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하들이 그를 '위대한 예핌'이라 불렀고, 의료진은 생애 누적 피폭량을 치사량의 세 배에 해당하는 약 1,500뢴트겐으로 추산했다는 회고가 전한다.
도네츠크 마키이우카의 소작농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품팔이꾼과 목동으로 일했고 교구 학교 3학년까지밖에 다니지 못했다. 1918년 봄 볼셰비키 당에 입당해 남북전쟁에서 제1기병군 소속으로 싸웠고 1928년 제대한 뒤 1933년 비철금속·금 연구소를 졸업했다. 1946년 제1총국 부국장이 되어 원자폭탄 계획에 들어갔고 1947년 콤비나트 817호(마야크) 책임자로 임명되어 1949년 첫 소련 핵실험의 플루토늄을 생산했다. 1957년부터 1986년 11월까지 핵산업을 이끌며 폐쇄 원자력 도시들을 세웠고 1991년 11월 28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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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1928도네츠크 탄광 소년 광부, 적위대·제1기병군 복무 후 제대
1933–1941모스크바 비철금속연구소 졸업, 엘렉트로친크 공장장, 드네프르 알루미늄 공장장
1941–1945우랄 알루미늄 공장장, 전시 알루미늄 생산 총괄로 레닌 훈장 3회
1946–1953제1총국 부국장 겸 콤비나트 817호(마야크) 책임자, 첫 원자폭탄 플루토늄 생산
1953–1957중형기계공업 제1차관, 수소폭탄 개발 참여
1957–1986중형기계공업 장관(29년), 차르봄바·핵잠수함·원전·폐쇄 원자력 도시 건설 총괄
1938년 우랄마시 공장장 시절, 군사기술 2급 기술자 계급을 받았다. 전시 중형기계공업 인민위원으로서 KV·IS 중전차와 SU 자주포의 동력계통을 책임졌고, 1945년 5월에는 쿠투조프 1급 훈장 — 대규모 부대 작전을 성공시킨 군사령관에게 주어지는 훈장을 산업 지휘관으로서 받았다.
아르메니아계 소비에트 산업 관료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중형기계공업 인민위원으로서 전차·자주포·트랙터 생산을 지휘했고, 전후에는 자동차·트랙터 공업을 연이어 관장했다. 우랄마시 공장장을 거쳐 중기계·중형기계 인민위원부에서 말리셰프, 반니코프 등과 함께 스탈린 시대 군수-산업 행정을 떠받친 실무형 관리자였다. 1955년 흐루쇼프에게 공개 비판받고 물러났으나, 이미 3개의 레닌 훈장과 쿠투조프 1급 훈장을 받은 전쟁영웅급 산업 지휘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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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1922그루지야 콤소몰 조직비서, 트빌리시 시위원회 책임비서
1922–1931바우만 모스크바 기계기계공학대학에서 수학하며 당 조직 업무 병행
1931–1937포돌스크 크레킹·전기기관차 공장 기술이사, 후에 공장장
1937–1939우랄마시 공장장, 군사기술 2급 계급 수여
1939–1941중기계공업 부인민위원, 제1부인민위원; 중형기계공업 제1부인민위원
1941–1946중형기계공업 인민위원 — 전차·자주포·트랙터 동력계통 생산 총괄
1946–1950자동차공업 장관, 자동차·트랙터공업 장관
1950–1955농업기계제조 차관·제1차관, 기계제조 장관, 자동차·트랙터·농업기계 장관; 1955년 퇴임
NKVD 수사를 받으며 갇혀 있던 연구실에서 그는 발전기를 설계했다. 13년 후, 그가 주도한 전자기 분리법으로 소련은 수소폭탄의 리튬-6을 얻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치과기공사의 아들로 태어나 레닌그라드 공업대학을 졸업하고 '엘렉트로실라' 공장에서 평생 전기기계공학에 헌신했다. 1938년 NKVD 수사를 받았으나 수감 중에도 공장 내 특수연구실에서 발전기 설계를 계속했고, 전쟁 발발로 풀려나 주임기사로 전시 생산을 이끌었다. 1951년 전기공업장관에 올라 스탈린 말기 전기기계·케이블·무선·전력기기 부문을 총괄했으며, 특히 전자기 동위원소 분리법 개발과 리튬-6 생산 기술 확립을 주도해 소련 핵무기 계획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네 차례 스탈린상과 레닌상을 수상한 과학자-행정가로서, 말년에는 원자력이용총국 부국장으로 핵에너지 평화적 이용으로 전환하는 과도기를 감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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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1938'엘렉트로실라' 공장 설계기사 → 전기기계연구실장 → 기술부장
1938–1941NKVD 수사 중 '엘렉트로실라' 제40부서 특수연구실장으로 발전기 설계 지속
1941–1947'엘렉트로실라' 공장 주임기사 → 부공장장, 특수설계국장(1945–1946) 겸임
“내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나는 늘 비행기를 생각했다 — 이미 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존재하지 않는 비행기를.”
세묜 라보치킨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소련 공군 주력 전투기 La-5와 La-7을 설계한 항공기 설계자로, 22,000대 이상 생산되어 동부전선 제공권 장악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LaGG-3로 시작한 OKB-301은 전후 La-176으로 소련 최초 음속 돌파(1948년)를 달성했고, 1950년대 이후 S-25 베르쿠트 방공망과 SA-2 대공미사일, 순항미사일 부랴 개발로 방공·우주 분야로 전환했다. SA-2는 1960년 게리 파워스의 U-2기 격추로 냉전사에 기록되었다. 사회주의노동영웅 2회, 스탈린상 4회, 과학아카데미 회원, 공병기술소장을 지냈으며 1960년 사리샤간 시험장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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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1920붉은군대 복무, 러시아 내전 참전
1920–1927모스크바 바우만 고등기술학교 수학, 항공역학 기사 자격 취득
1927–1939각 항공설계국에서 근무, 1939년 항공기 제작 수석설계사 직급
1939–1940고르부노프·구드코프와 함께 LaGG-3 전투기 공동 개발, OKB-301
1940–1945OKB-21 수석설계사(고리키), La-5·La-7 전투기 설계, 22,000대 이상 생산
1945–1960OKB-301 총책임자(힘키), La-15 제트 전투기, S-25·SA-2·부랴 미사일 개발 주도
쿨리크 원수는 '네 포는 필요 없다'고 말했고, 그라빈은 '어째서입니까?'라고만 답할 수 있었다. 그는 공장에서 비밀리에 ZiS-3를 양산했고, 1942년 2월 정식 채택될 때 이미 1천 문 이상이 전선에 있었다.
바실리 그라빈은 소련의 가장 중요한 포병 설계자로, 제2차 세계대전 최대 생산 화포인 ZiS-3 76.2mm 사단포(10만 3천 문 이상)를 비롯해 ZiS-2 57mm 대전차포, T-34의 주무장 F-34 전차포, BS-3 100mm 야포를 설계했다. 고리키 제92공장 수석설계자와 중앙포병설계국(TsAKB) 국장을 지내며 신형 화포 개발을 수년에서 수개월로 단축한 속도설계 방식을 확립했고, 인간공학이란 용어조차 없던 시절 포 설계에 생리학자를 참여시켰다. 설계와 생산기술을 통합한 그의 방식은 전시 화포의 컨베이어 조립과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했다. 전후 미사일 시대의 도래로 그의 영향력은 쇠퇴했고, 후기 설계 중 S-60 대공포만이 정식 채택되었다.
「자베냐긴은 강인하고 결단력 있으며 지나치리만치 주도적인 책임자였다. 과학자들의 의견을 잘 경청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대단한 지성의 소유자였고, 동시에 완전히 스탈린주의적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다」 (안드레이 사하로프의 회고)
1930년 모스크바 광산아카데미를 용광로 전문으로 졸업한 광산·야금 기술자다. 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 콤비나트 소장을 거쳐 1938년부터 노릴스크 광산·야금 콤비나트 건설을 노릴라그 수용소 노동력으로 지휘했고, 1941년 3월부터 1946년 8월까지 NKVD 부인민위원으로 굴라그의 산업건설 기구들을 총괄했다. 원자력 계획에서는 1944년 12월 우라늄 탐사 책임을 맡았고, 1945년 8월부터 제1총국 제1부책임자 겸 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특수수용자 노동력을 감독했으며 1949년 첫 핵실험을 앞두고 RDS-1 조립을 책임졌다. 1955년 중형기계공업 장관이 되어 사망할 때까지 재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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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1923RKP(b) 입당, 붉은 군대 사단 정치위원, 우크라이나 당 활동
1923–1930모스크바 광산아카데미 졸업, 용광로 기술자
1930–1933기프로메즈 소장, 카멘스코예 제철공장 지배인
1933–1937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 콤비나트 소장
1938–1941노릴스크 건설 총책임자, 노릴라그 수용소 노동으로 최초 니켈 생산
1941–1946NKVD 부인민위원, 산업건설·광산·수로 굴라그 총국 지휘
1945–1953원자폭탄 계획 제1총국 제1부책임자, 우라늄·폐쇄도시·RDS-1 조립 책임
1946년, 흐루니체프와 야코블레프가 영국제 제트엔진 구매를 건의하자 스탈린이 물었다. '어떤 바보가 자기 비밀을 우리에게 팔겠는가?' 노동당 정부는 기꺼이 롤스로이스 닌 엔진과 청사진을 넘겼고, 이를 복제한 RD-45가 MiG-15의 심장이 되었다.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민병대·공장 관리직을 거쳐 소련 항공공업 장관(1946~1953)까지 오른 산업 행정가. 전시에는 탄약 제1부인민위원으로서 포탄·항공폭탄 증산을 지휘했고, 종전 후 항공공업 수장으로서 쇠퇴한 소련 제트 기술의 돌파구를 찾았다. 1946년 야코블레프와 함께 스탈린을 설득해 영국 롤스로이스 닌 엔진을 도입, 이를 역설계한 클리모프 RD-45가 MiG-15에 탑재되며 소련은 단숨에 제트 전투기 시대에 진입했다. 그의 이름은 오늘날 흐루니체프 우주센터에 남아 있다.
1939년 10월 소련 지도부는 석탄공업인민위원부를 신설하고 바흐루셰프를 초대 위원으로 임명했다 — 그는 이미 러시아공화국 총리였다. 한 사람에게 정부 수반과 전략 산업을 동시에 맡긴 것은 전운 속에서 석탄이 곧 총력전의 연료라는 판단이었다.
툴라의 자물쇠공 견습공에서 출발해 러시아 공화국 정부 수반과 소련 최초의 석탄공업인민위원을 겸임한 산업 행정가. 1939년 신설된 석탄공업인민위원부의 초대 위원으로 임명되어, 전쟁 발발 후 돈바스의 채탄 설비를 동부로 대피시키고 쿠즈바스·카라간다에 새 탄전을 열었으며, 1943년 전시 연료 공급의 공로로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에는 폐허가 된 돈바스 탄광 복구를 지휘하던 중 집무실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졌고, 그 공로는 크렘린 벽 묘지 안장으로 기려졌다.
전쟁 중 고리키의 크라스노예 소르모보 조선소에서 그의 직접 감독 아래 12,000대의 T-34 탱크가 생산되었다. 조선 인민위원이 바다가 아닌 육상 전투를 위해 가장 많은 탱크를 찍어낸 역설이다.
니콜라예프 조선소의 심부름꾼으로 출발해 소련 조선공업을 17년간 이끈 생산 관료다. 1940년 조선공업 인민위원에 취임하여 대양함대 건설 프로그램을 추진했고, 전시에는 조선소 대피와 잠수함·전투정 생산을 지휘하는 한편 탱크공업 인민위원부 제1부위원을 겸임했다. 전후 수송기계·중기계 분야를 거쳐 1954년 조선공업장관으로 복귀, 소련 해군의 원양화와 원자력 잠수함 시대의 산업 기반을 닦았다. 그의 아들 유리 노센코는 KGB 장교로서 미국에 망명, 냉전기의 대표적 이중 스파이 사건을 일으켰다.
1939년, 스탈린의 호출에 트럭이 두 번 펑크 나 1시간 30분 늦었다. '콜롬나에서 트베리 경유로 오셨나?'라는 빈정거림에 서른일곱 살 공장장은 '기술도 사람이 못 따라가면 배신합니다'라고 답했다. 중기계 인민위원 임명을 사양하자 보로실로프가 팔을 붙잡았다: '모루 위의 보드카는 어디 갔나?'
스탈린 시대 소련 군수공업의 핵심 기술관료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차공업 인민위원으로서 T-34의 대량생산 체계를 지휘했으며, 전후에는 소련 원자력 산업 전체를 관장하는 중형기계공업부 초대 장관을 지냈다. 기관차 설계사에서 출발해 전차, 조선, 핵무기, 미사일에 이르기까지 소련 군수-기술 행정의 정점을 두루 거친 '스탈린의 인민위원' 세대의 전형이었다.
1930년, 28세 나이에 철금속 부문 책임자로 임명되자 오르조니키제에게 '공장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책상보다 용광로를 택한 이 결정이 그를 소련 최고의 금속 전문가로 만들었다.
슈샤 출신 아르메니아인으로, 광산아카데미 졸업 후 엘렉트로스탈 공장에서 강철 생산을 익혔다. 특수강 트레스트 관리자로 두각을 드러내 방위공업·조선 인민위원부를 거쳐 1940년 철금속 인민위원이 되었다. 전시에는 남부·중부 금속공장을 우랄 너머로 대피시키고 탱크·항공기·탄약용 특수강 생산을 지휘해 1943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 부수상 겸 철금속장관으로 재건을 이끌며 소련 원자력 계획의 우라늄 공급도 관리했다. 1938년 독일 연수 이력으로 '독일 스파이' 의심을 받았으나 스탈린의 개인적 개입으로 살아남았다.
카모프와 스크르진스키는 자신들이 만든 새로운 비행 기계를 가리키는 말로 "베르탈료트(вертолёт)"를 제안했다. 회전익기를 뜻하는 이 러시아어 단어는 그들의 설계와 함께 탄생했다.
소련의 항공기 설계자로, 동축반전로터 헬리콥터의 선구자이자 카모프 설계국(OKB Kamov)의 창립자. 1929년 니콜라이 스크르진스키와 함께 소련 최초의 오토자이로 KASKR-1을 제작했고, 1940년 헬리콥터 전문 설계국을 맡아 Ka-8, Ka-15, Ka-25 함상헬기, Ka-27, Ka-50 "블랙샤크" 공격헬기 등 Ka 계열기를 개발하여 소련 해군 항공대의 중추를 구축했다. 단일로터 방식이 지배하던 시대에 기술적으로 더 까다로운 동축반전로터를 고집했고, 그 선택은 소형·고기동 기체로 결실을 맺었다. 1972년 사회주의노동영웅 및 소련 국가상을 수상했다.
1955년 4월, 의도적으로 모호한 이름으로 로켓·우주 개발을 감추기 위한 일반기계공작부가 창설되자, 고레미킨이 초대 장관에 올랐다.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바우만 모스크바국립공과대학을 졸업한 소련의 공업 관리자이자 국가 지도자이다. 방위공장 기술직에서 출발하여 독소전쟁 발발 직전 탄약인민위원에 임명되어 전쟁 첫해의 군수 생산을 지휘했고, 종전 후에는 농업기계공작부 장관을 지냈다. 1955년 소련 최초의 일반기계공작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일반기계'라는 의도적으로 모호한 명칭은 이 부처의 실제 임무인 탄도미사일과 우주로켓 개발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 1951년 '금속 잔여분 은폐' 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고 당에서 제명되었으나 스탈린 사후 복권되어 복직했으며, 만년에는 공작기계 분야 과학기술 자문을 이끌었다.
스탈린이 대륙간 제트폭격기를 원했을 때 투폴레프는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먀시셰프가 22개월 만에 M-4를 띄웠다. 투폴레프가 후일 인정했다: "먀시셰프가 아니었으면 우리에겐 그런 폭격기가 없었을 것이다."
소련 중폭격기 설계의 독보적 인물로, M-4(몰로트)를 통해 세계 최초로 실전 배치된 대륙간 터보제트 전략폭격기를 현실화했다. 투폴레프 설계국에서 TB-1, TB-3, ANT-20 개발에 참여했고, 1938년 체포되어 NKVD의 TsKB-29에서 페틀랴코프와 함께 Pe-2를 설계했다. 1951년 스탈린의 직속 지시로 OKB-23을 재건해 불과 22개월 만에 M-4를 띄웠고, 이후 초음속 전략폭격기 M-50과 세계 기록 19개를 수립한 3M을 개발했다. 1960년부터 7년간 TsAGI를 이끌며 소련 항공우주의 기초연구를 총괄했고, 사후에도 그의 설계국이 VM-T 아틀란트로 부란 우주왕복선 수송을 담당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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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34투폴레프 설계국(AGOS TsAGI) — TB-1, TB-3, ANT-20 날개 설계
1934–37TsAGI 실험기 여단(KB-6) 책임자, ANT-41 어뢰폭격기
1937–38제84공장 수석설계사 — DC-3을 Li-2로 개량, 약 14,000대 생산
1938–40체포, NKVD TsKB-29에서 페틀랴코프 휘하 Pe-2 설계
1940–43석방 후 자체 OKB — DVB-102, 소련 최초 여압식 객실 폭격기
1943–46제22공장 수석설계사 — Pe-2 개량형(Pe-2I 등), DIS, DB-108
“1941년 이후 우리는 전차 생산을 5배 이상 늘렸습니다. 이는 전체 집단의 엄청난 창조적 노력 덕분입니다.” — 1944년 당 활동가회의 연설에서
하리코프 및 우랄 전차공장 책임자로서 T-34의 대량생산 체제를 확립했으며, 전쟁 기간 중 단일 공장에서 약 3만 5천 대의 T-34를 생산해 소련 전차 전력의 중추를 형성했다. 전후 수송기계공업장관을 거쳐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의장과 발명발견위원회 의장을 지내며 소련의 특허·발명 제도를 국제적 수준으로 정비했다. 1938년 전임자가 숙청된 직후 부임해 하리코프 공장을 안정시키고 코시킨·모로조프 설계국을 전폭 지원하여 T-34의 실현을 가능케 한 인물로 평가된다.
세 번의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은 소련의 무기 설계자. 키로프 공장에서 KV·IS 중전차를 설계해 대조국전쟁 승리에 기여했고, 1948년 원자폭탄 프로젝트에 투입되어 KB-11에서 최초의 소련 핵무기 내폭 시스템을 개발했다. 이후 분과 1호 연구소(VNIIA) 소장 겸 수석설계자로서 열핵탄두와 17종 운반체용 핵탄약을 설계해 소련 핵전력의 공학적 기초를 세웠다. 전차와 핵무기를 모두 주도한 유일무이한 경력은 소련 군산복합체의 전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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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1936키로프 공장 엔지니어 — 트랙터·자동차 설계
1936–1941SKB-2 수석설계자 — KV-1·KV-2 중전차 개발
1941–1948첼랴빈스크 키로프 공장 수석설계자 — KV·IS 전차, T-34 개량, 자주포
1940년 1월 크렘린에서 스탈린이 말했다. '당신을 항공공업인민위원으로 임명하오. 고리키에 가서 인수인계할 시간조차 없소. 단 하루도, 단 한 시간도 허비할 수 없는 일이 기다리고 있소.'
1940년부터 종전까지 소련 항공공업인민위원으로서 Yak, MiG, Il-2, La-5 등 전투기·공격기의 대량 생산 체제를 구축해 루프트바페를 생산력으로 압도했으나, 종전 직후 1946년 '항공사건'으로 체포되어 7년형을 선고받았다. 1953년 스탈린 사후 복권되어 항공공업 차관으로 돌아왔다.
1942년 2월 26일 화학공업인민위원에 임명되었을 때, 그는 스탈린에게 「저는 전기기술자이고 화학은 잘 모릅니다」라고 말했다. 스탈린이 답했다: 「당신은 훌륭한 조직가입니다. 볼셰비키라면 맡은 일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대장간 아들로 태어나 전기기술자로 성장한 소련의 산업 행정가. 제2차 세계대전 중 화학공업인민위원으로서 군수 화학물질 생산을 재건했고, 1943년부터는 소련 원자폭탄 계획의 최고 경제 행정 책임자로 쿠르차토프와 함께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1949년 첫 핵실험 국가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으며, 1955년부터 제1부총리를 지냈다. 1957년 흐루쇼프의 일인 독주를 비판한 '반당 그룹' 사건에 연루되어 정치적으로 좌천되었으나, 이후로도 고스플란에서 에너지·지역계획 전문가로 일하며 1978년 7월 22일 모스크바에서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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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1936모스크바 경제원 졸업 후 카시라 발전소에서 기술자에서 소장까지 승진
1937–1939모스에네르고 수석기사, 글라브에네르고 국장을 거쳐 중공업인민위원부 제1부인민위원
1939–1940발전소·전기공업인민위원, 에너지 인프라 확충 지휘
1942–1950화학공업인민위원(이후 장관), 1942년 2월 26일 임명, 부총리 겸임, 전시 화학 생산 재건·확대
1943–1949원자폭탄 계획의 최고 경제 행정 책임자, 1945년 8월 20일부터 특별위원회 부위원장, 1949년 8월 RDS-1 핵실험 국가위원회 위원장
1952–1957CPSU 중앙위 간부회 위원·제1부총리, 1957년 반당 그룹 사건으로 강등
우랄마시에서 탱크를, 마야크에서 플루토늄을, 아르자마스-16에서 핵탄두를 찍어낸 산업 지휘관
1947년, 베리야가 그를 불러 “당 중앙과 스탈린 동지의 결정으로 자네를 기지-10의 책임자로 임명한다”고 통보했다. 무즈루코프가 반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임무는 소련 최초의 플루토늄으로 이어졌다.
중공업과 원자력 산업을 세 단계로 이끈 소련의 생산 지휘관이다. 1939년 35세로 우랄마시 공장장에 임명되어 7년간 7명이 바뀐 난국을 수습하고, 전시에는 소련 전차·자주포 5대 중 1대를 생산하는 기지로 전환시켰다. 1947년 베리야의 지명으로 마야크(제817콤비나트) 소장이 되어 1949년 8월 소련 최초 원자폭탄용 플루토늄 생산에 성공했다. 1955년부터 1974년까지 VNIIEF(아르자마스-16) 소장으로 전략·전술 핵탄두 개발과 양산을 총괄했다. 사회주의노동영웅 2회, 레닌상, 스탈린상 2회 수상. 노동자 생활과 도시 기반시설까지 챙긴 실무형 지도자였다.
1941년 10월 설계국이 우랄로 철수하자, 36세 모로조프는 숙련공 없는 공장에서 T-34를 더 단순하게 만들면서도 더 강력한 전차로 개량해야 하는 이중 과제를 떠안았다.
14세에 하리코프 기관차 공장 사환으로 출발해 소련 최장수 전차 수석설계자(1940~1976)가 된 공학자. 미하일 코시킨과 함께 T-34 개발을 주도했고, 코시킨 사후 36세에 설계국장을 이어받아 독소전쟁 내내 T-34의 양산 간소화와 전투력 개량(T-34-85)을 동시에 지휘했다. 전후에는 T-54/55를 설계해 역사상 가장 많이 생산된 전차 계열을 만들었고, 1960년대에는 복합장갑·자동장전장치·활강포를 채택한 T-64로 2세대 주력전차 개념을 열었다. 그의 설계국은 오늘날까지 '모로조프 설계국'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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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하리코프 기관차공장 기술부 사무원·복사공·제도공
1926–28붉은군대 항공여단 항공기술병 복무
1928–31하리코프 기관차공장 설계국 복귀, 콤무나르 트랙터·T-24 전차 설계 참여
1931하리코프 기계제작 전문학교 졸업, BT-2·BT-5·BT-7 경전차 설계 참여
1936–38설계국 신규설계 부문장
1938–40설계국 부국장 겸 부수석설계자, A-20·A-32 개발 — A-32가 T-34로 발전
1940–41하리코프 183호 공장 수석설계자, T-34 양산화 지휘
1941–51우랄 전차공장(니즈니타길) 수석설계자, T-34 현대화·T-43·T-44·T-54 개발
핵무기 설계국 KB-11의 초대 소장이자 소련 원자폭탄의 행정적 기반을 닦은 군수산업 조직자
베리야가 원자폭탄 기한을 못 맞춘다고 압박하자, 제르노프는 "과학자들이 게으른 게 아니라 문제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라고 맞섰다.
모스크바 바우만 공과대학에서 내연기관을 전공한 공학자 출신 군수산업 조직가. 1946년 4월 KB-11(아르자마스-16)의 초대 소장으로 임명되어 폐쇄도시 건설과 설계국 운영의 행정적 기반을 닦았고, 수석설계자 율리 하리톤과 함께 1949년 첫 소련 원자폭탄 RDS-1을 성공시켰다. 전쟁 중에는 전차공업 부인민위원으로서 공장 대피와 생산 재개를 지휘했고, 이후 중형기계공업부 차관으로 핵무기 산업 전반을 관장하며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스탈린이 물었다: "어떤 바보가 우리에게 비밀을 팔겠는가?" 그 바보는 영국 노동당 정부였다. 미코얀은 1946년 제트 엔진을 사러 런던으로 날아갔고, 롤스로이스 닌의 역설계가 곧 MiG-15의 심장이 되었다.
아르메니아 산골 마을 출신 선반공에서 소련 최대 전투기 설계국의 창립자로 거듭난 인물. 1939년 미하일 구레비치와 OKB-155(MiG)를 창설, MiG-15로 한국전쟁의 제공권을 장악하고 MiG-21이라는 사상 최다 생산 초음속 전투기를 내놓았다. 정치국원 아나스타스 미코얀의 동생이지만,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과 여섯 차례 스탈린상, 레닌상을 받으며 스스로 기술관료의 정점에 올랐다. 그의 설계국 항공기들은 55개 세계 기록을 수립했다.
1942년 2월 새벽 4시, 스탈린이 전화를 걸었다. 'T-34는 깊은 눈밭을 제비처럼 난다. 니즈니 타길로 가서 당장 생산하라.' 33일 만에 개조된 공장에서 T-34가 쏟아져 나왔다.
유대인 재단사 아들로 오데사 공업대학 졸업 후 키로프 공장에 입사, 33세에 공장장이 되었다. KV 중전차 양산을 주도했고 봉쇄 초기 포격 속에서도 생산을 이어갔다. 1941년 공장을 첼랴빈스크로 대피시켜 '탱코그라드'를 건설했으며, 1942년 전차공업 인민위원으로 전국 전차 생산을 총괄했다. 1943년 키로프 공장장으로 복귀해 IS-2를 투입, 전쟁 기간 18,000대의 전차와 자주포를 생산했다. 1949년 비리와 '레닌그라드 사건' 연루로 당 제명되었으나 체포는 면했고, 평범한 공장 직을 전전하다 1986년 은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