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쿠즈민, 『1934년 일기』

인물세르게이 키로프, 막심 고리키, 프세볼로트 메이예르홀트,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아돌프 히틀러, 니콜라이 구밀료프, 미하일 쿠즈민

7월

7월 6일 (금요일)

벌써 데츠코예에 온 지 나흘째다. 완전히 다르다. 파블롭스크와 탸를레보 쪽의 근교와 경치는 매혹적이다. 정원도 아주 좋고 집도 그럭저럭이겠지만, 나는 아무와도 사귀지 않았고 거리를 두고 지낸다. 부엌 옆 의무실에서 혼자 산다. 집은, O. N.의 표현대로, 모르몬교도 집 같다. 특히 식당과 응접실이. 자잘한 복도와 지나다니는 방이 잔뜩 있고, 모든 것이 이렇게 비뚤비뚤하게 놓여 있어서 북쪽인지 동쪽인지 분간이 안 된다. 내 상태는 좀 멍하지만 병적인 것은 아니다. 창문은 안뜰을 향해 있어서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이 다 보인다. 잔디밭이 있는 현관인데, 좀 더 깨끗했다면 유르.가 오기에 알맞을 것이다. 유르.는 여기서 O. N.와 부부처럼 산다. 나는 그들에게서 차를 마셨고, 그들은 스테파노프의 누이에게 갔다. 스테파노프 부부의 방문은 집안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유르.는 혼자서도 온다. 심지어 탸를레보까지 둘이서 산책도 했다. 지극히 멋진 길이다. 시내가 흐르는 가로수길과 철로를 따라 난 프랑스식 길, 그리고 은빛 버드나무를 배경으로 한 배구. 연못이 너무 더러워서 다섯 살 이상 시민은 수영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어쩐지 멍청하게 처신하고 있다. 기분 좋게 면도를 했다. 도시에서처럼 일을 하지 않았다. 전러시아 극작가위원회에서는 겨우 80을 주었다. 지난 일을 조각조각 무질서하게 적어 두었다가 나중에 정리하기로 했다.

콜로니스트 연못. 모스크바 가도변. 지금은 종이쪽과 솜이 붙은 육종 시험 밭, 장거리 열차용으로 새로 쌓아 올린 높은 철로와 휴양소가 있다. 초원과 버드나무 사이의 길고 푸른 연못. 그다음엔 초원 옆으로 시내가 흐르는 넓은 영지 길과 트인 언덕들, 그리고 어디든 온통 소와 물놀이하는 아이들. 독일인을 위한 프리덴탈 정착촌. 획일적인 주거용 집들은 약간 empire 양식(정착촌이 예카테리나 때 생겼는데도 마치 40년대 같다)으로 분홍색, 하늘색, 피스타치오색이다. 터무니없는 색으로, 속물적인 「시골의 한 달」 같다, 그 작품 자체가 충분히 속물적이지 않았다면 말이지만, 그리고 「음모와 사랑」 같다. 지금도 모두 독일인들이 산다.

즈노스코보롭스키 가족. 중류층 출신이라 매우 근엄하고 거만하기까지 한 집안(그래서 거만한 것이다). 어머니는 얼굴에 습진 같은 것이 있는 독일 여자다. 아버지는 유르.가 그리는 건물 관리인들을 닮았다. 시동들(안톤은 아주 괜찮은 녀석), 빈트, 손님들, 리체이와 법률학교에 다니는 아들들, “새로운 기풍”으로서, 자유주의와 데카당스로서 다른 강습 과정에 다니는 딸. 아마 나와 구밀료프와 아우슬렌데르를, 특히 나를 집에 부를지 말지 오래도록 의논했을 것이다. 그곳에서 레시코프와 프로코피예프는 아이들의 손님이다. 나는 《아폴론》에서 알게 되었는데, 제냐가 그곳 비서였고, 아마 마코프스키의 친구 P. P. 베이네르를 통해서였을 것이다. 그에게 나디나 즈보롭스카야를 시집보내려 했었다. 그의 동료는 V. 추돕스키였는데, 어찌된 셈인지 세료자 라들로프의 친구이기도 했다. 나는 곧 즈노스카를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키가 작고, 지독히 성급하고, 코는 단추 같고, 혈색이 붉고, 쾌활하고, 머리는 고슴도치처럼 짧게 깎았다. 체스 선수이기도 했다. 그 뒤 우리의 「막간극의 집」에 들어왔다. 그의 친구는 칸크린이었는데, 나중에 극장 쪽에서 일했고, 이 방면의 난봉꾼인 크루펜스키와 관계가 있었던 것 같다. P. 사부로프 — 이쪽은 좀 더 진지했던 것 같다. 나는 제냐와 함께 구밀료프 측 결투 입회인이었고, 함께 장소와 권총을 골랐는데, 바로 얼마 전 구치코프가 결투에 쓴 권총이었다. 구밀료프와 볼로신의 결투에 관해서는 따로 이야기하겠다. 이것이 내게는 아주 즐거웠다 — 즈노스카와 함께 하는 일이니까. 그 뒤 아우슬렌데르가 나디나와 결혼했다. 결혼식은 오쿨롭카에서 있었다. 나와 제냐가 들러리였다. 나는 포즈냐코프 때문인지 고두노프 때문인지 누이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사흘(아니면 이틀) 일정으로 갔고, 제냐와 함께 떠났는데, 그는 역에서 사부로프를 만나자 양해를 구하고 그의 칸으로 옮겨 갔다. 결혼식은 시골 풍습을 따른다는 시늉을 했지만, 내 누이가 예전의 허무주의 탓에 풍습을 죄다 잊어버린 터라 꽤 우스꽝스러웠다. 모든 것을 매형의 누이가 주관했는데, 나는 그녀가 상을 돌며 “꼼지락거리세요, 내 손님들, 꼼지락거리세요, 귀한 분들” 하고 말하고, 이에 “알다마다요, 당겨 앉지요 — 실컷 꼼지락거렸습니다” 하고 답해야 하는 장면을 내내 기다렸다. 하긴 아우슬렌데르에게는 자벨린의 러시아 차르들의 생활상이 그다지 어울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즈노스코보롭스키는 비상하게 정력적이고 재빠르며 요령 있는 조직가였다. 그것은 《아폴론》 편집국에서도, 아카데미 회의에서도, 「막간극의 집」에서도 드러났다. 극작가이자 비평가로서 그는 다소 건조했고 꽤 영리했다. 그는 처음에는 베드린스카야에게, 그다음엔 올레트 수데이키나에게 반했고, 2년쯤 우리가 거의 떨어질 수 없는 일행이던 시절이 있었다. 톨스토이, 소냐 톨스타야, 수데이킨, 올레트, 제냐, 나, 나댜 아우슬렌데르, 그리고 구밀료프. 그 뒤 그는 전쟁에서 부상을 당해 브론니츠카야 어딘가에 누워 있었고, 나는 그를 찾아가곤 했다. 그 뒤 필라레토바와 결혼했는데, 지금은 철거된 마트베옙스카야 교회에서였고, 나는 들러리였다. 그는 알렉스. 예파프로디티치라는 어떤 지인의 집에 살았다. 나는 늘 여기서 이름은 아무 상관이 없고, 부칭에 이미 이름도 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 예브 아프로디티치. 키라인지 키릴인지 무슨 귀족적인 이름의 아들을 낳았다. 아이는 “전쟁이 끝나면 아빠가 면도를 하고, 우리는 놀러 갈 거야” 하고 말했다. 어림없는 소리. 그때는 많은 이들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의 서약을 했다. 리나 이바노브나가 지금도 흰송어를 먹지 않는 것처럼. 그 뒤 어떻게 해서인지 파리로 옮겨 가, 이따금 시시한 체스 대회에 나가고 체스에 관한 글을 쓴다. 나를 크냐제프와 알게 해주었는데, 나디나의 말로는 내가 왜 그에게 반했느냐고 화를 냈다고 한다. 크냐제프는 올렌카 수데이키나와 연애를 시작해 나와 다투고는 나중에 리가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나는 지금도 그의 어머니를 만난다. 한편 나디나는 유르.와 연애를 시작했다. 첫 소식을 가져온 사람은 블라. 아드. 나그로드스키였는데, 즈노스카와 그의 어떤 지인들이 살던 즈베니고로드스카야의 그 집 현관에서 유르.의 외투를 보았다는 것이다. 그다음은 코제바트킨으로, 유르.가 그에게 모스크바행 열차를 물었다고 했다(나한테는 레스노예 어딘가로 간다고 했었다). 그다음은 그리고리 그리고리예비치, 그다음엔 유르. 자신이 돌아왔다. 나는 그때 “셀렉트”에 살았다. 모스크바에서 그들은 그다지 즐겁게 놀지 못했는데, 더구나 나디나는 같은 무렵 타이로프와 무슨 연애 놀음을 벌이고 있었다. 지금 그녀는 루마니아 어딘가에서 아주 부유한 남자와 결혼해 살지만, 외딴 시골에 틀어박혀 위선적인 신앙에 빠졌다.

7월 7일 (토요일)

하루 종일 비. 아침에 유르.를 기다리지 못하고 그를 마중하러 나갔는데, O. N.이 우리를 만났다. 그녀는 바구니와 병을 들고 시장에 가는 길이었다. 나는 이미 유르.를 배웅했다. 그리고 그 뒤로 하루 종일 집에 앉아 있었다. 『죄와 벌』을 실컷 읽고 이미 잠자리에 들었을 때, 모슬린 같은 황혼 속에 O. N.이 내게 들렀다. 기사 몰차노프, 또 어떤 노인과 잠깐 이야기를 나눴다. 오늘은 (8) 크로케를 치고 팔레이 궁전 옆을 산책하기까지 했다. 오늘 날씨가 멋지고 몸 상태도 아주 좋다. 일하고 싶기까지 하다.

아침의 연못. 재스민은 이미 다 졌지만, 그래도 아침의 정원은 호화로운 인상을 준다. 그리고 빽빽한 나무들의 액자 너머로 보이는 연못은 은빛의 안개 어린 목가처럼, 버드나무, 가축 떼, 선별된 초원, 물놀이하는 사람들, 그리고 멀리서 보면 더 커 보이고, 무엇보다 다리가 더 길어 보이는 행인들이 있는 전원시처럼 보인다. 그리고 저녁 햇살의 매력, 낮의 햇살에는 거의 완전히 없는 그 매력을 지닌 이 아침 햇살들!

선조들에 관하여. 프랑스의 비극 배우 오프랭(아마도 Hauffrin이라고 썼을 것이다)이 있었다. 그에 관해서는 볼테르와 프리드리히의 서신에 나온다. 그는 프리드리히의 궁정에 있었고, 그 뒤에는 예카테리나의 궁정에 있었다. 그에게는 딸이 있었는데, 그는 그 딸을 배우에게만 주기로 마음먹었다. 한 젊은 망명객이 그 딸에게 반했고(아마 오프랭이 러시아에 오래 머물렀던 듯하다), 조건을 이행하기 위해 배우가 되었으나 배우로서는 변변치 못했다. 그러나 오프랭의 딸도 그다지 훌륭한 배우는 아니었던 듯하지만, 그들은 결혼했고 딸을 낳은 뒤 아주 젊은 나이에 죽었다. 망명객의 성은 기억나지 않는다. 가지에 르 몽 같은 것이었는데, 어쩌면 내가 지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소녀가 내 할머니였다. 그녀는 연극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고모(셰프르빌, 셰브르페이유) 집에 살면서 발레에서 큐피드를 연기했으나, 과정을 마치지 않고 겨우 16세 남짓에 학급 감독관 표도로프와 결혼했다. 쾌활하고 경솔한 성격이었던 듯하며, 특히 남편과 사별한 뒤에는 더했다. 자식이 넷이었다 — 아들 야코프와 딸 셋: 안나, 나데즈다, 옐리자베타. 과부가 된 뒤 크류코프 운하 니콜스키 시장 근처 푸루겔름 장군의 집에 살았다. 어떤 추종자가 그녀가 자기와 함께 마차를 타러 나갈 것이라고 내기를 걸었고, 삯마차꾼으로 변장해서 그녀를 태우고 달렸다, 일화들. 아주 작은 양산을 들고 물에 몸을 담그며 물놀이를 했다: “카테리나 리보브나, 남자들이에요!” — “저게 무슨 남자들이야! 저건 농사꾼들이지.” 우리 집에 잔뜩 치장하고 크리놀린을 입고 와서는 빙글빙글 돌았다. “그런데 미샤는 어디 있지?” 미샤가 어쨌다는 건가. 그녀는 벌써 오래전에 크리놀린으로 그를 침대 밑으로 쓸어 넣어 버렸고, 그는 거기서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게 누워 있다. 대개 이 일화는 나에게 붙이지만, 할머니가 1875년에 이미 살아 있지 않았으므로 내 형 알렉세이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정교로 개종했는데, 가톨릭 신부들이 가정생활에 끔찍하게 간섭하고 그것을 이끌려 애쓰며 늙은 처녀들처럼 병적인 에로틱한 호기심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반면 정교회 신부는 아이들 안부를 묻고, 다차는 어디로 가느냐고 묻더니 곧바로 “하느님이 용서하시고, 하느님이 축복하시리라”였다. 그때 그녀는 금발에서 갈색 머리로 염색을 바꿨다. 내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청혼하기 전에 내 생각으로는 할머니와 연애를 했다. 미인이었다고들 한다. 그러나 어느 할머니에게 그런 말을 안 하겠는가. 어쨌든 그녀의 자식들에게는 그것이 드러나지 않았다.

7월 8일 (일요일)

멋진 날씨. 크로케까지 했다. 조금 걸었고, 저녁 식사 전에도 걸었다. 돌아오는 길에 유르.와 O. N.을 만났다. 나에게 양복을 가져다주었고, “아카데미아”에서는 15일 이후에. 왠지 들뜬 기분이다. 파블롭스크 쪽으로 여러 길을 걸었는데, 멋진 곳들이었다. 무엇보다 차르스코예 셀로와 전혀 닮지 않았다. 왠지 유르.와 O. N.이 아주 형편없이 먹고 지내는 것 같아서, 몹시 안쓰럽다. 여기는 요리가 훨씬 형편없지만, 우리가 나리들처럼 먹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어쩌면 실제로 그렇게 보이는지도 모른다. 왠지 좀 무거운 꿈들을 꾸었다. 아직 날이 많이 남아 있어 다행이다. 얼마 남지 않은 것도 다행이다.

지도교사. 보육원에서 남자아이들이 떼로 왔다. 샤워를 하러 온 모양이었다. 그들과 함께 담임 선생 비슷한 사람이 있었는데, 열여덟 살쯤 된 젊은이로 팔을 드러냈지만 전혀 그을리지 않았다. 귀여운 얼굴이었고, 아우슬렌데르를 개량한 듯했다. 온갖 자세를 취했다. 동료처럼 행동하지만 거리를 둔다. 아이들은 어려워하지 않으면서도 그를 숭배하고, 누가 그에게 더 가까이 앉을지를 두고 싸우고, 칭찬을 받으려 애쓰고, 그의 관심을 끌려고 한다. 그러나 그 대신, 아마도, 그가 무언가에서 기대에 못 미치거나, 잘못을 저지르거나, 무언가를 모르거나, 할 줄 모르면 얼마나 무자비할지, 자신들의 비굴함에 대해 얼마나 앙갚음할지.

어머니. 나데즈다 드미트리예프나는 장녀였다. 연극학교에서 태어났는데, 알렉산드린스키 극장 쪽으로 반원형 창문이 난 위층, 오른쪽 별관이었다. 할머니는 아침에만 볼 수 있었다. 할머니는 침대에서 그들을 맞이하며 손이 깨끗한지, 머리와 옷차림이 단정한지 살피고, 건강과 공부는 어떤지 물었고, 그 뒤로는 하루 종일 할머니를 볼 수 없었다. 모든 부탁과 질문은 시험처럼 두려워하던 이 짧은 만남에 맞춰야 했다. 그들 집에 “작가” 고골이 드나들었던 것을 기억한다. 소녀들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 소매가 짧고 손이 붉으며, 옷차림은 비록 유행을 따랐으나 어쩐지 우스꽝스럽다고 했다. 할머니는 레르몬토프의 할머니 아르세니예바와도 친했지만, 후자는 표도로프 집에 오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또 조토프(라파일)를 싫어했는데, 그는 어떤 친척뻘이었고 자주 와서 식사를 했으며, 식사 후에는 아이들이 흔히 놀던 소파에 드러누워 잠들었다. 아이들은 그를 증기선이라 상상하기도 하고, 섬이라 상상하기도 하고, 또 무엇이라 상상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베누아의 집, 글린카 거리와 예카테린고프 거리 모퉁이에 있던 기숙학교(트루바, 그리고 아마 티보의 학교)에서 공부했다. 서커스 운영자 게라의 딸이 어머니와 함께 공부했고, 친구는 지질렌코(그녀의 오빠는 어떤 학자였다)였는데, 이 우정에 레즈비언적 성격이 없었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그들이 외출할 때 안. 드미.는 더 예쁘다는 점에서, 리즈. 드미.는 가장 활발하고 붙임성 좋다는 점에서 두드러졌고, 어머니는 구석에 앉아 있었다. 어머니는 키가 아주 작았고, 중국 여자처럼 매끄럽고 검고 윤나는 머리칼, 선명한 홍조가 있는 흰 얼굴, 흥분하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번쩍이는 푸른빛으로 차오르는 짙은 회색 눈, 다소 찌푸린 눈썹을 지녔다. 평생 60년대의 재킷과 드레스, 아니면 아예 시대와 무관한 노파의 옷을 입고 다녔다. 젊었을 때는 아마 유행을 따랐을 것이다. 발레리안이라는 어떤 청년이 그녀에게 구애했고 청혼했다. 안 이모에게. 할머니는 그를 쫓아냈고, 어머니는 나이 많은 지인, 심지어 아마 할머니 자신의 정부였던 A. A. 쿠즈민에게 시집보냈다. 어머니는 그를 “늙은이”로 여겼지만 시집갔다. 그때부터 그럭저럭 즐거웠던 삶은 끝났다. 아버지에게는 어머니의 소녀적이고 목가적인 오락이 지루했고, 아이들이 생겼고, 이리저리 이사를 다녔다(모스크바, 리빈스크, 야로슬라블, 사라토프). 그리고 형편이 나아졌을 때는 이미 젊음이 떠나 있었다. 이미 80년에 그녀는 미탸에게서 천연두를 옮아 곰보가 되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그녀 곁에 들어가지 못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그녀는 좀 더 자유로워졌는데, 그때 그녀는 54세쯤이었다. 그녀는 소설 읽기와 걸어 다니기를 아주 좋아했고, 죽을 때까지 그랬다. 죽음은 거의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11월 8일만 해도 그녀는 기운차고 건강했다. 그런데 11월 19일에 죽었다. 장례는 21일, 성모 봉헌 축일에 치렀다. 내내 말이 없었고, 잠만 잤고, 아무것도 먹지 않고 쌕쌕거렸다. 폐렴. 의사는 늦게 왔다. 장뇌는 소용없었다. 내가 신부를 모시러 간 사이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리자 이모가 우리 집에 와 있었다. 관리인 로만이 나를 맞이했는데, 어머니의 건강을 묻더니 문 앞까지 데려다주고는 말했다. “미셴카, 놀라지 마세요, 어머님께서 돌아가셨어요.” 나는 그때 반지를 많이 끼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그것들을 빼서 조끼 주머니에 감췄다. 그때 내 마음은 극도로 경건한 상태였고, 곧바로 수녀들이 찾아왔다. 추도 예배, 잡무, 장례, 추도 식사 — 그것들이 내 마음을 딴 데로 돌려 주었다. 그러나 같은 집에서 혼자 사는 것은 좀 으스스했다. 그녀의 나이는 72세였다.

7월 9일 (월요일)

특별히 눈에 띄는 일은 없었다. 면도를 했다. 유르.가 들렀다. 이틀 동안 떠났다. 그리고 O. N.이 그를 따라, 아니면 그가 그녀를 따라. 길고도 긴 하루였다.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호수 위로 라디오가 베버의 「Invitation」을 내보내고 있었다. 젊음, 파블롭스크, 오케스트라, 음악, 소모프에 대한 어떤 달콤한 회상. 공원에서 유일하게 갈 만한 곳은 연못 둘레를 도는 것인데, 아마도 물 위에는 나무가 없어서 공간이 유지되기 때문일 것이다. 낮에 중태의 여자 환자 하나가 실려 왔다. 겨우 내려서 집 안으로 데려갔다. 어떤 가축 치는 여자가 “이런 사람을 요양소에!”라고 했다. 안드르. 알.의 아내였다. 그들은 어딘가 맥이 빠져 버렸다. 투신스키도 없고 수술도 없이, 그저 멍하니 병이 제 갈 길로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었다. 말란치코프와 이야기했는데, 내일 산책을 나가기로 했고, 이브. 페트로비치와는 고로데츠키와 퍄스트에 관해 이야기했다.

Invitation a la valse. 저녁놀 속, 궁전 건물들이 있는 연못 위로 베버의 낭만적인 음향. 아아, 그 소리는 그저 라디오였고, 나무에는 표어가 걸려 있었고, 벤치들은 모두 부서져 있었지만, 베버는 제 할 일을 했다. 그는 어떤 문을 열었고, 그리로 호프만, 나 자신의 음악 공부, 「작은 숲」, 언제나 내게 마법처럼 느껴지는 오케스트라의 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콤플렉스 — 소모프, 댜길레프, 카르사비나, 니진스키 등등. 바로, 내 영혼의 낭만적인 면, 무언가 이슬에 젖은 것.

7월 10·11일 (화요일·수요일)

유르.는 없었다, 그러다가 10일에, 이미 열 시가 넘은 시각에, 비를 맞고 진창을 헤치며 가엾게도 내게로 날아왔는데, 나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얼마나 안타까운지! 내게 어떤 조용한 노인을 들여 살게 하자는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어제 개울가를 산책하며 줄곧 소모프를 생각했고, 그가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생각했다. 어딘가 그의 처지가 내 처지와 비슷하다. 아니다, 그렇지도 않다, 훨씬 더 활동적이고, 그렇게 송두리째 잊히지도 않았고, 이렇게 인색하게 쓰이지도 않는다. 유르.가 내게 왔다, 지쳐서, O. N.과 함께 여기저기 다른 곳들도 돌고 나서 (마치 그녀와 함께 오지 않은 것처럼, 그녀를 보지 못한 것처럼). 그래, 포도주에 맥주까지 마셨다, 걷고 싶어 하지 않아서 나도 산책하지 않았다. 그는 내내 투덜거렸다, 내가 피곤해질 거라고, 그는 잠을 충분히 못 잘 거라고 등등. 저녁 식사 삼십 분 전에 왔다. 아이들은 다 우리 쪽에 있다. 유르.네로 갔다. 그가 마중 나오는데, 주전자가 놓여 있고, 글. 빅트.를 기다리고 있고, 비단향꽃무, 그런데 나는 마침 소모프와 관련해서 숙소가 아닌 곳에서 차를 마시고 싶다고 꿈꾸고 있던 참이었다. 유르.는 떠났다. 집안은 온갖 어수선함뿐이고, 페인트도 없고, 어머니는 청소를 했고(?), 아무도 돈을 내지 않고, 그리 아늑하지도 않다. 좀 늦게 돌아왔다. 우리 식구들은 스테파노바를 보았다. 시집 제목은 『개울의 교훈』이라 하리라.

70년대의 소설들. 술타노바의 모습을 보면, 니힐리즘의 아류들과 지노비예바-아니발 같은 상징주의의 선구자들이 뒤섞인 어떤 것을 상상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미하일롭스키, 위장 결혼, 모임들, 그리고 도스토옙스키와 레스코프의 인물들(hat 체르니솁스키 gelesen), 셰르-아무르, 수염 난 남자들, 연인의 능란한 어조, 여성 사회, 필로소포바, 스타소바, 스토유니나와 오볼렌스카야의 여자 김나지움, 여성 협동조합, 톨스토이주의, 거의 베라 피그네르와 브레시코-브레시콥스카야까지,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로운 사랑, 나그로드스카야, 베르비츠카야, 기피우스, 라포-다닐렙스카야, 로흐비츠카야 미르라, 니나 페트롭스카야, 그리고 브류소프의 여자들. 그녀에게는 그래도 사교계의 매력과, 그녀를 심지어 어느 변변찮은 d’Annunzio에게도 어울리게 만드는 어떤 공허함이 있다. 나그로드스카야는 같은 종류의 또 다른 변종으로, 조금 더 젊은 무리에 속한다. 체르니솁스키는 아주 조금, 페도토프와 도스토옙스키를 거쳐 소모프 안에도 자리 잡고 있었다.

잠든 새들. 나는 정원으로 나갔다. 그리 이른 시각은 아니었다. 이곳에서는 여름이면 대개 아주 늦게 일어난다. 짧은 가지 위에서 두 마리 새가 깃을 부풀린 채 어깨를 맞대고 잠들어 있었다. 그중 한 마리가 나를 보고는 화들짝 깨어 다른 한 마리의 옆구리를 쿡 찌르고는 날아가 버렸다. 남은 새는 잠결에 몸을 흔들흔들하다가(잠결의 새보다 우습고 사랑스러운 것은 없다) 역시 날아갔다. 겉모습은 다 참새 같은데, 어떤 것은 불그스름한 꽁지에 온통 점무늬, 붉은 가슴(푸른머리되새)이고, 제비는 폴리네시아인의 가면이나 크레타 항아리처럼 선명한 흰 줄과 검은 줄로 그려져 있어서, 모닝코트를 걸친 것이 또렷이 보인다. 이곳의 참새와 도시의 참새조차 서로 다르다. 도시의 것은 더 야윈 데다 머리가 검고 부리가 크며 노파 같은 주름진 눈을 하고 있는데, 이곳의 것은 더 통통하고 잿빛이며 순한 편이다. 참새 암컷이 새끼들에게 입으로 먹이를 물려 주거나 날기를 가르칠 때가 아주 우습다. 새끼들은 어쩐지 배를 앞세우고(머리를 앞세우지 않고) 날며, 자주, 아주 자주 날개를 파닥인다.

7월 12일 (목요일)

비, 그리고 사이사이 무더위. O. N.을 마중하러, 그다음엔 그들 집에 나갔을 뿐이다. 글. V.의 다리가 부어서 그녀가 들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스크바 거리를 따라 식당 앞을 지나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돌아왔다. 공동 숙소에서 조금은 벗어났다. 왜인지 병원에 몇 번 갔는지 세어 보았다 — 여섯 번, 그중 세 번은 올봄이고, 시로카야에서의 발작은 세지 않았다. 저녁에는 멋진 구름과 뇌우가 있었다. 밤에 어떤 여자 입주민이 아이를 낳으려 했으나 나중에 다 무사히 넘어갔다. 그리고 내 옆 욕실의 급수관이 내내 무섭게 윙윙거린다. O. N.이 모자도 없이 나를 조금 배웅해 주었다. 거기 근처에는 톨스토이도, 샤포린 부부도, 메이셀만도, 예브게니야 알렉세예브나도, 술타노프도 있다. 식당은 음악으로 유혹하듯 웅웅거렸다. 몸이 건강하다고 느낀다.

산책. 여기에는 바로 공원이 아닌 산책로가 정말 얼마 없다. 역 쪽으로, 탸를레보 쪽으로, 그리고 파블롭스크 쪽으로. 딸기 밭, 나무 사이로 난 길, 여러 높이로 나란히 이어지는 언덕, 평원과 연못과 졸졸 흐르는 시내가 보이는 풍경. 하늘과 구름은 거의 언제나 몹시 소모프풍이다. 연못은 물이 상했다. 타이치 수도관이 12베르스타 지점에서 망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영하는 사람조차 적지만, 그러나 ~할 때는 (중단했다… 그리고 그다음에 무엇을 쓰려 했는지 잊어버렸다).

7월 13일 (금요일)

거의 종일 가는비. 아주 따뜻하다. 유르.는 없다. 레비틴이 왔다. 모냐와 미티카 라들로프를 섞어 놓은 자다. 기쁨과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유리예프의 어떤 친구, 유리예프의 비서 스미르노프와의 어떤 다툼, 호다세비치와 제베르제예프 등에 관한 소식. 물론 별난 녀석이지만, 나를 즐겁게 해 주었다. 마침내 그 집에서 온 수수께끼의 “소포”가 배달되었다. 내가 생각한 대로 스토리친에게서 온 신문이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내가 『일리아스』를 번역했다는 소식과 알렉산드린카에서 「헛소동」이 상연된다는 소식이 있어, 그것이 나를 고무시켰다. 저녁에 말란치코프 부부와 술타노바와 어울렸다. 어떤 휴양지 거물들이 와서 나에게 동숙자를 붙여 주겠다고 알렸다. 어떤 독일인들이 이따금 크로케를 치며 독일어로 말하는데, 마치 독일어를 말할 줄 모르는 것처럼 말한다.

노래.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말미에 라스콜니코프가 노동하러 나가는데, 이르티시강 건너편 초원에서 노래가 들려오는, 가슴을 에는 대목이 있다. 새로운, 미지의, 매혹적이고 진지한 삶의 상징으로서의 노래다. 러시아의 성화, 러시아의 노래, 러시아의 일상, 러시아의 옷, 러시아의 얼굴, 러시아의 기도는 내게 그와 같은 인상을 준다. 친숙하고, 야성적이고, 달콤하고, 진지한. 아마도 지나치게 진지하기까지 한, 뭐랄까, 뒤돌아보지 않고 광신적으로 뛰어들어야 할 그런 무엇. 그러나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행동의 자유” 없이 행동하는 데는 무능하다. 그러므로 아마도 나 자신도 예술에서도 감정에서도 다른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지 못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러시아적 위험은, 어쩌면 나에게 가장 위험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아직 존재한다면 말이다. 30년 전쯤에는 그래도 어떻게든 존재했지만, 이제는 두렵건대 러시아의 세계가 크레타와 미케네로 변해 버린 것은 아닌지. 빠져들 수는 있어도 그것으로 살아가기란 거의 불가능한 곳들 말이다.

현관. 현관 앞에는 꽃과 잔디가 있는 화단이 있다. 조금만 더 정돈되었다면 유로치카가 그 길을 따라 걸어 들어오기에 어울렸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정원에 무리 지어 서 있는 스테파노프 가족, 술타노프 가족, O. N.과 유르.도 프랑스 특파원에게라면 사교계의 Garden-party로 쉽게 통했을 것이다. 나는 유감스럽게도 사교계 인사 마르틴 드빈스키의 장밋빛 안경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7월 14일 (토요일)

유르.가 역에서 곧장 내게 왔다. 그다음에는 O. N.이 들렀다. 호화로운 더위, 진짜 여름의 매력이다. 시내는 끔찍하다고들 한다. 유르.는 흰 양복을 입고 있어서 겨우 알아보았다. 대단히 우아하고 젊다. 이런 때야말로 다른 어떤 상황에서보다 몸매가 있어야 한다. 근사하다. 대체로 아주 상냥했다, 피곤했고 잠도 못 잤는데도. 다들 물놀이를 많이 한다. 내게 이웃을 붙여 주었다, 폴리카르포프다. 코시킨, 모즈고프, 피갈킨, 폴리카르포프, 팔라스 극장의 건축자들이 떠오른다.

독일적 요소. 사실 말하자면 차르스코예 셀로의 풍경 속에 포츠담이 있듯이, 차르스코예 셀로의 자연 전체에 이 호도베츠키, 호제만의 성격이 있고, 심지어 슈빈트와 룬게의 기사도적인 물망초, 심지어 지크프리트적인 새들의 풍요와 숲의 사각거림까지 — 모든 것이 독일적이고 예술세계적인데, 이 둘은 대략 같은 것이다. 소모프, 골로빈, 베누아, 란세레, 도부진스키, 심지어 박스트에게 프랑스인들과 공통된 것이 무엇인가? — 아무것도 없다. 온통 “Sezession”이고 세계 문학에 대한 독일적 인식이다. 물론 독일적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영국적인(모더니즘의 복합체로서의 라파엘 전파) 흐름이다.

7월 15일 (일요일)

더 서늘하고, 더 잿빛이고, 더 후텁지근하다. 불쾌하고 수상쩍은 진줏빛, 그것이 호화로운 마른번개의 밤으로 이어졌다. 사방에서 번개의 굉음, 비는 그리 많이 오지 않은 듯하다. 다행히 내게 그리 심하게 작용하지는 않았다. 우리 쪽에는 사람이 자꾸 늘어난다. 아스트바차투로프 부부가 나타났고, 바이올리니스트 체르노프가 왔고, N. 블. 술타노바가 왔었다. 무질-보로즈디나와도 기어이 합류했다. 아, 그리고 메이예르홀트에게서 온 스테파노프도. 파블롭스크 쪽으로 좋아하는 길을 따라 산책했다.

바이올린 연주자. 바이올린 연주자가 마당에 와서 나무 아래 서더니 연주를 시작했다. 연주 솜씨는 나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이 터무니없이 재능이 없었다. 생기도 없고, 매력도 없고, 상품을 번듯하게 내보일 줄 아는 솜씨도 없었다. 기타 반주 없이 연주했다는 점도, 곡목의 선택도, 하필 우리 휴양소를 찾아온 것도, 처신하는 태도도, 풍채도, 외모도, 모든 것이 때에 맞지 않았다. 귀엽지도 않은, 오히려 둔한 수줍음, 사기꾼 기질의 부재, 가장 솔직하게 말하자면 재능 없음이었다. 내가 이 일에 이토록 머무는 것은, 내 안에서 이 바이올린 연주자의 모든 성질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른바 상품을 번듯하게 내보인다는 것, 예술의 창조적 요소가 아니라 작용하고 전달하고 전염시키는 요소의 필수 조건인 바로 그것과 완전히 정반대다. 이런 면은 유르.에게도 얼마간 있다. 그의 작품들의 온갖 광채는 그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드러나고, 그의 노력은 오히려 일을 될 수 있는 한 돌이킬 수 없이 망쳐 놓는 데로 향하는 것만 같다. 처신하는 태도에서조차 그렇다. 그는 이것을 오래 버티기 위한 전술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게 아니라, 얼음을 깨고 자연스러움과 타고난 다정함으로 나아가려는 어떤 안간힘, 남의 마음에 들고 싶어 한다는 의심을 받을까 두려워서 나오는 어떤 억지스러운 소심함(그러면서도 마음에 들고 싶은 마음은 무섭도록 간절하고, 칭찬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긴다), 무례함과 도발이다.

착시. 나는 연못가에 앉아 있었다. 맞은편 기슭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그렇다, 행렬이, 내가 본 것을 이 엄숙한 단어 말고는 달리 부를 수 없다. [검열 2: 1문장] 루트비히 호프만의 환영들처럼 빠르고 가지런하게 걸었다. 가까이서 보니 보육원이었다. 크레틴 같은, 범죄자 같은 얼굴을 한 여섯 살쯤 된 팬티 차림의 사내아이들, 아홉에서 열 살쯤 된 여자아이들. 멀리서는 모든 것이 더 커 보인다. 이보다 더 잘 말할 수는 없다. 어떤 얼굴, 새, 나비, 꽃, 돌은 가까이서만 제대로 가늠할 수 있지만, 전체적인 인상, 전체적인 결론은 멀리서만 가능하고, 또 무의미하다.

7월 16일 (월요일)

좀 덥지만, 어제 한바탕 우르릉거린 뒤라 그래도 공기가 상쾌해졌다. 기술자 보긴스키가 왔다. 연극 애호가로, 코르닐리 파블로비치의 동료이고 니콜라이 에르네스토비치의 지인이다. 나를 이야기로 붙들고 있었다. 대체로 나는 모두와 말을 트게 되었지만, 무슨 저녁 모임들이며 바이올린 연주자며 체호프의 밤이 평온을 위협한다. 그리고 또 무슨 의무들. 유르.가 뇌우를 걱정하며 일찍 왔다. 그에게 노트를 읽어 주었는데, 아주 마음에 들어 한다. 이것이 나를 고무한다. 저녁에 페트로프가 나를 찾아와서 그에게도 읽어 주었더니, 그는 […]을 연상시킨다고 했다. 그를 배웅했다. 어쩌면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른다. 뇌우를 앞두고 어쩐지 좀 무겁다. 어딘가에서 천둥이 울렸다. 저녁에 보긴스키와 모스크바 가도를 잠깐 거닐었다. 그는 담쟁이로 뒤덮이고 지저귀는 새들이 떼로 깃든 수위실에 묵게 되었다. 연못 너머의 경치가 사랑스럽다.

7월 17일 (화요일)

아침에 술타노바가 안. 드미.가 위독하다고 알려 주었다. 연쇄구균성 편도염이고, 세료자가 그리로 달려갔다. 티란은 아무래도 여성 질환이 재발한 모양이다. 그녀는 몹시 상심하여 집에 틀어박혀 장과를 사고 뜨개질을 하지만, 무엇을 하든 믿기지 않을 만큼 사랑스럽다. 면도하러 다녀왔다. 아침에 웬일인지 나타샤의 아버지가 나와 이야기를 나누며 휴양소들에 대해 불평했다. 그리고 내 한량 영감은 아주 푸근하고 호의적이며, 예구노프와 이바노프의 중간쯤 되는 사람인데, 볼링핀처럼 서서 깍듯하게 굴고, 나를 늙은 하인처럼 대한다. 지극히 순진한 사람이다. 육종 시험장으로 무슨 견학.

집에 남는다. 지금까지 나는 집에 혼자 있는 것을 견딜 수 없었고, 파스테르나크의 마지막 중편에 묘사된 느낌, 방에서 살아 있는 모든 것, 혼이 있는 모든 것이 다 빠져나가 버릴 때의 느낌을 이해했다. 얼마 전부터 나는 갑자기

“그는 갑자기 애국자가 되어 깨어났네
모르스카야 거리의 Hotel de Londres에서…”

나는 때로 혼자 남는 것, 어쩌면 아주 오래 혼자 남는 것의 매력을, 자유(무엇으로부터?)와 독립, 갑자기 생겨난 엄청난 시간의 여유를 이해하기 시작했고, 그저 이해했다. 내 안에는 식욕을 돋우고 기쁨을 주는 것들뿐 아니라 그때그때 닥치는 것들, 무엇이든 되는 대로의 것들에 대한 식욕과 기쁨의 감각, 그 자체로 충분한 쾌감이 강하다. 그렇지만 불평과 비좁음과 말다툼에서 오는 쾌감은 지금도 느끼지 않는다.

흰색. 우아함과 유럽 취향, 그리고 과감함의 극치—흰 바지. 프롤레타리아뿐 아니라 상당수의 사람들에게(비록 스스로는 인정하지 않더라도) 이것은 배를 불사르는 일이다. 루비콘이다. 내 어린 시절 남자가 콧수염을 밀거나 여자가 분을 하얗게 바르거나 땋은 머리를 자르던 것과 비슷하다.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지만 무언가 남아 있어서, 상당수의 점잖은 사람들이 흰 바지를 입어 자신과 우아한 유행을 망신시키고 있다. 유르., 레프 리보비치, 코스탸, 알. 알.에게 흰 양복이 완벽한 만큼, 말하자면 스미르노프, 지르문스키, 프로만, 세료자 라들로프, 피오트롭스키—그들이 무엇하러 망신을 자초하겠는가. 아니면 흰 바지를 입은 로제스트벤스키, 즈브루예프, 게르켄 같은 추잡한 꼴들. 흰색은 속옷의 색만이 아니어서, 흰 바지는 속바지, 즉 나체보다 더 큰 추잡함이자 우스꽝스러움이다. 그러나 속옷이 흰색인 경우가 드문 지금조차 흰색은 대다수의 점잖은 사람들과 전혀 점잖지 않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추잡하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그래서 매력적인 물건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얼마나 비참한가. 부분적으로, 비록 덜하기는 하지만, 이는 여자들의 흰 드레스에도 해당한다.

탑. 인생에서 똑같이 중대한 획기적 시기들은 길이가 매우 고르지 않다. 십 년일 수도, 몇 해, 몇 주, 며칠일 수도 있다. 그런 시기는 그리 많지도 않다. 그 사이의 여러 해들은 멀리서 빛나는 삶에 비추어진 채 살아가는데, 마치 카드놀이를 하는 맨 끝 응접실에서 빛이 스며드는 연이은 방들과 같다. 내 인생의 가장 높은 초점 중 하나는 탑이었고, 나는 뱌체슬라프 이바노프라는 이름이 그 주변과 함께 내 존재의 4분의 1, 아니 족히 3분의 1을 차지하리라 생각한다. 이제 그것은 어느 정도 조망이 가능하다. 이상한 일은 정서적 기억이 몇몇 이름에 대해 의식적인 폭력을 행사하며 연대기를 뒤섞는다는 것이다. 유르.의 경우가 그렇다. 물론 그는 사실상 1912년 — 무한히 이어지는 해와 연결되어 있지만, 감정은 그를 예술세계파 무리와 이바노프의 탑 속으로 밀어 넣으며, 상황에 따라 그에게 때로는 마슬로프의, 때로는 소모프의, 때로는 그 시절 아우슬렌데르의, 때로는 니진스키의 역할을 부여한다. 그러나 뱌체슬라프 이바노프로 돌아가자. 그는 신부의 아들이자 고전학자였고, 볼테르이자 요한 크리소스토모스였다 — 뮌헨 학파(슈테판 게오르게, 클링거, 니체) 양식의 더없이 독창적인 시인이었으며, 바그너 풍의 독일적 기세에 독일적 몰취미와 묵직함과 깊이가 있었고, 박식함과 페트라르카풍의 광채, 그리고 이 모든 헬레니즘에 약간의 슬라브적 시큼한 역겨움과 솜 같은 물렁함이 있었다. 개인적 특징으로는: 어느 정도의 얼뜬 데, 의심 많음과 잘 믿음. 이탈리아의 판탈로네 같은 면도 있었고 밝은 인격 같은 면도 있었지만, 물론 놀라운 현상이었다. 그는 L. D. 지노비예바와 결혼했는데, 아니발은 멋을 부리려고 덧붙인 것으로, 그녀는 사칭자나 다름없다. 그녀는 페테르부르크 귀족단장의 누이였고, 가족의 억압을 피하려고 자기 형제들의 가정교사였던 시바르살론과 위장 결혼을 하고는 그곳에서 노래를 배우려고 외국으로 떠났다. 이 위장 결혼에서 아이 셋이 태어났고, 그녀는 시바르살론과 헤어져 뱌치. 이바노프와 함께하게 되었는데, 그는 몸젠의 강의를 들었고 그에게서 학업을 마치고 라틴어 학위논문을 제출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비아르도에게 노래를 배웠고, 아마도 돈 덕분에 밀라노 «La Scala»에서 데뷔를 따냈지만, 공연 당일 마비가 그녀의 성대를 덮쳤다. 그때부터 그녀에게는 완전히 쉰 소리 속에 음색과 독창성이 뛰어난 목소리의 몇몇 훌륭한 음들만이 남았다. 나그로드스카야에게도 비슷한 것이 있었는데, 다만 목소리가 형편없고 술에 절어 있었다. 그때부터 아이들과 돈 따위를 돌려달라는 시바르살론의 추적 때문에 그들의 유럽 유랑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대개 이탈리아에 머물렀고(어쩌면 거기서 만났을 수도 있다), 그곳에서 언제나 사랑스러운 이탈리아 관습 몇 가지와 리조토 조리법을 가져왔다. 그들이 어떻게 시바르살론에게서 벗어났는지, 정식으로 결혼했는지는 모른다. 뱌치. 이브.도 스무 살에 러시아에서 어떤 아내를 얻었는데, 그녀는 아직 살아 있었고, 아들도 하나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딸 리디야가 태어났다. 이 모든 것이 거의 20년 동안 이어졌다. 뱌치. 이바노프는 자비로 수보린 인쇄소에서 『키잡이 별들』을 냈고, 마침내 아이들을 모두 제네바에, 아마도 지노비예바의 형제 집에 M. M. 자먀트니나의 보살핌 아래 남겨 두고, 부부는 모스크바로 향했다. 둘 다 결코 젊지 않았고, 각자 마흔 살쯤이었다. 자먀트니나에 관해서는 말해 두어야겠다. 뱌치. 이브.도 리드. 드미.도 정직하고 너그러우며 다소, 혹은 덧없이 낭만적이거나 혹은 순진한 사람들에게서 자신들을 향한 사심 없고 온전한 헌신을 불러일으킬 줄 알았고, 그런 사람들은 알고 보면 그리 적지 않다.

7월 17일 (계속)

견학에 관해 놀라운 이야기들을 했다. 무슨 괴물 같은 교잡종들인데, 보통 잡종들이 그렇듯 불임도 아니다. 저녁 낭독회에 관해서는 아무 소식도 없다, 답답하다, 면도 말고는 어디에도 나가지 않았다. 호프만을 읽고, 조금 쓴다. 내내 사방에서 무슨 천둥 같은 소리가 난다. 유르.에게 돈을 주었을까? 의사가 나를 진찰했는데, 그리 좋지는 않지만 날씨를 감안하면 견딜 만하다. 안. 드미.에 관한 소식이 나를 몹시 당혹스럽게 했다.

지크프리트. 지크프리트가 독일의 얼굴 중 하나라는 진부한 생각을 점점 더 이해하게 된다. 즉 이것이 그럭저럭 내 마음에 들기 시작한다. 잘 웃고, 성급하고, 야성적이며 다정한 지크프리트. 그리고 반드시 작은 새와 함께. 지로두는 이 점을 사랑스럽게 이해했다. 나는 요즘 우리 정원에서 내가 관찰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새들, 검은방울새, 멋쟁이새, 찌르레기, 제비, 되새, 참새 등을 너무 자주 관찰해서, 내 독일 그림 속의 헤른후트파 사람처럼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 새들의 예언을 이해하지 못한다(Vogel als Prophet). 어쩌면 이끼와 햇빛이 있는 울창한 숲도 이해하게 될지 모른다, 어딘가 굴뚝 안에서 저 위로 아주 작은 조각처럼 보이는. 물망초가 핀 시냇물과, 햇빛 가득하고 푸르고 서늘한 광야로서의 라인강. 검은방울새에서 지크프리트로, 숲으로, 그리고 「니벨룽의 반지」로.

장미. 장미는 몹시 프랑스적인, 무엇보다 프랑스적인 꽃이다. 「La belle au bois dormante」 — 모든 성들도, 베르사유도, 레니에의 소설들도, 프랑스의 고대도, 그 모든 것이 장미다. 나는 그것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렇다. 그리고 “장미는 꽃의 여왕”이라는 말은 “아름다운 프랑스”처럼 들린다. 그런 식으로, 폴란드는 — “로마 교좌의 사랑받는 딸”이다. 프랑스에는 — 장미, 독일에는 — 물망초와 라일락, 영국에는 — 재스민과 찔레, 이탈리아에는 — 제비꽃과 비단향꽃무, 러시아에는, 어쩌면, 수레국화와 해바라기. 나무와 과일에 관해서도 그렇게 할 수 있겠지만, 그러면 무책임한 놀이로 전락할 것이다.

7월 18일 (수요일)

이상한 방문들. 스토리친, 비가 오는 동안. 그러다 갑자기 — 똑, 똑, 똑. (비교적) 젊은 사람이 들어온다, 핍킨과 어두운 예세닌의 중간쯤 되는. — 못 알아보시겠어요? — 아니요. — 제가 9선에서 일했잖아요, 세냐 루사코프요. 맙소사! 9선의 목욕탕 때밀이. 그가 왜 그토록 애써 나를 찾아냈을까? 지금은 군사 영화 기지의 조감독이다. 보블로보에 산다. 햇볕에 그을려 거무스름해졌고, 코는 두툼하고, 눈은 갈색이며, 가끔 예전의 웃음과 교태 섞인 몸짓이 보일 뿐이다. 그가 왜 그토록 애써 나를 찾아냈을까? 게페우 요원처럼 두리번거리면서도 움직이지 않는 시선? 아니면, 그야 누가 알겠나? 릴랴 브리크와도 아는 사이다. 그녀의 회고록에 내가 언급된다고 한다. 아침에 O. N.가 나에게 사과와 유로치카의 다정한 편지를 가져왔다. 헤신이 그에게 주선해 주었다. 티란의 남편과 보긴스키와 손잡았다. 저녁에는 나탈리야 블라디미로브나와 알렉사 술타노바가 왔는데, 무슨 털북숭이 흰 모자를 썼고, 그 밑에서 기르고 있는 머리칼이 돌고래 꼬리처럼 솟아 있었다. 크슈샤도 초대를 취소하러 들렀다. 폭풍우 전에 그녀를 배웅했다. 접시꽃이 무성한 독일식 정원들, 그녀의 남편은 머리를 밀고 꽃을 만지작거린다, 목가적이다. 저녁에는 음악이 있었다, 음악회. 쿠지미나가 노래했고, 바이올린 연주자가 한 곡 연주했다. 나는 이미 잠들어 가면서 들었다. 밤에는 비가 왔다. 유르.가 나에게 복코프 판 셰익스피어와 휘트먼을 가져왔다.

탑(계속). 모스크바에서 이바노프 부부는 어딘가 어울리지 못했다. 특히 리드. 드미.와 그녀의 소설 『불꽃들』이 반발을 샀는데, 이 작품은 전갈 출판사가 받아들였다고들 했다. 그러나 전갈 출판사에서는 그녀의 『반지들』과 뱌치. 이바노프의 『투명성』이 출간되었다. 『반지들』은 프시비셰프스키, d’Annunzio, L. 안드레예프의 잡종이다. 상당히 몰취미한 파토스가 감도는 작품이다. 브류소프는 지노비예바의 두툼한 소설 원고가 편집부에 들어올 때마다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그녀가 나에게 읽어 준 것은 『디오니소스의 분노』와 비슷했다. 괜히 그 소설이 나왔을 때 탑에서 모두가 술렁였던 것이 아니다. 작가가 누구인지, 왜 이것이 ‘리디야’의 창작과 그토록 비슷한지, 심지어 거의 그녀의 전기까지 연상시키는지 말이다. 어쨌든 그들은 모스크바 사람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고, 모스크바 사람들도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L. 드미.가 둔중하게 재담을 부린 대로 Apraxanianische Treiben). 그래서 이바노프 부부는 페테르부르크로 옮겨 갔다. 메레시콥스키 부부가 없는 틈을 타서 그들은 주요한 문학 중심지 가운데 하나, 아니 유일한 문학 중심지가 되는 데 성공했다. 비록 그들이 《예술의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그 관계는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것이었고, 계몽 출판사, 고리키, 안드레예프에게 보낸 추파나 종교철학회 영역에서의 종교적 아마추어리즘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유기적인 것은 탐미적인 교수진과의 결합이었다: 안넨스키, 젤린스키, 플로렌스키, 카르사빈, 그레프스, 로스토프체프. 이바노프의 어느 정도 폭넓은 시각에는 얼마간 어중간한 데가 있었지만, 실로 예술과 학문, 어쩌면 정치 영역에서조차 탑의 시금소를 피해 간 뛰어난 현상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찌꺼기 또한 얼마나 많았던가. 내가 지노비예바를 알게 되었을 무렵 그녀는 마흔두 살쯤이었다. 크고 육중한 여자로, 넓은(오각형의) 얼굴은 광대뼈가 불거지고 찌들었으며, 흑인 같은 입에 피부에는 거대한 모공이 있었고, 판자처럼 연분홍 물감으로 칠해져 있었으며, 거칠게 그려 넣은 납빛 잿빛 멍 자국 사이로 거대하고 물기 어린 흰 눈이 있었다. 머리카락은 자연스러운 아마색인지 의심스러웠고, 아주 가늘며, 머리 전체를 둘러 위로 곱슬거려, 그녀의 머리를 메두사의 머리처럼, 더 정확히는 피사넬로의 성 게오르기우스의 머리처럼 보이게 했다. 얼굴은 비극적이고 마법적이었다, 시빌라와 엔도르의 무녀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갖가지 색(대개 주황, 분홍, 노랑이지만, 연보라, 파랑, 바닷물색, 진주색도)의, 어딘가 꿰매지 않은 키톤을 입고 다녔다. 그녀에게는 아쿠아마린이 놀랍도록 잘 어울렸고, 그럴 때면 그녀의 눈도 푸르러졌다. 건전한 눈으로 보기에는, 속물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녀는 일종의 괴물, 야만적인 영묘처럼 보였다. 그녀의 방에는 항아리, 소파 덮개, 수많은 색색의 방석이 놓여 있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누워 있고, 담배를 피우고, 책을 읽고, 노래하고, 번호도 없는 작은 종이쪽지에 끝없는 소설과 희곡을 썼다. 그녀가 죽은 뒤 그것들을 복원하는 일은 중국인의 공예 같은 노동이었다. 박스트가 그녀를 아침 식사에 초대했을 때, 불쌍한, 물감 칠한 디오티마는 잘 맞지 않는 도회지 옷차림으로, 대낮의 빛 아래 박스트의 우아한 독신자 아파트에서 한심하고 비참한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귀족단장 가문의 혈통에서 물려받은 재주가 있었다. 모든 손님을 살피고, 모두에게 친절하고 다정한 말을 건네고, 누구도 장광설을 늘어놓거나, 외톨이가 되거나, 말다툼하거나 하는 따위로 두지 않는 재주 말이다. 그런데 손님은 백 명까지 되었고, 응접실은 빽빽이 들어찼으며, 식당은 관 모양으로 길었다. 바로 이 사람들로 가득 찬 무덤 속에, 밀랍초가 타고 있고, 흰 포도주와 붉은 포도주 큰 병이 놓여 있고, 상석에 덕지덕지 화장을 하고 분홍빛 후광 같은 머리카락을 한 지노비예바가 있는 그곳에 [내가 들어갔을 때,] 나는 좀 으스스해졌다. 하긴 내 모습도 이 충격적인 분위기에 완전히 어울렸다.

비행기 있는 풍경. 이곳에는 비행기가 끊임없이 날아다니는데, 그것들이 요란하게 울리지 않을 때면 기차가 멈출 때처럼 잠에서 깰 지경이다. 그것들은 풍경에 독특한 성격을 부여하는데, 결코 현대적이지 않고 어딘가 서투르고 아이처럼 교훈적이다. 나는 육종 시험장 너머로 기차가 달리는 철로를 보았고, 철로를 따라 수레가 가고 있었으며, 공장의 짤막하고 굵은 굴뚝 위 하늘에는 비행기가 떠 있었다. 앙리 루소나 『Orbis Pictus』의 호도베츠키 삽화 같은 인상이었다. 바다 위의 증기선과 자전거만 없었을 뿐이다. 그러나 결코 현대적이지 않다. 비행기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도 전에 어딘가 이미 낡아버렸다.

7월 19일 (목요일)

하루 종일 비. 조금 걸었을 뿐인데 뭔가 좀 무겁다. 게다가 어쩌다 더없이 형편없게 크로케를 치고, 그다음에는 바이올린 연주자와 가수의 반주까지 해주었기에, 잠자리에 들었을 때 몸이 좋지 않았다. 안드르. 알.을 불러들이기까지 했다. 그는 산소 베개를 권했지만 다 지나갔고, 의사는 다음 날 아침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유르.는 내 일기를 아주 좋아해서, 심지어 자기에게 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

7월 20일 (금요일)

춥고, 무엇보다 잿빛이다. 코트를 입고 면도하러 갔다. 어제 콘서트 이야기. 체르노프가 내게 정원 새들의 이름을 말해주는데, 특히 딱새가 많다. 솔새, 멧새, 지빠귀도 있다. 유르.와 함께 그들 집에 차를 마시러 갔다가, 그다음에는 알렉산드롭스키 공원을 산책했다. 무힌 부부가 살던 다차를 보았다. 그때는 더 황폐했다. 또 나탈리야 이바노브나를 만났고 스토리친에게서 소포 세 개를 받았다. 저녁 식사에 늦어 어둑한 식당에서 혼자 먹었다. 아스트바차투로바가 와 있었다. 오늘이나 22일에 오라고 했다.

시냇물의 교훈. 다음 시집의 제목이 그렇게 될 것이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갈지 나는 안다. 시들이 말하게 두자. 그러나 나는 저녁 무렵 탸를레보 가도를 따라 이 시냇물로 산책하던 일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소모프를 떠올리고 있었지만, 그 핑계 아래 희망과 힘, 투명하고 평온한 감정들, 그리고 그 중심이 — 사랑이라면 굽이굽이가 마법 같은 경이로운 삶이 조용하고 따뜻하고 즐겁게 끓어올랐다. 그 제목은 낭만적이기는커녕 어떤 “떡갈숲” 시인들의 것 같지만, 그건 문제가 아니다. 첫째, 그 안에는 슈투름-경건주의적 감상 같은 것도 있을 테고, 둘째, 그 책을 그 무엇과도 닮지 않게 만드는 것은 나에게 달려 있을 것이다.

정찬 준비. 이제는 기관, 협회만이 예전에 사적인 가정이 누릴 수 있었던 살림살이를 보여줄 수 있다. 식량, 부엌에 내주는 버터, 닭 잡기, 아이스크림 휘젓기. 예전에는 이것이 대가족이나 명절 손님을 맞을 때나 있던 일이다. 그때도 선택의 여지가 있었는데, 이제는 메뉴가 자주 무엇을 “내주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모든 면에서 그렇다. 밖에서 조직된 만족은 인색하고 지루해 보인다.

탑(계속). 러시아적 요소는 내게 아주 늦게 열렸고, 그래서 얼마간의 광신을 띠었는데, 나는 원래 광신에 거의 기울지 않는다. 게다가 그것은 그리스와 동방과 동성애를 거쳐, 어떤 우회로를 통해 내게 왔다. 무엇보다 조형적인 인간으로서 나를 우선 끌어당긴 것은 예술과 생활 풍속; 예배와 의상이었다. 여기에는 가장무도회와 [탐미]주의가 적지 않았는데, 특히 완전히 서구적인 나의 애호와 취향의 복합체를 고려한다면 더욱 그랬다. 이것이 열어 보인 것은, 이 모든 구조물이 그나마 존속할 수 있게 해 주던 그 작은 다리들보다도 아마 나를 더 끌어당겼다. 이 전환은 차츰 약해지면서 몇 차례 되풀이되었다. 마지막은 내가 문학과 문학계에 등장하던 때와 겹쳤다. 나의 모습. 작고 앞으로 두드러진 턱수염, 바가지 모양으로 자른 머리, 은편자를 단 붉은 장화, 금란 셔츠, 고운 나사로 지은 농민 외투가 향수(내게서는 성수의에서처럼 냄새가 났다), 연지, 선을 그린 눈, 수두룩한 보석 반지와 어우러진 것, 나의 「알렉산드리아의 노래」, 음악과 취향 — 이것들은 사람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인상을 주었으리라. 소모프의 초상은 이미 그 뒤의, 타협적이고 인텔리화된 시기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온갖 기괴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클류예프보다 훨씬 앞선 일종의 미학적 라스푸틴이었다. 게다가 탑에서 나는 무용수이자 투시자이기도 했다. 이 성유물 너머에서 살아 있는, 자기들에게 필요한 인간을 알아본 예술세계파 사람들에게 나는 놀라고 또 감사한다. 이바노프 부부에게 나를 데려간 것은 카라티긴과 누로크였다. 소모프, 댜길레프, 박스트, 누벨은 이바노프네 수요일 모임보다 먼저 알았다. 에른이나 아니치코프 같은 누군가가 강연을 했다. 청중은 점차 옆방으로 옮겨 갔고, 거기서는 의자가 없어 바닥에 앉아 시를 읽었다. 블로크는 「작은 가설극장」과 「푸르고 먼 침실 속에서」를 읽었다. 고로데츠키는 「보리수」에 관한 것을.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고 읽지도 않았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초록 문집』이라는 앨머낵을 낸 것이 어떤 “그룹”인지 알아보러 온 브류소프는 나와 베르홉스키와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나는 레미조프와 로자노프를 처음 보았다. 이바노프 부부는 나를 소모프의 초상화 작업 자리에 함께하도록 불렀는데, 소모프는 그때 뱌치. 이브.의 초상을 그리고 있었고 모나리자처럼 자기 모델들을 안락하게 꾸며 앉히기를 좋아했다. 그렇게 나는 “탑”의 시기에 들어섰다.

7월 21일 (토요일)

따뜻하지만 해는 여전히 구름 장막을 뚫지 못한다. 몸 상태는 좋다. 유르.는 O. N.이 늦게 떠났기 때문에 늦게 왔다. 보그다노비치가 안넨스키가 보로디나에게 보낸 편지들을 내게 읽으라고 주었다. 아주 차르스코예 셀로적이고 안넨스키적이다. 의사를 만났다. 집에서 유르.가 주전자를 올려놓고, 예브게니야 알렉세예브나의 다차가 있는 채소밭으로 산책을 갔다. 어디가 변소인지,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모두 보여 주었다. 글라프. V.가 오면 어딘가 장롱 뒤에서 자게 될 것이다. 차를 마셨다. 모든 것을 유르.가 꾸린다, 가엾게도 지쳤다. 생쥐처럼 재빠르고 소리 없이 해낸다. 잠은 잘 잤지만 유르.가 꼭두새벽에 벌떡 일어나서 우리는 벌써 8시에 산책을 나갔다. 멋지게 산책했다. 카메론 갤러리로 들어가는 입구와 에스플러네이드가 훌륭하다. 유르.의 말로는 “비어즐리풍”이다.

수탉(끝). 아일랜드 수탉에게는 슬픈 운명이 닥쳤다. 그것은 시로카야에 있는 요양소의 여성 방문객들을 쪼고 또 쪼더니, 마침내는 먹이를 주려고 몸을 굽힌 인정 많은 노파의 코를 꼬집듯 쪼았다. 그에 대한 불평이 늘어 갔다. 그러자 주인인 크로힌은 불평하는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동시에, 관청 수탉이 자기 수탉을 그토록 용납할 수 없는 지경으로 두들겨 놓은 데 대해 그 관청 수탉에게 앙갚음하려고, 그것을 콜피노의 영국산 싸움닭과 바꾸기로 작정했다. 그 영국산은 이틀 만에 관청 수탉을 궁지로 몰아넣어, 관청 수탉은 얼씬도 못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주일 뒤 아일랜드 수탉은 되돌아왔다. 새 주인네 딸아이가 그것 때문에 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 발을 쪼아 댔다. 그래서 그 목을 비틀어 버렸다. 그런데 아일랜드 암탉이 그것과의 사이에서 수평아리와 암평아리 한 무리를 낳았다. 그림 형제의 어떤 잔혹한 동화를 닮았다.

사랑스러움. 내가 무언가를 사랑스럽게 여길 때, 그것은 대개 조금 우스운 것, 그것 때문에 마음이 녹아내릴 수 있는 것과 결부되어 있다. 우스우면서도 짜증스럽지 않은 처지에 놓인 모습을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사람, 얼굴, 혹은 짐승은 내 생각에 아주 본질적인 무언가를 결여하고 있다.

세례받은 흑인들. 여기서는 아기들을 마치 첫 영성체를 앞둔 흑인 아이들처럼 옷 입힌다. 남자아이들은 무슨 흰 블라우스에 분홍 줄무늬 바지를, 여자아이들은 어깨에 작은 견장이 달린 옥양목 princesse를 입는다. 토착민의 얼굴, 짐승 같은 몸짓, 그을린 피부, 조직화된 우아함에 대한 적응력 없음이 어우러져 인상은 아주 식민지적이다. 몸으로 가득 찬 연못은 개구리 연못을, 혹은 루시의 세례를 연상시킨다.

7월 22일 (일요일)

안드르. 알.의 아내가 죽었다. 물론 그녀는 서구의 호텔에서처럼 아무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사이에 어떻게든 실려 갔다. 저녁에 코추로프네 집에 갔으나 그들은 집에 없었다. O. N.은 늦게 그리로 갔으나 역시 문을 두드려도 응답이 없었다. 유르. 없이 어쩐지 심심하다.

7월 23일 (월요일)

날씨가 풀렸다. 면도를 했다. 여전히 조금씩만 나갔다. O. N.이 와서 그녀와 함께 크슈샤네 집에 들렀는데, 나는 거기서 발이 묶였다. 그들 집은 그림 동화 속 같다. 분홍 접시꽃, 양귀비, 한련, 수많은 독일인과 개들. 하늘은 다시 소모프풍이 되었다. 유르.가 와서 내게 책들을 가져다주었다. 우리 정원에서 연회가 열렸다. 시시코프, 술타노프, 제베르제예프. 유르. 이브.를 배웅하러 나갔다. 샤드린이 내게로 성큼성큼 걸어온다. 돌아와서 잠깐 앉아 있었다. 페트로프에게서 내 방문에 관해 알았다. 유르.네 집에 밀랍스키 야샤가 있었는데, 그는 유형지에서 그리 나쁘지 않게 지낸다고 한다. 이제 곧 나도 떠나야 한다.

지나가 버리는 삶. 삶의 선이 있고, 부차적인 관심의 선들이 있으며, 때로는 삶 자체보다 더 강하지만 부차적인 것들이다. 유르.와 함께였던 우리의 삶은 그렇게 흘렀고, 이제는 그렇게 흐르지 않는다. 그는 “집”을 바꿨고, 내게는 그것이 없어졌으며, 두 흐름은 어쩐지 서로 닿지 않은 채, 하나가 다른 하나 곁을 스쳐 흘러간다.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유르.는 어쩌면 나 못지않게 사랑하겠지만, 삶은 다르게 흐른다. 그는 나를 그저 찾아올 뿐이다.

지나가는 구름. 멀리, 맨 위에는 창백한 양떼구름, 그 아래에는 반짝이는 적운이 몰려가며,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달려서, 그 반대되는 움직임이 한층 더 빠르게 보인다. 이처럼 배를 타고 산이 많은 해안[에서] 멀리 떠나가는 사람에게는, 서로 다른 평면에 있는 고지들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듯 보인다.

7월 24일 (화요일)

화사하게 더운 날씨. 꽃을 사러 나갔다. 모두들 사고 있다. 장미를 들고 걸으니 마치 어느 코카서스 도시에 온 것 같았다. 문을 두드리고 꽃만 밀어 넣으려 했으나 들어갔다. 글. V.와 유르., 그리고 O. N.가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시장에서 막 돌아온 터라 어쩐지 여름처럼 홀가분하고 좋았다. 그러나 남의 삶이다. 유르.는 나에게 오려 했었다. 그리고 나섰다. 의사가 우리를 따라잡았다. 내 상태는 괜찮다. 집에서는 몇몇이 명명일 잔치에 가려고 떠난다. 유르.와 함께 티란을 만났다. 완두콩을 들고,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세잔의 「포모나」나 「가을」 같은 차림으로 걷고 있었다. 우리 식구들을 기다리지 못하고 나갔고, 그들은 물론 나와 엇갈렸다. 유르.는 정작 집에 있었고 글. V.와 함께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냐 페트로바가 도착했고, 그다음 유르.가 미하일로프네와 알. 알.을 데리러 갔다. 매우 즐거웠고, 유르.도 만족한 듯했다. 늦지 않게 떠났다. 모두 배웅했고, 유르.도 나를 배웅했다. 아직 문이 잠기지 않았고 불도 꺼지지 않았다.

새끼오리. 암탉이 물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새끼오리를 품어 부화시켰는데, 새끼들이 작을 때는 일이 별탈 없이 지나갔다. 그러나 자란 새끼오리들이 연못으로 기어들어 갔을 때 그 암탉의 절망과 놀라움과 분노와 소동은 정말 볼 만했다.

슈만. 나는 왜 슈만을 좋아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론적으로 보면 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 중 하나여야 할 것 같다. 주제로 보아도, 접근 방식으로 보아도. 그리고 이것저것(「파우스트」의 장면들, 「Manfred」, 가곡들, 피아노 소품들)을 떠올리면, 모두 마음에 들고, 어떤 것은 아주 많이 드는데도, 막상 연주를 시작하면, 마치 하이네를 읽을 때처럼, 뭔가가 방해한다. 도무지 무엇 때문인지 잡아낼 수가 없다. 슈베르트, 마르슈너, 로르칭에게서 보이는 같은 정서는, 베버는 말할 것도 없고, 나를 몹시 끌어당긴다.

7월 25일 (수요일)

아침부터 날씨가 좋다. 정원에서 어슬렁거렸다. 점심때 누군가 나를 기다린다고 했다. 스토리친이나 레비틴 같은 이들인 줄 알았는데, 유르.가 O. N.와 함께였다. 돔브롭스카야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은 음식을 가져왔는데, 보이카는 없었고, 고양이가 도망가 버렸다. 그러나 레비틴은 결국 티란이 내 손님으로 와 있을 때 나타났다. 그와 함께 공원을 거닐었다. 돌아와 보니 O. N.가 돔브롭스카야와 함께 와 있었다. 내가 저녁을 먹는 동안 기다려 주었다. 연장을 위해 애써야 할지, 그것이 이루어질지 모르겠다. 아침은 화사했는데. 저녁에는 비가 쏟아졌고, 음악회는 취소되었다.

탑(계속). 뱌치. 이바노프와 《예술의 세계》의 연결은 소모프, 박스트, 누벨, 그리고 나와의 개인적 우정에 있었다. 그런데 《예술의 세계》가 폐간된 뒤 예술세계파는 대체로 상징주의자들(《저울》, 《황금 양털》)과 합류했다. 다만 그들의 행동 노선은 전혀 달랐는데, 적어도 내게 가까운 그룹은 그러했다. 그들의 어느 정도의 “푸시킨주의”는 환쟁이 같은 화가로 보이기를 원하지 않고 사교계 인사가 되려 애쓰는 데 있었다. 지식, 감정, 열정, 모든 것이 가볍게, 예의범절의 한도 안에서. Sturm und Drang의 관점에서 보면, 아마도 꽤 속물적인 경향이다. 어쨌든 위대한 예술, 디오니소스주의, 신화 창조에 관한 밤샘 장광설을 늘어놓는 뱌치. 이브.는, 결국 스노브였던 예술세계파 같은 이들 사이에서는 꽤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그들을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했고, 그들은 그를 미식가처럼 음미했다. 어떻게든 우정은 유지되었으나 완전한 융합은 없었다. 짚어 둘 것은, 뱌치. 이브.의 “카오스들, 코스모스들”과 화가들의 “공허”에는 당파적인 과장이 있었다는 점이며, 어쩌면 그들은 서로에게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쉬었는지도 모른다.

7월 26~27일 (목요일·금요일)

내가 2주 더 머무르기로 결정이 났다. 어제는 어쩐지 그 결정에 무관심하고 조금 시큼한 기분으로 내 “집”을 그리워했는데, 오늘은 특히 안드르. 알.이 그 일을 맡은 뒤 내가 말란치코프에게 유르.에게 그 일을 전화하도록 부탁하고 나니 아주 기쁘고 즐거워졌다. 하긴 아침부터 다섯 시쯤까지 날씨도 내가 좋아하는 호화로운 여름날이었다. 26일 유르.가 두 번이나 나를 찾아왔다. 내 일기 속 몇몇 불평에 마음 상했고, 보긴스키와 티란이 산책하자고 불렀으며, 저녁에는 내가 조금 연주했다. 오늘 말란치코프가 사랑스러운 유로치카와 이야기했는데, 그는 다소 걱정하다가 이내 기뻐했다. 스테파노프에게 「송어」를 읽어 주고, 자고, 콘서트를 듣고, 저녁을 먹었다. 그러다 O. N.가 글라프. 빅트.와 함께 왔고, 그때 유로치카도 도착했다. 돈은 아직 없다. 불쌍하게도 사전을 잔뜩 가져왔다. 돈을 주었다. 내일 파블롭스크에 가자고 제안했다.

유로치카의 방. 내가 콜핀스카야에서 하룻밤을 묵었을 때, 유르.는 은은한 불빛을 마련해 두었다. 밝은 커튼이 드리운 네모난 방, 여름에 낯선 환경 속에서. 익숙지 않게 깨끗하다. 유르.가 옆에 있지만 낯선 곳, 창문에서 새어 드는 허연 빛과 가리어진 밤등. 잠이 오지 않아 자꾸만 유르.의 수집품 속 그 호프만의 방이 떠올랐다. 호프만이 병든(죽어 가는?) 여자의 침대 곁에 앉아 있는 방. 잊을 수 없는 그림이다. 아마도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호프만 자신의 그림인 그 그림은, 이상하게도, 발레리안이나 장뇌처럼, 어쩌면 죽음 자체처럼 따뜻하고 조용한 희망으로 가득하다. 나는 이미 자신을 죽어 가는 사람, 병든 사람으로 보고 상상하는 데 익숙해졌는데, 갑자기 잔인한 운명의 변덕으로 병들고 죽어 가는 쪽이 유르.이고 내가 앉아 그를 바라보게 된다면?!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주님께서 나를 그런 벌에서 구해 주실 것이다!

보랴와 엄마. 관리인의 아들은 우스울 만큼 아버지를 닮았다. 크지 않은 마른 금발 남자의 그 가느다란 이목구비, 교활하고 몽상적인 눈빛, 익살스러운 웃음기. 다만 수염이 없다. 지금 그는 봄보다 훨씬 작아 보인다. 내 창문은 욕실 창문과 비스듬한 각도로 마주하는데, 한번은 거기서 보랴의 약삭빠른 작은 얼굴이 쑥 내밀었다. 지금 살고 있는 아동원에서 어떻게 여기 왔느냐고 물었다. 엄마를 보러 가라고 보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여우 같은 얼굴에 가엾은 기색과 무언가 숨기는 기색이 스쳐 갔다. 나중에야 나는 그의 어머니가 아침에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나는 어쩐지 그의 목소리를 기억했다. 그 목소리에는 자기 감정을 내보이기 싫어하는 데서 오는 허위가 분명했다.

7월 28일 (토요일)

호화로운 아침도 12시쯤에는 결국 바람으로 바뀌더니 두 시에는 억수 같은 비가 되었다. 우리는 떠났다. 그러나 식당은 두 시까지 문을 닫아, 면도를 하고 산책을 나갔다. 모든 것이 지극히 부드러운 추억과 아름다운 풍경으로 가득하지만, 어째서인지 우리 다차를 허물어 버렸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그다음 점심을 먹었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 예의를 갖추어 주었지만 닭고기는 형편없이 질겼다. 베로치카와 시체르바초프를 보았다. 저녁에는 다시 비가 왔다. 아주 잘 다녀왔고, O. N.가 가지 않은 것은 유르. 쪽에서 몹시 세심한 처사였다. 저녁에는 우리에게 강연이 있었고, 나는 어두운 정원을 거닐었다. 안드르. 알렉.이 내게 마련해 줄지 아직 모르니까.

7월 29~30일 (일요일·월요일)

비가 왔지만 밤에는 조용한 달이 떴다. 그러나 비 오는 날씨에도 집은 어느 정도 풍요로운 모습을 갖추고 있다. 장미를 샀다. “Madame Caroline Tashtou” 한 송이. 30일 아침 술타노바의 방에서 「고집쟁이」와 「라자리」를 읽었다. 보긴스키가 말한다. “유르. 이브.가 당신을 찾고 있어요.” 그러다 비가 왔다. 멋진 점심. 모두 떠나는데, 휴양권은 마지못해 연장된다. 저녁에 다시 중국인들이 낭독했고, 쿠[지]미나가 노래했고, 니콜라이 드미트리예비치가 연주했다. 나타샤는 아이들을 두고 항의들을 한다고 단단히 기분이 상해 있다. 유르.는 저녁 식사 후에 왔다. 완전히 노란 하늘 아래 유쾌한 억수 같은 비가 쏟아졌고, 우리는 폴리카르포프와 장미에 관해 이야기했다. 아주 좋았다. 그다음 유르.의 집까지 걸어가 “나파레울리”를 마셨고, 그가 다정하게 나를 배웅했다. 집에서는 아직 자지 않고 있었다. 저녁 식사 전에 내가 합류했던 남편을 배웅하던 티란을 만났다.

사라토프의 집들. 처음에 우리는 메드베데프 집에 살았는데, 어딘가 페시카의 옛 성당 근처였다. 그들은 노교도들이었고, 일식이 있었을 때 수의를 입고 촛불을 켜고 세상 종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할머니는 만일을 대비해 달걀 한 체를 통째로 땅에 묻었는데, 이 모든 일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 뒤 우리는 아니치콥스카야로 이사했는데, 연병장과 경찰서장 아라포프의 집 근처였다. 펜자 지주들인 보디스코네 집이었다. 집은 비탈진 곳에 있었다. 안뜰과 거리 쪽에서는 메자닌이 딸린 단층이었다. 사과 과수원 쪽에서는 2층이었다. 거리 쪽의 1층과 정원 쪽의 2층을 우리가 차지했고, 정원 쪽 아래층에는 보디스코 본인이 살았다. 그녀는 (아마도) 펜자의 지주였고, 얼굴 윤곽이 날카롭고 눈빛이 불같은 작은 노파였다. 그녀는 인색함과 악의와 불길한 눈으로 유명했다. 어머니는 변변찮은 실내 화초들이 그녀의 칭찬을 받고 죽어 버리지 않도록 늘 그녀에게서 숨겼다. 기억하기로, 어느 겨울 소풍이 있었는데 그녀의 딸 토샤(페오파니야 레온티예프나)를 초대하지 않았다. 펠라게야 블라디미로브나는 우리 집에 와서 즐기고 있는 일행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온갖 재앙이 그들에게 닥치기를 빌었다. 그리고 정말로, 볼가강 건너에서 눈보라가 그들을 덮쳐 모두를 사방으로 흩어 버렸고, 누구는 길을 잃고 누구는 굴러떨어졌으며, 코와 귀와 손과 발에 동상을 입었다. 노파는 자신의 나쁜 평판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이용했다. 그녀는 무슨 몰다비아 여자였다. 페오파니야는 통통하고 작은 흑발 여자로, 통통하고 자그마한 손에, 버슬을 하고 흰 접은 칼라를 달았으며, 풍만하게 조인 가슴에는 로마 폐허 풍경이 담긴 모자이크 브로치를 가장 자주 달고 있었고, 앞머리를 내리고 시뇽을 높이 올렸다. 파피로스를 피우고 거의 늘 검은 옷을 입었는데, 이탈리아 여자처럼 보이리라 생각해서였다. 그녀는 보아하니 지참금이 없었고, 노파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녀를 치워 버리려 애써, 볼가강을 따라 아래로도 위로도 데리고 다니고, 여름에는 리페츠크의 광천에서 보내기도 했다. 그들의 형편은 기울어 있었고, 어머니는 인색했으며, 게다가 어딘가 근위 연대에 오빠가 있어 그들의 빈약한 수입이 모두 그의 생활비로 들어갔다. 마침내 신랑을 찾았는데, 어느 육군 중위 파블로프라는 자로 신부보다 한 살 반이 어렸다. 그는 머리털이 허옇고 얼굴이 붉었으며, 투박하고 쭈뼛거리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내 마음에 쏙 들었고, 나는 군복의 모직 천에 몸을 붙이고 그의 무릎에 앉아 있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나는 결혼식에서 성상을 드는 소년이었다. 사람들은 내 머리를 양처럼 곱슬곱슬하게 말고, 연노란 셔츠를 입혀, 신부와 함께 마차에 태워 데려갔다. 아낙네들은 모두 내가 어찌나 작은지 신기해했는데, 정말로 나는 네 살이 될까 말까 했다. 보디스코네 집이 비좁아서 결혼식은 우리 집에서 치렀고, 춤은 발코니에서 추었다. 신부는 모든 신부들처럼 생각에 잠겨 있었고 재미없었다. 거의 바로 다음 날 남편은 돈 문제로 속았다고 판단했고, 아내와 장모를 때리기 시작했다. 노파가 죽은 뒤에는 자기 beau-frere와 집 때문에 소송을 벌였고, 대체로 막돼먹은 인간이자 소송꾼으로 드러났다. 나는 누나들이 살던 메자닌을 아주 잘 기억하는데, 그곳에는 나를 들여보내지 않았다. 우리 하녀들인 “큰 안누시카”와 “개구리 안누시카”의 장난도 기억하는데, 그녀들은 솔에 시트와 가면을 씌워 울타리 너머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끄덕여 보이곤 했고, 결국 어느 상인이 썰매에서 내려 채찍으로 그녀들을 후려갈겼으며, 그동안 그의 마누라는 눈더미 속에서 겁에 질려 고함을 질렀다. 활인화들을 기억한다. 바랴가 간호사, 키 큰 김나지야 학생이 전장에서 죽어가는 병사로 나왔고 (그의 다리가 무대에 들어가지 않아 복도로 튀어나왔다), 아냐는 벨라를 죽이는 체르케스인 차림이었다. 나는 아냐가 그을린 코르크로 콧수염을 그린다고 말해 버렸고, 그 때문에 볼기를 맞았다. 형들이 저녁 식사 중에 유대인 이예블레프에게 겨자를 처발랐던 것을 기억하는데, 내게는 그것이 아주 우스웠지만 아버지는 몹시 화를 내며 자기 아이들이 그런 상것들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에는 거대하게 느껴졌던, 일렬로 이어진 방들을 기억한다. 창문이 두 개, 세 개씩 있었고, 그 창으로 정원과 아래 거리들 너머 볼가강이 보였는데, 때로는 강 건너 끝없는 초록 초원과 함께 (그 위로 구름 그림자가 옮겨 다닌다), 때로는 달빛에 잠겨, 언제나 멀리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와 함께였다. 불은 어머니가 피아노로 다섯 편의 오페라를 치던 홀과 서재에만 켜져 있었고, 응접실과 침실은 어두웠으며 달빛뿐이었다. 나는 거울 앞에서 어머니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거나, 이리저리 오가는 아버지를 쫓아다니며 등 뒤로 깍지 낀 그의 손을 찰싹찰싹 때렸는데, 그러다 그가 불시에 넓고 따뜻한 손바닥으로 나를 붙잡곤 했다. 이 불시의 순간, 더 정확히는 이 불시의 순간에 대한 기다림이 내게 그토록 달콤하게 작용해서 나는 자주 오줌을 지렸다. 다섯 편의 오페라는 「세비야의 이발사」, 「마탄의 사수」, 「빌헬름 텔」, 「안나 벨레나」, 「돈 후안」이었다. 때로 저녁 모임이 있을 때면 어머니는 늘 똑같은 왈츠, 폴카, 폴카-마주르카, 카드릴, 랑시에를 쳤다. 개를 쫓아냈다고 내가 현관 계단에 앉아 울고, 한 소년이 나를 달래던 것을 기억한다. “미하, 착하지, 울지 마, 귀여운 카바카는 또 올 거야.” 나는 내가 왜 울었는지, 소년이 왜 나를 달랬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개는 그 소년의 친구였고, 개를 쫓아낸 것은 내가 그 개를 무서워했기 때문이었다. 내 소원을 들어준 것이다. 나는 내 평안이 그에게 불쾌함을 준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울었고, 그는 이 일이 아직 되돌릴 수 있는 일이라고 나를 안심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 뒤 우리는 같은 아니치콥스카야의 라리오노프 집으로 이사했다.

7월 31일 (화요일)

마지막 날, 극단적인 조치가 취해지고 침대들이 치워진다. 나는 보아하니 남게 된다. 내 영감, 보그다노비치, 쿠지미나와 작별했다. 모두가 떠나자 날씨가 안정되었다. 술타노프 부부가 내게 앨범을 주었는데, 거기엔 20년도의 멋진 소모프가 마치 징표처럼 있다. 저녁에 우리에게 손님들이 왔다, 두마의 르제부스키 부부, 또 누군가, 아들과 […] 유리 니콜라예비치. 유르.는 계속 티란이 로르의 점원이었다고 장담한다. 그는 일찍 와서 우리 집에서 저녁을 먹었고, 그다음 내가 그를 역까지 배웅했다. 여기서 사람들은 우리한테만큼은 아주 다정하다. 멋진 날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