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탕트와 전략무기제한협상
두 초강대국은 왜 핵무기 경쟁을 멈추려 했고, 왜 결국 멈추지 못했는가?
데탕트(데탕트)와 전략무기제한협상(SALT)은 1969년부터 1979년까지 미국과 소련이 냉전의 긴장을 낮추고 핵무기 증강을 통제하려 한 10년간의 노력이다. 1960년대 후반 소련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에서 미국과의 전략적 균형에 도달하면서, 양측은 무한정한 군비경쟁보다 제한이 더 안전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닉슨과 브레즈네프가 1972년 모스크바에서 서명한 SALT I은 탄도미사일 방어체제(ABM)를 제한하는 조약과 공격용 미사일 발사대 숫자를 동결하는 잠정협정으로 이어졌다. 뒤이은 SALT II 협상은 블라디보스토크 합의(1974년)를 거쳐 1979년 빈에서 카터와 브레즈네프의 서명으로 정점에 도달했으나,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미국 상원 비준이 무산되며 데탕트는 종말을 맞았다.
균형에 다다랐는데, 더 위험해진 순간
1969년 11월 17일 헬싱키에서 처음 마주 앉은 두 대표단이 나눈 것은 누가 더 많은 미사일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미사일이 더 많아지는 것이 어째서 더 위험한지에 대한 합의였다. 그 합의가 가능해진 데는 한 가지 전제가 있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미국은 전략 폭격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했고, 소련은 그 간극을 좁히기 위해 공장을 야간 삼교대로 돌렸다. 1960년대 중반이 되자 소련이 미국을 따라잡았다는 사실이 워싱턴의 위성 사진으로 확인됐다. 미국의 ICBM 수는 1967년부터 1,054기로 고정된 반면, 소련 발사대는 해마다 수백 기씩 늘어나 1,600기를 넘보는 추세였다. 숫자만으로는 이제 아무도 일방적으로 이길 수 없는, 이른바 전략적 균형(strategic parity)의 시대가 온 것이다. 균형 그 자체는 안정의 근거였다. 상대가 먼저 치고 나와도 살아남은 쪽이 반격해 상대를 완전히 파괴할 수 있다는 확신, 즉 확증파괴의 논리가 두 초대국 사이에 처음으로 '작동하는 불쾌한 질서'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방어라는 이름의 흥정 재료, 그리고 동결이 감춘 불균형
SALT I은 처음부터 핵무기를 줄이자는 얘기가 아니었다. 닉슨 행정부가 1969년 봄 의회에 요구한 세이프가드 ABM 체계의 목적은, 키신저가 사적으로 인정했듯 '군사적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이었다. 그는 미사일 방어망을 소련의 공격용 미사일을 제한하게 만드는 흥정 재료로 보았고, 닉슨도 그랬다. 1969년 8월 상원에서 표결이 동수로 갈렸을 때 부통령 스피로 애그뉴의 캐스팅보트로 겨우 살아난 세이프가드 예산이야말로, 이 협상의 진짜 시작점이었다.
1970년 4월 미국이 내놓은 제안은 그 흥정의 산물이었다. 수도 방어(NCA) 하나만 남기는 최소한의 ABM 제한안을 던지면서, 닉슨과 키신저는 소련이 이를 거부할 것이라고 보았다. 거부하면 의회에 더 많은 세이프가드 기지를 요구할 명분이 서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련 대표단은 관심을 보였고, 8월에는 이 선택지를 확정했다. 멜빈 레어드 국방장관과 NSC 참모 헬무트 조넨펠트가 우려했듯, 소련이 최소안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이 새어나가면 세이프가드 확대를 밀어붙일 논리가 무너지는 상황이었다. 흥정 재료로 내민 방어망이 오히려 발목을 잡은 것이다.
협상은 1970년 가을부터 정체에 빠졌다. 걸림돌은 미국의 유럽 전진배치 체계, 즉 NATO에 깔린 전술핵 운반수단을 포괄 협정에 넣을지였다. 막힌 자리를 뚫은 것은 정식 대표단이 아니라, 키신저가 아나톨리 도브리닌 소련 대사와 유지하던 백악관 비밀 채널이었다. 제라드 스미스가 이끄는 헬싱키·빈 대표단이 문서를 한 조항 한 단어씩 다듬는 동안, 닉슨과 키신저는 정상회담의 '돌파구'라는 공을 백악관이 가져가려 애썼고, 이는 스미스 일행과의 관료적 알력으로 이어졌다.
1972년 5월 모스크바에서 맺어진 결과물은 정교한 타협이었다. ABM 조약은 양측에 기지 두 곳만 남기며 영토 전역 방어를 금지했는데, 이는 세이프가드의 원래 목적을 사실상 묻어버린 것이었다. 잠정협정은 공격용 미사일 발사대를 동결했지만, 그 숫자는 미국 ICBM 1,054기 대 소련 1,607기로 소련 쪽 우세를 그대로 법제화했다. 소련이 ICBM과 잠수함발사미사일 수에서 앞서는 상태를 얼려버린 대신, 미국은 MIRV 다탄두와 폭격기에서의 우위를 그대로 유지했다. 그래서 SALT I은 군비경쟁을 멈춘 협정이라기보다, 양측이 각자 유리한 분야의 우위를 지킨 채 서로 유리하지 않은 분야의 경쟁만을 얼린 거래였다. 방어를 금지하고 공격의 불균형을 받아들인 이 구조는, 이후 10년 데탕트가 풀어야 할 숙제를 미리 안고 있었던 셈이다.
핵전쟁 포기라는 초안이 무력하게 바뀌기까지
SALT II가 1972년 11월 제네바에서 열렸을 때, 방 안에서 양측은 전혀 다른 문제를 꺼내고 있었다. SALT I 잠정협정은 발사대의 숫자만 얼렸을 뿐, 한 발사대가 몇 개의 핵탄두를 싣는지는 얼리지 않았다. 소련은 더 크고 무거운 ICBM을 이미 갖고 있었고, 이제 그 큰 미사일에 MIRV를 얹기 시작했다. 숫자로는 뒤처진 미국은 정성적 우위, 곧 MIRV에서 앞서 있었지만, 소련이 그 격차를 따라잡으면 미국은 숫자에서도 질 뿐 아니라 화력에서도 지게 된다는 계산이었다. 그래서 미국 협상단이 처음 요구한 것은 어떤 신형 미사일도 기존보다 5퍼센트 이상 성능이 좋아서는 안 된다는 동결이었다. 소련은 이를 자신들의 현대화를 막으려는 속셈으로 읽었고, 교착은 이듬해 내내 풀리지 않았다.
이 막힌 협상 옆에서 별개의 문서가 움직이고 있었다. 1972년 모스크바 회담에서 소련 쪽이 먼저 내놓은 것은 핵무기의 첫사용을 서로 포기하자는 초안이었다. 키신저는 이것을 위험한 책략으로 읽었다. 소련은 재래식 전력에서 우세했으므로, 미국이 핵 선제사용까지 포기하면 나토의 전략, 곧 유럽 동맹국을 보호하는 확장억지는 무너진다. 그리고 두 나라가 서로를 향해 무력을 쓰지 않기로 선언하는 순간, 중국은 이것을 두려워하던 미소의 공모, 곧 제3의 핵보유국을 고립시키려는 공동 행동으로 볼 것이라고 그는 보았다. 영국 외교관 토머스 브리멜로의 도움으로 키신저는 반대 제안을 써냈고, 1년여의 협상 끝에 원안은 180도 뒤집혔다. 소련이 원했던 '무조건적 핵포기 선언'은 '우리의 목표는 평화이다'라는, 구속력이 거의 없는 문장으로 줄어들었다. 키신저 스스로도 그것이 '노력할 가치가 있는지' 의문이었고, 결과는 '미미하게 유용할 뿐'이라고 평했다.
1973년 6월 22일 워싱턴에서 서명된 핵전쟁 방지 협정은 이렇게 태어났다. 여덟 조항은 구속력이 없는 약속이 대부분이었고, 제4조가 정한 '위험할 때 긴급 협의'도 의무라기보다 의례였다. 그러나 양측이 건져낸 것은 서로 달랐다. 소련은 미국의 초강경 대표 없이도 협상이 정상회담에서 상징적 문서를 낳았다는 확인, 곧 초강대국 공동관리라는 인정을 얻었다. 키신저에게 이 문서는 다른 의미였는데, 그가 보기에 문안은 '소련이 나토나 중동을 공격하면 협정을 위반하는 것'이 되는 틀, 또 '소련의 중국 공격에 저항할 법적 근거'까지 부여해 주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상징은 컸고, 효력은 작았다. 협정은 그 해 나중의 중동전쟁에서 아무것도 막지 못했다.
'동수'라는 겉옷 아래 남긴 것, 그리고 무역이 이민을 만난 곳
블라디보스토크 합의의 핵심은 한 단어였다. '동수'(equality). 1974년 11월 23~24일 이틀 동안 포드와 브레즈네프가 소련 극동의 해군 휴양시설인 오케안스카야 요양소에서 정리한 틀은, 양측의 전략핵무기 운반수단(ICBM·SLBM·전략폭격기)을 각각 2,400기로 묶고 그 가운데 MIRV를 단 기체는 1,320기로 못박는 것이었다. SALT I이 소련에 더 많은 발사대(1,607 대 1,054)를 남긴 '불균형 동결'이었던 데 비해, 이번엔 양쪽에 똑같은 상한을 매긴 최초의 합의였다. 소련에게 이것은 진짜 양보였다. 도브리닌은 회고록에서 이를 '타협'이라 부르며 SALT I의 '주요 결함'이 사라졌다고 평했다. 그 결함이란 소련 쪽 숫자 우위였고, 그걸 포기하는 대가로 브레즈네프는 미국의 중(重)ICBM 감축 요구를 막아냈다. 그로미코가 전하듯, 미국이 서유럽과 동맹국에 둔 전진배치 체계(F-4, F-111, FB-111 등)와 트라이던트 잠수함, B-1 폭격기를 논의조차 거부하면서, 소련의 미사일을 반납하라는 요구는 애초에 성립할 수 없었다. 포드가 이 지점에서 물러선 덕분에 합의는 성사됐다.
문제는 '동수'라는 숫자가 감춘 비대칭이었다. 2,400기라는 총량은 전진배치 체계와 나토 동맹국의 핵을 아예 세지 않았고, MIRV라는 하위 한도는 이미 다탄두화를 다 끝낸 미국에 유리했다. 문서는 1974년 말 현재 미국 우위를 그대로 틀 안에 얼려 넣었고, 그래서 협상이 끝나는 순간부터 미국 국내에서는 '소련에게 너무 많이 줬다'는 비판이, 소련 군부에서는 '미국의 질적 우위를 못 막았다'는 불만이 동시에 자랐다. 키신저는 이 정상회담이 포드 임기 중 '유일하게 정부가 하나의 입장으로 나간 순간'이었다고 적었고, 동시에 'SALT에 대한 국내 공격은 계속될 것'이라 경고했다. 그 경고는 한 달여 뒤 현실이 됐지만, 발신지는 상원이 아니라 무역 법안이었다.
1975년 1월 3일 포드는 무역법에 잭슨-배닉 수정조항이 붙은 채로 서명했다. 이 조항은 이민을 제한하는 비시장경제 국가에 대해 최혜국 대우와 수출 신용을 거부하도록 한 것이었다. 법 제정의 직접 표적은 1972년 여름 소련이 도입한 '교육세'였다. 고등교육을 무료로 받은 이민 희망자에게 거액의 출국세를 물린 제도였던 것이다. 그 배후에는 유대인 이민 자유화를 원하는 미국 유대계 단체와, 데탕트 자체에 반대하며 인권을 무기로 삼은 헨리 잭슨 상원의원의 대권 야심이 있었다. 잭슨은 1974년 내내 키신저와 도브리닌을 상대로 삼자 교섭을 벌였고, 증언대로 키신저만이 세 당사자의 입장을 모두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결국 잭슨은 모호한 이민 확약 대신 명문의 법 조항을 얻는 쪽을 택했다.
모스크바의 반응은 즉각적이고 완전했다. 1975년 1월 10일 브레즈네프가 포드에게 보낸 공식 서한은, 의회 입법이 1972년 협정의 '조건 없는 차별 철폐' 원칙과 '상호 내정 불간섭' 원칙 모두에 반한다고 규정하고, 소련은 자신을 1972년 통상·금융 협정의 의무로부터 '해방된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민에 관한 '약속은 한 적 없다'는 다짐도 함께였다. 1월 13일 키신저는 1972년 통상협정이 당분간 발효될 수 없다고 공식 확인했다. 소련이 미국 무역에 사실상 기대할 것이 없어진 이상, 양보를 유지할 유인도 사라졌다. MGIMO 학술지의 유블류드와 일린이 정리하듯, 이 수정조항은 '고(高) 데탕트와 하강 국면'을 가르는 분수령이었고 2012년 마그니츠키 법으로 대체될 때까지 대러 정책의 지렛대로 남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두 초강대국이 숫자에 합의한 지 불과 40일, 그 합의를 떠받칠 정치적 완화가 자국 의회의 표결과 이민 통계라는 서로 다른 실재 앞에서 각각 무너진 것이다.
헬싱키가 낳은 고발자들, 그리고 인권이 핵협상을 삼킨 2년
헬싱키 최종의정서는 한 문서에 서로 모순된 두 약속을 담고 있었다. 첫째 '바스켓'은 국경의 불가침성을 명시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영토 질서, 곧 소련이 동유럽에서 챙긴 전리품을 국제적으로 확인해 주었고, 셋째 '바스켓'은 가족 재결합, 이주, 정보의 자유 같은 인권 조항을 실었다. 브레즈네프는 첫째를 얻으려고 셋째에 서명했다. 도브리닌의 회고에 따르면 브레즈네프는 전후 국경이 최종 확정되었다는 사실이 소련 국내에 알려질 때 얻을 선전 효과를 기대했다. 대신 그 문서는 반체제 운동의 선언문이 되었다. 1976년 5월 물리학자 유리 오를로프는 열한 명과 함께 '모스크바 헬싱키 그룹'을 세우고, 조약 문구 그대로 '소련 영토에서의 인도주의 조항 준수 여부를 감시하고 위반을 서명국들에 알리겠다'고 선언했다. 크렘린이 자랑스럽게 서명한 국제 문서가, 그 나라에서 처음으로, 정부를 상대로 외부에 고발할 법적 근거로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1977년 2월부터 체포가 시작되어 오를로프는 반소 선동죄로 징역 7년과 유형 5년을 선고받았고, 그해 가을까지 헬싱키 그룹 회원 50여 명이 자유를 잃었다.
바로 이 시점에 지미 카터가 대통령이 되었다. 카터는 두 가지를 동시에 원했다. 핵무기의 대폭 감축과, 자기가 세운 도덕적 외교의 상징으로서의 인권 압박이었다. 문제는 이 둘이 소련의 눈에는 하나로 보였다는 점이다. 카터는 취임 몇 달 뒤인 1977년 3월, 블라디보스토크 합의의 한도(운반수단 2,400기)를 무시하고 훨씬 깊은 감축안을 모스크바에 제시했다. 이전 대통령들과 달리 카터는 그 안을 소련에 먼저 전달하기도 전에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반스 국무장관이 그 안을 들고 모스크바에 갔을 때, 그로미코는 단호한 '녜트'로 거부했다. 소련 지도부는 수년간 쌓아 올린 블라디보스토크의 정교한 균형을 일방적으로 버리려는 시도로 읽었고, 여기에 카터가 사하로프에게 보낸 지지 서한과 인권 비판이 겹치며 내정간섭으로 받아들였다. 흥미로운 점은 이 거절이 카터를 움직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SALT II 서명은 1977년에서 1979년 6월로 2년이나 밀렸다.
그 2년은 사라진 시간이 아니었다. 소련은 SS-18 중ICBM을 계속 배치했고, 미국은 크루즈 미사일과 백파이어 폭격기 문제로 협상을 지연시켰다. 결국 1979년 6월 빈의 호프부르크 궁전에서 카터와 브레즈네프가 서명한 SALT II는 카터가 약속했던 '대폭 감축'이 아니라, 블라디보스토크 골격을 조금 다듬은 조약이었다. 한도는 2,400기에서 2,250기로 조금 낮아졌고, 타협 없는 핵심 쟁점(소련의 중ICBM 308기, 미국의 크루즈 미사일)은 그대로 남았다. 인권을 무기로 삼으려던 도덕적 개시는, 정작 그 인권 때문에 화가 난 상대방을 협상 테이블에서 두 번 물러나게 만들었고, 그 사이 양쪽 다 놓치고 싶지 않던 무기를 더 배치할 시간만 벌어주었다. 헬싱키가 크렘린에 준 국경의 선물은 반체제 인사들의 손에서 그 가치를 갉아먹는 서류가 되었고, 카터의 인권 외교는 핵협상을 2년 늦춤으로써 자신이 없애려던 무기 경쟁을 오히려 연장시켰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무너진 것은 조약이 아니라 신뢰였다
소련 지도부가 1979년 12월 아프가니스탄에 군대를 보낸 논리는 워싱턴이 말한 ‘침략’과 달랐다. 1978년 혁명 뒤 인민민주당 정권은 농촌의 무장봉기와 내부 분열에 시달렸고, 하피줄라 아민은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를 제거한 뒤 정적을 숙청했다. 모스크바에서 보면 국경의 우호적 사회주의 정권이 무너져 이슬람 반정부 세력이나 미국과 가까운 정권으로 대체될 위험이 현실적이었다. 소련 정치국 문서의 표현대로라면 목표는 장기 점령보다 정권을 안정시키고 아프가니스탄을 ‘우호적인’ 방향에 묶어 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판단은 아민 제거와 바브라크 카르말 옹립, 카불과 주요 교통로의 직접 장악으로 이어졌다. 아프간인의 정치적 자율성을 군사적 안정의 비용으로 지불하게 만든 선택이었고, 신속한 개입이라는 계획은 10년 전쟁으로 바뀌었다.
미국의 대응도 단순히 조약을 버린 것이 아니었다. 카터 행정부는 침공 전까지 소련이 군사 개입의 비용을 감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했고, 그 오판이 깨지자 사건을 유럽 밖의 지역분쟁이 아니라 페르시아만과 세계 세력균형에 대한 시험으로 재규정했다. 즈비그니에프 브레진스키는 강경 대응을 촉구했지만, 행정부 안에는 소련의 의도와 아프간 사태의 범위를 더 신중히 보려는 입장도 있었다. 1980년 1월 3일 상원의원 버드에게 보낸 서한에서 카터는 SALT II가 “미국과 전 세계의 국가안보 이익”에 여전히 부합한다고 썼다. 그는 비준을 철회한다고 선언한 것이 아니라, 의회와 행정부가 소련의 행동과 의도를 평가하고 위기 대응에 우선 집중할 수 있도록 심의를 연기해 달라고 했다.
이 구분은 중요하지만 정치적 효과를 되돌리지는 못했다. SALT II는 검증과 숫자 제한을 통해 상대의 핵전력을 관리하는 장치였으나, 아프가니스탄은 상대가 합의 바깥에서 어떤 위험을 감수할지를 묻는 사건이 되었다. 카터는 제재, 대소 곡물 공급 제한,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보이콧, 아프간 저항세력 지원을 결합해 침공의 비용을 높이려 했다. 소련은 철수를 압박하는 군사적·경제적 대가를 치렀고, 아프간 사회는 훨씬 더 큰 파괴와 난민 발생을 떠안았다. 양국은 1985년까지 SALT II의 한도를 대체로 지켰지만, 그것은 데탕트의 정치적 신뢰가 살아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핵전쟁을 피하려는 최소한의 이해가 남아 있었다는 뜻이었다. 조약은 서명되었으나 비준되지 않았고, 군비통제는 협력의 증거에서 적대 속 위험을 관리하는 임시 난간으로 변했다.
멈춘 것과 남겨진 것, SALT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SALT가 남긴 가장 확실한 합의는 핵무기를 없앴다는 약속이 아니라, 경쟁을 셀 수 있는 규칙으로 바꾸었다는 사실이다. 1972년 ABM 조약은 방어망을 무제한으로 늘려 상대의 보복능력을 무력화하려는 경쟁을 막았고, SALT I 잠정협정은 공격용 탄도미사일 발사대를 당시 수준에 묶었다. 1979년 SALT II는 더 나아가 1985년까지 양측의 전략 운반수단을 2,250기로 제한하고, MIRV 탄도미사일과 장거리 순항미사일을 탑재한 중폭격기의 합계를 1,320기로, MIRV 발사체 전체를 1,200기로, MIRV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대를 820기로 제한하려 했다. 조약은 국가기술수단, 곧 정찰위성에 의한 검증을 인정하고 이를 방해하는 고의적 은폐와 시험자료 차단을 금지했다. 상대가 무엇을 하는지 완전히 믿어서가 아니라, 믿지 않아도 감시하고 항의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군축과 같지 않았다. SALT II는 핵탄두의 총량을 없애지 않았고, 새 무기 개발을 전부 중단하지도 않았다. 미국은 트라이던트 체계를 지킬 수 있었고, 소련은 중형보다 훨씬 큰 SS-18 대륙간탄도미사일 308기를 보유할 수 있었다. 순항미사일과 소련의 백파이어 폭격기를 어느 범주로 셀 것인지는 끝까지 다투어졌다. 따라서 한쪽의 전략적 취약성을 줄이는 안정화 장치로 보면 성과였지만, 군사산업과 핵 억지 자체를 해체하려는 군축의 기준으로 보면 불충분했다.
SALT II의 법적 실패도 단순하지 않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뒤 지미 카터는 1980년 1월 3일 상원에 심의를 중단해 달라고 요청했고, 조약은 양국 어느 의회에서도 비준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미국과 소련은 조약의 목적을 좌절시키는 행동을 피하겠다고 각각 밝혔고,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도 1982년에는 상호 자제를 전제로 SALT의 틀을 훼손하지 않겠다고 했다. 미국은 1984년과 1985년에 소련의 위반을 주장했으며, 1986년에는 그 틀에 더 이상 구속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므로 ‘비준되지 않았지만 지켜졌다’는 평가는 일정 기간의 정치적 준수에는 맞지만, 완전한 법적 조약으로서 성공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 제한과 검증의 언어가 1991년 START I 협상으로 이어졌다는 점은, 제도가 실패와 계승을 동시에 남긴다는 것을 보여준다.
역사가들의 논쟁은 무엇을 성공으로 셀 것인가에서 갈린다. 안정성 중심의 해석은 ABM 제한과 검증 규칙이 오판과 선제공격의 유인을 낮추고, 적대적인 두 국가가 지속적인 연락망을 만들었다고 본다. 경쟁정책 중심의 해석은 양측이 협상을 통해 자기 무기체계의 유리한 부분을 보존하면서 상대의 선택지를 제한했다고 강조한다. 군축 중심의 비판은 숫자의 동결과 감축이 여전히 대량살상의 질서를 보존했다고 지적한다. 자료가 보여주는 결론은 셋 중 하나를 완전히 지우지 않는다. SALT는 핵 경쟁을 끝내지 못했지만 경쟁을 관리할 공동 문법을 만들었고, 그 문법은 정치적 신뢰가 사라지자 즉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도 함께 드러냈다.
조약은 끝났지만,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SALT가 남긴 것은 ‘핵무기를 줄였다’는 결말이 아니다. SALT I의 공격무기 잠정협정은 발사대 수를 동결했지만 탄두 수 자체를 줄이지 않았고, SALT II도 총 운반수단 2,250기와 MIRV 관련 하위 한도를 정했을 뿐 이미 배치된 무기를 해체하는 감축조약은 아니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합의가 실제로 정착시킨 것은 군축보다 상호 예측 가능성이었다. 양측은 상대의 국가 기술수단, 특히 정찰위성이 협정 준수 여부를 감시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고, 검증을 무력화할 은폐 조치를 피하기로 했다. 핵전력을 없애지는 못했지만, 상대가 무엇을 세고 어떻게 위반을 판단하는지에 관한 공통 규칙을 만든 것이다.
SALT II의 법적 지위는 이 성과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1979년 6월 18일 빈에서 서명했지만 미국 상원은 비준하지 않았고, 1980년 1월 카터가 심의를 중단시켰다. 그럼에도 카터와 브레즈네프, 이어서 레이건은 일정한 상호 자제를 정치적으로 약속했다. 미국 국무부의 당시 설명에 따르면 조약은 비준되지 않았어도 당사국은 조약의 대상과 목적을 좌절시키는 행위를 피할 의무가 있었고, 양측은 1985년까지 대체로 그 틀을 따랐다. 이 사실은 ‘실패한 조약’이라는 법적 판정과 ‘행동을 제약한 합의’라는 정치적 판정이 동시에 참일 수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무엇이 남았는지를 두고는 해석이 갈린다. 한 해석은 SALT가 ABM 방어 경쟁을 억제하고 검증 관행과 협상 언어를 제도화해 START로 가는 사다리를 놓았다고 본다. 다른 해석은 SALT의 숫자가 MIRV와 질적 현대화를 충분히 막지 못해 핵전력의 실질적 취약성을 보존했으며, 비준되지 않은 SALT II는 위기의 첫 충격에 견디지 못했다고 본다. 1984년 이후 미국 정부가 제기한 소련의 준수 위반 주장은 후자의 근거로 사용되었지만, 그 문서 자체도 정치적 입장에서 작성되었다. 핵심 쟁점은 위반 주장이 모두 허위였는가가 아니라, 복잡한 계수 규칙과 검증 자료를 둘러싼 분쟁을 협상 틀 안에서 관리할 제도가 충분했는가이다. 그러므로 역사가들이 비교적 합의하는 결론은 제한적이다. SALT는 경쟁을 끝내지 않았지만 경쟁을 읽고 지연시키는 규칙을 만들었고, 그 규칙은 데탕트가 무너진 뒤에도 다음 협상을 가능하게 했다. 반면 그것이 핵무기 경쟁을 ‘멈추게’ 했다고 말할 증거는 없다.
결과
SALT I은 ABM 조약과 잠정협정을 통해 양측의 전략무기 체계에 처음으로 국제법적 제한을 가했으며, ABM 조약은 2002년 미국이 탈퇴할 때까지 군비통제의 근간으로 유지되었다. SALT II는 비준되지 않았지만 양측은 1985년까지 그 조항을 사실상 준수했고, 그 협상 구조와 검증 체계는 이후 START(1991년)와 신START(2011년)로 이어졌다. 데탕트는 헬싱키 협정(1975년), 아폴로-소유즈 도킹(1975년), 미소 곡물 무역과 같은 경제·문화 협력도 낳았으나, 잭슨-배닉 수정조항이 보여주듯 인권을 둘러싼 근본적 대립을 해소하지는 못했다. 이 시대가 남긴 교훈은 군비통제가 정치적 긴장 완화 없이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이었으며, 1983년의 위기와 유럽 중거리미사일 배치 위기는 데탕트 붕괴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연표
- 1969.11.17SALT I 협상 개시
미국과 소련 대표단이 헬싱키에서 첫 전략무기제한협상을 시작했다. 미국 측 수석대표는 군비관리군축청장 제라드 스미스였다.
- 1972.05.26모스크바 정상회담: ABM 조약과 SALT I 잠정협정 서명
닉슨과 브레즈네프가 ABM 조약과 공격무기 잠정협정에 서명했다. 미국은 ICBM 발사대 1,054기, 소련은 1,607기로 동결되었으며 ABM 기지는 각 2곳으로 제한되었다.
- 1972.11.21SALT II 협상 시작
제네바에서 2단계 전략무기제한협상이 시작되었다. SALT I이 다루지 못한 MIRV(다탄두 개별목표재돌입체)와 전략폭격기가 핵심 의제가 되었다.
- 1973.06.21워싱턴 정상회담: 핵전쟁 방지 협정
브레즈네프의 답방에서 양측은 핵전쟁 방지 협정과 SALT II의 기본원칙에 서명했다. 닉슨의 '연계' 전략이 정점에 이른 순간이었다.
- 1974.11.24블라디보스토크 정상회담: SALT II 기본 틀 합의
포드와 브레즈네프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SALT II의 기본 틀에 합의했다. 전략핵무기 운반수단 총 2,400기 제한, 그 중 MIRV 탑재는 1,320기로 제한하는 내용이었다.
- 1975.01.03잭슨-배닉 수정조항 발효
미국의 대소 무역 관계를 소련의 이민 자유화와 연동하는 잭슨-배닉 수정조항이 발효되었다. 소련은 이 조항을 내정간섭으로 간주하고 1972년 체결된 미소 통상협정의 발효를 거부했다.
- 1975.08.01헬싱키 최종의정서 서명
유럽 35개국이 헬싱키에서 유럽안보협력회의 최종의정서에 서명했다. 국경의 불가침성과 인권 존중을 동시에 명시한 이 문서는 데탕트의 제도적 정점이었다.
- 1979.06.18빈 정상회담: SALT II 조약 서명
카터와 브레즈네프가 빈 호프부르크 궁전에서 SALT II에 서명했다. 운반수단 총 한도를 2,250기로 낮추고 MIRV 탑재 미사일과 중폭격기에 대한 세부 제한을 담았다.
- 1979.12.25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 진입했다. 이로써 데탕트는 사실상 종말을 맞았다.
- 1980.01.03카터, SALT II 비준 철회 요청
카터 대통령이 상원에 SALT II 비준 심의 중단을 요청했다. 양측은 1985년까지 조약을 사실상 준수했으며 이후 START 협상으로 이어졌다.
관련 인물 13명
지도부4
1972년 모스크바 회담에서 브레즈네프와 ABM 조약과 SALT I 잠정 협정에 서명했다.
링키지 전략의 설계자헨리 키신저1923–2023닉슨 행정부에서 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지내며 도브리닌과의 비밀 채널로 살트 I를 주도했다.
SALT와 데탕트의 소련 측 당사자레오니트 브레즈네프1906–1982핵전쟁 방지 협정의 최초 초안을 제안한 쪽이었다. 1973년 워싱턴 답방에서 닉슨과 이 협정과 SALT II 기본원칙에 서명했다.
살트 협상의 첫 발의자린든 B. 존슨1908–19731968년 7월 전략무기 제한 협상 시작에 합의했으며, 이는 닉슨이 이어받았다.
참여8
1979년 빈에서 브레즈네프와 SALT II에 서명했고, 아프가니스탄 침공 후 상원 심의를 철회했다.
소련 주미대사, 백악관 비밀 채널 상대아나톨리 도브리닌1919–2010키신저와의 비밀 대화로 SALT I 교착을 돌파했고, 닉슨-키신저는 이 채널을 통해 정상회담의 돌파구를 확보했다.
소련 외무장관, 블라디보스토크 회담의 소련 측 협상자안드레이 그로미코1909–1989포드와의 워싱턴 예비회담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 정상회담에서 중(重)ICBM 양보 문제를 놓고 브레즈네프 곁에서 미국 측 요구를 물리쳤다.
블라디보스토크 회담의 미국 대통령제럴드 포드1913–20061974년 11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브레즈네프를 만나 SALT II 기본 틀에 합의했다.
잭슨-배닉 수정안 공동 발의자헨리 M. 잭슨1912–19831974년 키신저, 도브리닌과 협상하고 1972년 무역 협정을 무산시켰다.
헬싱키 협정 감시 운동의 창시자유리 오를로프1924–20201976년 모스크바 헬싱키 그룹을 창설했고, 1977년 체포되어 징역 7년과 유배 5년을 선고받았다.
미국 측 수석 협상가제라드 스미스1914–1994미국 군축국장으로 SALT I 협상을 이끌었고, 회고록을 남겼다.
잭슨 수정안 하원 공동발의자찰스 배닉1913–2007수정안을 하원에서 공동 발의해 소련 유대인 이민 자유를 무역 조건으로 내걸었다.
관련 용어
출처: Raymond L. Garthoff, Détente and Confrontation: American-Soviet Relations from Nixon to Reagan, Brookings Institution, 1994U.S. Department of State, Office of the Historian, Milestones: 1969–1976, Strategic Arms Limitations Talks/Treaty (SALT) I and IIWilliam Burr (ed.), The Secret History of the ABM Treaty, 1969–1972, National Security Archive Electronic Briefing Book No. 60, 2001Arms Control Association, Fifty Years Ago, the First Strategic Arms Limitation Talks Began, November 2019Gerard C. Smith, Doubletalk: The Story of SALT I by the Chief American Negotiator, Doubleday, 1980Большая российская энциклопедия, Разрядка международной напряжённости, т. 2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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