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포 후 진술: '나와 수사관 10명이 레닌그라드로 갔다… 아바쿠모프가 엄중히 경고했다. 재판에서 즈다노프의 이름이 언급되어선 안 된다. 목숨을 건다고.'
1938년부터 NKVD에서 복무한 보안 요원으로, MGB 특별중요사건 수사부 차장(대령)까지 올랐다. 레닌그라드 사건 수사에서 아바쿠모프의 핵심 집행자로 활동하며 피의자들을 직접 구타하고, 부하 수사관 푸틴체프의 조서 조작을 승인·지휘했으며, 재판 전 피고인들에게 위증을 강요하는 리허설까지 주관했다. 1951년 아바쿠모프와 함께 체포되었고, 스탈린 사후 레닌그라드 사건 조작 혐의로 1954년 사형 선고를 받고 레바쇼보에서 총살되었으며, 현재까지 복권되지 않았다.
「끝까지 마오 주석의 충성스러운 병사」라 자처한 그는 수십 년간 마오를 경호했고, 1976년에는 8341부대로 4인방을 체포했다.
장시 출신으로 대장정 뒤 마오의 경호를 맡았고 1949년부터 중앙경위국(8341부대) 책임자로 지도부의 안전과 일상을 관리했다. 문화대혁명기 중앙판공청 주임으로 마오의 신임을 받았으며 1976년 10월 예젠잉·화궈펑과 함께 8341부대를 동원해 장칭 등 4인방을 체포했다. 1977년 당 부주석이 되었으나 화궈펑의 「양개범시」를 지지해 덩샤오핑과 대립했고, 1980년 부주석직에서 물러나 정치적으로 퇴장했다. 2015년 99세로 사망했다.
1982년 1월 19일, 수슬로프와의 격렬한 대면 후 다차 서재에서 권총 한 발. 당일 소집된 의사들은 심장마비로 사망진단서를 썼다.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 출신으로 역사 교사에서 NKVD에 입문해 몰다비아에서 브레즈네프의 신임을 얻었고, 1967년 KGB 제1부의장 겸 제5국장으로서 반체제 인사 탄압을 총괄했다. 1982년 1월 의문의 권총 사망은 수슬로프의 급서와 안드로포프의 당직 이동, 브레즈네프의 사망으로 이어지며 크렘린 권력 구도의 분수령이 되었다.
소련 국경군 사상 최초로 대장 계급에 오른 수장이었던 마트로소프는, 아프가니스탄 전쟁 중 직접 국경 부대를 방문해 작전을 조율했다. 훗날 국경군 원로들은 그를 '국경군 역사상 가장 뛰어난 지휘관'으로 꼽았다.
스몰렌스크 지방 시골 교사 가정 출신으로, 1938년 NKVD 국경군에 입대해 이란 접경에서 복무하다 독소전쟁 발발 후 카렐리야 전선에서 핀란드군 후방으로 10차례의 장거리 정찰을 감행했다. 1972년부터 1989년까지 KGB 국경군 총사령관을 지내며 소련 국경수비대 역사상 최장기 지휘관으로 군 복무했고, 국경군 수장 최초로 대장 계급에 올랐다. 안드로포프·페도르추크·체브리코프 3대 KGB 의장 아래에서 아프가니스탄 북부 국경 작전을 직접 지휘했으며, 소련 전 국경의 군사화를 총괄한 국가보안 기관의 핵심 군사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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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1941NKVD 국경군 입대, 아제르바이잔 렌코란 분견대에서 이란 국경 경비
1941–1944모스크바 방어전 참전 후 카렐리야 전선에서 정찰 장교로 10차례 핀란드군 후방 정찰
1948–1963국경군 본부에서 참모 경력, 북부·자캅카스 국경관구 근무
1967–1972국경군 참모장 겸 제1부사령관
1972–1989KGB 국경군 총사령관 (1984년부터 KGB 부의장 겸직), 아프가니스탄 국경 작전 지휘
KGB 도청 부서가 감청 중인 스위스 주재원의 전화에 누군가 망을 봐주었다. 추적 결과, 발신자는 다름 아닌 제1총국장 모르틴 자신이었다. 그는 그해 휴가를 떠난 뒤 다시는 루뱐카로 돌아오지 못했다.
사하롭스키의 13년 오른팔로 냉전기 KGB 제1총국의 대외첩보 실무를 지휘하다 1971년 총국장이 된 소련의 첩보 장군이다. 재임 중 PGU 본부를 야세네보로 옮기고 과학기술 첩보를 확충하며, 브란트 정부와의 비밀 채널이 가동되던 데탕트 초기의 해외 정보활동을 총괄했으나 부하 간부를 감청에서 지키려 한 전화 한 통으로 불과 2년 반 만에 크류치코프에게 자리를 넘겼다.
1943년 말 키이우 서쪽에서, 야코블레프는 자신의 대전차포 대대와 두 개의 대전차소총 소대로 50대의 적 전차를 포위사격으로 맞아 17대를 격파하고 공세를 저지했다.
소련 내무부(MVD) 내부군 총사령관을 1968년부터 1986년까지 18년간 역임한 육군대장이다. 스타브로폴의 코사크 가정에서 태어나 1939년 붉은 군대에 입대, 위대한 조국전쟁에서 중위에서 소령까지 진급하며 여섯 개의 전투훈장을 받고 세 차례 부상당했다. 내부군 사령관으로서 영토 기반의 준군사 조직을 항공·해상 부대까지 갖춘 기동타격 부대로 재편하고 특수차량화경찰부대와 지역 사령부 체계를 도입했으며,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1만 5천 명의 병력을 동원해 오염 구역 경계 작전을 직접 지휘했다. 1986년 12월 우파 공항에서 내부군 호송연대 병사들이 여객기를 납치해 여러 명을 살해한 사건의 책임을 지고 해임되었으나, 말년까지 내부군 고문과 참전용사협의회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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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1940케메로보 박격포·포병학교 졸업, 소련-핀란드 전쟁 참전 (부상)
1941–1945대조국전쟁: 소대장→대대장, 중위→소령, 6개 전투훈장, 3차례 부상
1949–1958스탈린 기갑군사학교·참모대학 졸업, 독일 주둔군 전차연대장, 루마니아 주둔 사단장
그리고렌코가 직접 조직하고 수행한 SMERSH 라디오 게임은 181건에 달했다 — '자가드카(수수께끼)', '투만(안개)' 등 암호명으로 압베어와 체펠린을 교란하며 독일군 사령부에 허위 정보를 주입했다.
그리고리 그리고렌코는 소련 방첩 기관의 중추를 40년 넘게 떠받친 인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SMERSH에서 181건의 라디오 게임을 직접 수행하며 압베어와 체펠린을 상대로 기만 작전을 지휘했고, 이후 MGB와 KGB로 이어지는 방첩 부서에서 경력을 쌓았다. 1970년부터 1983년까지 KGB 제2총국장을 맡아 CIA와 서방 정보기관의 심층 침투 요원들을 연쇄 적발하는 체계를 구축했으며, 1978년부터는 KGB 부의장을 겸임하며 유리 안드로포프의 핵심 측근으로 활동했다. 그의 방첩 시스템은 외국 정보기관의 모스크바 거점을 수년간 마비시켰고, 소련 붕괴 후에도 러시아 방첩의 방법론적 토대로 남았다.
1982년 12월 내무장관으로 부임한 페도르추크는 첫 확대 합동회의를 내무부 청사가 아닌 루뱐카의 KGB 건물에서 소집했다. 한 장성은 훗날 '그는 떠날 생각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우크라이나 빈농 가정 출신의 군 방첩 장교로, 할힌골 전투와 모스크바 방어전에서 실전을 겪은 뒤 SMERSH와 KGB 군 방첩 계통에서 경력을 쌓았다. 1970년부터 12년간 우크라이나 KGB 의장으로 공화국 보안기관을 이끌며 브레즈네프 후기 내내 자리를 지켰고, 안드로포프가 서기장이 되자 소련 KGB 의장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7개월 만에 내무장관으로 이동해 약 9만 명의 경찰 간부를 부패 혐의로 해임하는 숙정을 단행했으며, 1986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해임되었다.
서방에 5천여 건의 소련 미사일 기밀을 넘겨 쿠바 위기에서 흐루쇼프의 허세를 벗긴 GRU 대령
런던의 안전가옥에서 펜콥스키는 미국과 영국 육군 대령 군복을 차례로 입어보고 사진을 찍으며 '언젠가 이 제복을 진짜로 입게 될 날'을 말했다.
GRU 대령으로 근무하던 중 흐루쇼프 체제에 환멸을 느껴 1961년 MI6와 CIA에 자진 접촉했다. 18개월간 소련의 대륙간탄도미사일 실태, 쿠바 미사일 기지 배치도, 군사교리 등 5천여 건의 기밀문서를 서방에 넘겼다. 그의 정보는 소련의 미사일 전력이 흐루쇼프의 위세와 달리 서방에 크게 뒤처져 있음을 케네디에게 확신시켜,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미국이 강경하게 대응할 근거가 되었다. 1962년 10월 KGB에 체포되어 이듬해 공개재판 끝에 총살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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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1939제2키예프 포병학교 졸업, 소위 임관
1939–1945폴란드 침공·겨울전쟁·독소전 참전, 두 차례 부상,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 포병사령관 부관
1945–1948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30세에 대령 진급
1949–1953군사외교아카데미 졸업, GRU 제4(중동)국 배속
1955–1956주튀르키예 소련대사관 무관보 겸 GRU 거주자
1960–1962국가과학기술위원회 대외관계국 부국장으로 위장 근무하며 GRU 활동
1961.4–1962.10MI6·CIA 이중첩보원, 런던·파리·모스크바에서 5천여 건 기밀 전달
1987년 5월 1일 브라티슬라바 노동절 퍼레이드에서 한 학생이 주석단에 서 있던 샬고비치에게 달걀 두 개를 던졌다. 그는 경호원에게 달걀이 묻은 재킷을 건네며 자리를 떠나야 했다.
슬로바키아 출신 체코슬로바키아 보안기관 장교이자 정치인. 전시에는 친나치 슬로바키아군에서 소련으로 탈주한 후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에서 복무했고, 전후 StB 장교로 정치탄압에 가담했다. 1968년 6월, 두브체크는 자신과 개인적 친분이 있는 샬고비치를 내무차관 겸 StB 책임자로 발탁했으나, 샬고비치는 KGB와 협력하여 개혁파 체포 계획을 세우고 8월 21일 두브체크 일행을 소련군에 넘겼다. '정상화' 체제에서는 슬로바키아 민족평의회 의장(1975~1989)이라는 의전직에 머물렀고, 벨벳 혁명 직후 자택 지하실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레이 클라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가 걱정해온 그것들, 정말 있는 것 같습니다.' 번디가 물었다. '확실한가?'
미국의 국가안보보좌관(1961–1966)으로,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에서 베트남전 확전의 핵심 설계자였다. 1962년 10월 15일 저녁 CIA로부터 소련의 쿠바 미사일 배치 증거를 보고받았으나, 비밀 유지와 준비 부족을 이유로 다음 날 아침까지 대통령에게 알리지 않기로 결정했다. 1966년 퇴임 후 포드재단 회장을 지냈고, 말년에는 핵무기 선제사용 포기를 주창하며 핵군축 논의에 기여했다.
브레즈네프부터 고르바초프까지 소련 검찰을 이끈 법률가, 사하로프에게 추방령을 전달한 검찰총장
1980년 1월 22일, 레쿤코프는 사하로프 앞에서 최고회의 칙령을 낭독했다: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와 모든 국가 훈장을 박탈하며, 폐쇄도시 고리키로 추방한다.
돈 강 유역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중상을 입은 후 검찰에 투신했다. 로스토프 지역 검사를 거쳐 1976년 소련 검찰 제1부총장, 1981년 루덴코의 후임으로 검찰총장이 되었다. 안드로포프 시기에는 '우즈베크 면화 사건'과 통상부 비리 수사를 진두지휘하며 대규모 반부패 캠페인을 주도했고, 1980년에는 사하로프에게 국가 훈장 박탈과 고리키 추방을 직접 통고했다. 퇴임 후에는 정치적 탄압 피해자 재활 부서에서 일하며 소련 검찰 제도의 복잡한 유산을 몸소 구현했다.
1941년 포위 중 탈출을 이끌며: "동무들, 나는 군 방첩 요원이다! 내가 돌파를 조직할 것이다. 겁먹고 항복하려는 자는 조국이 내게 준 권한으로 사살하겠다."
소련의 군사방첩 지도자. 의료 교육을 받고 1939년 붉은군대에 입대했으며, 독소전 발발 직전 국가보안기관에 배속되어 전선에서 NKVD 특별부서와 스메르시에서 복무했다. 전후에는 주로 소련군 주독 집단군(GSFG)과 극동군관구에서 군 방첩 요원으로 경력을 쌓았고, 1970년 KGB 제3국장에 올라 소련 전군의 특별부서(오소비스트)를 총괄했다. 1973년 게오르기 치네프 KGB 부의장과의 갈등으로 해임된 뒤 다시 GSFG 특별부서장으로 복귀했으며, 1981년 이후 국가계획위원회 안보 고문을 지냈다. 퇴역 후 군 방첩사에 관한 회고록을 저술했고 100세까지 생존했다.
「나는 곧바로 알아챘다 — 더 가까운 사람을 찾고 있다는 걸. 물론 그랬다. 개인적으로 충성하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1966년 연방 MOOP 수장 자리에서 밀려난 뒤.
바딤 티쿠노프는 셸레핀의 콤소몰 인맥을 타고 KGB 부의장(1959~1961)을 거쳐 러시아공화국 내무장관(1961~1966)을 지낸 소비에트 국가보안·내무 관료다. 흐루쇼프가 연방 MVD를 폐지한 공백기 속에서, 그는 RSFSR 치안 체계를 실질적으로 이끌며 경찰의 날 제정, 무임승차권, 그리고 소련 경찰 사상 처음으로 고무곤봉·수갑·최루가스 도입을 관철했다. 1966년 브레즈네프가 연방 MOOP을 부활시키며 측근 니콜라이 셸로코프를 수장으로 앉히자 밀려났고, 이후 상부볼타·카메룬 대사로 좌천되었으며 재임 중 야운데에서 사망했다.
코파치 샨도르는 금속 노동자와 반나치 저항 활동가 출신의 헝가리 경찰 지휘관으로, 국가기구 안에서 개혁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부다페스트 경찰청장으로서 1956년 10월 23일 비무장 시위대에 발포하라는 명령을 거부했고, 봉기 세력과 협력하며 국가근위대 부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체포되어 나지 임레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1963년 사면으로 석방되었고, 훗날 회고록으로 혁명의 내부 경험을 증언했다.
1979년 12월 카불, 슈토름-333 작전 개시 후 상황을 전혀 몰랐던 주아프간 소련 대사 타베예프가 전화로 해명을 요구하자, 키르피첸코는 "지금 너무 바빠서 통화할 수 없습니다. 아침에 보고드리겠습니다"라고 답하고 끊었다.
키르피첸코는 KGB 제1총국(대외정보)의 첫 번째 부국장으로서 1979년부터 소련 붕괴까지 12년간 소련의 해외 첩보 활동을 실질적으로 지휘한 인물이다. 모스크바 동양학대학 아랍어과를 수석 졸업한 후 1954년 이집트 부주재관으로 정보 경력을 시작했으며, 수에즈 위기와 욤키푸르 전쟁을 카이로 현장에서 목격했다. 1979년 12월에는 카불에 직접 파견되어 하피줄라 아민 축출 작전의 정보 부문을 지휘했고, 이후 고르바초프 시기 글라스노스트가 외국 정보기관의 활동을 용이하게 만들고 있다고 경고했다. 은퇴 후 6권 분량의 《러시아 대외정보사》 편찬을 주도하며 소련 정보기관의 공식 기억을 정리하는 작업에 헌신했다.
체브리코프는 죽기 1년 전 러시아 TV 인터뷰에서 KGB 시절을 이렇게 변호했다. "나는 과거를 얼려버리는 시각에 반대합니다."
2차대전에서 세 차례 부상당하며 대대장까지 오른 전투 장교 출신으로,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 당 간부를 거쳐 1967년 안드로포프의 부름으로 KGB에 합류했다. 1982년부터 6년간 KGB 의장을 맡아 알드리치 에임스의 정보를 활용한 대미 첩보전과 우즈베키스탄 부패 수사를 동시에 진두지휘했다. 1985년 정치국 정위원이 되었으나 페레스트로이카의 속도에 반대하며 리가초프 계열에 섰고, 1988년 해임되었다.
1984년 8월 RYaN 회의에서 그는 서방의 핵공격 징후보다 ‘실제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마르쿠스 볼프는 나치 박해를 피해 소련으로 망명한 뒤 독일민주공화국의 대외정보기관을 이끈 공산주의 관료이자 정보 책임자였다. 그는 1952년부터 1986년까지 슈타지 해외정보국 HVA를 지휘하며 서독 정치·군사·경제를 겨냥한 첩보와 공작을 조직했다. 1980년대 초 소련이 핵 선제공격 공포 속에서 RYaN 작전을 확대하자, 볼프는 협력을 유지하면서도 현장 정보가 실제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는 긴장을 드러냈다. 독일 통일 뒤 그는 해외 망명과 재판을 거쳤고, 자신의 국가보안 활동에 대한 책임과 사회주의의 개혁 가능성을 회고록과 공개 발언으로 다뤘다.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소련의 마지막 개혁 검찰총장, 스탈린 탄압 피해자 재활을 감독한 법률가
1988년 검찰총장 취임 후 수하레프는 이렇게 말했다: "검사는 민중의 삶에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그가 지휘한 검찰은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수십만 명의 정치적 탄압 피해자에 대한 재활 심사를 추진했다.
보로네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0대에 항공 공장 선반공으로 일하다 18세에 전선으로 나갔다. 통신장교로 모스크바에서 비스와 강까지 진격하며 4개의 전투 훈장을 받고, 1944년 폴란드 나레프 강 도하 작전에서 중상을 입었다. 전역 후 콤소몰과 당 중앙위원회 기구에서 사법·검찰 분야를 담당하며 법률가로 성장해, 1970년 재창설된 소련 법무부의 제1차관으로 발탁되었다. 1988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검찰총장으로 임명되어 스탈린 시대 정치 탄압 피해자들의 대대적인 법적 재활을 추진했고, 1990년 퇴임 후에도 러시아 검찰 산하 연구소를 이끌며 법치 강화와 형사사법 개혁에 평생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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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1944제69소총병사단 통신소대장·중대장·연대통신주임, 대위
1947–1950콤소몰 보로네시 철도지구위 서기, 보로네시 주위원회 부장
1950–1959콤소몰 중앙위원회 국제부 지도원·부장·국제부장
1959–1966CPSU 중앙위원회 행정기관부 지도원·RSFSR 담당 부부장
1966–1970CPSU 중앙위원회 행정기관부 검찰·법원·사법 부문장
1970–1984소련 법무부 제1차관
1984–1988러시아 SFSR 법무장관
1988.2–1988.5소련 검찰 제1부총장
1988–1990소련 검찰총장
1991–2006러시아 연방 검찰청 산하 합법성 및 법질서 강화 연구소 부소장·소장·주임연구원
1958년 콤소몰 40주년 대회에서 파스테르나크를 두고 “돼지는 자신이 먹는 곳에 더럽히지 않는다. 파스테르나크는 돼지도 하지 않을 짓을 했다”라고 연설했다. 이 발언으로 파스테르나크는 노벨문학상을 거부했다.
콤소몰에서 두각을 드러낸 셸레핀의 측근으로, 37세에 소련 사상 최연소 KGB 의장이 되었다. 1958년 파스테르나크를 '돼지'에 비유한 연설로 악명을 얻었고, 1964년 흐루쇼프 축출에서 보안·통신·경호를 장악해 쿠데타의 물리적 기반을 제공했다. 이후 브레즈네프가 셸레핀 계열을 약화시키며 우크라이나 직책으로 밀려났고, 결국 변방의 대중교육 단체에서 경력을 마감했다.
1991년 6월 17일, 최고소비에트 비공개 회의에서 크류치코프는 개혁파 진영에 서방의 '영향력 공작'이 침투했다고 경고하며 내각에 비상대권을 부여하라는 요구에 동참했다. 두 달 뒤 그가 조직한 쿠데타는 사흘 만에 무너졌다.
1924년 2월 29일 차리친(훗날 스탈린그라드, 오늘날 볼고그라드)에서 태어났다. 1941~43년 스탈린그라드 포병 공장에서 일했고, 1949년 법학을 전공으로 졸업해 1946~51년 스탈린그라드 지역 검사로 일했다. 1955~59년 부다페스트 소련대사관 3등서기관으로 1956년 헝가리 사건을 겪었고, 1967년 안드로포프를 따라 KGB로 옮겨 1974~88년 제1총국장을 지냈다. 1988년 10월 1일 KGB 의장에 임명되어 1991년까지 재임했다. 1991년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를 주도했으며, 8월 22일 체포되어 1994년 국가두마 사면으로 재판 없이 종결되었다. 2007년 11월 23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옐친 회고록: KGB 국장이 '당과 우호 협력한다'고 하자 피로시코프가 '코르닐로프 장군, 일어서! 당 기관의 지도 아래 일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1942년 18세에 자원입대하여 민스크·바르샤바 해방과 베를린 공방전을 거쳐 베를린 전승 퍼레이드에 참가한 전쟁 세대. 전후 알타이 지역에서 콤소몰과 당 간부로 올라 1968년 제2서기까지 지낸 뒤, 정치국의 결정으로 KGB에 배치되어 인사국장과 당위원회 서기를 거쳐 1971년부터 1991년까지 부의장직을 수행했다. 안드로포프·페도르추크·체브리코프·크류치코프 4대 의장 아래에서 거의 20년간 자리를 지킨 유례없는 장기 재임자로, KGB 인사정책과 구조 정비, 대테러 작전(알파 그룹 지휘·감독)을 총괄했으며 퇴역 후에는 FSB 재향군인회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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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1945자원입대, 316근위박격포연대에서 민스크·바르샤바·베를린 전투, 베를린 전승 퍼레이드 참가
원탁회의 합의문 서명 후 키슈차크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 폴란드 국민이 승자다'라고 말했다.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군인·공산당 정치인으로, 1981년 내무장관에 임명되어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와 함께 계엄령을 기획·집행하며 연대노조 탄압을 주도했다. 1989년에는 정부 측 원탁회의 공동의장으로서 레흐 바웬사와 협상하여 연대노조 재합법화와 부분 자유선거의 길을 열었다. 선거에서 연대가 압승한 후 총리로 지명되었으나 연대의 거부로 불과 3주 만에 사임했고, 타데우시 마조비에츠키 내각에서 부총리 겸 내무장관으로 잠시 머문 뒤 정계에서 은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