
  • 1949–1950민스크 시당위 제2서기 → 제1서기
  • 1950–1953민스크 주당위 제1서기
  • 1953–1956벨라루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56–1965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57–1965CPSU 중앙위 간부회 후보위원
  • 1965–1978CPSU 정치국 정위원 겸 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진입 작전 현장 정치감독관
  • 1986–1989전연방 전쟁·노동 재향군인회 초대 의장

게오르기 알렉산드로비치 튤린

Георг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Тюлин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914–1990 ○ 자연사

테레시코바, 레오노프, 루노호트의 발사에 'Go'를 내린 사람

보스토크 5호 발사 직전, 3단 'Go' 신호등이 들어오지 않자 위원회는 발사 중지 쪽으로 기울었다. 튤린은 코롤료프 편에 섰다 — 계측 오류다. 카운트다운을 재개했고, 발사는 완벽했다.

소련의 로켓우주 과학자이자 중장으로, GKOT 제1부의장(1963–1965)과 일반기계공업부 제1차관(1965–1976)을 지냈다. 국가위원회 의장으로서 테레시코바의 보스토크 6호, 레오노프의 첫 우주유영(보스호트 2호), 세계 최초 달 연착륙(루나 9호)과 루노호트(루나 17호) 등 역사적 발사마다 최종 발사 명령을 내렸다. 1974~1975년 아폴로-소유즈 계획의 소련 측 정부 책임자로서 공동 임무의 최종 책임을 맡았다. 14세 선반공으로 출발해 카추샤 로켓부대에서 복무한 포병장교 출신으로, 소련 로켓 프로그램을 제도화된 국가 역량으로 전환시킨 군사기술 관리자 중 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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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4카추샤 로켓부대 포대장에서 근위박격포부대 작전반장까지, 서부·북서·제2발트 전선
  • 1945–1946독일서 V-2 로켓 기술 회수팀 지휘 ('튤린 경영')
  • 1948–1955NII-4 탄도연구소장 → 과학담당 부소장 → 제1부소장
  • 1959–1961NII-88 (후일 TsNIIMash) 소장
  • 1961–1965국방기술국가위원회(GKOT) 부의장 → 제1부의장
  • 1965–1976일반기계공업부 제1차관 (S. A. 아파나시예프 장관 아래)
  • 1974–1975아폴로-소유즈 시험계획(EPAS) 소련 측 조정위원회 의장
  • 1977–1990모스크바국립대학교 기계수학부 파동역학연구실 조직·지도

빅토르 바실리예비치 그리신

Виктор Васильевич Гришин

18년간 모스크바를 통치하고 연금 재신청 중 사망한 브레즈네프 시대의 얼굴

1964년 10월, 흐루쇼프 실각 당시 그리신은 일리초프와 함께 흐루쇼프의 사임 성명 초안을 작성했다. 흐루쇼프는 자신의 정치적 죽음이 담긴 그 서류에 서명했고, 이후 브레즈네프 시대가 열렸다.

브레즈네프 시대 보수파의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로 18년간(1967~1985) 수도를 통치했다. 1971년 정치국 정위원이 되었고, 브레즈네프와 체르넨코 사후 두 차례 서기장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1985년 고르바초프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모스크바 인근 원전 건설을 저지해 체르노빌 이후 선견지명을 인정받았고, 1980년 올림픽 인프라를 총괄했다. 1992년 연금 재등록을 위해 구청 사회보장과를 찾았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후기 소비에트 체제의 안정과 정체를 동시에 체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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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38측량기사, 기관차 차량기지 부책임자
  • 1941–50세르푸호프 시당 제2서기 → 제1서기
  • 1950–52모스크바 주당 기계제조부장 → 제2서기
  • 1956–67전소비에트 중앙노동조합평의회(VTsSPS) 의장 · 세계노조연맹 부의장
  • 1967.06–1985.12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
  • 1971.04–1986.02정치국 정위원 (1961년부터 후보위원)
  • 1980모스크바 올림픽 인프라 건설 총괄
  • 1986–87최고소비에트 상무회 국가고문, 이후 연금 생활

비탈리스 페트로비치 루벤스

Виталий Петрович Рубен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라트비아 1914–1994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기 민족소비에트를 10년간 이끈 라트비아인

1983년 12월 8일, 인권의 날 기자회견에서 루벤스는 고리키에 유배된 사하로프에 대해 "재능은 있지만 아픈 사람"이며 유배가 "무엇보다도 그 자신의 정신적 평화를 위해 필요했다"고 말했다.

모스크바 출신의 라트비아계 소비에트 정치인으로, 라트비아 SSR 각료회의 의장과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을 거쳐 브레즈네프 시기 소련 민족소비에트 의장(1974~1984)을 10년간 지냈다. 비러시아 공화국 출신 간부가 연방 의회 핵심직을 안정적으로 장기 수행한 보기 드문 사례로, 1959년 라트비아 민족공산주의자 숙청 이후 아르비트 펠셰가 발탁한 충성파 기술관료의 전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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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1941농업전문학교 졸업 후 농학자로 근무
  • 1942–1943리빈스크 지구신문 《스타하노프 노동》 편집장
  • 1947–1948라트비아 공산당 다우가프필스 군위원회 제2서기
  • 1958–1960라트비아 SSR 국가계획위 농업·조달부장
  • 1960–1961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 농업부장
  • 1962–1970라트비아 SSR 각료회의 의장
  • 1970–1974라트비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 · 소련 최고회의 간부회 부의장
  • 1974–1984소련 최고회의 민족소비에트 의장

미하일 바실리예비치 지먀닌

Михаил Васильевич Зимянин

브레즈네프 시대 '2인자 당 이데올로그'

1964년 10월, 프라하의 소련 대사관. 지먀닌은 모스크바에서 막 돌아와 수화기를 들고 크렘린 쿠데타의 성공을 자랑했다. 상대는 흐루쇼프의 아내 니나였다. '친애하는 레오니트 일리치가 제1서기에 취임했습니다!' 답이 없는 수화기 너머로, 니나는 그 순간 남편의 실각을 알게 되었다.

벨라루스 출신의 당 관료로, 11년간 『프라우다』 편집장을 지내며 소련 언론의 방향을 통제했다. 1976년 중앙위 서기에 올라 수슬로프의 지휘 아래 과학·교육·문화·체육·매체 전반을 관장하는 이념 제2인자가 되었다. 브레즈네프기 후반 보수적 이념 통제의 핵심 집행자였으며, 고르바초프 집권 2년차인 1987년 퇴진할 때까지 당 선전 기구의 연속성을 체현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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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46벨라루스 공산청년동맹(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 전시 파르티잔 활동 지도
  • 1946–1953벨라루스 공산당 제2서기 겸 교육장관, 당내 간부로 급성장
  • 1956–1965주베트남 대사, 외교부 극동국장, 주체코슬로바키아 대사 역임
  • 1965–1976『프라우다』 편집장 겸 소련 언론인동맹 이사장 — 최장 재임
  • 1976–1987중앙위 서기, 수슬로프 아래 이념 전반 총괄
  • 1987건강 사유로 퇴진, 연금 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