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활동과 국가·세력

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외교·국제활동 · 미국 국가기관 인물 17명

조건 모두 해제

코델 헐

Cordell Hull

자유무역과 국제기구를 밀어붙인 미국 외교가

1941년 11월 26일, 그는 일본 대사에게 「미일 간 합의의 기초로 제안된 개요」를 전달했다.

코델 헐은 미국의 자유무역과 다자적 국제질서를 설계한 민주당 정치가이자 외교가였다. 그는 1930년대 무역장벽 완화와 선린정책을 추진했지만, 외교정책의 최종 결정권을 쥔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자주 긴장했다. 1941년 일본과의 협상에서 미국의 요구를 정리한 11월 26일 합의안 개요를 전달했으며, 이는 전쟁 직전 외교의 마지막 문서가 되었다. 전후에는 국제연합 창설을 이끈 공로로 1945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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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1897테네시주 하원의원
  • 1907–1921미국 연방 하원의원
  • 1921–1924민주당 전국위원회 의장
  • 1923–1931미국 연방 하원의원
  • 1931–1933테네시주 연방 상원의원
  • 1933–1944미국 국무장관
  • 1945국제연합 샌프란시스코 회의 대표

루스벨트의 '보조 대통령'이자 포츠담 배상안을 설계한 국무장관

번스의 국무장관 취임 선서 직후, 트루먼이 말했다. "지미, 성경에 입 맞춰." 번스가 그러고 나서 성경을 트루먼에게 건네며 말했다. "대통령님도 입 맞추시죠." 트루먼이 그렇게 하자 자리 전체가 웃음바다가 되었다.

제임스 F. 번스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의 민주당 정치인으로, 뉴딜 입법을 주도한 상원의원, 전시 동원을 총괄하며 '보조 대통령'으로 불린 루스벨트의 오른팔, 그리고 트루먼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서 포츠담 회담에서 독일 배상의 틀을 설계한 인물이다. 포츠담에서 번스는 각 점령국이 자국 점령지역에서 배상을 취하되 소련에는 서방 지역 산업설비의 15%를 식량·원자재와 교환하고 10%를 무상 제공하는 절충안을 몰로토프와 협상해 타결시켰다. 루스벨트의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뒤 트루먼과의 관계도 점차 냉각되었으나, 이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로 당선되어 인종 분리 교육 체제를 고수하며 '분리하되 평등하게' 노선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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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25사우스캐롤라이나주 하원의원
  • 1931–1941사우스캐롤라이나주 상원의원
  • 1941–1942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
  • 1942–1943경제안정국 국장
  • 1943–1945전시동원국 국장
  • 1945–1947미국 국무장관
  • 1951–1955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

존 포스터 덜레스

John Foster Dulles

동맹망으로 냉전을 밀어붙인 미국 외교가

1954년 베를린 회의에서 그는 자유선거 없는 전독일 정부 구상을 거부하고 서방의 선거 절차를 내세웠다.

존 포스터 덜레스는 변호사 출신의 미국 외교가로, 전후 국제질서를 동맹과 군사적 억지의 틀로 재편하려 했다. 그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서 대소 봉쇄를 넘어 공산주의 세력의 후퇴를 압박하는 노선을 폈고, NATO를 중심으로 서방의 결속을 강화했다. 1954년 베를린 회의에서 그는 몰로토프의 집단안보 구상과 전독일 정부 제안에 맞서 자유선거를 거친 통일을 주장했으며, 그해 서독의 NATO 가입을 관철해 유럽 분단의 제도화를 선택했다. 이 노선은 서방 진영의 안정과 미국의 영향력을 넓혔지만, 이란·과테말라 정권 전복 지원과 핵 위협을 포함한 개입주의라는 책임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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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프린스턴대학교 졸업
  • 1911설리번 앤드 크롬웰 국제변호사
  • 1919파리 강화회의 미국 대표단 법률고문
  • 1945–1950유엔 회의·총회 미국 대표 및 외교 고문
  • 1950–1952트루먼 대통령 대일 강화조약 특별고문
  • 1953–1959미국 국무장관
  • 1954베를린 회의 참가, 서독 NATO 가입 협상 주도
  • 1959국무장관 사임, 5월 24일 사망

로버트 다니엘 머피

Robert Daniel Murphy

베를린 봉쇄의 위험을 먼저 읽은 외교관

소콜롭스키가 회의장을 떠난 직후, 머피는 소련이 서방을 베를린에서 몰아내려는 3단계 계획에 착수했다고 보고했다.

로버트 대니얼 머피는 전쟁과 점령의 현장에서 협상과 정보 판단을 결합한 미국 외교관이었다. 1948년 독일 주재 미국 정치고문으로서 그는 소련이 서방을 베를린에서 몰아내려는 단계적 압박에 들어갔다고 분석해 워싱턴에 보고했고, 그 판단은 봉쇄와 공수작전을 둘러싼 미국의 인식 형성에 기여했다. 그의 경력은 북아프리카 상륙 준비와 전후 독일 행정, 벨기에·일본 대사직, 국무부 고위직을 거쳤으며, 외교관의 현장 보고가 군사·정치 결정을 움직이는 과정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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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미국 우체국에서 연방 공직 시작
  • 1917–1919스위스 베른 미국 공사관 암호 서기
  • 1921–1925취리히 부영사, 뮌헨 부영사
  • 1930–1940파리 영사, 비시 프랑스 주재 대리대사
  • 1940–1944프랑스령 북아프리카 대통령 특사, 연합군 정치고문
  • 1944–1949독일 주재 미국 정치고문
  • 1949–1952주벨기에 미국 대사
  • 1952–1959주일 대사, 국무부 정치 담당 차관

기업 권력에서 국제질서의 설계자로 이동한 외교가

얄타 회담 의정서에는 미국 대표로 ‘E. R. 스테티니우스 주니어’의 서명이 남았다.

에드워드 스테티니우스는 대기업 경영과 국가 동원 행정을 거쳐 제2차 세계대전 말 미국 외교의 중심에 선 정치가였다. 무기대여 원조를 관리하며 동맹국의 전쟁 수행을 뒷받침했고, 얄타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함께 전후 유럽과 국제기구의 틀을 협의했다. 그는 얄타 의정서에 미국 대표로 서명한 뒤 유엔 창설회의를 이끌었지만, 소련과의 긴장을 유엔을 통한 협력으로 풀려 한 구상은 트루먼 행정부와 충돌했다. 이 경력은 기업과 국가의 전시 동원이 전후 다자주의로 이어지는 동시에 냉전의 문턱에서 제약받은 과정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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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제너럴 모터스 입사, 존 리 프랫의 보좌역
  • 1931제너럴 모터스 공공·산업관계 담당 부사장
  • 1934–1938US스틸 이사, 1938년 이사회 의장
  • 1939–1941전쟁자원위원회와 생산우선순위 기관에서 전시 동원 담당
  • 1941–1943무기대여 원조 행정관
  • 1943–1944미국 국무부 차관
  • 1944–1945미국 국무장관, 얄타 회담 미국 대표
  • 1945–1946초대 미국 유엔대사

루엘린 E. 톰슨

Llewellyn Thompson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흐루쇼프의 마음을 읽고 해법을 제시한 인물

「흐루쇼프에게 중요한 것은 '나는 쿠바를 구했다, 나는 침공을 막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쿠바 미사일 위기 ExComm 회의에서.

미국 외교관으로, 1957년부터 1962년까지 모스크바 주재 대사를 역임하며 흐루쇼프와 독자적인 신뢰 관계를 구축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케네디의 국가안전보장회의 집행위원회(ExComm)에서, 10월 27일 도착한 두 통의 흐루쇼프 서한 중 강경한 두 번째 서한을 무시하고 26일의 첫 번째 서한에 응답하라고 권고했으며, 이 전략이 위기 해소의 핵심이 되었다. 이후 1967년부터 1969년까지 다시 모스크바 대사를 지내며 SALT 협상과 핵비확산 정책 수립에도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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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미국 외교관으로 임용
  • 1941주소 미국대사관 2등서기관, 독소전 발발 후 모스크바 잔류
  • 1952–1957주오스트리아 고등판무관·대사, 오스트리아 국가조약 및 트리에스테 협상
  • 1957–1962주소 미국 대사 (1차), 캠프 데이비드·빈 정상회담, U-2 사건, 부엌 논쟁
  • 1962ExComm 위원, 쿠바 미사일 위기 해결에 핵심 조언
  • 1962–1966국무부 소련 담당 대사급 순회대사·정무담당 부차관보
  • 1967–1969주소 미국 대사 (2차), 글래스보로 정상회담, SALT·핵비확산 협상

찰스 E. 유스티스 볼렌

Charles E. Bohlen

케넌과 클레이턴의 정책 메모를 마셜의 하버드 연설문으로 옮긴 국무부 소련 전문가

「포츠담 이후, 소련이 세계 공동체의 합리적이고 협력적인 구성원이 되도록 유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회고록 『역사의 증인』에서.

미국 외교관이자 소련 전문가로, 1934년 주소 미국대사관 개설부터 냉전기까지 미소관계의 거의 모든 중대한 장면에 입회했다. 루스벨트와 트루먼의 통역으로 테헤란·얄타·포츠담 회담에 배석했으며, 1947년 마셜 국무장관의 요청으로 케넌과 클레이턴의 정책 메모를 하버드 졸업식 연설문으로 작성해 마셜 플랜의 공개적 출발을 이끌었다. 1953년 주소 대사로 임명되었으나 매카시의 공격을 받으며 인준 청문회를 겪었고, 이후 프랑스 대사까지 지내며 '현자들'로 불린 초당파 외교 고문 중 한 사람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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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국무부 외교관으로 임용
  • 1934–1940주소 미국대사관 3등서기관, 독소불가침조약 전문 입수
  • 1943–1945백악관 소련 고문, 테헤란·얄타·포츠담 회담 통역
  • 1947–1949국무부 고문, 마셜의 하버드 연설 초안 작성
  • 1949–1951주프랑스 미국 공사
  • 1953–1957주소 미국 대사
  • 1957–1959주필리핀 미국 대사
  • 1962–1968주프랑스 미국 대사

어니스트 그로스

Ernest A. Gross

유엔의 절차를 움직인 국제법률가

1950년 6월 25일, 그는 한국의 상황을 보고하고 결의안 표결을 위한 안전보장이사회 절차를 이끌었다.

어니스트 그로스는 국제법률가이자 미국 외교관으로, 법률 자문과 전후 점령지 행정을 거쳐 유엔에서 미국의 정책을 대표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시작되자 그는 미국 대표단을 이끌며 안전보장이사회가 결의 82를 채택하도록 절차와 표결을 조율했다. 이 과정은 소련 대표의 불참이라는 조건을 활용한 미국 외교의 성과였지만, 유엔의 집단안보가 강대국 경쟁 속에서 작동한 방식이라는 긴장도 남겼다. 이후 그는 국제변호사로서 티베트 문제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를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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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1933미 국무부 법률고문
  • 1940–1943전시노동위원회 부법률고문
  • 1943–1945미 육군 민정국 경제과장
  • 1945–1949국무부 법률고문 및 점령지역 담당 차관보 보좌관
  • 1949국무부 의회관계 담당 차관보
  • 1949–1953유엔 주재 미국 대표부 차석대표, 1949–1950년 대표단장 직무대행
  • 1953–1999커티스·말레-프레보스트 법률사무소 변호사
  • 1959–1960티베트 망명정부 국제연합 로비스트·자문역
  • 1960년대국제사법재판소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 아파르트헤이트 소송 제기

딘 러스크

Dean Rusk

봉쇄를 국제 연대로 만든 냉전 외교가

“유엔에서는 미사일 위협 제거를, 미주기구에서는 리우 조약에 따른 공동행동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딘 러스크는 제2차 세계대전과 전후 국무부를 거쳐 미국 외교의 중심에 선 국제주의자였다.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서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군사적 충돌을 통제하면서도 봉쇄를 선택했고, 미주기구와 유엔을 통해 그 조치를 국제적으로 방어하려 했다. 그러나 베트남전에서는 점차 개입을 강하게 옹호해, 국제법과 동맹 외교를 중시한 인물이 전쟁의 정당화에도 관여한 긴장을 남겼다. 퇴임 뒤에는 그루지야대학교에서 국제법과 외교를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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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1940밀스 칼리지 정부학 교수
  • 1941–1945미 육군 중국·버마·인도 전구 참모장교
  • 1947–1949국무부 특수정치업무국장
  • 1949–1950국무부 차관보급 부차관
  • 1950–1952극동 담당 국무부 차관보
  • 1952–1961록펠러 재단 회장
  • 1961–1969미국 국무장관
  • 1970–1984그루지야대학교 국제법 교수

조지 볼

George Ball

쿠바 위기서 진주만 비유로 공습을 저지하고, 베트남전에서 홀로 확전을 반대한 국무차관

기습으로 쿠바를 치는 건 진주만과 똑같은 짓이다. 그게 어디로 갈지 생각하면 정말 소름이 끼친다... 미사일을 다 제거해도 그게 끝이 아니야. 그게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국무차관(1961–1966)으로 존 F. 케네디와 린든 B. 존슨 두 행정부에서 복무하며, 쿠바 미사일 위기와 베트남전이라는 냉전의 두 결정적 순간에 확전을 반대한 예외적 인물이었다. 1962년 10월 EXCOMM에서 기습 공습을 '또 하나의 진주만'이라 규정하며 로버트 케네디를 비롯한 다수를 봉쇄 쪽으로 돌리는 결정적 역할을 했고, 이후 1965년까지 베트남 파병 확대에 홀로 반대하는 각료 내 유일한 반대자가 되었다. 퇴임 후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편향된 중동 정책을 비판했고, 유럽 통합의 초기 설계자 중 한 명으로 장 모네와 함께 슈만 계획과 유럽석탄철강공동체 조약의 초안을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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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1942시카고에서 변호사 활동
  • 1942–1945렌드리스 관리국 · 전략폭격조사단
  • 1946–1961Cleary, Gottlieb, Steen & Hamilton 공동 창립
  • 1961국무부 경제담당 차관
  • 1961–1966국무차관
  • 1968유엔 주재 미국 대사
  • 1969–1982리먼 브라더스 선임 전무이사

제라드 스미스

Gerard C. Smith

핵시대의 협상가

스미스가 정책기획실장 시절 제안한 모스크바-워싱턴 직통 회선은 국무부와 군부의 반대에 부딪혔지만, 훗날 '핫라인'이 되자 케네디 대통령은 그 구상의 공을 스미스에게 돌렸다.

제라드 C. 스미스는 미국의 변호사이자 핵정책 전문가로, 군비통제와 비확산을 국가정책의 문제로 다룬 외교관이었다. 그는 SALT I에서 미국 대표단을 이끌며 경쟁하는 핵전략 속에서 제한 협상의 실무를 조직했고, 회고록 Doubletalk에 그 과정의 긴장과 판단을 기록했다. 이후에도 핵물질 전용 방지와 탄도탄요격미사일 조약의 보존을 주장하며 군비경쟁의 관리와 한계를 함께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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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예일대학교 졸업
  • 1938예일 법학대학원 졸업, 뉴욕 변호사
  • 1942–1945미 해군성 조달 담당관
  • 1950–1954원자력위원회 특별보좌관
  • 1954–1961국무부 원자력 담당 특별보좌관 및 정책기획국장
  • 1969–1973미국 군비통제·군축청장, SALT I 미국 대표단 수석협상가
  • 1977–1980대통령 특별대표, 핵확산 방지 담당
  • 1981대통령 자유훈장 수훈

발터 슈텔레

Walter Stoessel

데탕트의 현장을 지킨 직업 외교관

1974년 3월 4일 모스크바 주재 미국대사로 신임장을 제정했다.

발터 슈텔레는 냉전기 미국 외교관으로, 소련과 유럽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룬 직업 외교관이었다. 그는 1974년부터 1976년까지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로서 데탕트 국면의 미소 협상을 현장에서 지켜봤고, 헬싱키 협정으로 이어진 외교 과정과도 맞닿아 있었다. 이후 서독 대사와 국무부 부장관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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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1944미 육군 복무
  • 1947–1953국무부 동유럽·소련 담당
  • 1963–1965모스크바 주재 미국대사관 공사
  • 1968–1972폴란드 주재 미국대사
  • 1972–1974유럽·캐나다 담당 국무부 차관보
  • 1974–1976소련 주재 미국대사
  • 1976–1981서독 주재 미국대사
  • 1982–1983미 국무부 부장관

조지 프랫 슐츠

George Shultz

레이건 곁에서 고르바초프와의 대화를 밀어붙여 냉전 종식을 이끈 국무장관

슐츠는 레이건 부부와의 저녁 식사에서 소련 지도자들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듣고 깨달았다. '이 사람은 공산당 지도자와 대화를 해본 적이 없고, 몹시 하고 싶어 하는구나.'

조지 슐츠는 노동·예산·재무·국무의 4개 부처 장관을 모두 지낸 두 미국인 중 하나로, 레이건 행정부에서 6년 반 동안 국무장관을 맡아 대소 외교의 방향을 다시 썼다. 국방장관 와인버거와 CIA 국장 케이시가 협상을 반대하는 가운데서도 슐츠는 레이건이 고르바초프와 직접 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제네바(1985)와 레이캬비크(1986) 정상회담의 외교적 토대를 놓았다. 그 결과 1987년 INF 조약으로 사상 처음 핵무기 한 급 전체가 폐기되었고, 슐츠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고 동유럽에 대한 지배를 포기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냉전의 종식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그의 회고록 『격랑과 승리』는 1980년대 외교사의 핵심 사료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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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뉴욕시 출생, 뉴저지주 엥글우드에서 성장
  • 1942–1945해병대 장교, 앙가우르 전투 참전
  • 1969–1974노동장관 → OMB 국장 → 재무장관, 브레턴우즈 체제 종료
  • 1974–1982벡텔 사장, 중동 건설 사업 확장
  • 1982–1989국무장관, 제네바·레이캬비크 정상회담, INF 조약
  • 1989–2021스탠퍼드 후버연구소 선임연구원, 핵군축 및 탄소세 운동
  • 1993회고록 『격랑과 승리』(Turmoil and Triumph) 출간

헨리 앨프리드 키신저

Henry Alfred Kissinger

데탕트와 '연계' 전략으로 초강대국 핵무기 통제의 틀을 설계한, 현실주의 외교의 화신

1972년 파판치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인들은 마차 대열을 홀로 앞서 달리는 카우보이를 좋아합니다. 이 낭만적인 캐릭터는 제게 꼭 맞습니다"라고 말해 닉슨을 격노시켰다.

나치 독일을 피해 15세에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 난민 출신으로, 하버드대에서 현실주의 외교 이론을 정립하고 닉슨·포드 행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지냈다. 소련과의 데탕트를 주도하며 '연계' 전략을 고안, 도브리닌 주미 소련대사와의 비밀 배후채널을 통해 1972년 SALT I과 ABM 조약을 성사시키는 결정적 외교를 펼쳤다. 중국 비밀 방문으로 미중 화해의 문을 열고 파리 평화협정을 중재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으나, 캄보디아 폭격과 제3세계 개입으로 전쟁범죄 논란 역시 끌어안은 복합적 유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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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43나치 독일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 시티칼리지에서 회계학 수학 후 미군 입대
  • 1943–194984보병사단 정보장교로 유럽 전선 참전, 방첩대 요원으로 게슈타포 색출 및 탈나치화 임무
  • 1950–1969하버드대 정치학 교수, 국방연구프로그램 소장; 록펠러·닉슨 캠페인 외교 고문
  • 1969–1975국가안보보좌관: 데탕트·대중국 개방·SALT I 협상 주도, 도브리닌과의 배후채널 운영
  • 1971–1972중국 비밀 방문으로 마오쩌둥·저우언라이와 회담, 닉슨 방중 길을 열다
  • 1973–1977국무장관: 파리 평화협정, 노벨 평화상(1973), 중동 셔틀 외교; 칠레 쿠데타 연루
  • 1977–2023키신저 어소시에이츠 설립, 저술 및 12명의 대통령에 대한 외교 자문

소련을 아프간 늪으로 끌어들인 카터의 국가안보보좌관

그 비밀 작전은 탁월한 발상이었다. 그것은 러시아인들을 아프간 덫으로 끌어들였다… 소련이 국경을 넘던 날 나는 카터 대통령에게 썼다: 우리는 지금 소련에게 베트남 전쟁을 선사할 기회를 가졌다.

폴란드 출신의 미국 정치학자이자 외교 전략가로, 카터 행정부(1977–1981)에서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냈다. 소련 견제를 위한 인권 외교와 대중국 관계 정규화,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주도했으며, 카터 독트린으로 페르시아만 군사 개입 의지를 천명했다. 1979년 7월 3일, 소련 개입을 유발할 위험을 알리는 메모를 대통령에게 보내면서도 무자헤딘 비밀 원조 지시에 서명했으며, 훗날 "소련에게 베트남 전쟁을 선사할 기회"라 평했다. 냉전 후에는 《거대한 체스판》(1997)으로 유라시아 지정학과 NATO 확장을 주창하며 미국 외교에 지속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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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7–1981국가안보보좌관
  • 1973–19763극위원회 디렉터
  • 1966–1968국무부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 1960–1972컬럼비아대학교 교수, 공산권연구소 소장
  • 1953–1960하버드대학교 교수
  • 1981–2017존스홉킨스대학교 SAIS 교수, CSIS 고문

레이건의 '소비에트 101'을 편성한 NSC 소련 전문가이자 소련 주재 마지막 미국 대사

매트록은 회고했다. "나는 로널드 레이건보다 더 나은 학생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는 자기가 모르는 게 많다는 것을 알았고, 그걸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잭 매트록은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러시아에 매료되어 외교관이 된 미국의 대소 전문가로, 1961년 첫 모스크바 근무 시절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케네디와 흐루쇼프 사이의 외교문을 번역했다. 레이건 행정부에서 NSC 유럽·소련 담당 선임국장으로서 CIA와 국무부 분석관들을 동원해 '소비에트 101'이라는 24편의 브리핑 문건을 편성하고 모의 정상회담에서 고르바초프 역을 맡아 레이건을 훈련시켰다. 1987년 소련 주재 대사로 부임하여 소련의 마지막 4년을 목격했고, 은퇴 후 고르바초프가 제네바에서 SDI 공유 약속을 서면화하지 않은 것을 '전략적 실수'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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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노스캐롤라이나주 그린즈버러 출생, 듀크대·컬럼비아대 수학
  • 1956–1971외교관 임관, 빈·모스크바·서아프리카·동아프리카 근무, 쿠바 미사일 위기 시 케네디-흐루쇼프 서신 번역
  • 1971–1974국무부 소련 담당 국장
  • 1974–1978주소 미국대사관 공사 겸 부대사
  • 1981–1983체코슬로바키아 주재 미국 대사
  • 1983–1986NSC 유럽·소련 담당 선임국장, '소비에트 101' 편성, 제네바·레이캬비크 정상회담 준비
  • 1987–1991소련 주재 미국 대사, 소련 마지막 4년 목격
  • 1991–컬럼비아대·프린스턴 고등연구소 교수, 『제국의 부검』·『레이건과 고르바초프』 저술

제임스 베이커

James Baker

냉전 종식을 설계한 실무형 외교가

1989년 11월 29일 몰타 회담 메모에서 베이커는 부시가 고르바초프보다도 "새로운 속도와 목적"을 이끌어야 한다고 썼다.

제임스 베이커는 변호사 출신의 공화당 정치가로, 조지 H. W. 부시와의 오랜 동맹을 바탕으로 미국 보수정치의 핵심 실무자가 되었다. 재무장관으로 환율과 국제 금융을 다룬 뒤 국무장관이 되어 냉전 말기의 외교, 독일 통일, 걸프 위기를 조정했다. 그는 고르바초프의 개혁을 무조건 신뢰하기보다 미국의 이익과 동맹의 안정을 계산했지만, 부시가 페레스트로이카에 손을 내밀도록 설득하고 1989년 몰타 회담의 의제와 운영을 구체화했다. 그 신중한 현실주의는 대결의 관성을 늦추면서도 변화의 방향을 미국 외교가 관리할 수 있는 협상으로 바꾸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0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출생
  • 1952–1954프린스턴대 졸업 후 해병대 장교로 복무
  • 1957–1980휴스턴에서 기업 변호사로 활동
  • 1981–1985레이건 대통령 백악관 비서실장
  • 1985–1988미국 재무장관, 플라자 합의와 베이커 계획 추진
  • 1989–1992미국 국무장관, 몰타 회담과 냉전 말기 외교를 조정
  • 1992–1993부시 행정부 백악관 비서실장으로 복귀
  • 2010년대–공공정책과 국제 현안에 자문역으로 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