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예멘 독립과 사회주의 국가의 변천
항구와 보호령으로 나뉘었던 남예멘은 어떻게 사회주의 국가가 됐으며 왜 북예멘과 통일했는가?
1967년 영국의 철수 뒤 남예멘은 독립국가가 됐다. 1969년 급진파의 부상과 1970년 인민민주공화국으로의 개편, 1978년 예멘사회당 창당은 사회주의 체제 형성의 주요 단계였다.
아덴과 내륙: 불균등한 식민지 유산
영국 지배 아래 아덴은 항구·급유·상업·군사기지의 도시로 성장했지만 내륙의 보호령들은 여러 술탄과 지역 지배자 아래 남아 있었다. 항구 노동운동과 농촌의 저항은 서로 다른 사회적 기반을 가졌다. 독립운동 내부에서도 민족해방전선(NLF)과 점령남예멘해방전선(FLOSY)이 주도권을 다퉜다. 반식민 운동의 승리가 어느 조직의 국가 건설로 이어질지는 독립 직전까지 갈등의 대상이었다. 근거 1 · 근거 2
1967년 독립과 1969년 급진파의 부상
1967년 11월 30일 영국 철수와 함께 남예멘인민공화국이 독립했다. 승리한 NLF는 옛 지배 가문과 보호령의 행정구획을 해체하며 중앙정부의 권한을 넓혔다. 1969년 6월에는 전선 내부의 급진파가 주도권을 잡았고, 1970년 국호가 예멘인민민주공화국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식민지에서 독립한 날과 사회주의 노선이 제도적으로 강화된 시기는 구분해야 한다. 근거 2 · 근거 1
토지·기업·항구: 국가 주도 경제의 범위
정부는 토지개혁과 은행·상업 부문의 국유화를 통해 국가와 협동조합의 역할을 확대했다. 그러나 모든 자산이 독립과 동시에 국유화된 것은 아니다. 아덴의 BP 정유시설은 1977년 협상을 통한 이전으로 국가 소유가 됐고, 농업과 소규모 생산에는 다른 소유 형태도 남았다. 국유화의 실제 범위와 시행 시점을 살펴야 국가 주도 경제의 구조가 드러난다. 근거 3
독립 직후에는 영국의 군사 지출과 지원이 사라지고 수에즈 운하 폐쇄로 아덴의 중계무역이 줄어 재정이 압박받았다. 새 정부의 경제적 어려움은 국유화 정책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출발 조건이었다. 소련·동유럽 및 중국과의 원조·군사 협력은 중요한 자원이 됐지만, 외부 지원이 협소한 국내 생산 기반과 외화 부족을 없애 주지는 못했다. 근거 1 · 근거 3
교육·의료·여성의 생활 변화
교육과 의료의 공공 제공, 노동·주거 정책, 여성의 교육·고용 참여 확대는 새 체제의 주요 사회정책이었다. 옛 지배 가문과 상인에게는 재산·지위의 상실이, 일부 노동자와 여성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는 변화였다. 제도의 목표와 지역별 접근성, 가정과 사회의 관행을 나누어 보아야 법적 변화가 모든 주민에게 같은 경험이었는지 평가할 수 있다. 근거 4
당의 통합과 지도부 갈등
살림 루바이 알리, 압둘 파타흐 이스마일, 알리 나시르 무함마드는 서로 다른 시기에 지도권을 행사했다. 1978년 예멘사회당의 결성은 당 조직을 통합했지만 지도부 간의 권력·정책 갈등을 해소하지 못했다. 1986년 1월 충돌은 당 지도부와 군을 갈라 대규모 인명 피해와 국외 도피를 낳았다. 이를 외부 강대국의 지시만으로 설명하면 국내의 인사권·지역 기반·정치적 연합 문제를 놓치게 된다. 근거 5 · 근거 6
1990년 통일: 국가의 종식과 남은 갈등
남북 예멘은 국경 충돌과 협상을 반복하면서도 통일을 공식 목표로 유지했다. 1980년대 말 남부의 내분 후유증과 경제적 압박, 소련권 변화가 겹치는 가운데 통합 협상이 진전됐고, 1990년 5월 22일 예멘공화국이 성립했다. 서로 다른 당·군·행정조직을 합치는 문제는 선언 뒤에도 남았다. 남예멘의 역사는 1990년에 별도 국가로서는 끝나지만 그 제도와 집단적 경험의 영향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근거 2 · 근거 7
회의장 총성: 선제 타격으로 시작된 1986년 1월의 내전
1985년 봄 압둘파타흐 이스마일이 모스크바 망명에서 돌아오자 예멘사회당의 균열은 회복 불가능해졌다. 알리 나시르 무함마드는 대통령 겸 당 서기장 자리를 지켰지만, 제3차 당대회 뒤 정치국 다수는 부통령 알리 안타르와 국방장관 살리흐 무슬리흐 카심 중심의 반대파(알투그마)로 넘어갔다. 알리 나시르는 새 중앙위원을 임명하는 정치국 회의 소집을 거부하며 “나는 이미 양보를 너무 많이 했다”고 선을 그었다. 1986년 1월 9일 정치국이 책임분담 결의 없이 흩어지자, 안타르는 13일 회의에서 구체안을 내고 알리 나시르가 거부하면 “권총을 꺼내 스스로 쏘겠다”고 레바논 공산당 서기장에게 말했다. 이 말은 몇 시간 안에 알리 나시르에게 전해졌다.
1월 13일 오전 10시 20분, 알리 나시르는 회의장에 나타나지 않은 채 자신의 경호원들이 반대파가 앉은 줄을 향해 기관총을 쏘게 했다. 부통령 안타르와 국방장관 카심, 당 기율위원장 알리 샤야 하디가 그 자리에서 사살됐다. 이스마일과 알비드는 탁자 밑으로 몸을 숨겨 살아남았고, 이스마일은 뒤에 실종된 채 사망 판정을 받았다. 알리 나시르는 오후에 ‘대통령 암살 미수자 4명을 처형했다’는 녹음방송을 내보냈지만, 그 가운데 두 명은 방송 시점에 아직 살아 있었고 재판도 없었다. 이 허위 방송이 결정타가 됐다.
선제 타격은 성급하게 준비된 것이었다. 알리 나시르는 해군과 공군 대부분을 확보했으나, 안타르가 키운 아덴 전차군단은 사흘쯤 뒤 지휘관 사살 소식을 듣고 반대파로 돌아섰다. 정보기관도 반대파 편이었다. 아덴에서 일주일 넘게 이어진 시가전에서 수천 명이 죽었고, 프레드 할리데이의 추산으로는 지도 간부의 절반가량이 목숨을 잃었다. 알리 나시르는 패배를 인정하고 지지자 수천 명과 함께 북예멘과 에티오피아로 달아났다. 북예멘의 알리 압둘라 살리흐는 우호적이던 그를 돕고 싶었지만, 1월 15일 밤 소련 대사가 “이것은 남예멘의 내정이며 개입하지 말라”고 경고하자 물러섰다. 승계 정부는 알비드가 당 서기장을, 하이다르 아부바크르 알아타스가 대통령을 맡아 통일까지 남예멘을 이끌었다. 할리데이가 지적했듯, 이 내전은 외부의 압력이 가장 약했던 시점에 자초한 참사였고, 좁은 지도부 안에서만 이뤄지던 정치가 개인적 앙금과 결합해 폭발한 것이었다.
석유가 나기 전에: 서두른 통일의 셈법과 그 대가
남쪽이 통일을 서두른 이유는 가장 구체적으로는 석유였다. 소련 탐사대는 남부 샤브와 지역에서 유전을 찾아냈고, 인근 북부 마리브 유전은 1984년에 이미 발견돼 있었다. 국경이 획정되지 않은 두 유전 사이의 땅을 두고 1988년 3월 양측은 군대를 집결시켰다. 4월과 5월의 정상회담에서 알리 압둘라 살레와 알리 살림 알비드는 5월 4일 협정을 맺어 마리브-샤브와 사이를 비무장 ‘중립지대’로 만들고 그 지대를 위한 합작 석유탐사회사를 세웠으며, 국민의 자유 왕래와 통일 기구의 재가동에 합의했다. 당내에서는 알비드가 ‘우리가 유산국이 되기 전에 통일을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고 정치국원 자랄라 오마르가 회고했다. 석유가 실제로 나면 남쪽은 혼자서도 버틸 힘을 갖게 되고 아덴을 걸프의 소국처럼 만들자는 목소리가 커질 것이라고, 그래서 그 전에 통일해야 한다는 계산이었다.
다른 한 축은 소련의 붕괴였다. 소련은 남예멘의 주된 원조국이었고, 1980년대 후반 그 후원이 사라질 조짐이 보이자 아덴의 지도부는 노출된 상태가 됐다. 북쪽의 살레도 마찬가지로 통일을 자신의 권력을 지키는 길로 봤다. 1989년 10월, 1972년 최초의 통일 합의 때부터 규정돼 있으면서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통일정치기구 합동위원회가 처음 소집됐고, 4주 뒤 아덴 정상회담에서 두 지도자는 1년 안에 통일을 끝내는 일정에 서명했다. 1981년부터 묵혀두었던 통일헌법 초안이 다시 꺼내져 양국 입법부의 비준과 국민투표를 거치기로 했다.
서두름의 값은 불균등하게 배분됐다. 인구는 북쪽이 약 1천2백만, 남쪽이 약 3백만이었고, 수도는 북쪽의 사나로 정해졌다. 1990년 5월 22일 예멘공화국이 선포되자 살레가 국가원수가 되고 알비드가 부통령이 됐으며, 남쪽은 석유가 주었을 지렛대를 미리 포기한 채 통합국가에 흡수됐다. 남쪽의 지도부가 ‘유산국이 되기 전에’ 잡은 이 거래는 1994년 내전으로 이어질 불균형을 처음부터 안고 있었다.
끝난 뒤에 남은 것: 무엇이 정착했고, 무엇이 정착하지 못했으며, 역사가들은 어디서 갈리는가
이 사건이 결정적으로 정착시킨 것은 국가의 형태가 아니라 국가가 하겠다고 약속한 일의 목록이었다. 1967년 이전 남예멘은 아덴 직할식민지와 20여 개의 술탄국·셰이크국으로 쪼개져 있었고, 영국은 25명의 술탄에게 1년에 약 5,400달러의 보조금을 주고 부족 구조를 그대로 두는 방식으로 지배했다. 독립 정부는 1967년 12월 11일 ‘봉건 세력과 영국 대리인의 토지’를 몰수하고 주를 6개 주로 재편해 옛 술탄국의 경계 자체를 무효화했다. 외국 은행·보험사 국유화, 토지개혁, 1974년 가족법(조혼·일부다처 금지), 그리고 지역에서 손꼽히는 문해율과 보편적 기초생활·의료·교육은 그 목록에서 나온 결과였다. 즉 남예멘 사회주의는 국가 건설과 겹쳐 있었고, 그 국가는 실제로 옛 보호령의 틀을 해체했다.
정착하지 못한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 당의 통일이 곧 지도부의 통일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1986년 1월 13일 중앙위원회 회의장에서 벌어진 총격과 그 뒤의 시가전으로 알리 아흐마드 나세르 안타르가 죽고 수천 명이 아덴을 떠났다. 이 사건은 파벌 대립이 정책 논쟁이 아니라 물리적 제거 경쟁이었음을 드러냈다. 둘째, 경제 기반이었다. 통일 전 남부는 사회주의라는 이름과 달리 혼합경제에 가까웠고, 1988년에도 노동력의 25퍼센트만이 국영기업에 고용되어 있었다. 석유는 1986년 말 샤브와에서 발견되었으나 생산은 통일 이후에야 본격화했고, 그 수입은 남부에 남지 않았다.
통일이 무엇을 정착시켰는가에 대해서는 당시의 평가와 결과가 어긋난다. 1990년 5월 22일 통일 직후의 분위기는 남부에서도 낙관적이었다. 30여 개 신당이 신문을 내고 1992년 총선을 준비했으며, 아덴과 사나 사이의 군 검문소가 거의 사라졌다는 관측도 있었다. 그러나 1993년 4월 27일 총선에서 예멘사회당은 301석 가운데 54석만 얻어 알리 압둘라 살레의 총인민대회당(122석)에 크게 뒤졌다. 남부는 인구의 6분의 1 규모였고, 옛 남부 군대와 북부 군대는 끝내 통합되지 않았다. 1994년 내전에서 남부 분리 세력이 패배한 뒤 7월 7일 북부군이 아덴을 점령했고, 오늘날 남부 활동가들은 그날을 ‘분노의 날’로 부른다. 알리 살림 알비드 등 예멘사회당 지도부는 망명했고, 2007년 여름 강제 퇴역 군인들의 시위에서 시작된 남부 운동(히라크)으로 갈등은 다시 표출됐다. 통일은 분단을 끝냈지만 남북의 정치적·경제적 위계를 남겨 두었다.
역사가들이 갈리는 지점은 두 축이다. 첫째, 남예멘을 ‘소련의 대리국’으로 볼 것인가, 독자적 혁명으로 볼 것인가. 프레드 핼리데이는 『혁명과 대외정책: 남예멘 1967-1987』(1990)에서 아덴의 집권 예멘사회당이 모스크바와 베이징 사이에서 자율적이고 때로는 성공적이지 못한 대외정책을 만들었다고 보았다. 그는 통일을 냉전 종식의 부산물로 보는 통설에 반대해, 1986년 당내 유혈 사태, 남북 국경 지대의 석유 발견, 사우디의 헤게모니 위협 같은 내부·지역 요인을 함께 놓았다. 반면 남예멘을 변호하는 연구자들은 1990년 이후 사나 정권이 옛 남부 통치의 흔적을 의도적으로 지웠고, 국제적 담론 변화가 사회주의 경험의 긍정적 측면을 억눌렀다고 지적한다. 둘째, 사회주의 국가의 성취와 억압을 어떻게 함께 셀 것인가. 문해율과 여성 권리의 진전을 문서로 확인하면서도, 1986년의 내부 숙청과 인권 침해를 같은 기록으로 확인해야 한다는 입장이 오늘날의 통설에 가깝다. 어느 쪽이든, 남예멘은 ‘성공한 혁명’ 또는 ‘실패한 실험’이라는 한 단어로 정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의견이 모인다.
결과
독립 정부는 옛 보호령의 지배구조를 해체하고 국유화·토지개혁·사회서비스를 추진했다. 예멘사회당의 권력 집중 속에서도 지도부의 지역적·정치적 갈등은 사라지지 않았고 1986년 유혈 충돌로 폭발했다. 대외 지원과 취약한 경제 기반의 문제는 1990년 통일의 배경이 됐지만 통일이 남북의 갈등을 곧바로 해소한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