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민은 무엇보다도 '인간적인 데탕트', 곧 사람과 사상의 자유로운 이동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노르웨이 이민자의 아들로 워싱턴주에서 태어나 40년 넘게 의회에서 활동한 냉전 자유주의자였다. 민권과 환경 정책에는 앞장섰지만 데탕트에는 회의적이어서, 소련의 유대인 이민을 통상 지위와 연결한 잭슨-배닉 수정안을 주도했다. 1974년 키신저·도브리닌과의 비공식 협상이 소련의 거부로 무산되며 잭슨은 1972년 통상협정을 사실상 좌초시킨 인물로 남았다. 그의 매파 보좌관들은 훗날 신보수주의의 핵심을 이루었다.
1966년 아카데미 정회원 선거에서 역사학부는 그를 통과시켰지만, 총회에서 노벨상 수상자 이고리 탐이 반대 연설을 하자 표결은 부결되었다. 10년 뒤 통신회원 선출은 '절대 정회원 후보로 나서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가능했다.
1965년부터 1983년까지 18년간 중앙위 과학·교육기관부장을 지내며 소련 학계의 인사·교과과정·출판을 통제한 브레즈네프 시대 이념 관료였다. 박사 학위 논문과 주요 저작들은 집단화의 공식 역사서술을 형성했고, 1960년대 중반 스탈린 복권 캠페인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다. 모스크바 고등당학교 부학장과 몰도바 공화당학교 교장을 거쳐 브레즈네프의 개인 비서관을 지냈으며, 그 인연으로 과학·교육 부문의 최고 행정직에 올랐다. 지식인 사회에서는 1966년 아카데미 정회원 선거에서 노벨상 수상자 이고리 탐의 반대로 낙선할 정도로 불신을 샀으나, 10년 후 통신회원으로 선출되며 학계 내 입지를 유지했다.
“과학이 무슨 상관이오!?” 제자에게서 부서에 무능한 동료를 왜 채용했느냐는 질문을 받고 크론로트는 화를 냈다. 잠시 침묵한 뒤 덧붙였다: “17일 동안 안치시킨이 우리 사단을 포위에서 빼냈소. 우리 부대의 정치위원이었는데, 지휘관은 전사했소.” — 모스크바 전투, 1941년 겨울
소련 정치경제학 '상품학파'를 이끌며 사회주의에서 가치법칙과 기업 자율성을 주장한 이론가. 1971–72년 학파가 분쇄·해임되었고, 말년에 소련 체제를 '사회과두제'로 분석한 원고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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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1934모스크바대학 철학과 졸업, 이삭 루빈의 제자로 자처
1934–1940소련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모스크바주계획위, 중앙통계청 근무
1940소련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연구원
1941–1945의용군 입대(1941.7.6.), 모스크바 전투 참전, 동프로이센까지 진격, 소령으로 종전
1945–1971경제연구소 정치경제학 부문장, '상품학파' 형성 및 1960년대 경제개혁 논쟁 주도
1941년 12월, 레닌그라드 포위전 속에서 칸토로비치는 라도가 호수 얼음 위를 직접 걸으며 얼음 두께와 기온에 따른 차량 간 최적 거리를 계산했다. '생명의 길'이었다.
소련 유일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1975). 1939년 합판 공장의 배분 문제를 풀며 선형계획법의 기초를 정립했고, 최적해에서 도출되는 '해소 승수'가 계획경제 내 객관적 가격 신호로 기능할 수 있음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22세에 레닌그라드 대학 교수, 1935년 무방어로 물리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그림자 가격 이론은 중앙계획 아래 분권화된 의사결정을 위한 이론적 토대였으나, 마르크스 노동가치론과 충돌하여 소련 경제관료에게 오래 배척당했다. 1960년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수리경제연구소를 창설하며 계획경제의 수학적 합리화를 평생 과제로 삼았다.
1970년 레닌 탄생 100주년 테제에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문구를 레닌의 말로 잘못 인용한 사건은 스테파코프가 아지트프롭에서 축출되는 공식 명분이자 셸레핀 계열 숙청의 신호탄이었다.
브레즈네프 초기 5년간 중앙위 선전선동부장을 맡아 당의 일상적 이념 장치를 운영했다. 수슬로프·데미체프가 서기국에서 이념을 총괄하는 동안 레닌 탄생 100주년과 프라하의 봄 대응 선전을 지휘한 실무자였다. 역사학 박사로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선전론을 체계화했으며, 셸레핀 계열로 분류되어 1970년 레닌 테제 오류 사건으로 축출된 후 유고슬라비아 대사로 옮겼다.
1956년 6월 27일, 그는 포즈난 ZISPO 노동자들 앞에서 전날 바르샤바에서 약속했던 내용을 철회했다.
폴란드 공산당 출신의 기계공학 배경 기술관료로 1955년 기계공업부 장관에 올랐다. 1956년 6월 26일 바르샤바에서 포즈난 ZISPO 노동자 대표단에게 임금 인상과 체납 세금의 환급을 약속했다가 이튿날 포즈난 현장에서 이를 번복했고, 이 파기가 6월 28일 봉기의 직접적 불씨가 되었다. 이후 계획경제 기구에서 계속 근무하며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산업 관료로 은퇴했다.
피우메에서 하녀의 사생아로 태어나 이탈리아식으로 체르마니크로 등록되었고, 1927년 타자기 정비공 견습을 시작해 1929년 직인이 되었다. 1931년 불법 공산청년동맹과 당에 입당해 지하활동과 투옥을 겪었다. 1948~50년 내무장관으로서 라이크 라슬로 숙청에 관여했고, 1951년 체포되어 1952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54년 석방되었다. 1956년 10월 25일 서기장이 되어 11월 1일 소련 측으로 넘어가 진압을 수용하고 너지 임레의 처형을 승인했으며, 수백 명 처형과 수만 명 투옥이 뒤따랐다. 1961년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 편이다'를 제창해 대사면과 개혁을 추진했고, 1988년 사임하고 1989년 사망했다.
“나는 어제 레오니트 일리치와 점심을 함께 했네.” — 라핀이 부하와 동료들에게 무언가 지시하기 전에 건네던 상투적인 첫마디로, 이 말이 나온 뒤에는 브레즈네프와 아침이나 저녁을 함께한 사람 외에는 아무도 감히 반대하지 못했다.
1970년부터 1985년까지 소련 국가방송위원회(고스텔레라디오) 의장을 지내며 브레즈네프 시대 방송을 총괄한 언론 관료다. 레닌그라드 신문기자로 출발해 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국에서 훈련받았고, 외교관으로 전환하여 오스트리아·중국 대사와 외무차관을 거쳐 TASS 사장을 지냈다. 고스텔레라디오 의장 재임 동안 올림픽 텔레비전센터 건설과 위성 방송망 확충으로 기술적 기반을 크게 넓혔으나, 동시에 생방송을 철폐하고 유대계 예술가들을 체계적으로 배제하는 엄격한 이념 검열을 시행했다. 브레즈네프의 개인적 신임을 등에 업고 당 선전부의 지시조차 거부할 만큼 독자적인 권력을 행사했으며, 고르바초프 집권 직후인 1985년 12월 해임되었다.
“나는 러시아인이지만, 평생 타타르인들을 비방으로부터 지켜왔다” — 카잔의 구밀료프 흉상 받침대에 새겨진 문구.
소련의 역사학자·민족학자·고고학자로, 민족 집단의 발생과 쇠퇴를 우주적 에너지 '파시오나르노스트'로 설명하는 민족발생론을 제창했다. 시인 니콜라이 구밀료프와 안나 아흐마토바의 아들로, 1938년부터 1956년까지 세 차례 체포되어 14년간 수용소에서 복역했으며 베를린 전투에 참전했다. 그의 저작은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폭발적 인기를 얻어 중앙아시아와 타타르스탄에서 민족 정체성 담론의 기초가 되었고, 카자흐스탄에는 그의 이름을 딴 구밀료프 유라시아 국립대학교가 설립되었다. 학계에서는 유사과학이라는 비판도 받았으나,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정치 엘리트의 유라시아주의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구레비치의 연구진은 뮤오늄 원자 속 양뮤온 스핀이 약한 자기장에서 두 개의 가까운 주파수로 세차해 맥놀이를 만든다는 새 현상을 예측하고, 1969년 실험으로 확인했다.
이사이 구레비치는 소련의 이론물리학자로, 핵분열과 중성자 물리를 연구했다. 1943년 실험 자원이 부족한 전시 상황에서 이사크 포메란추크와 함께 연구하여, 흑연 감속재 속 우라늄을 격자 형태로 배치하는 불균질 조립체 이론을 세웠다. 이 계산은 우라늄의 공명 흡수를 줄이는 설계 원리를 제시했고, 쿠르차토프 연구진이 F-1 원자로를 건설하는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24년간 카자흐스탄을 브레즈네프의 동반자로 이끌고, 해임으로 젤톡산 봉기를 촉발한 공화국 건설자
1986년 2월, 나자르바예프의 비판 보고가 있은 후 쿠나예프는 고르바초프를 찾아가 나자르바예프의 해임을 요청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가 오히려 쿠나예프 자신에 대한 불만을 전하자, 24년간 카자흐스탄을 이끌어온 노지도자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럴 필요 없소. 내가 직접 물러나겠소."
광산 기술자로 출발하여 카자흐스탄 공산당 제1서기로 24년 가까이 재임한, 소련 공화국 지도자 중 가장 오래 권좌에 있던 인물이다. 브레즈네프와의 친교를 바탕으로 카자흐스탄을 소련 3대 경제권으로 끌어올렸고, 흐루쇼프의 남부 영토 이전 시도를 저지하여 공화국의 영토 보전을 지켰다. 전연방 정치국 정위원(1971–1987)으로서 중앙 무대에도 진출했으나, 1986년 12월 고르바초프에 의해 전격 해임되면서 알마아타에서 대규모 민중 시위: 젤톡산(12월) 사건이 촉발되었다.
1965년 하바롭스크 변경에 레닌훈장이 수여되자 시티코프는 말했다. '변경의 훈장 수훈을 우리는 중앙위원회와 소비에트 정부가 극동인들에게 베푼 큰 관심의 표현으로 받아들입니다.'
코스트로마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축산기술자로 출발한 소련의 당·국가 지도자이다. 하바롭스크 변경당 기구에서 25년간 근무하며 캄차카·유대자치주 당서기를 거쳐 1957년 하바롭스크 변경당 제1서기에 올랐고, 재임 13년간 도시 기반시설과 공업화를 추진했다. 1970년 소련 최고소비에트 연방회의 의장에 선출되어 14년간 재임하며 브레즈네프 시대 연방 입법의 제도적 중심을 형성했고, 소비에트 유럽안보협력위원회 의장으로서 데탕트와 헬싱키 프로세스에 참여했다.
1945년 10월 14일, 10만 명이 넘는 군중이 평양 운동장에 모여 소련군 해방 환영대회를 열었다. 소련 장군이 '민족의 영웅, 유명한 빨치산 지도자 김일성 동지'를 소개하자, 연단에 오른 것은 33세의 젊은이였다. 군중은 50대쯤 되었을 전설적 게릴라의 실제 모습에 당혹스러워했다.
항일 유격대 지휘관으로 활동하다 1940년대 소련 극동의 제88독립소총여단에 속했고, 1945년 이후 소련 점령 당국의 후원 아래 조선 북부의 권력 중심으로 부상했다.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운 뒤 당·국가·군의 권력을 장기적으로 집중시켰다.
고든 스킬링은 체코슬로바키아 현대사와 정치의 권위 있는 연구자로 활동한 캐나다 정치학자였다. 그는 《중단된 혁명》에서 1968년 프라하의 봄을 좌절된 실험이 아니라 외부 개입으로 중단된 개혁 혁명으로 분석해, 개혁 공산주의의 가능성을 둘러싼 논쟁에 오래 남을 틀을 제시했다. 토론토대학교에서 동유럽 연구 기반을 세운 그는 학술 연구와 체코슬로바키아 민주화 세력에 대한 연대를 함께 실천했다.
그는 인구조사와 예상 인구를 비교해 유고슬라비아 전쟁 희생자를 약 102만 7천 명으로 다시 계산했고, 이는 1946년 배상 청구의 근거였던 170만 명이라는 공식 수치를 뒤흔들었다.
블라디미르 제르야비치는 크로아티아계 경제학자이자 인구학자로, 경제개발 자문과 인구 통계를 연구한 뒤 제2차 세계대전의 유고슬라비아 인명 손실을 분석한 연구자로 알려졌다. 그는 전후 인구조사와 예상 인구를 비교해 실제 사망자와 인구학적 손실을 구분하려 했고, 1989년 유고슬라비아의 전쟁 사망자를 약 102만 7천 명으로 추산했다. 그의 수치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을 포함한 여러 세력의 희생과 전후 보복을 둘러싼 기존 서사를 재검토하게 했지만, 자료와 방법을 둘러싼 비판도 낳았다.
『나는 석탄공업을 사랑한다. 내 의식적인 삶 전부를 거기에 바쳤고, 다른 길은 상상할 수도 없다.』 — 브랏첸코, 2004년 마지막 인터뷰에서.
쿠반 카자크 후손으로 모스크바 광산대학을 졸업한 광산기사-경제학자로, 키젤·로스토프 탄광 갱도에서 출발해 카라간다 콤비나트 수석기사, 카자흐 공화국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을 거쳐 1965년 소련 석탄공업장관이 되었다. 1985년까지 20년간 재임하며 라스파드스카야·보르가쇼르스카야 탄광, 보가티리 노천광, 칸스크-아친스크·에키바스투스·남야쿠티아 연료에너지 콤플렉스 등을 진두지휘해 소련 석탄 생산량을 7억 1,800만 톤까지 끌어올렸다. 강력한 채탄기 개발로 1949년 스탈린상을 받았고 1982년 사회주의 노동 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1971년부터 1986년까지 CPSU 중앙위원을 지냈다.
은퇴 후 그는 『배신자 고르바초프』라는 회고록에서, 자신이 스타브로폴에서 길을 열어준 후임자를 향해 "양면적인 자들의 동맹"이라 쏘아붙였다.
농업기계화 기술자로 출발한 예프레모프는 전시 항공공업과 쿠이비셰프 당 기구를 거쳐 흐루쇼프 시기 쿠르스크·고리키·스타브로폴 당 조직을 차례로 이끈 지역 간부로 성장했다. 전성기에는 CPSU 상임위 후보위원과 중앙위 러시아공화국 뷰로 제1부의장을 지내며, 연방 구조 안에서 러시아 공화국을 별도 관리하려는 당 구도 중심에 섰다. 흐루쇼프 실각 후 스타브로폴로 되돌아갔고, 1970년 그 자리를 미하일 고르바초프에게 넘겨준 것이 가장 역사적인 순간이 되었다. 훗날 그는 회고록 『배신자 고르바초프』에서 후임자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후 18년간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제1부의장으로 일하다 1988년 연방급 연금생활자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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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41보로네시 농업기계화연구소 졸업 → 항공공장 기술자, 독일 통상대표부 장비 인수원
그는 전축 옆에 서서 천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하이든 소나타의 마지막 화음을 듣고 있었다. 음악이 멈추자 '신성한 작품이군요'라고 중얼거리며 손님들에게 자리를 권했다.
바실리 샤우로는 브레즈네프 체제 21년간 중앙위 문화부장으로서 어떤 문학·영화·음악이 소련 대중에게 닿는지를 결정한 문화의 당 문지기였다. 벨라루스 교사 출신의 그는 보수 진영의 지지를 업고 1973년 선전부장 대행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를 중앙위에서 몰아내, 고르바초프 등장까지 이념 개혁을 늦추는 데 한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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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1942비쳅스크 지역 교사·학교장
1942–1947중앙위 선전선동국 지도원·분과장
1948–1956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기구 → 민스크 주당위 제1서기
1960–1965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서기 겸 최고회의 간부회의 의장 (1963–1965)
키라이 벨러는 헝가리 군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과 전후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거쳐 1956년 혁명에 참여했다. 전후 체제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감형·석방된 그는 국민위병을 지휘하며 소련군에 맞선 헝가리 무장세력의 최고위 군인이 되었다. 망명 뒤 미국에서 역사를 연구하고 가르쳤으며, 티토·스탈린 결렬을 다룬 회고와 저술에서 소련의 유고슬라비아 침공 계획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후 공개된 소련권 자료를 바탕으로 한 연구는 그 주장을 반박하거나 수정하며, 그의 증언을 1956년의 경험과 기억 정치 속에서 다시 검토하게 했다.
1971년 9월 3일, 아브라시모프가 베를린 4국 협정에 서명한 뒤 남긴 말: '가시 없는 장미는 없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향한 말이자, 냉전 최전선에서 10년 가까이 협상해온 외교관의 솔직한 표현이었다.
벨라루스 출신의 소련 직업 외교관이자 당 관료. 조국전쟁에서 벨라루스 파르티잔 정치장교로 복무했고, 전후 벨라루스 각료회의 제1부의장과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를 지냈다. 1957년 외교로 전환하여 동독 주재 대사를 두 차례(1962–1971, 1975–1983) 역임하며 냉전기 소련의 대독 정책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1966년 서베를린 시장 빌리 브란트와 비밀 회담을 가졌고, 1971년 9월 베를린 4국 협정에 소련 대표로 서명했다. 두 번째 동독 임기 중 동독 내정에 적극 개입하여 '통치 대사'라 불렸고, 결국 호네커의 요청으로 1983년 소환되었다. 국가대외관광위원회 의장과 주일 대사를 끝으로 1986년 은퇴했다.
1945년 5월 2일, 붉은군대 소령 보리스 체르토크는 베를린 함락 직후 독일의회 의사당 벽에 자기 이름을 써넣었다. 평생 그 순간을 '가장 행복한 성취'라 불렀다. 석 달 뒤 그는 독일의 V-2 로켓 잔해 속에서 소련 우주 프로그램의 첫 페이지를 열고 있었다.
코롤료프의 최측근 대리인으로, 대륙간탄도미사일 R-7부터 스푸트니크·보스토크·소유스·미르까지 소련 우주 로켓의 유도제어 시스템을 50년간 설계했다. 사회주의노동영웅(1961)이자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으로, 은퇴 후 회고록 『로켓과 사람들』 4권을 펴내 소련 우주 프로그램의 속내를 생생히 기록했으며 99세까지 집필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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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38제22항공공장 전기기사, 항공기 특수장비·무장 설계
1940–45볼호비티노프 설계국(OKB)에서 군용기 전기·무선 장비 담당
1945–47독일 파견: V-2 유도제어 연구, 라베 연구소·노르트하우젠 연구소 근무
1946–56NII-88 제어시스템 부서장 → 부수석 엔지니어, 코롤료프와 협업 시작
1956–74OKB-1 부수석 설계자: R-7, 스푸트니크, 보스토크, 소유스 제어계 설계
자오제르나야에 오른 비네비틴은 프리놉스키의 개인 명령에 따라 한 발의 정확한 사격으로 국경을 넘어 온 일본 헌병을 그 자리에서 쓰러뜨렸다.
NKVD 포시예트 국경분견대 소위로, 저격 교관을 거쳐 공병대장을 맡았다. 1938년 7월 15일 자오제르나야 고지에서 제1부인민위원 프리놉스키의 개인 명령으로 만주 영토에 들어온 일본 헌병을 저격 사살해 하산 호 분쟁의 도화선이 됐다. 부상 뒤 병원을 이탈해 전선에 복귀했고, 8월 1일 새벽 지뢰 통로 개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다 초병에게 잘못된 암호를 대어 아군 총에 맞아 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