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리에 들 때 벙어리였다가 아침에 일어나 말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검열이 풀리던 시절, 점진적으로 넓혀가는 금기의 경계를 설명하며.
모스크바 역사기록대학 출신으로 『이즈베스티야』 특파원과 잡지 『주르날리스트』 창간 편집장을 지낸 언론인. 1986년 APN 부의장 겸 『모스크바 뉴스』 편집장에 임명되어 3만 5천 부의 영문 선전지를 8개 언어 300만 부의 글라스노스트 기관지로 키웠다. 스탈린 숙청, 아프간 전쟁, KGB 활동 등 금기를 잇달아 깨뜨렸고, 1991년 쿠데타 당시 11개 자유언론의 공동호 『옵샤야 가제타』를 발행해 저항했다.
1989년 소련 인민대표 당선 후 모스크바 아파트를 거절하고 고향 팔라나로 돌아갔다. '내 모든 책은 나에게 고해성사다'라고 그는 말했다.
코랴크 최초의 전업 작가로, 필명 코얀토(Коянто, '순록의 사람')로 널리 알려진 코랴크 문학의 기념비적 인물이다. 레닌그라드 게르첸 사범대학 북방학부와 고리키 문학대학 고등문학과정을 졸업하고, 1969년 첫 시집 『알네이의 노래』를 시작으로 코랴크인과 북방 원주민의 삶, 신화, 정체성을 문학으로 형상화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의 산문 『윗사람들은 기다리라』(1976)는 소련 관료들의 북방 정책을 날카롭게 비판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89년 코랴크 자치구에서 소련 인민대표로 선출되어 북방 원주민의 권익을 대변했으며, 소련 해체 후에도 코랴크 자치구 인권위원장과 주지사 고문을 지내며 고향을 위해 활동했다.
1969년 2월, 하벨은 잡지 『트바르시』에 실은 「체코의 운명?」에서 쿤데라의 낙관적 민족 서사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우리 운명의 주인은 무엇보다 바로 우리 자신이며, 지리적 위치나 수백 년의 숙명 뒤에 숨는다고 우리가 해방되지는 않는다."
체코의 극작가이자 반체제 운동가, 정치가. 부조리극 『가든 파티』(1963)와 『비망록』(1965)으로 체제를 풍자하며 명성을 얻었고, 1968년 프라하의 봄 진압 후 밀란 쿤데라의 「체코의 운명」에 「체코의 운명?」으로 응답하며 반체제로 전환했다. 1977년 헌장 77을 공동 창립하고 투옥을 거듭했으며, 1989년 벨벳 혁명을 이끌어 체코슬로바키아 마지막 대통령과 체코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
「70년 동안 우리는 아버지를 배신한 아들이, 교회를 불태운 자가 영웅이라고 배워왔다. 사람들은 철저한 거짓말 속에서 살아왔다」
키이우 출신 시인이자 의사로, 1985년 반미 소설로 국가상을 받을 만큼 체제 순응적 작가였으나, 1986년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의 추천으로 『오고뇨크』 편집장에 임명되자 잡지를 글라스노스트의 선봉으로 돌변시켰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실상, 스탈린 시대 대숙청, 노멘클라투라의 특권을 최초로 폭로하며 구독 부수를 26만에서 460만으로 끌어올렸고, 파스테르나크와 나보코프의 작품을 최초로 게재했다. 1989년 인민대표로 당선되어 지역간그룹에 가담했고, 1991년 쿠데타 당시 미국 체류 중 귀국을 거부해 편집장직에서 해임된 후 보스턴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말년에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공개 지지해 고국에서 배척당했다.
1988년 9월 11일 「에스티마 라울」 무대에서 30만 명을 향해 외쳤다: "언젠가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그 말은 에스토니아 독립운동의 구호가 되었다.
에스토니아의 예술가이자 캐리커처 작가로, 1988년 6월 탈린 노래 축제 광장에서 벌어진 자발적 밤노래 시위 직후 『시르프 야 바사르』에 「노래 혁명」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여 이 역사적 명칭을 만들어 냈다. 그해 9월 「에스티마 라울」 집회에서는 30만 청중 앞에서 "언젠가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Ükskord me võidame niikuinii!)"라고 선언해 독립운동의 상징적 구호를 남겼다. 에스토니아 문화유산협회와 라흐바린네(인민전선) 창립에 참여했으며, 1990년부터 1992년까지 에스토니아 최고회의 의원으로서 1991년 8월 20일 독립 회복 선언에 찬성표를 던졌다.
1980년 7월 28일, 모스크바 올림픽 기간. 비소츠키의 시신이 타간카 극장 로비에 안치되자 십만 인파가 수 킬로미터 줄을 섰다. 경찰 추산 10만8천 명. 『햄릿』 공연 취소에도 단 한 명도 환불을 요구하지 않았다.
타간카 극장의 배우이자 소련 최고의 음유시인. 700곡이 넘는 노래를 7현 기타로 불렀고, 공식 매체에서 배제되었으나 릴 테이프 복제로 전국에 퍼졌다. 1971년 타간카 『햄릿』에서 검은 스웨터의 지식인 반항아로 한 세대의 상징이 되었으며, 범죄자·최전선 병사·알코올 중독자 같은 가면을 빌려 소비에트 사회의 금기를 거리 언어로 노래했다. 브레즈네프마저 병상에서 전화로 그의 노래를 듣기를 원했을 만큼 당과 민중을 동시에 사로잡은 유일무이한 문화적 현상이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중 42세로 사망했을 때, 십만 인파가 타간카 광장에 모여 당국이 감추려 했던 존재의 진정한 무게를 증언했다.
복무 중 '바실리 티모페예프'라는 필명으로 첩보소설을 쓰던 그는, 기밀 해제 전 예조프의 신문 조서 원문을 발굴해 평전에 그대로 실었다.
소련 국가보안 기관(KGB) 출신의 러시아 작가다. 기밀 해제 이전의 수사 기록에 접근해 예조프 평전 『예조프: 「철의」 스탈린 인민위원 이야기』(2001, 「특별 문서고」 총서)를 썼다. 이 책은 예조프 신문 조서와 재판 기록을 대량으로 수록한 초기 공간물이지만, 조서 인용 사이사이에 신문실 정경 같은 소설적 재구성을 끼워 넣어 사료와 창작의 경계가 흐리다는 한계가 있다.
상세 이력 보기
1969모스크바 폴리그라프 연구소 졸업
1971KGB 학교 졸업
1970년대 이후국가보안기관 정보장교로 복무(대령), 태국·인도에서 타스 통신 특파원으로 근무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벨라루스의 작가이자 기자로, 러시아어로 전쟁과 사회적 격변을 겪은 사람들의 증언을 엮어 집단적 기억의 문학을 만들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와 《아연 소년들》에서 공식 영웅담이 가린 여성과 병사의 경험을 드러냈고, 《체르노빌의 기도》에서는 1986년 재난 뒤 생존자와 유가족, ликвидатор들의 목소리로 기술 재난의 인간적 결과를 기록했다. 그녀의 작업은 사실의 기록과 문학적 구성 사이의 긴장을 감수하면서도 개인의 목소리를 역사 이해의 중심에 놓았으며, 2015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1991년 1월 20일 저녁 오몬의 내무부 공격을 세계에 보여 주려 카메라를 들고 바리케이드로 나섰고, 바스테이칼른에서 촬영하다 총에 맞아 숨졌다.
안드리스 슬라핀슈는 리가 영화 스튜디오에서 활동한 라트비아의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자 촬영기사였다. 리브인의 문화와 라트비아의 역사·사회 문제를 다룬 작품을 만들며, 기록영화가 억눌린 기억과 현재의 투쟁을 잇는 매체임을 보여 주었다. 1991년 1월 20일 리가 내무부 공격을 촬영하던 중 사망했고, 그가 남긴 장면은 라트비아 독립운동의 국제적 기억을 형성했다.
「노래혁명」의 사운드트랙을 쓴 작곡가, 다섯 조국의 노래로 에스토니아 대중을 하나로 묶었다
밴드의 연주를 멈추고 30만 군중 앞에서 맨손으로 합창을 지휘하며 '나는 에스토니아인이고 에스토니아인으로 남을 것이다'를 불렀다.
에스토니아의 작곡가이자 음악가로, 1980년대 후반 노래혁명 시기 독립 열망을 노래한 〈다섯 조국의 노래〉 연작으로 대중의 감정적 결집을 이끌었다. 1987년 인광석 채굴 반대 운동에 연대해 만든 〈어느 땅도 홀로 있지 않다〉는 노래혁명의 서곡이 되었고, 이듬해 5월 타르투 팝 페스티벌에서 초연된 다섯 곡은 이듬해 9월 30만 명이 모인 〈에스티마 라울〉 공연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1996년 35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까지 다양한 장르에서 200여 곡을 남겼지만, 역사는 그를 무엇보다 독립운동의 작곡가로 기억한다.
비디오 영상 속에서 일리야는 전차 앞에 서서 군인들에게 외치고 있었다: '뭐 하는 짓이야?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잖아!'
모스크바건축대학 출신의 건축가이자 시인으로, 그의 시는 사후 옙투셴코의 《세기의 시절》에 실렸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차이콥스키 터널에서 BMP 536호에 불이 붙은 뒤 병사들이 후퇴할 때 돌진했다가 머리에 총을 맞아 숨졌다. 사후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되었고, 그의 유대식 장례식은 랍비와 정교회 성직자가 함께 집전한 최초의 공적 종교의례로서 신생 러시아의 다민족 상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