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두도로프는 밀리치야의 정보원·도발자 제도를 단계적으로 철폐하라는 명령에 서명했다. 소련 경찰 역사상 거의 유일한 이 시도는 곧바로 저지되었고, 이듬해 그가 해임되면서 묻혔다.
흐루쇼프가 스탈린 시대 NKVD 출신들을 몰아내고 임명한 민간인 내무장관(MVD, 1956–1960). 화학기술자 출신으로 건설·공업 관료로 경력을 쌓았으며, 1954년 당 중앙위 건설부장을 거쳐 내무장관이 되었다. 굴라그 체제를 소규모 교정식민지 중심으로 재편하려 했고, 1959년에는 밀리치야의 정보원·도발자 활용을 단계적으로 폐지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의 임기는 정치경찰(KGB)과 분리된 내무기관의 위상이 급격히 약화되던 시기였고, 1960년 MVD 자체가 해체되면서 물러났다.
마오쩌둥은 "하늘이 무너져도 키 큰 뤄가 받쳐 준다"며 그를 최측근 경호 책임자로 신임했다. 1949년 초대 공안부장으로 10년간 공안 체계를 세웠고, 총참모장을 지내다 1965년 말 실각했다.
쓰촨 출신 황푸 6기생으로 홍군 정치·보위 부문에서 일했고 항일군정대학 교육장이었다. 1949년 초대 공안부장이 되어 반혁명 진압운동과 공안 체계를 세웠고, 1959년 펑더화이 실각 뒤 총참모장으로 군을 관리했다. 정치보다 훈련을 앞세운 그는 1965년 말 린뱌오의 고발로 「군권 탈취」를 꾀했다는 비판을 받아 실각했고, 1966년 자살을 기도해 다리를 다쳤다. 1977년 복권되어 군사위원회 비서장이 되었으나 이듬해 서독에서 수술 후 사망했다.
동료들의 회고에 따르면, 코제브니코프는 “국가 자금은 아껴야 한다”며 관리 기구를 팽창시키는 대신 기존 간부들의 적재적소 배치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열 개 건설부처 중 분기 계획까지 유일하게 완수하는 부처를 만들었다.
철도기사 출신으로 소련 운송건설부(민트란스스트로이)의 초대 장관을 1954년부터 1975년까지 20년 넘게 역임하며, 철도·항만·고속도로·지하철·공항 등 소련 산업팽창의 물적 기반을 총괄 건설한 행정가다. 그가 이끈 운송건설부는 카자흐스탄 처녀지 개간 철도망, 볼가-발트 수로, 바니노-홀름스크 해상철도 연락선 등 굵직한 국가 프로젝트를 수행했고 바이칼-아무르 철도(BAM) 착공을 주도했다. 몽골·시리아·이라크·베트남 등 해외 운송 인프라 건설에서도 소련의 기술적 진출을 진두지휘했다. 예하 트러스트로 직결되는 2단계 관리 체계를 도입해 열 개 연방 건설부처 중 가장 안정적인 계획 달성률을 기록했으며, 1975년 퇴임과 함께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상세 이력 보기
1927중앙아시아철도 관리국 궤도부 기사 (아시가바트)
1928–1930투르크시브 철도 구간장·공사구역 부책임자 (알마아타)
1930–1936쿠즈네츠크 제철 콤비나트 신선건설 기술지도자 → 젬젤도르스트로이 책임자 → 쿠즈네츠크 기관차·차량 공장 건설 총책임자
1924년, 열여덟 살의 이반 그리슈마노프는 레닌그라드 보로프스키 시멘트 공장에서 목수로 일을 시작했다. 반세기 뒤, 그가 장관으로 이끄는 소련의 시멘트 산업은 연간 1억 2,700만 톤을 생산하며 세계 1위에 올랐다.
트베리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열여덟에 망치를 잡은 그리슈마노프는, 레닌그라드 건설현장의 목수·십장·기사장을 거쳐 전후 도시재건을 지휘한 실무형 관료였다. 흐루쇼프의 대규모 주택 프로그램이 본격화되던 1956년부터 당 중앙위 건설부장으로 소련 전역의 건설정책을 조율했고, 이어 고스스트로이 의장으로 국가 건설 기준을 총괄했다. 브레즈네프 시기 내내 건설자재공업 장관(1965–1979)으로 재임하며 시멘트 생산량을 5,440만 톤 끌어올려 소련을 세계 1위 시멘트 생산국으로 만들었다. 그가 구축한 대규모 시멘트 공장망은 흐루쇼프카에서 브레즈네프카까지 소련의 도시 풍경을 물리적으로 떠받친 산업 토대였다.
1951년 6월 23일 유엔 라디오 방송에서 말리크는 말했다. "교전국들이 38도선에서 상호 철군하는 휴전과 정전을 위한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한국의 평화를 위해 치르기에 너무 큰 대가는 아닐 것이다."
야코프 말리크는 두 차례 유엔 상임대표(1948~1952, 1967~1976)를 지낸 소련의 대표적 외교관이다. 하리코프 주 농민 가정 출신으로 경제학을 전공하고 당 간부를 거쳐 1937년 외무인민위원부에 입부했다. 1951년 6월 유엔 라디오 방송에서 한국전쟁 휴전과 38도선 상호 철군을 제안해 정전 협상의 물꼬를 텄고, 1968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안보리에서 정당화했다. 일본·영국 대사와 외무차관을 두루 거친 말리크의 유엔 외교는 스탈린 말기부터 브레즈네프 시대까지 소련의 국제적 입장을 관철하는 핵심 통로였다.
스탈린이 카라간다 탄광 증산을 명하자 멜니코프는 현지어를 모른다고 고백했다. 스탈린의 답: 「시장에 가서 노래하는 늙은 아킨을 찾아라. 그가 도와줄 것이다.」 아킨은 노래했고, 광부들은 일했다.
도네츠크 탄광 지대에서 성장한 광산 기술자 출신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종군한 뒤 카라간다 탄전 증산 임무를 완수하며 스탈린의 신임을 얻었다. 1949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에 올라 전후 복구와 서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화, '우크라이나 부르주아 민족주의' 척결 운동을 지휘했으며, 반유대주의 캠페인에서 강경 노선을 취하며 흐루쇼프와 결별했다. 1952년 10월 확대된 당 중앙위 간부회의 정위원에 선출되었으나, 스탈린 사망 직후인 1953년 6월 '민족정책 왜곡'을 이유로 해임되고 루마니아 대사로 좌천되었다. 이후 건설부 장관, 카자흐스탄 국가계획위원장을 거쳐 1966년부터 사망까지 15년간 소련 국가산업안전감독위원회 의장으로 일하며 산업 안전 체계를 정비했다.
시인 미하일 스베틀로프는 그를 두고 "나는 문화부 장관이 무서운 게 아니라 장관의 문화가 무섭다"라고 말했다.
모스크바 구두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콤소몰 기관지 편집장을 거쳐 32세에 소비에트 청년 조직의 수장이 되었다. 전시 세대 청년들에게 스탈린을 위한 자기희생을 주입한 '영웅 개척자' 서사의 설계자였으며, 스탈린 말기에는 당 선전부장·상임위원까지 올랐다. 해빙기 문화장관(1955~1960)으로서는 검열을 유지하면서도 제한된 개방을 허용해야 하는 모순된 위치에 섰고, 말년에는 폴란드·인도네시아 대사와 국가출판위원장을 지내며 조용히 퇴장했다.
1979년 10월 7일 동베를린, 동독 건국 30주년 기념식에서 사진작가 레지스 보수가 브레즈네프와 에리히 호네커의 '사회주의 형제의 키스'를 촬영했다. 이 사진은 드미트리 브루벨의 1990년 베를린 장벽 벽화의 바탕이 되었다.
흐루쇼프 해임에 참여해 그를 대신해 제1서기가 되었고, 1960년대 말까지 권력을 독점했다. 1964년부터 1982년 사망할 때까지 서기장으로, 1960~1964년과 1977~1982년에는 국가원수를 겸했다. 해빙 뒤에는 검열과 탄압이 강화되어 1970년대 중반 정치·종교 사범이 약 1만 명에 이르렀다. 정치·경제 개혁에 적대적이어서 '정체의 시대'의 부패와 소비재 부족을 낳았고, 1975년 이후 건강이 나빠지자 통치에서 물러났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과 1979년 아프가니스탄 개입을 결정했으며, 데탕트와 함께 SALT I·헬싱키 협정으로 미국과 핵 균형을 이루었다. 소련영웅 칭호를 네 번 받았고 1978년의 승리훈장은 1989년 취소되었다.
1964년 10월 흐루쇼프 실각 직후 브레즈네프 보좌관들이 총무부를 우회해 문서를 유통시키자 말린은 일기에 썼다: "이중 지휘계통이 생겨서 어느 문서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게 된다."
1954년부터 1965년까지 CPSU 중앙위 총무부장으로 정치국과 중앙위를 오가는 모든 문서를 통제한 당 기구의 핵심 관리자였다. 전쟁 시기에는 중앙 빨치산운동 사령부 정치국장 겸 부사령관으로 점령지 파르티잔 활동을 조직했고, 벨라루스 공산당 제3서기를 지냈다. 쿠바 미사일 위기와 흐루쇼프 실각 직후 정치국 회의에서 직접 속기록을 작성한 그의 노트는 소련 지도부 의사결정의 내부를 보여주는 사료다. 1965년 브레즈네프가 측근 체르넨코를 후임에 앉히며 아카데미 사회과학원 총장으로 전출된 것은 브레즈네프식 후원 인사의 전형이다.
윌리엄 H. 터너는 제2차 세계대전의 히말라야 공수와 베를린 공수에서 대규모 항공수송을 정교한 체계로 바꾼 미국 공군 지휘관이었다. 그는 베를린 봉쇄 때 연합 공수임무부대를 이끌며 항공기를 일방통행 회랑과 엄격한 시간표에 배치해 임시 작전을 지속 가능한 공급망으로 전환했다. 블랙 프라이데이의 사고 뒤에는 악천후에도 계기비행을 의무화하고 착륙 실패 항공기를 되돌리는 규칙을 세워 안전과 처리량을 함께 높였다. 이후 한국전쟁 공수와 군사항공수송 근무를 지휘하며 현대 전략공수의 조직 원리를 남겼다.
안토노프는 자신의 가장 큰 성공으로 거대 수송기가 아닌 An-2 복엽기를 꼽았다. "An-2는 나의 가장 위대한 성공작입니다. 세계 항공 기술에 아날로그가 없는, 오직 우리의 조건을 위해 만들어진 비행기입니다."
소련의 수송항공을 한 세대 앞서 이끈 항공기 설계자. 1946년 노보시비르스크에서 OKB-153(후일 안토노프 설계국)을 창설하고, 50년 이상 양산된 유일한 항공기 An-2 복엽기로 출발해 An-12 군용수송기, An-22 안테이, An-124 루슬란, An-225 므리야에 이르는 중량물 수송기 계보를 완성했다. 비포장 활주로에서도 운용 가능한 실용적 설계로 소련 전역과 수십 개국에서 민군 겸용으로 채택되었다. 글라이더 설계로 출발해 야코블레프의 제1부설계사를 거친 그는 화가이자 시인이기도 했으며, "못생긴 비행기는 날지 못한다"는 신념으로 공학과 미학의 일치를 추구했다. 영국 타임스는 An-22를 두고 "소련이 항공기 제작에서 모든 나라를 앞서게 했다"고 썼다.
상세 이력 보기
1924–30글라이더 설계 시작, OKA-1 「골루비」로 전연방 글라이더 경연대회 1등상
1931–38모스크바 글라이더 공장 수석설계사, 30종 글라이더 개발
1938–43야코블레프 설계국 수석 엔지니어, A-7 군용 글라이더 개발
1943–46야코블레프 설계국 제1부설계사, Yak-3 전투기 개량
1946–52OKB-153 설계국장(노보시비르스크), An-2 첫 비행(1947), 스탈린상(1952)
1952–84안토노프 설계국 총설계사(키예프), An-12·An-22·An-124 계열 개발
1972년, 12년 전 거래가 무산되었던 미국 브라이언트사의 정밀 연삭기가 마침내 소련에 도착하자, 코스토우소프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12년 동안 이 기계들을 기다려왔다.'
아나톨리 코스토우소프는 소련에서 가장 오래 재임한 공업 장관 중 하나로, 1949년부터 1980년까지 공작기계·공구공업을 이끌며 소련을 세계 최대 공작기계 생산국으로 올려놓은 생산 행정가였다. 농민 출신으로 콤소몰에서 시작해 모스크바 공작기계대학을 졸업하고 레닌그라드·크라스노다르·노보시비르스크 공장에서 엔지니어로 성장했다. 그의 지휘 아래 소련은 1962년부터 금속절삭 공작기계 생산량 세계 1위를 차지했고, 1970년대에는 CNC 공작기계의 독자 생산 체계를 갖추었다. 1972년 미국 브라이언트사의 정밀 연삭기를 12년 만에 수입하게 되자 '12년 동안 이 기계를 기다렸다'고 말한 일화는 기술 격차 속에서도 국산화를 밀어붙인 그의 집요함을 보여준다.
유대인으로 태어나 가톨릭으로 개종한 그는 스스로를 「나는 『혼례』 속의 유대인이다」라고 불렀다.
로만 브란트슈테터는 폴란드어로 시와 소설, 희곡을 쓰고 히브리어 성서와 셰익스피어를 번역한 폴란드 작가였다.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나 시온주의와 동화의 문제를 탐구했으며, 로마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에도 유대 전통과의 긴장을 문학의 중심에 남겼다. 전후에는 포즈난에 정착해 성서적 상상력과 역사적 기억을 결합한 작품을 썼다. 1980년에는 포즈난 1956년 6월 희생자 기념비 건립 사회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노동자 봉기의 기억을 공공 기념물로 만드는 조직 작업을 맡았다.
흐루쇼프 비밀연설을 수만 부 찍어내 당의 통제 밖으로 퍼뜨린 바르샤바 당위원회 개혁파 제1서기
1956년 3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휴식 시간, 흐루쇼프에게 스탈린의 반유대주의를 따져 묻자 흐루쇼프는 손을 떨며 스탈린이 소련 유대인에 대한 포그롬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바르샤바 유대인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14세에 공산청년운동에 가담했고, 국제레닌학교에서 수학한 후 폴란드 지하당 활동과 소련 체류를 오갔다. 1938년 NKVD에 체포되어 콜리마 수용소에서 8년을 보낸 뒤 1945년 폴란드로 돌아와 선전·언론·농업 부문에서 스탈린주의 노선을 집행했다. 1955년 바르샤바 당위원회 제1서기가 된 후 제20차 당대회를 계기로 개혁파로 전환, 당원들이 비밀연설을 학습하도록 제안하고 1만 5천여 부의 비공식 인쇄본을 찍어내 연설문이 폐쇄된 당 문서에서 세계적 문서가 되는 결정적 통로를 열었다. 폴란드 10월 후 고무우카와 충돌해 1957년 해임되고 1968년 반유대 캠페인으로 축출되었으며, 이후 반체제 운동을 지지하며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스탈린이 말했다: '자네 생각을 말하게, 부끄러워 말게 — 자네는 젊지만 우린 자네를 믿네. 과거의 실수와 연루되지 않았으니, 우리를 항공의 수렁으로 이끈 옛 전문가들보다 객관적일 걸세.'
2차대전 소련 전투기의 3분의 2를 담당한 Yak-1·Yak-3·Yak-7·Yak-9의 설계자. '비프롤레타리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주콥스키 사관학교 입학을 거부당했으나 글라이더 경연으로 돌파해 1932년 독자 설계국을 세웠다. 1940년 항공공업 부인민위원과 OKB-115 수석을 겸임: 소련 항공설계자 중 유일한 행정·설계 권력의 결합이었다. 전후 Yak-15(소련 최초 제트전투기), Yak-25(전천후 요격기), Yak-28(초음속 폭격기)에 이어 Yak-40·Yak-42 여객기까지 아우르며, 43년간 최고소비에트 대의원으로서 사회주의노동영웅 2회·스탈린상 6회·레닌상·레닌 훈장 10회를 받았다.
상세 이력 보기
1924–31AVF-10 글라이더, AIR-1 경비행기 설계; 주콥스키 사관학교 졸업
1932–39항공제39공장에서 경항공기 설계국 창설; 주임설계자로 승진
1940–46항공공업 부인민위원 겸 OKB-115 수석; Yak-1·Yak-7·Yak-9·Yak-3 전투기
1956년 10월, 흐루쇼프가 군사개입을 위협하자 오하프는 폴란드군을 바르샤바 방어태세에 배치하며 맞섰고, '이 상황에서 고무우카가 국가를 이끌 최선의 선택'이라고 소련 지도부에 말했다.
크라쿠프 출신의 폴란드 공산주의자로, 1929년 폴란드 공산당에 입당해 사나치아 정권하에서 6년 반을 정치범으로 복역했다. 1943년 소련에서 베를링군 정치위원으로 활약한 후 폴란드 노동자당 중앙위원, 공공행정부 장관, 국방차관, 정치국원을 지냈다. 1956년 3월 비에루트 사망 후 제1서기가 되어 흐루쇼프 비밀연설의 폴란드어 번역본을 전국 당 조직과 공공집회를 통해 유포했고, 수천 부가 바르샤바 시장에서 팔릴 정도로 확산시켜 비밀연설의 전세계적 유출을 촉발했다. 포즈난 봉기 진압을 승인했으나 10월에는 소련의 군사개입 위협에 맞서 폴란드의 주권을 지켰고, 이후 고무우카에게 권력을 넘긴 후 1968년 반유대 캠페인에 항의하며 모든 공직에서 사퇴했다.
1981년 당 대회에서 중앙위원 후보 명단을 낭독하며 거의 모든 이름을 잘못 발음했고, 브레즈네프를 포함한 상임간부석마저 공공연히 웃음을 터뜨렸다. 한때 '3인자'로 불리던 후계자의 공개적 몰락이었다.
항공기술자 출신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제18군 군사평의회에서 브레즈네프와 함께 복무하며 정치적 동반자가 되었다. 중앙위 서기국에서 소련 군산복합체 전체를 총괄하는 실력자로, 브레즈네프·수슬로프와 함께 당의 '3인자'로 불리며 후계자로 거론되었다. 정체기 당 관료제의 승진 통로와 충성 네트워크를 상징했으나, 1970년대 후반 뇌 기능 저하로 쇠퇴하다 안드로포프 집권 직후 축출되었다.
클레이가 '석탄이라도 실어날라 줄 수 있겠소?' 하고 묻자 르메이는 '우리는 무엇이든 실어나를 수 있다'고 답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에 대한 전략폭격을 지휘한 인물로, 1945년 3월 도쿄 대공습을 시작으로 66개 도시를 소이탄으로 태웠다. 1948년 미 유럽공군 사령관으로서 베를린 봉쇄에 맞서 루시우스 클레이에게 '우리는 무엇이든 실어나를 수 있다'고 답하며 공수의 첫 단계를 세웠다. 이어 전략공군사령부(SAC)를 맡아 핵전력 중심의 제트 공군으로 개편했고, 1961년 공군 참모총장이 되어 쿠바 위기 때 미사일 기지 폭격을 주장했다. 은퇴 후에는 인종분리주의자 조지 월리스의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1968년 대선에 나섰다.
“그에게는 단호한 행정가의 손길이 있었고, 건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 동시대인의 평가
가죽 공장 노동자와 인민위생위원회 배달원으로 출발한 미하일 야스노프는 소비에트 체제가 길러낸 행정 실무자였다. 모스크바 시 집행위원회 의장(1950–1956)으로서 스탈린식 고층건물 완공, 남서부 주택단지 착공, 지하철 대순환선 개통 등 제2차 모스크바 재건계획을 진두지휘했으며, 주택 건설량을 두 배로 늘렸다. 1956년부터 1957년까지 러시아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을 지냈고, 1966년부터 1985년까지 19년간 러시아 최고소비에트 상임회의 의장으로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의 형식적 국가원수직을 수행했다. 모스크바 전투 당시 방어선 구축을 지휘한 건설 전문가로서, 동시대인들로부터 거칠지만 확실한 행정 수완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상세 이력 보기
1918–1922인민위생위원회 배달원
1922–1928가죽 공장 노동자
1925모스크바국립대 노동자학부 졸업, 전연방공산당 입당
1928–1930붉은 군대 복무
1930–1938모스크바 건설 신탁 관리직 역임
1938–1949모스크바 시 집행위원회 부의장(1942년부터 제1부의장), 모스크바 전투 시 방어선 구축 지휘
“일은 사람보다 높아야 한다. 그래야 그것을 알고자 하는 열망이 생기고, 그로부터 자연스럽게 기술과 경험이 생겨난다.”
소련의 국내 상업 유통 체계를 18년간 총괄한 무역장관이다. 도네츠크(스탈리노) 지역당 제1서기와 페름 지역당 제1서기를 지내며 전후 재건과 공업화를 진두지휘했고, 1965년부터 1983년까지 소련 무역부 장관으로서 브레즈네프 시기 소비재 유통 정책 전반을 관장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남부전선·북캅카스전선·제4우크라이나전선 군무역국장으로 복무하며 전시 보급 체계를 책임졌다. 1976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1956~1961년과 1966~1986년 두 차례에 걸쳐 CPSU 중앙위원을 지냈다.
아폴로 1호 화재 뒤 그는 NASA가 조사와 수습을 맡아야 한다고 존슨 대통령에게 요구했다.
제임스 웨브는 과학자나 기술자가 아니라 대규모 공공사업을 조직한 미국의 행정가였다. NASA 국장으로서 아폴로 계획에 안정적인 예산과 정치적 지지를 결합하고, 연구센터와 산업·대학을 조정하는 중앙집중적 운영 체계를 세웠다. 그는 유인 달 착륙을 추진하면서도 마리너와 파이어니어 같은 행성과학 및 우주망원경 연구를 지지했다. 아폴로 1호 화재 뒤에는 조사를 이끌고 NASA의 책임을 의회에 설명하며 계획의 연속성을 지켰다.
베리야가 모스크바 대정전 책임자를 향해 권총을 겨누자, 지메린은 그 앞을 몸으로 막으며 말했다. «쏘시오, 그는 잘못이 없습니다!»
소비에트 전력화의 핵심 인물로, 1942년 35세의 나이로 전력인민위원에 임명되어 제2차 세계대전 중 발전소 대피와 복구를 지휘했다. 1948년 모스크바 대정전 당시 베리야의 권총 위협에도 부하를 몸으로 감싸며 맞섰고, 흐루쇼프의 1955년 고스플란 분할 개혁기에는 제1부의장으로서 장기계획 체계 전환에 참여했다. 은퇴 후 국립 에너지연구소장과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제1부의장을 지내며 소련 에너지 과학의 제도화에 기여했고, 소련 전기화 역사에 관한 표준적 저작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