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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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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 인물 130명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카르핀스키

Александр Петрович Карпинский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47–1936 ○ 자연사

혁명을 가로질러 과학아카데미를 지킨 첫 선출 총재

1917년 5월 15일 과학아카데미 총회에서 최초의 선출 총재 투표가 열렸다. 카르핀스키는 거의 만장일치로 당선되었다 — 오직 본인만이 자신에게 반대표를 던졌다.

카르핀스키는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최초의 선출 총재(1917–1936)로서, 제정에서 소비에트 체제로의 전환기를 가로질러 학술원을 이끈 세계적 지질학자다. 유럽러시아 최초의 종합 지질도를 완성했고, 동유럽 플랫폼의 2층 구조를 밝혔으며, 남부 유럽러시아를 가로지르는 변형대인 '카르핀스키 선'을 규명해 지구조론의 기초를 놓았다. 페름기 상어 헬리코프리온을 기재했고, 그의 이름은 광물 카르핀스카이트, 달의 크레이터, 러시아 지질연구소에 남아 있다. 1917년 5월 총회에서 거의 만장일치로 선출된 그는 혁명과 내전의 혼란 속에서도 학술원의 장비와 기록을 보존하며 소비에트 기초과학 제도의 연속성을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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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6–1869우랄 지역 광산 기사
  • 1869–1896상트페테르부르크 광산연구소 교수
  • 1885–1903지질위원회 위원장
  • 1886제국 과학아카데미 회원 선출
  • 1899–1936광물학회 회장
  • 1916–1917과학아카데미 부총재 대행
  • 1917–1936과학아카데미 총재 · RAS → AN SSSR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베르나츠키

Владимир Иванович Вернадский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63–1945 ○ 자연사

생물권과 지식권 개념으로 지구를 재발견한 생지화학의 창시자

“내 삶의 모든 좋은 것은 나타샤에게 빚졌다. 56년을 마음과 생각을 함께 살았다.” — 1943년 아내의 임종일에 쓴 일기.

광물학자로 출발하여 생지화학이라는 새 학문을 세우고, 생물권(비오스페라)과 지식권(노오스페라) 개념을 정식화해 현대 지구계 과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1918년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초대 총재를 지냈고, 소비에트 라듐연구소를 조직해 초기 소련 우라늄·원자력 연구의 제도적 기반을 놓았다. 한때 카데트당 중앙위원이자 임시정부 교육차관이었으나, 혁명 후 아카데미의 보호 속에 과학자로 남아 1943년 스탈린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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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1911모스크바대학 광물학 교수
  • 1906–1917카데트당 중앙위원 · 국가평의회 의원
  • 1917임시정부 교육부 차관
  • 1918–1921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초대 총재
  • 1922–1939소련 라듐연구소 소장
  • 1927–1945생지화학연구소 소장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크릴로프

Алексей Николаевич Крыл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63–1945 ○ 자연사

소련 조선과학의 아버지, 뉴턴 『프린키피아』를 러시아어로 옮긴 수학자

손자 안드레이 카피차가 "왜 혁명 때 장군인 할아버지는 총살되지 않았어?" 하고 묻자, 크릴로프는 짧게 답했다. "장군도 장군 나름이란다."

제정 말기부터 소련까지 활동한 수학자·조선공학자. 마카로프 제독과 선박 불침몰성 이론을 정립했고, 1915년 뉴턴 『프린키피아』를 러시아어로 완역했다. 혁명 후 조선과학 토대를 닦고 사회주의노동영웅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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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4–1887해군 소위·나침반부 근무, 자차 이론 첫 연구
  • 1888–1890니콜라옙스크 해군사관학교 조선학과 수료
  • 1890–1908해군사관학교·해군대학 교수, 조선에 수학을 최초로 체계 응용
  • 1900–1908해군성 실험수조장 — 조선 연구 기초 마련
  • 1908–1911해군기술위원회 위원장·수석 조선감독관
  • 1911–1917해군장관 특별임무 담당 대장, 세바스토폴급 전함 설계
  • 1915뉴턴 『프린키피아』 라틴어 원전 러시아어 최초 완역
  • 1916페테르부르크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수리물리학)
  • 1919–1920해군대학장
  • 1928–1931소련 과학아카데미 물리수학연구소 소장
  • 1938–1941나침반 편차·자이로콤파스 이론 출판, 스탈린상 1급
  • 1943사회주의노동영웅 — 조선과학 평생 공로

휴 쿠퍼

Hugh Lincoln Cooper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미국 미국 1865–1937 ○ 자연사

세계 최대 댐 기술을 사회주의 건설 현장에 옮긴 미국인 공병 대령

1932년 드네프로스트로이 준공식에서: "이렇게 얻은 미국식 기술 경험이 이 나라의 생활 수준을 높이는 지렛대가 될 것입니다."

무학으로 댐 공학을 익힌 휴 링컨 쿠퍼는 나이아가라 급류(1907)와 미시시피 키오콕 댐(1913)을 성공시키며 자력으로 미국 최고의 수력 기술자가 되었다. 1926년 소련의 초청으로 드네프로스트로이 건설 수석 컨설턴트를 맡아 GE 터빈을 공급하고 공정을 총지휘, 1932년 유럽 최대 발전소를 예정보다 8개월 앞당겨 완공했다. 같은 해 소련은 쿠퍼와 미국인 기술자 5명에게 노동적기훈장을 수여했는데,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이었다. 평생 반공주의자로 남았으나, 그의 댐이 없었다면 1차 5개년 계획의 상징적 성취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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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토론토 발전소(나이아가라 호스슈 급류) 완공
  • 1913미시시피강 키오콕 댐 및 발전소 완공
  • 1914아스완 댐 전력화 사업 컨설턴트(제1차 세계대전으로 중단)
  • 1917–1918미 육군 공병대 감독 공병 장교, 대령
  • 1919레이크 줌브로 수력발전소(미네소타) 완공
  • 1924윌슨 댐(앨라배마, 후일 TVA 편입) 완공
  • 1927–1932드네프로스트로이(드네프로게스) 수석 컨설턴트, 소련
  • 1932노동적기훈장 수훈(외국인 최초)

블라디미르 레온티예비치 코마로프

Владимир Леонтьевич Комар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69–1945 ○ 자연사

스탈린 시대 과학아카데미를 이끈 식물학자

1939년 과학아카데미 회의에서 코마로프는 리센코의 유전학 공격을 공개 지지했고, 회의가 끝난 뒤 바빌로프와 코스토프 앞에서는 리센코의 견해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바빌로프는 이런 이중성을 두고 그를 '바실리 슈이스키' 같다고 비꼬았다.

블라디미르 코마로프는 1936년부터 1945년까지 소련 과학아카데미 총재를 지낸 식물학자이자 식물지리학자다. 극동·만주·캄차카·중앙아시아를 탐사하며 방대한 표본을 수집했고, 『만주의 식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그의 주도로 편찬된 30권의 『소련의 식물』은 소련 분류학의 금자탑이며, 형태-지리적 방법론을 체계화하고 극동·우랄·캅카스 등지에 분원을 세워 과학의 지방 분산을 추진했다. 대숙청과 전쟁기를 관통하며 아카데미를 이끌었고, 리센코를 공개 지지하면서 사적으로는 바빌로프에게 비판을 털어놓는 이중적 태도로 스탈린기 과학자의 곤경을 상징했다. 전시 자원동원위원회를 이끌었고, 사후 그의 이름은 코마로프 식물연구소에 헌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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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졸업, 식물학 학위
  • 1895–1897극동·만주·한반도 북부 탐사
  • 1899–1931제국 식물원(후일 식물연구소) 연구원
  • 1920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선출
  • 1930–1936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36–1945소련 과학아카데미 총재
  • 1941–1945우랄·서시베리아·카자흐스탄 자원 동원 위원회 의장

안톤 판네쿠크

Anton Pannekoek

은하수를 그린 천체물리학자이자, 레닌이 「좌익소아병」에서 겨냥한 평의회 공산주의의 창시자

1908년 브레멘의 어느 여름밤, 판네쿠크는 노동자 교실을 마치고 망원경을 들고 나갔다. 그가 은하수 구름을 언어로 묘사하며 남긴 관측 노트는, 훗날 항성통계학자들이 은하의 나선팔 거리를 처음 가늠하는 증거가 되었다.

네덜란드 천문학자이자 평의회 공산주의 창시자. 항성 대기·은하 구조 연구로 왕립천문학회 금메달을 받았다. 독일·네덜란드 좌파에서 평의회 혁명론을 정립했고, 레닌의 『좌익소아병』이 겨냥한 논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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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레이던 천문대 관측자, 알골 변광성 연구로 박사학위
  • 1901네덜란드 사회민주노동당 입당
  • 1906–1914베를린·브레멘에서 독일 사민당 좌파 활동, 당교 교사
  • 1909네덜란드 사회민주당 창립 참여 (KPN의 전신)
  • 1918–1921네덜란드 공산당 창립 참여, 코민테른 암스테르담 뷰로 위원
  • 1920레닌의 『좌익소아병』 비판 대상, 『세계혁명과 공산주의 전술』로 반론
  • 1921–1927KPN 제명 후 공산노동자당·공산노동자 인터내셔널 활동
  • 1925–1942암스테르담 대학 교수, 천문학연구소 설립
  • 1938J. 하퍼 가명으로 『철학자로서의 레닌』 출간
  • 1946P. 아르츠 가명으로 『노동자 평의회』 출간

표트르 이오아키모비치 팔친스키

Пётр Иоакимович Пальчинский
과학·기술 소속 미확정 소비에트 러시아인 1875–1929 ✕ 처형

겨울궁전 방어를 지휘한 임시정부의 마지막 기술관료

궁전이 함락되던 순간, 팔친스키는 돌격해 들어온 적위대 앞으로 뛰어들어 "합의가 이루어졌다, 시의회와 소비에트 대표단이 오는 중이다"라고 외쳤다.

카잔 출신 광산 기술자로, 청년 시절 아나키스트 사상에 공명했으며 1905년 혁명에 가담했다가 망명길에 올랐다. 1917년 임시정부의 통상·산업 차관과 페트로그라드 총독을 거쳐, 10월 25일 키시킨의 보좌관으로서 겨울궁전 방어를 실질적으로 지휘했으며, 궁전 함락 직전 돌입해 온 볼셰비키 병력에게 각료들의 항복 결정을 전했다. 석방 뒤 소비에트 체제에 협력하며 러시아기술협회 회장, GOELRO 및 드네프르 수력발전소 자문을 맡았으나, 1928년 샤흐티 재판의 후속 탄압 속에 체포되어 이듬해 '반혁명 사보타주' 혐의로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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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광산 기술자, 도네츠 탄전 조사
  • 1902–1905골로빈스키 탄광 지배인, 이르쿠츠크
  • 1906–1913망명 (런던·토리노·로마), 토리노 세계박람회 광업부문 책임
  • 1915–1917중앙군수공업위원회 간부
  • 1917.03–10임시정부 통상·산업 차관, 페트로그라드 총독 (8–9월)
  • 1917.10.25겨울궁전 방어 책임자, 체포
  • 1918–1928러시아기술협회 회장, GOELRO·드네프르 수력발전소 자문
  • 1928–1929체포, 사형 선고, 총살

보리스 미하일로비치 엘친

Борис Михайлович Эльцин
과학·기술 소속 미확정 소련 우크라이나 1876–1937 ✕ 처형

러시아 초대 대통령과 이름이 겹치는, 의사 출신의 좌익반대파

러시아 초대 대통령 보리스 옐친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러시아어 표기도 이쪽은 Эльцин, 대통령은 Ельцин으로 다르다.

1876년 키예프현 즈베니고로드카에서 태어났다(1875년으로 적은 자료도 있다). 1897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들어갔고 이듬해 오데사의 노보로시야대학 의학부를 마친 의사였다. 1910년 혁명 활동으로 우파현에 유배되어 벨레베이에서 위생의사로 일하며 볼셰비키에 가담했다. 혁명 후 지역 소비에트와 여러 위원회에서 일했고, 1923년부터 좌익반대파에 속해 46인 선언에 서명했다. 1927년 당에서 제명되어 이듬해 초 우스티-뷔미로 유배되었고, 1929년에는 수즈달 정치격리소에 수용되었다. 1936년 다시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으며, 같은 해 마가단에서 정치범 단식투쟁을 조직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1937년 처형되었고 1956년 11월 23일 복권되었다. 아들 빅토르 보리소비치 엘친도 반대파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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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 1898오데사 노보로시야대학 의학부 졸업
  • 1910우파현 유배, 벨레베이 위생의사
  • 1923좌익반대파 가담, 46인 선언 서명
  • 1927당에서 제명
  • 1928–1929우스티-뷔미 유배, 수즈달 정치격리소 수용
  • 1936재체포, 시베리아 유배, 마가단 정치범 단식투쟁 조직
  • 1937처형
  • 1956복권

니콜라이 닐로비치 부르덴코

Николай Нилович Бурденко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러시아 1876–1946 ○ 뇌졸중

소비에트 신경외과의 창시자이자 적군 주임외과의

공습 중 대피를 거부하며 말했다. "부상자들은 숨을 수 없소. 의사의 자리는 환자 곁이오."

소비에트 신경외과의 창시자이자 대조국전쟁기 적군 주임외과의로, 네 차례 전쟁에서 야전외과를 혁신했다. 신학교를 그만두고 유리예프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며, 러일전쟁에 자원해 부상자 후송 중 총상을 입고 게오르기 십자훈장을 받았다. 1932년 세계 최초의 중앙신경외과연구소를 모스크바에 창설하고 뇌종양 수술을 대중화했으며 구근절개술을 개발했다. 1937년부터 적군 주임외과의로서 야전의료를 지휘했고, 65세에도 전선에서 수천 건의 수술을 집도하며 페니실린 도입을 주도했다. 그의 지휘 아래 적군 의무대는 부상병 72.3%를 전선에 복귀시켰고 단 한 건의 감염병 유행도 없었다. 1944년 소련 의학아카데미 초대 총재로 취임했으며, 3차례 뇌졸중 끝에 1946년 70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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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1905러일전쟁 의무병, 부상자 후송 중 총상, 게오르기 십자훈장
  • 1906–1910유리예프 대학 의학부 졸업, 박사학위, 독일·스위스 연수
  • 1910–1917유리예프 대학 외과 교수, 1차대전 북서전선 적십자 외과고문, 2군 외과고문, 주임군사위생감독(1917.3–5)
  • 1918–1923보로네시 대학 외과 교수, 적군 군병원·야전외과 강좌 조직, 피로고프 의학회 창립
  • 1923–1937모스크바 대학·제1모스크바 의학원 외과 교수, 외과 클리닉 원장, 신경외과 병동 개설
  • 1932세계 최초 중앙신경외과연구소 창설, 소장
  • 1937–1946적군 주임외과의, 소련-핀란드 전쟁·대조국전쟁 야전의료 지휘, 수천 건 수술, 페니실린 도입
  • 1944–1946소비에트 의학아카데미 초대 총재

헨리 뵈우커스

Henry Beeuwkes
과학·기술 소속 미확정 미국 미국계 1880–1959 ○ 자연사

기근 현장에서 의료 구호를 조직한 의사

뵈우커스는 기근 구호를 급식소의 수가 아니라 병원과 위생망의 회복으로 기록했다.

헨리 뵈우커스는 미국의 의사이자 공중보건 행정가로, 국제 구호를 임상과 위생의 조직 문제로 다룬 인물이다. 1921년부터 1923년까지 미국구호행정의 러시아 의료국장으로 일하며 식량 배급과 병행되는 병원 지원, 의약품 공급, 예방접종과 전염병 대응을 조정했다. 그는 이 경험을 1926년 저서에 정리해 기근 구호가 급식소를 넘어 의료·위생 체계의 복구였음을 기록했다. 이후 황열병 연구와 군 의료 행정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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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미 육군 의무대 입대
  • 1917–1918제1차 세계대전 프랑스 전선에서 군의관 복무
  • 1921–1923미국구호행정 러시아 의료국장
  • 1925–1927록펠러재단 서아프리카 황열병 조사단장
  • 1926『러시아 기근의 미국 의료·위생 구호』 출간
  • 1942–1945밸리포지 종합병원 지휘관

아브람 표도로비치 이오페

Абрам Фёдорович Иоффе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제국(폴타바 주 롬니)의 유대인 가정 출신 1880–1960 ○ 자연사 ( 레닌그라드)

소비에트 물리학 전체를 키워낸 '파파 이오페'

1905년 뮌헨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스승 뢴트겐의 교수직 제안을 거절하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반동의 시기에 러시아 밖에 머무는 것은 자신의 시민적 의무가 아니라고 보았고, 정치가가 되기를 바라지 않고 오직 과학에서 만족을 찾는다고 말했다.

뢴트겐의 제자로 1918년 물리기술연구소를 설립해 소련 물리학의 산실로 키웠고, 쿠르차토프·카피차 등 핵물리학 세대를 길러냈다. 1942년 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를 지냈으며, 1950년 12월 반세계주의 공세 속에 소장직에서 해임되었다. 1952년 반도체 실험실을 세워 1954년 연구소로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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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1918상트페테르부르크 공과대학 물리학 강사·실험실장
  • 1918–1921국립방사선·방사선학연구소 물리기술부장
  • 1921–1950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LFTI) 소장
  • 1926–1929, 1942–1945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32–1942LFTI 내 핵물리학 연구 주도·원자력 계획 추진
  • 1952–1960소련 과학아카데미 반도체연구소 소장

프레더릭 린데만

Frederick Lindemann
과학·기술 소속 미확정 영국 영국계 1886–1957 ○ 자연사

전쟁 과학을 국가전략으로 밀어붙인 물리학자

그는 1942년 처칠에게 도시 폭격으로 노동계급 주거지를 무너뜨리자는 ‘Dehousing’ 논리를 제출했다.

프레더릭 린데만은 영국의 물리학자이자 윈스턴 처칠의 핵심 과학 자문자로, 과학 연구를 국가의 전쟁 수행과 정책 결정에 직접 결합했다. 그는 옥스퍼드 클라렌던 연구소를 이끌며 항공기 스핀 회복과 물리화학을 연구했고, 전시에는 통계 부서를 조직해 전쟁 내각이 보급과 생산을 수치로 판단하도록 했다. 폭격의 효과와 민간 사기를 둘러싼 논쟁에서 그는 도시 지역 폭격을 강하게 지지했으며, 코번트리 이후에도 폭격 지속을 뒷받침하는 정책 논리를 제공했다. 그의 전문성은 처칠에게 신속한 판단의 도구를 주었지만, 계급주의적 인간관과 폭격 정책은 과학 지식이 국가 폭력에 편입될 때 생기는 책임의 문제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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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왕립 항공기 공장 연구원, 항공기 스핀 회복 연구
  • 1919옥스퍼드대학교 실험철학 교수 및 클라렌던 연구소장
  • 1920왕립학회 회원 선출
  • 1940처칠 정부의 수석 과학 자문자, 통계 부서 S-Branch 조직
  • 1942페이마스터 제너럴, 도시 지역 폭격 정책 자문
  • 1951처칠 제2차 정부의 페이마스터 제너럴 및 과학 자문자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바빌로프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Вавил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87–1943 ○ 옥사

세계 최대 종자은행을 세운 유전학자, 리센코의 반대자

“우리는 화형대에 오를 것이다, 타오를 것이다, 그러나 신념에서 물러서지는 않을 것이다.” — 1939년, 레닌그라드에서 리센코의 박해가 절정에 달했을 때.

러시아와 소련의 유전학자·식물학자. 유전적 변이의 상동계열 법칙을 발견하고 재배식물의 기원중심지 이론을 수립했으며, 전 세계 180여 차례의 식물채집 원정을 통해 25만 점 이상의 세계 최대 종자 컬렉션을 구축했다. 전연방농업과학아카데미(VASKhNIL) 초대 총재와 전연방식물재배연구소(VIR) 소장을 지내며 소비에트 농업과학을 이끌었으나, 1930년대 중반 이후 리센코의 유사과학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다 1940년 조작된 혐의로 체포되어 1943년 사라토프 감옥에서 사망했다. 1955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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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0사라토프 대학 교수, 식물면역 연구
  • 1920유전적 변이의 상동계열 법칙 발견
  • 1920–1940전연방식물재배연구소(VIR) 소장
  • 1926재배식물 기원중심지 이론 발표
  • 1929–1935전연방농업과학아카데미(VASKhNIL) 총재
  • 1930–1940소련과학아카데미 유전학연구소 소장
  • 1931–1940전연방지리학회 회장
  • 1935–1940VASKhNIL 부총재, 리센코 학설에 공개적 반대

비탈리 그리고리예비치 흘로핀

Виталий Григорьевич Хлопин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890–1950 ○ 사망

라듐연구소를 이끌며 소련 핵물리학의 제도적 토대를 놓은 방사화학자

1921년 12월 1일, 흘로핀은 페트로그라드의 실험실에서 소련 최초의 고활성 라듐 제제를 자신의 손으로 얻어냈다.

소련 방사화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으로, 1921년 최초의 국산 라듐을 얻어내고 1924년 미량성분 분배 법칙(흘로핀 법칙)을 정립했다. 베르나츠키의 뒤를 이어 라듐연구소장이 되었고, 1940년 6월 베르나츠키와 함께 우라늄 위원회 설립을 제안해 7월 30일 위원회가 발족하자 초대 위원장에 올랐다. 전후에는 라듐연구소에서 플루토늄 분리 기술을 개발해 1949년 첫 핵실험의 산업적 기반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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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베르나츠키의 초청으로 과학아카데미 방사선연구소에서 연구 시작
  • 1921소련 최초의 고활성 라듐 제제 획득
  • 1922–1935라듐연구소 부소장 겸 화학부장
  • 1936–1950라듐연구소 소장
  • 1940과학아카데미 우라늄 문제 위원회 위원장
  • 1943, 1946, 1949스탈린상 3회 수상
  • 1945레닌그라드대학에 소련 최초의 방사화학 강좌 개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바빌로프

Сергей Иванович Вавил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1–1951 ○ 심근경색

초기 원자력 시대 과학아카데미를 이끈 물리학자-행정가

“뉴턴에게는 과학적 포부와 사색의 깊이 외에도 행정적 재능이 있었다… 막대한 행정·실무 활동이 그를 과학 작업에서 떼어놓았다.” — 바빌로프가 1945년 자신의 뉴턴 전기에서 쓴, 동시에 자기 자신을 그린 구절.

소련의 물리광학자이자 과학행정가로, 소비에트 물리광학 학파의 창시자이다. 루미네선스 연구를 개척했으며, 1934년 파벨 체렌코프와 함께 바빌로프-체렌코프 효과를 공동 발견하여 훗날 체렌코프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의 토대를 놓았다. 1934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FIAN) 소장을 지내며 소련 최대의 물리학 연구기관으로 키워냈고, 1945년 과학아카데미 총재로 선출되어 초기 원자력 시대의 소비에트 과학을 행정적으로 이끌었다. 네 차례 스탈린상을 받았으며 제2판 『대소비에트 백과사전』 편집장을 맡았다. 유전학자 니콜라이 바빌로프의 동생으로, 형이 리센코의 박해로 체포·사망한 시기에도 공식적 지위를 유지하며 물리학을 보호해야 했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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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1914모스크바대학 물리·수학부, 우등 졸업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복무, 공병·기술 부대
  • 1918–1932모스크바대학·모스크바국립기술대학 강사, 물리·생물물리학연구소 연구원
  • 1932소련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선출
  • 1932–1945국립광학연구소(GOI) 과학 지도자
  • 1934바빌로프-체렌코프 효과 공동 발견
  • 1934–1951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FIAN) 소장
  • 1945–1951소련과학아카데미 총재, 『대소비에트 백과사전』 편집장

오토 율리예비치 슈미트

Отто Юльевич Шмидт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독일 1891–1956 ○ 병사

북극을 과학으로 정복한 수학자, 글라브세브모르푸티의 설계자

두 달간의 빙판 체류 내내 그는 매일 저녁 텐트에서 철학·수학·지리 강연을 열었다. 결핵으로 각혈하면서도 끝까지 진영을 떠나지 않겠다고 버텼고, 104명 중 단 한 명의 무단 이탈도 없었다.

수학자·북극 탐험가·국가행정가. 모길료프 출생의 독일계 러시아인으로, 군론 연구로 모스크바 대수학파를 창건했다. 1932년 쇄빙선 시비랴코프호로 북극해 항로를 세계 최초로 단일 항해로 돌파했고, 1934년 첼류스킨호 침몰 후 빙판 위에서 104명의 생존자를 이끌었다. 글라브세브모르푸티 국장으로 북극 개발을 총괄했으며, 말년에는 태양계 행성이 차가운 먼지 구름의 응축으로 형성되었다는 우주기원론을 제창하여 소련 과학계에 큰 영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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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키예프 대학 물리수학부 졸업, 군론 연구 시작
  • 1916『추상군론』 출판, 키예프 대학 사립강사
  • 1918–1920식량인민위원부 간부, RSDLP(국제주의자)에서 RKP(b)로 편입
  • 1921–1924국립출판사 소장, 교육·출판 개혁 주도
  • 1924–1942『대소비에트백과사전』 초대 편집장
  • 1929–1949모스크바 대학 고등대수학과 창설·주임, 소련 대수학파 지도
  • 1930–1932전연방북극연구소 소장
  • 1932시비랴코프호로 북극해 항로 최초 단일 항해 통과
  • 1932–1938북극해 항로 총국(글라브세브모르푸티) 국장
  • 1934첼류스킨호 침몰, 빙판 위에서 104명과 두 달 생존·전원 구조
  • 1937표류관측소 '북극-1' 설립 주도,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
  • 1939–1942소련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42–1956이론지구물리학연구소 소장, 태양계 '차가운 강착' 우주기원론 연구

빅토르 발렌티노비치 노보질로프

Виктор Валентинович Новожил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2–1970 ○ 자연사

마르크스 가치론과 수리 최적화를 접목한 소비에트 경제수학파의 공동 창시자

1942년, 독일군 점령하의 퍄티고르스크에서 시립극장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등록해 강제노동 이송을 피했다. 독일 측 경제학자 슈타켈베르크가 통계국장직을 제안하자 '현재 4중주단의 제1바이올린 주자로서 떠날 수 없다'며 거절했다.

칸토로비치·넴치노프와 함께 소련 수리경제학파의 창시자. 마르크스 노동가치론에 기초해 자원 희소성을 반영하는 '차등적 비용' 개념을 정식화, 계획경제 최적화 이론의 토대를 세웠다. 1965년 레닌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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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2하리코프 출생 (아버지는 현직 참사관)
  • 1911–1915키예프 대학 법학부 졸업 (금메달), 정치경제학·통계학 강좌 교수장학생으로 잔류
  • 1922–1951레닌그라드 폴리테크닉 연구소 교수, 1938–1951 기계제작 경제학 주임
  • 1941경제학 박사학위: 「계획·설계 변수의 국민경제적 효율 비교측정 방법」
  • 1951–1966레닌그라드 공학경제연구소 통계학 주임
  • 1961레닌 훈장 수훈
  • 1965레닌상 공동 수상 (칸토로비치·넴치노프와 선형계획법·경제모형 개발)
  • 1966–1970TsEMI 레닌그라드 분소 체계적 경제평가 연구실장

보리스 미하일로비치 게센

Борис Михайлович Гессен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3–1936 ✕ 처형

뉴턴 역학의 사회경제적 뿌리를 밝힌 마르크스주의 과학사학자, MSU 물리학부 초대 학장

1931년 런던, 게센은 연단에서 포프의 시를 인용했다. '신이 말하길 뉴턴이 있으라 하시니 모든 것이 빛이 되었다.' 이어 그는 《프린키피아》가 신의 계시가 아니라 17세기 상업·산업·전쟁의 기술적 요구가 낳은 산물이라고 선언했고, 강당은 술렁였다.

소비에트 물리학자·과학사학자. 1931년 런던에서 뉴턴 역학이 17세기 기술·경제적 요구의 산물임을 논증, 과학사회학 외재주의 전통을 열었다. MSU 물리학부 초대 학장으로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옹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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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1917에든버러대·페트로그라드대에서 물리학 수학, 폴리테크닉에서 경제학 병행
  • 1919–1921적군 복무, 혁명군사평의회 정치총국 근무
  • 1921–1924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 교원
  • 1924–1928붉은 교수직 연구소 수학, 졸업 후 강의
  • 1928《상대성이론의 기본 이념》 출간
  • 1931런던 국제과학사회의에서 「뉴턴 역학의 사회경제적 뿌리」 발표
  • 1931–1934MSU 물리학 교수, 물리학부 초대 학장, NIIF 소장
  • 1933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선출
  • 1935–1936FIAN 부소장, 《우스페히 피지체스키흐 나우크》·대소비에트백과사전 편집위원

악셀 이바노비치 베르그

Аксель Иванович Берг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핀란드·스웨덴·독일계 1893–1979 ○ 자연사

소련 레이더를 세우고 사이버네틱스를 부흥시킨 과학자-제독

"사이버네틱스의 주된 목표는 인간이 복잡하고 통제하기 어려운 과정을 통제하는 효율을 높이도록 돕는 것이다. 인간의 역할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1959년 4월 10일 과학아카데미 상임위원회 보고

1893년 오렌부르크에서 스웨덴·핀란드·독일계 루터교 군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1979년 모스크바에서 죽었다. 해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정 해군 장교로 복무했으며, 1919년 잠수함 판테라의 항해장으로 영국 구축함을 격침한 뒤 군 통신 연구와 레이더 개발을 지휘했다. 1937년 12월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유죄 판결을 받지 않고 1940년 석방되었고, 1991년에야 사후 복권되었다. 1946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1955년 제독-기사, 1953년부터 1957년까지 국방차관을 지냈고, 1959년부터 죽을 때까지 아카데미 사이버네틱스 과학위원회를 이끌며 생물학적·기술적 사이버네틱스와 인공지능 연구를 제도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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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8전함 체사레비치 항해사, 영국 잠수함 E8 연락장교 (제정 러시아 해군)
  • 1918–1922잠수함 판테라 항해사, 잠수함 리스·볼크·즈메야 함장 (붉은 함대); HMS 비토리아 격침 (1919)
  • 1925–1937해군공병학교 교관, 무선연구소 설립 → 해군통신·원격기계연구소장 (NIMIST)
  • 1937–1940체포, NKVD 특별설계국(샤라슈카)에서 군 통신체계 개발; 증거불충분 석방
  • 1943–1944전기공업 부인민위원; 전연방 레이더 과학연구소 창설·초대 소장
  • 1943–1947국방위원회 레이더 위원회 부위원장 (위원장: 말렌코프)
  • 1953–1957소련 국방차관
  • 1953–1955과학아카데미 무선공학·전자공학연구소 초대 소장
  • 1959–1979과학아카데미 사이버네틱스 과학위원회 의장

바실리 세르게예비치 넴치노프

Василий Сергеевич Немчин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4–1964 ○ 자연사

수리경제학으로 계획의 과학화를 꿈꾼 학술 조직자

1948년 8월 VASKhNIL 총회. "염색체 유전 이론은 인류 과학의 황금 기금에 들어갔다"고 말한 넴치노프에게 누군가 "사임하시오!"라고 외쳤다. 그가 답했다. "아마도 사임해야겠지요. 나는 내 자리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다음날 그는 정말 해임되었다. 전체 회의장에서 리센코에 맞선 유일한 공개 연설이었다.

소련 수리경제학파의 창시자. 1917년 모스크바 상업대학 졸업 후 1920년대 농촌 계급구조 연구로 주목받았다. 1948년 VASKhNIL 8월 총회에서 리센코의 유전학 탄압에 맞서 유일하게 공개 반대 연설을 했고, 다음날 티미랴제프 농업대학 학장직에서 해임되었다. 1955년 '300인의 편지'에 서명했다. 1958년 소련 최초의 경제-수학 연구실험실을 조직, 1963년 중앙경제수학연구소(TsEMI)로 발전시켰다. 스탈린상(1946)·레닌상(1965) 수상. 칸토로비치·리베르만과 함께 해빙기 경제개혁 논의의 지적 삼각축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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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펜자현 그라보보 마을에서 출생
  • 1917모스크바 상업대학 경제학부 졸업
  • 1917–1922첼랴빈스크 현 젬스트보 통계국장
  • 1923–1926우랄주 통계청장 (스베르들롭스크)
  • 1926–1934소련 중앙통계국·고스플란 인민경제회계 이사국 위원
  • 1940–1948티미랴제프 모스크바 농업대학 학장
  • 194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경제·통계)
  • 1948VASKhNIL 총회 리센코 반대 연설 — 다음날 학장직 해임
  • 1949–1963소련 과학아카데미 생산력연구회의(SOPS) 의장
  • 1953–1962과학아카데미 상임위원·경제·철학·법학부 학술서기
  • 1958소련 최초의 경제-수학 연구실험실 창설
  • 1962–1964모스크바대학 경제분석 수리방법 학과 창설·학과장
  • 1963중앙경제수학연구소(TsEMI) 창설, 학술지 창간
  • 1964모스크바에서 사망, 노보데비치 묘지 안장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오파린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Опарин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러시아 1894–1980 ○ 자연사

원시 수프에서 생명의 기원을 탐구한 소비에트 생화학자

"살아 있는 유기체와 무생명 물질 사이에는 근본적 차이가 없다." — 1922년, 훗날 『생명의 기원』으로 출판된 초기 논고에서.

소비에트 생화학의 제도적 기초를 닦은 생화학자이자 과학행정가이다. 1924년 지구상 생명이 무생물적 화학 진화를 통해 발생했다는 '원시 수프' 가설을 제창하여 생명기원 연구의 패러다임을 열었고, 이는 훗날 밀러-유리 실험으로 이어졌다. 1935년 알렉세이 바흐와 함께 소련 과학아카데미 생화학연구소를 창설하고 1946년부터 34년간 소장으로서 소비에트 생화학의 중심 축을 이끌었다. 1970년 국제생명기원연구학회(ISSOL) 초대 회장으로서 이 분야의 국제적 제도화에도 기여했으나, 한편으로 리센코와 레페신스카야의 유사과학을 지지하여 과학과 정치의 긴장을 자신의 경력 속에 각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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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모스크바국립대학교 물리수학부 자연과학과 졸업
  • 1925–1942모스크바국립대학교 생화학 강사·교수
  • 1935A. N. 바흐와 함께 소련 과학아카데미 생화학연구소 공동 창설
  • 1935–1946바흐 생화학연구소 부소장
  • 1939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42–1960모스크바국립대학교 식물생화학과장
  • 194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 1946–1980바흐 생화학연구소 소장
  • 1948–1955소련 과학아카데미 생물학부 아카데미크-서기
  • 1951–1958전연방 '즈나니예' 협회 회장
  • 1970–1977국제생명기원연구학회(ISSOL) 초대 회장

표트르 레오니도비치 카피차

Пётр Леонидович Капица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4–1984 ○ 자연사

베리야를 거부하고 초유동성을 발견한 노벨상 물리학자

지난 20년을 보면, 물리학의 새로운 발견에 기초한 세계 기술의 근본적으로 새로운 방향들은 모두 해외에서 발전했고, 우리는 그것들이 확실한 인정을 받은 후에야 받아들였다. —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 1946년

소련의 실험물리학자. 케임브리지에서 러더퍼드 밑에서 연구했고 1934년 소련에 억류되었다. 1937년 액체 헬륨의 초유동성 발견, 베리야의 원자탄 프로젝트 지휘를 거부했다. 1978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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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1934케임브리지 캐번디시 연구소 연구원·자기연구 부소장·몬드 연구소장
  • 1934–1946소련 과학아카데미 물리문제연구소(IFP) 소장
  • 1943–1946소련 인민위원회 산하 산소총국(글라프키슬로로드) 국장
  • 1945원자력 특별위원회 위원 — 베리야의 지휘 방식을 거부하고 사임
  • 1946–1955해임 및 사실상의 가택연금 — 자택 실험실 '물리문제의 오두막'에서 연구 지속
  • 1955–1984물리문제연구소(IFP) 소장 (복권)
  • 1957–1984소련 과학아카데미 상임위원회 위원

이반 드미트리예비치 파파닌

Иван Дмитриевич Папанин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4–1986 ○ 자연사

유빙 위에서 북극을 기록한 소련 극지 탐험의 얼굴

「우리는 균열과 거대한 수로에 둘러싸여 있다. 눈보라 속에서 유빙이 붕괴하면 탈출은 어려울 것이다…」 — 1938년 1월 29일, 파파닌의 일기.

세계 최초의 유빙 과학기지 '북극점-1'(1937–1938)을 이끈 소련의 극지 탐험가. 네 명의 연구원이 274일 동안 유빙 위에서 생활하며 북극 고위도 지역의 해양·기상 데이터를 수집한 이 원정은 유빙 표류 관측이라는 새로운 방법론을 개척했다. 오토 슈미트의 후임으로 북극항로 총국(글라브세브모르푸티, 1939–1946)을 이끌며 소련의 전략적 북극 해운을 총괄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국방위원회 대표로서 북극 해상 수송을 지휘했다. 세바스토폴의 선원 가정에서 태어나 내전기 크림에서 붉은 파르티잔으로 활동했으며, 소련 영웅 칭호를 두 차례, 레닌 훈장을 아홉 차례 받았다. 전후에는 소련 과학아카데미 해양탐험부장을 35년간 맡으며 소련 해양학의 제도적 기반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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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러시아 제국 해군 징집
  • 1918–1920크림에서 붉은 파르티잔 활동, 내전 참전
  • 1920–1922크림 체카 사령관, 하리코프 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 군사령관
  • 1923–1932통신인민위원부에서 근무
  • 1932–1933프란츠요제프 제도 티하야만 극지기지장
  • 1934–1935첼류스킨곶 극지기지장
  • 1937–1938세계 최초 유빙기지 '북극점-1' 대장
  • 1939–1946북극항로 총국(글라브세브모르푸티) 국장
  • 1941–1945국방위원회(GKO) 북부 해상수송 전권대표
  • 1948–1951소련 과학아카데미 해양학연구소 부소장
  • 1951–1986소련 과학아카데미 해양탐험부장
  • 1952–1972소련 과학아카데미 내수생물학연구소장 (겸임)

이고리 예브게니예비치 탐

Игорь Евгеньевич Тамм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895–1971 ○ 루게릭병

수소폭탄에서 토카막까지, 두 핵 시대의 이론물리학자

1953년 첫 수소폭탄 실험 성공과 함께 탐은 무기 연구를 떠나 모스크바로 돌아왔고, 남은 18년을 핵융합의 평화적 이용에 바쳤다.

이고리 탐은 체렌코프 복사를 일리야 프란크와 함께 해명하여 1958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소비에트 이론물리학자다. 1934년부터 사망까지 FIAN 이론부장으로 탐 준위·탐-댄코프 근사 등 기초물리학에 기여했고, 1948년 쿠르차토프의 요청으로 수소폭탄 개발에 투입되어 1949~1953년 아르자마스-16 이론그룹을 이끌며 사하로프·긴즈부르크 등과 '슬로이카' 설계로 1953년 8월 소련 첫 열핵폭탄 실험을 성공시켰다. 1951년 사하로프와 제안한 토카막 자기밀폐 핵융합 개념은 ITER로 이어지는 주류 핵융합로의 토대이며, 후기에는 '300인의 편지'(1955)와 스탈린 복권 반대 성명(1966)에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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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모스크바대학 졸업
  • 1924–1930모스크바대학 강사 → 이론물리학 주임
  • 1934–1971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FIAN) 이론부장
  • 1949–1953아르자마스-16 열핵폭탄 이론그룹장
  • 1951사하로프와 토카막 개념 제안
  • 1953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58노벨 물리학상 (체렌코프 복사 해명)
  • 1966스탈린 복권 반대 25인 성명 서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