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로네시 제1서기 시절, 흐루쇼프의 시찰을 앞두고 국영농장과 콜호스에 명령을 내렸다. 노동자들은 예비선로의 레일을 뜯어내 트랙터 뒤에 묶고 들판을 가로질러 끌며 수확이 끝난 것처럼 연출했다.
페름 공장에서 10년간 엔지니어로 일한 뒤 전쟁 중 당 기구에 진입했다. 흐루쇼프 시절 탐보프·보로네시·볼고그라드(스탈린그라드) 3개 주에서 1서기를 지내며 지역 산업과 농업을 지휘했고, 보로네시에서는 수확 과시를 위해 들판에 레일을 끌게 한 일화로 유명하다. 1964년 10월 중앙위 전체회의에서 흐루쇼프의 농업 정책과 당 기구 분할을 비판하며 그의 축출에 한몫했다. 이후 RSFSR 각료회의 제1부의장(1965~1974)을 거쳐 소련 인민통제위원회 의장(1974~1987)으로 국가 감독 기구를 13년간 이끌며 브레즈네프 체제의 행정 통제를 담당했다.
1984년 라이프치히 박람회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지기 직전까지 동독 측과 화학 플랜트 협상을 진행했다. 그의 유골은 크렘린 벽 묘지에 안치되었는데, 이는 드미트리 우스티노프 바로 앞, 대략 마지막에서 두 번째로 그곳에 묻힌 인물이 되었다.
소련 화학공업의 최장수 책임자로서, 15년간 장관직을 수행하며 비료·고분자·석유화학을 축으로 한 전면적 화학화 계획을 지휘했다. 치르치크 전기화학 콤비나트의 현장 엔지니어로 출발해 질소비료·중수소 생산 기술로 스탈린상과 레닌상을 받았고, 이후 각료회의 부의장으로서 화학·석유·가스 산업 전반을 총괄했다. 아르메니아계로 투르크메니스탄에서 태어나 전연방 산업 관료로 성장했으며, 아르망드 해머와의 협력을 통해 서방 기술 도입 창구 역할도 수행했다.
게오르기 로보프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투기 조종사이자 사단 지휘관으로 성장한 소련 공군 장성이었다. 조선전쟁에서는 64 전투기항공군단을 지휘하며 소련의 비밀 공중 개입을 조직했고, 직접 미그-15를 몰아 전투 경험을 전수했다. 그의 전후 증언은 미그 앨리에서의 전과를 내세우던 공식 서술과 미국 공군을 끝내 제압하지 못했다는 현장 판단 사이의 긴장을 보여 준다. 이후 그는 군사교육과 전쟁사 연구에 힘쓰며 자신의 조선전쟁 경험을 글로 남겼다.
1951년 체포되어 고문받으면서도 자백을 거부하고, 감방에서 스탈린에게 국가보안 기관 개편안을 작성해 보내 결국 풀려났다.
스탈린 시대 소련 방첩의 핵심 인물로, 29세에 NKVD에 투신하여 빠르게 승진했다. 1946년부터 1950년까지 MGB 제2총국(방첩) 국장을 맡아 전후 소련 방첩 체계를 이끌었고, 1950년 국가보안부 차관이 되었다. 1951년 '아바쿠모프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투옥되었으나 끝내 자백하지 않았고, 스탈린 사후 복권되어 1953년 초 MGB 제1총국(해외정보) 국장으로 소련 대외정보를 지휘했다. 이후 동독과 중국에서 KGB 고문으로 활동했고, 1962년부터 KGB 고등학교장을 지냈으며, 말년에는 소련 상공회의소 의장(1983–1988)으로서 무역 외교와 산업 스파이 활동을 조율했다.
내 인생에서 상관은 코롤료프와 켈디시 단 두 사람뿐이었다. 두 사람 모두 고결한 분들이었다. 그게 중요하다.
소련 우주개발의 기초를 닦은 물리학자이자 로켓 공학자. 코롤료프의 OKB-1에서 우주선 방향제어 및 유도체계를 설계하여 루나 3호의 달 뒷면 촬영(1959)과 가가린의 보스토크 1호 비행(1961)을 기술적으로 가능하게 했다. 볼가 독일인 가계 출신으로 1942년 민족 기준으로 강제수용되었으나 수용 중에도 계산을 계속했고, 켈디시의 도움으로 복귀하여 우주 프로그램의 핵심 설계자가 되었다. 후기에는 회화의 원근법에 대한 수학적 연구와 정교회 신학으로 전환하여 독창적인 학제적 업적을 남겼다.
«폭발이 중앙 당국에 보고된 것은 몇 시간 이내였지만, 사태의 전모는 이틀이 지나서야 분명해졌습니다.» — 1986년 5월 8일 키예프 기자회견에서 체르노빌 초기 대응의 정보 지연을 설명하며.
도네츠크 공업지대에서 기술자로 출발하여 당 기구를 따라 승진한 랴시코는, 1972년부터 1987년까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각료회의 의장으로서 공화국 경제를 총괄했다. 15년의 임기는 이 직책 사상 최장기 재임이었으며, 브레즈네프 안정기 전체와 페레스트로이카 출범기를 관통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직후에는 공화국 정부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사고 수습을 지휘했으며, 사고 발생 수 시간 내에 중앙에 보고했으나 전모 파악에는 이틀이 걸렸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셰르비츠키와 함께 우크라이나 당·정을 분담하며 중앙의 정책을 충실히 집행하는 제도적 안정성을 대표했고, 퇴임 후에는 4권의 회고록 《기억의 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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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1945하리코프 전차학교 졸업, 전차소대장으로 북캅카스 전선 참전, 이후 사마르칸트 전차학교 교관
1945–1952노보크라마토르스크 기계제작공장 기술자·부공장장·당조직자
1952–1954크라마토르스크 시당위 제1서기
1954–1960스탈리노(도네츠크) 주당위 서기 → 제2서기
1960–1963도네츠크 주당위 제1서기
1963–1966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공업건설국 의장
1966–1969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
1969–1972우크라이나 SSR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 의장·소련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 부의장
1976년, 당대회 보고서 초안을 본 브레즈네프가 격노했다 — 「카피토노프 자신은 아무것도 쓸 줄 모른다. 그런데도 서기다. 그의 지시로 이 잡담을 꾸며낸 것이다. 당장 불러서 뼈저리게 야단쳐라!」 체르냐예프의 일기 속 한 장면이다.
모스크바 시·주 당 제1서기를 거쳐 1965년 중앙위 서기 겸 조직당사업부장에 올랐고, 이후 21년간 소련 간부 임명 체계 전체를 실무적으로 관장했다. 흐루쇼프, 브레즈네프, 안드로포프, 체르넨코를 거치며 당 서기국을 지킨 최장수 서기였으나, 정작 정치국원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고 브레즈네프는 그를 공개적으로 질책했다. 정체기 당관료제의 충성 네트워크와 인사 정체를 가장 오래 떠받친 기술자형 인사관리자다.
1968년 8월 21일, 지시보다 두 시간 앞서 스보보다 대통령을 찾아간 체르보넨코는 체코슬로바키아군의 무저항 전문을 이끌어냈다. 그레치코 원수의 회고: 「그 공으로 대사에게 레닌훈장을 두 개 줘야 한다고 누군가 말하더군.」
소련 외교관으로 중소 분열기 주중 대사(1959~1965), 프라하의 봄 당시 주체코슬로바키아 대사(1965~1973), 주프랑스 대사(1973~1982)를 지냈다. 1968년 8월 21일 모스크바 지시보다 두 시간 앞서 스보보다 대통령을 찾아가 체코슬로바키아군에 무저항 명령을 설득해 대규모 유혈 충돌을 막았으며, 소련 지도부는 이 공로에 「레닌훈장 두 개를 줘야 한다」고 말했다. 1961~1989년 CPSU 중앙위원, 5개 레닌훈장 수훈.
“저는 평생 어떤 자리도 구하려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번만은 예외였습니다. 제가 직접 타라소프 장관을 찾아가, 공장장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 건설 중인 VAZ의 총책임자 자리를 자원하며.
볼가 자동차 공장(VAZ)의 건설을 지휘하고 자동차공업부 장관으로 11년간 소련 자동차 산업을 이끈 행정가다. 톰스크 출신으로 MADI를 졸업하고 모스크바 소형차 공장에서 엔지니어로 출발해 1958년 공장장이 되었다. 1966년 타라소프 장관에게 스스로 VAZ 총책임자 자리를 자원해, 피아트와 협력한 세계적 규모의 공장을 3년 만에 가동시키고 1973년까지 100만 대를 생산했으며 '니바' 개발을 시작했다. 장관 시절 연간 200만 대 생산 체제를 완성했고 퇴임 후에도 엘라부가·KAMAZ·AVTOVAZ의 고문으로 평생을 바쳤다.
루돌프 누리예프의 망명 후 KGB가 그의 가족을 압박하자, 누리예프는 전화를 걸어 말했다. “가족을 내버려두시오, 그들이 무슨 반소비에트 분자란 말이오!” 그 후로 괴롭힘은 멈췄다.
바슈키르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누리예프는 1957년부터 12년간 바슈키르 주당위 제1서기로 공화국을 이끌며 우파와 체르니콥스크를 통합하고 대규모 주택 건설을 추진했다. 1969년 소련 조달장관으로 중앙에 진출한 뒤 1973년부터 1985년까지 각료회의 부의장 겸 농공복합체위원회 의장으로 브레즈네프 시기 농업·식량 정책의 실무 책임자 역할을 했다. 25년간 중앙위원과 8회 연속 최고소비에트 대의원을 지낸 그는 소수민족 간부가 연방 차원의 경제 관료로 자리 잡은 드문 사례였으며, 퇴임 후 회고록 『아울에서 크렘린까지』를 남겼다.
체포 후 진술: '나와 수사관 10명이 레닌그라드로 갔다… 아바쿠모프가 엄중히 경고했다. 재판에서 즈다노프의 이름이 언급되어선 안 된다. 목숨을 건다고.'
1938년부터 NKVD에서 복무한 보안 요원으로, MGB 특별중요사건 수사부 차장(대령)까지 올랐다. 레닌그라드 사건 수사에서 아바쿠모프의 핵심 집행자로 활동하며 피의자들을 직접 구타하고, 부하 수사관 푸틴체프의 조서 조작을 승인·지휘했으며, 재판 전 피고인들에게 위증을 강요하는 리허설까지 주관했다. 1951년 아바쿠모프와 함께 체포되었고, 스탈린 사후 레닌그라드 사건 조작 혐의로 1954년 사형 선고를 받고 레바쇼보에서 총살되었으며, 현재까지 복권되지 않았다.
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고도 병실에서 석유부 장관 업무를 계속했다. 마지막까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더 많은 석유를'이라는 압박에 맞섰다.
바쿠 출신의 석유 기술자로, 12년간 소련 석유부 장관을 지내며 서시베리아 유전의 집중 개발을 통해 소련을 세계 최대 산유국으로 올려놓은 인물. 타트네프티에서 터빈 시추 방식과 대형 블록 조립 공법을 도입해 로마슈킨스코예 유전 개발을 이끌었고, 이후 장관으로서 석유 생산량을 두 배 이상 끌어올렸다. 그러나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더 많은 석유를'이라는 당의 압박에 맞서 합리적 채굴을 주장했으며, 암으로 입원 중에도 병실에서 업무를 계속했다. 레닌상 수상자, 네 차례 레닌 훈장을 받았으며, 타트네프티는 지금도 그의 이름을 달고 있다.
1977년 6월, 24년간 항공공업을 이끈 표트르 데멘티예프가 사망하자 카자코프가 후임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취임 후 4년도 못 되어 임기 중 사망했고, 생전에 일했던 모스크바 계기공장은 그의 이름을 따랐다.
모스크바 근교 마을에서 태어나 16세에 제도공으로 노동을 시작한 소련 항공공업 행정가. 항공기 계기·유도장치 분야의 핵심 연구소였던 NII-923 소장 시절 로켓무장과 핵잠수함 생산에 기여해 1963년 사회주의노동영웅을 받았고, 12년간 차관과 제1차관을 거쳐 1977년 표트르 데멘티예프의 후임으로 항공공업 장관에 올랐다. 기술자에서 장관까지 항공공업의 모든 단계를 거친 유일한 전후 세대 지도자로, 브레즈네프 시기 소련 항공생산 체계의 실무적 안정성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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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1937모스크바 '엘렉트로스베트' 공장 제도공 → 모스크바 기계기술학교 졸업
1937–1944제213항공공장: 기술자 → 작업장장 → 부서장 → 주임기술자
1944–1951제122항공공장 주임기술자 → 제10국가설계연구소 부서장
1951–1960제122공장 수석기술자 (1955년 전소연방통신기계제조대학 졸업)
1960–1965NII-923 소장 — 항공기 계기·관성유도체계 개발 주도, 사회주의노동영웅(1963)
1965–1974소련 항공공업 차관
1974–1977소련 항공공업 제1차관
1977–1981소련 항공공업 장관 — 재임 중 사망, 레닌상(1976)·소련국가상(1967)
「낡은 보수적 V-2 형태를 버리면 2천 마일 사거리에 도달하는 게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원추형 형상이 근본적으로 유일한 해법입니다.」 1949년 아내 이르가르트에게
독일의 응용물리학자이자 로켓 유도 시스템 전문가. 페네뮌데에서 베르너 폰 브라운의 지휘 아래 V-2 유도 제어를 개발했고, 1944년 패전을 논했다는 이유로 게슈타포에 체포되기도 했다. 1946년 소련으로 강제 이주되어 고로도믈랴 섬에서 170여 명의 독일 기술자 집단을 이끌며 G-4(원추형 단일 단계)와 G-5(패킷 방식 다단)를 설계했다. 이 개념들은 훗날 코롤료프의 R-7 ICBM에 직접적 영향을 주었으며, 1949년 소련 평가단은 G-4가 R-3보다 우수하다고 판정했다. 1953년 서독 귀환 후 로켓을 떠나 스마트 카드를 발명하고 독일어 '인포르마틱' 용어를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전직 공장인 데그탸레프 공장의 젊은 설계사에게 이렇게 설득했다. "대포도, 로켓도 언젠가는 안 만들게 될 날이 온다. 하지만 사람이 살아 있는 한 따뜻함은 필요하고, 원자력은 핵무기만이 아니라 평화로운 에너지이기도 하다."
소련의 군수 산업 지도자로, 1968년부터 1987년까지 기계공업장관을 지내며 재래식 탄약·폭탄·신관·로켓 추진제 생산을 총괄했다. 모스크바 대학 수리역학부 졸업 후 코브로프의 데그탸레프 공장에서 엔지니어로 출발해 항공기관포·대전차유도탄 개발을 주도했고 1960년 공장장에 올랐다. 드미트리 우스티노프의 신임으로 1965년 방위공업부 제1차관, 1968년 신설 기계공업부 장관에 발탁되어 19년간 소련군의 포탄·폭탄·기뢰·고체연료를 책임지는 거대 군수 부문을 지휘했으며, 세계 최초의 수중고속로켓 '시크발(Шквал)' 개발에도 기여했다. 군수 생산과 함께 소비재·원자력 평화 이용까지 아우르며 군수 공업의 합리화를 추구했으나, 1987년 페레스트로이카 세대교체로 은퇴했다.
1988년 5월 28일, 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제19차 전연방 당대회 대표 선출이 진행되었다. 보스는 가장 많은 반대표를 받았지만 어쨌든 당선되었다. 모스크바로 항의 편지가 쇄도했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라트비아인 부모를 둔 시베리아 출신으로, 1959년 '민족주의자' 숙청 이후 라트비아 공산당을 이어받아 18년간 제1서기를 지낸 '인테르나치오날리즘'의 집행자였다. 모국어를 완벽히 구사하면서도 공개 석상에서 단 한 번도 라트비아어로 말하지 않았던 이 모순이 그의 시대를 상징했다. 말년에는 민족소비에트 의장으로 올랐지만, 페레스트로이카의 민족운동 속에서 구질서와 함께 밀려났다.
테헤란 회담 만찬장에서 스테이크를 입에 넣은 순간 처칠이 말을 꺼내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베레시코프에게, 스탈린이 귀에 대고 중얼거렸다. '자네는 밥 먹으러 온 게 아니야.'
테헤란(1943), 얄타(1945), 포츠담(1945) 회담에서 스탈린과 몰로토프의 개인 통역을 맡아 전후 질서를 결정한 '빅3' 외교 현장을 목격한 소련 외교관. 1940~1941년 주베를린 대사관 1등서기관으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체결 통역을 맡았고, 리벤트로프의 대소 선전포고 현장에도 있었다. 부모의 전시 행방 문제로 외무부에서 밀려난 후 《노보예 브레먀》 부편집장과 소련의 대표적 미국학 저널 《USA: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 창립 편집장을 지냈다. 주워싱턴 대사관 1등서기관(1979~1983)으로 복귀했고, 소련 붕괴 후 몬터레이 국제학연구소에서 강의하며 권력 정점에서의 경험을 회고록으로 남겼다.
R-12를 살피던 흐루쇼프가 설계자 얀겔에게 "뭘 만든 거요, 소시지인가?" 하고 소리치자, 스미르노프가 나서 조용히 말했다.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이게 바로 쿠바에서 미국을 겨눌 물건입니다."
드네프로페트로우스크 로켓공장(유즈마시) 사장 시절 R-12·R-16 대륙간탄도미사일 양산을 지휘하며 전략로켓군의 산업 기반을 구축한 공병 출신 군수 행정가. 1963년부터 22년간 군사산업위원회(VPK) 의장 겸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미사일·핵·우주·전자 분야 군산복합체 전체를 조율했고 SALT-I 준비에도 참여했다. 드미트리 우스티노프와 함께 브레즈네프기 소련 군사력의 정점을 관리했으며, 군수 영역을 넘어 면역학 연구소 설립을 정부에 설득한 개방적 기술 관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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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1948노보체르카스크 광산장비 공장에서 부생산책임자→화력발전소장→수석 에너지 엔지니어로 승진
1949–1951중앙자동화·유압연구소(TSNII-173) 소장, 무기성 산하
1951–1952소련 무기성 로켓·우주기술 총괄국장
1952–1957드네프로페트로우스크 기계제작공장(유즈마시) 사장, R-1·R-12·R-16 미사일 양산 지휘
1957–1961국방기술 국가위원회(GKOT) 총괄국장
1961–1963소련 각료회의 국방기술 국가위원회 의장 (장관급)
1963–1985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군사산업위원회(VPK) 의장, 군수 전 분야 총괄
"이 그래파이트 샘플은 마치 굶주린 늑대가 새끼 양을 대하듯 중성자를 잡아먹습니다": 첫 흑연 품질 측정 결과를 쿠르차토프에게 보고하며
이고리 파나슈크는 쿠르차토프의 가장 신임받는 제자로, 유럽 최초의 원자로 F-1 건설을 총괄 관리하고 1946년 12월 25일 임계 실험에서 제어반을 보조한 실험물리학자다. 1943년 제2연구소에 합류해 반응로 부문 부책임자로서 흑연과 우라늄 품질 검증부터 노심 조립까지 실무를 지휘했고, 1948년 첫 산업용 원자로 'A'의 기동에도 쿠르차토프 곁에서 같은 역할을 맡았다. 1954년 돌연 스승과 결별하고 주변부 연구직으로 밀려났는데, 쿠르차토프를 당에 고발한 것이 원인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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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1941레닌그라드 공업대학 물리공학부 졸업, 쿠르차토프 지도 아래 디플로마
1939–1943붉은군대 복무, 소련-핀란드 전쟁 및 대조국전쟁에서 야전병원 엑스선 기술자
1982년 1월 19일, 수슬로프와의 격렬한 대면 후 다차 서재에서 권총 한 발. 당일 소집된 의사들은 심장마비로 사망진단서를 썼다.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 출신으로 역사 교사에서 NKVD에 입문해 몰다비아에서 브레즈네프의 신임을 얻었고, 1967년 KGB 제1부의장 겸 제5국장으로서 반체제 인사 탄압을 총괄했다. 1982년 1월 의문의 권총 사망은 수슬로프의 급서와 안드로포프의 당직 이동, 브레즈네프의 사망으로 이어지며 크렘린 권력 구도의 분수령이 되었다.
알제리 출장길에 탄 승용차가 낙타와 충돌했다. 사막을 연구하고 지하 수 킬로미터를 시추했던 지질학자의 삶을 마감한 것은, 뜻밖에도 길 위의 동물 한 마리였다.
알렉산드르 시도렌코는 13년간 소련 지질장관(1962–1975)을 지내며 서시베리아·야쿠티아·중앙아시아의 광물자원 탐사를 지휘했고, 이후 과학아카데미 부총재로서 지구과학 전반을 총괄한 지질학자이다. 중앙아시아 사막의 풍화 과정을 규명하는 데서 출발해, 변성퇴적암의 원래 퇴적환경을 복원하는 '선캄브리아기 퇴적-변성암석학'이라는 새 분야를 개척했으며, 코브도르 운모광상 발견으로 1966년 레닌상을 수상했다. 그의 주도로 시작된 콜라 반도 초심층 시추는 지구 지각 연구의 획기적 프로젝트가 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참전용사이기도 한 그는, 알제리 출장 중 차량이 낙타와 충돌하는 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1962년 5월, 라시도프는 흐루쇼프의 비밀 지시로 소련 대표단을 이끌고 아바나로 날아갔다. 공식 임무는 농업·관개 협력이었지만, 실제로는 피델 카스트로에게 쿠바 핵미사일 배치 계획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이 비밀 접촉은 카리브 위기의 서막이 되었고, 라시도프와 카스트로의 평생 우정을 열었다.
가난한 농가 출신 교사·신문 편집자·작가로 활동하다 1959년 우즈베키스탄 공산당 제1서기에 올라 24년간 공화국을 이끌었다. 타슈켄트 지진 복구, 지하철 건설, 무룬타우 금광 개발, 항공·트랙터 공업 육성으로 경제 구조를 전환했다. 사마르칸트 2500주년 기념과 문화유산 보존 정책으로 우즈벡 민족 정체성을 고양시켰다. 사후 안드로포프의 면화 스캔들 수사로 부패 정치의 상징이 되었다.
그는 민스크 메트로 아이디어에 매달려 모스크바를 끈질기게 설득했고, 결국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훗날 그가 직접 첫 돌을 놓았다.
고멜의 옛신자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벨라루스어·문학 교사로 출발한 키셀료프는, 1959년부터 거의 20년간 벨라루스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으로서 전후 복구와 공업화를 주도한 실무형 경제 관료였다. 민스크 메트로와 즐로빈 제철소를 모스크바 관료들을 상대로 끈질기게 설득해 관철시켰으며, 1978년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승진한 뒤 1980년 마셰로프의 후임 벨라루스 공산당 제1서기 겸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당 지도부에 복귀했다. 개혁보다 안정적 관리를 중시했으나, 취임 2년여 만에 암으로 사망했다.
"문제를 피하는 최상의 방법은 상관에게 허락을 구하는 것이다. 열이면 아홉은 안 된다고 한다. 그러니 진짜 해결하고 싶으면 스스로 결정하고 보고하라. 뒤집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소련 핵무기 물리학의 핵심 설계자로서, 1960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제2핵무기설계국(VNIITF, 첼랴빈스크-70)의 과학지도자를 지냈다. 1947년 충격파 수렴에 관한 논문으로 젤도비치의 눈에 띄어 원자폭탄 계획에 합류했고, 첫 소련 핵실험(RDS-1)에 기여했으며, 최초의 완전 독자 설계 핵전하(RDS-2)의 이론적 토대를 세웠다. 1955년 신설된 우랄 제2센터의 이론부문 책임자로 옮겨 1957년 소련군 최초의 실전배치 열핵전하 개발을 이끌었다. 과학지도자로서 25년간 이끈 VNIITF는 소련 핵탄두 대부분을 설계했고, 평화적 핵폭발 기술을 개척해 가스 유정 화재 진압과 지각 탐사에 응용했으며, 말년에는 무제한 누적 현상에 관한 논문으로 켈디시 금메달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