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1941

소련-일본 국경 전쟁과 중립조약

일본 제국 육군은 왜 소련과의 두 차례 국경 전투에서 패배한 뒤 1941년 대소전에 가담하지 않았는가?

소련-일본 국경 전쟁은 1938년 하산 호 전투와 1939년 할힌골 전투를 중심으로 소련·몽골과 일본·만주국 사이에서 벌어진 무력 충돌이다. 발단은 만주국과 소련·몽골 사이의 경계선 해석 차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관동군북진론 세력이 소련의 군사력을 시험하려는 의도가 컸다. 하산 호에서는 일본군이 분쟁 지역을 일시 점령했으나 소련의 반격에 밀려 철수했고, 할힌골에서는 게오르기 주코프가 5만 7천의 병력과 500여 대의 전차를 동원해 1939년 8월 20일부터 31일까지 일본군 제23사단을 포위 섬멸했다. 이 패배로 일본 육군 내 북진론은 치명상을 입었고, 1941년 4월 13일 소련-일본 중립조약이 체결되었다. 그해 6월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을 때 일본은 중립조약을 존중해 참전하지 않았으며, 대신 남쪽으로 진로를 돌려 진주만 공격으로 이어졌다.

두 제국이 국경을 맞대기까지

두 제국 사이의 국경은 1932년 이전에도 이미 30년 가까이 움직이고 있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으로 남만주 철도와 랴오둥반도 조차권을 차지했고, 1906년 이를 지키기 위한 관동군이 뤼순에 창설되었다. 1910년 일본은 조선을 병합해 대륙으로의 발판을 마련했다.

러시아혁명 직후인 1918년, 일본은 시베리아 출병을 단행했다. 연합국의 명분은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구출이었으나, 일본 육군 참모본부의 실제 목표는 바이칼 호 이동의 시베리아를 분리해 독립된 완충국을 세우는 것이었다. 일본은 연합국 중 가장 많은 7만 2천의 병력을 파견했고, 1920년 다른 나라들이 철수한 뒤에도 블라디보스토크에 2년 더 주둔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지원한 백군 세력은 패배했고, 레닌이 조직한 완충국 극동공화국이 1922년 10월 블라디보스토크를 접수한 직후 소련에 합병되었다. 1,399명의 전사자를 내고도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실패는 일본 군부에 깊은 좌절감과 함께 소련에 대한 집요한 적대감을 남겼다.

1920년대 관동군은 도쿄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군대가 되어갔다. 1928년 관동군 장교들은 만주의 군벌 장쭤린을 폭살했고(황고둔 사건), 1931년 9월에는 류탸오후 사건을 조작해 만주 전역을 점령했다. 도쿄 정부는 이미 벌어진 일을 추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 불복종의 성공은 관동군을 더욱 대담하게 만들었다. 당시 일본 육군 내에서는 소련과의 충돌을 불사하고 시베리아로의 북진을 주장하는 북진론이 득세하고 있었고, 관동군은 그 최전선이었다.

한편 소련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1929년 중국 군벌 장쉐량이 중동철도를 장악하자, 스탈린은 바실리 블류헤르가 지휘하는 특별극동군을 신설해 15만 6천의 병력을 동원, 만주 국경에서 중국군을 격파하고 철도의 공동관리를 회복했다. 만주에 소련군이 얼마든지 진입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된 셈이었다. 이 전쟁 직후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자 스탈린의 대응은 신중했다. 1931년 가을 극동군 병력은 4만 1천에 불과했고,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유일한 보급로였다. 그는 「남의 땅은 한 뼘도 원하지 않지만 우리 땅은 한 치도 내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면서도 일본과의 직접 충돌을 피했다. 그러나 1932년 5월까지 극동군은 10만 5천으로, 12월에는 15만 2천으로 증강되었다.

그렇게 5,000km에 이르는 소련-만주국 국경은 두 개의 무장한 제국이 서로를 의심하며 마주보는 긴장선이 되었다. 국경선 자체도 제대로 획정된 적이 없었다. 1932년부터 1934년 사이에만 일본 측 집계로 152건의 국경 분쟁이 발생했다. 대규모 충돌은 시간문제였다.

충돌은 국경선에서 시작되었다

만주국 수립으로 일본과 소련 사이에는 약 5,000킬로미터에 달하는 새로운 국경이 생겨났다. 이 국경의 상당 구간은 표지도 없고 지도상으로도 모호했다. 1932년부터 1934년까지 관동군이 기록한 국경 분쟁만 152건이었다. 일본 측은 소련이 정보 수집 목적으로 만주국 내에 침투한 결과라고 주장했고, 소련 측은 1933년 한 해에만 일본의 국경 침범 15건, 영공 침입 6건, 간첩 밀입국 20건을 기록하며 맞섰다. 양측이 각자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는 땅에서 국경 수비대가 마주치는 일이 일상이 된 것이다.

첫 총격은 1935년 1월 8일 할하묘 사건에서 발생했다. 몽골-만주국 국경의 분쟁 어장 지대에서 몽골 인민군 기병 수십 명이 만주국군 초소를 공격해 일본인 군사고문 1명을 포함한 2명이 사망했다. 이 충돌을 시작으로 1939년 4월까지 일본 측 기록에만 108건의 무력 충돌이 이어졌다. 1935년 6월에는 한카 호 서쪽에서 일본 순찰대와 소련 기병이 처음으로 직접 교전했고, 10월에는 수이펀허 북쪽에서 소련군 50명이 일본-만주국 국경 경비대를 기관총으로 공격해 6명이 사망했다. 1936년 3월 타우란 사건에서는 몽골군과 소련군 100여 명이 분쟁 마을을 점거했고, 일본군은 경전차 10대를 동원한 400명의 병력으로 반격하여 몽골군 56명과 소련 군사고문 3명을 사살했다.

이 충돌들은 단순한 오인 사격이 아니었다. 일본 육군 내에는 북진론이라는 확고한 전략 구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만주와 시베리아를 일본의 세력권으로 삼아 소련을 공략해야 한다는 이 논리는 1931년부터 1934년까지 육군대신을 지낸 아라키 사다오 대장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아라키는 만주사변 당시 도쿄의 승인 없이 조선군을 만주로 진격시켰고, 관동군은 독자적 판단으로 국경을 넘나드는 작전을 일상화했다. 이시하라 간지와 같은 관동군 참모들은 소련과의 전면전을 염두에 두고 만주를 전략 기지로 개발했으며, 현지 부대 지휘관들은 소련의 군사적 반응을 시험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국경을 넘었다.

소련은 이 위협을 정확히 읽었다. 1935년 7월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일본을 '파시스트 적'으로 공개 규정한 것은 외교적 수사 이상이었다. 스탈린은 극동 방어를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1935년 극동군관구를 창설했으며, 태평양함대를 증강하고 콤소몰스크-나-아무레 군항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1936년 3월 12일 소련과 몽골인민공화국은 울란바토르에서 상호원조의정서에 서명했다. 10년 기한의 이 의정서는 양국 중 한쪽이 군사적 공격을 받을 경우 상대방이 군사력을 포함한 모든 지원을 제공할 수 있도록 규정했고, 이에 따라 소련군의 몽골 주둔이 시작되었다. 1937년 9월에는 이반 코네프가 지휘하는 제57특별소총병군단이 몽골에 배치되어 전차 265대, 장갑차 281대, 항공기 108문의 전력을 갖추게 된다.

일본의 대응은 1936년 11월 25일 독일과의 방공협정 체결로 이어졌다. 히로시 오시마 주독 무관과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협상한 이 협정에는 소련을 겨냥한 비밀 부속의정서가 포함되어 있었다. 만주국이라는 완충국을 사이에 둔 양대 제국은 이제 동맹을 통해 서로를 압박하는 구도로 접어들었다. 1935년 한 해에만 176건, 1936년에는 152건의 국경 충돌이 발생했고, 이제 그 충돌의 규모는 대대급 이상으로 확대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중국 전선, 시베리아 국경에 닿다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했을 때, 소련과 일본은 아직 국경에서 총을 겨누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 육군이 중국 본토 깊숙이 진격하는 동안 모스크바는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8월 21일, 소련은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와 중소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명목상의 불가침 조약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제트 작전」(Operation Zet)이라는 비밀 군사 원조 계획이 숨어 있었다.

그해 10월, 소련 지원 항공대 소속 I-16 전투기와 SB 폭격기들이 알마아타와 자바이칼을 거쳐 난징에 도착했다. 중국 공군의 가동기는 30대에 불과했고, 일본 항공대는 100대 이상의 편대로 난징을 폭격하고 있었다. 11월 22일 첫 교전에서 소련 조종사들은 일본 해군 항공대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저익단엽기」와 맞닥뜨렸다고 《아사히신문》이 보도할 만큼 충격을 주었다. 난징 방어전 동안 소련 조종사 니콜라이 니즈다노프가 최초로 전사했고, 이후 200명 이상의 소련 지원 항공대원이 중국 하늘에서 목숨을 잃었다.

중국에 대한 소련 지원 규모는 관동군에게 심각한 지정학적 압박이었다. 항공기 1,250대, 전차 82대, 군사고문 3,665명이 1937년부터 1941년까지 중국으로 흘러들어갔다. 소련은 일본과 국경을 맞댄 상태에서 일본의 적국을 무장시키고 있었고, 이는 만주국 변경의 관동군에게 두 개의 전선을 동시에 상대해야 한다는 압박으로 다가왔다.

이러한 긴장 속에서 1938년 6월 13일, 소련 극동 NKVD 책임자 겐리흐 류시코프가 만주국으로 망명했다. 국가보안 3등급 인민위원, 즉 소장급인 류시코프는 NKVD 역사상 최고위 망명자였다. 대숙청의 핵심 집행자였던 그는 자신에게도 체포의 칼날이 다가오자, 모스크바 소환 명령을 핑계로 국경을 넘었다.

일본 측이 류시코프에게서 얻은 정보는 충격적이었다. 관동군 참모부는 그간 소련 극동군과 자국의 전력비를 3:1로 추정했으나, 류시코프의 자료에 따르면 실제로 소련은 극동에 28개 사단을 즉시 투입할 수 있었고 유사시 31개에서 58개까지 증원이 가능했다. 당시 일본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9개 사단에 불과했다. 항공기는 소련 2,000대 대 일본 340대, 전차는 소련 1,900대 대 일본 170대였다. 전력비는 5:1을 넘었다. 일본 정보장교 고이즈미 고이치로는 훗날 "이 정보는 우리에게 예외적으로 귀중했다"고 기록하면서도 "이로 인해 기존의 대소 작전 계획은 사실상 실행 불가능해졌다"고 인정했다.

류시코프는 대숙청으로 인한 극동군 장교단의 붕괴 실태도 낱낱이 폭로했다. 그는 부임 11개월 동안 스스로 20만 명을 체포하고 7천 명을 사형에 처한 당사자였다. 일본 측은 이 정보를 바탕으로 두 가지 상반된 결론을 동시에 품게 되었다. 하나는 소련군이 수적으로 압도적이라는 불길한 현실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압도적인 군대의 지휘부가 숙청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는 유혹적인 약점이었다. 이 모순된 평가가 바로 한 달 뒤 벌어질 하산 호 전투의 배경이 된다.

도발, 전투, 그리고 원수의 말로

류시코프가 망명한 지 한 달 뒤, 1938년 7월 15일, NKVD 제1부인민위원 미하일 프리놉스키가 직접 이끄는 특별조가 자오제르나야 고지에 나타났다. 공식 임무는 류시코프 도주 경위 조사였으나, 프리놉스키는 자신의 수행원 몇 명에게 국경선을 넘어 만주국 쪽으로 들어가 참호를 파는 시늉을 하라고 구두로 지시했다. 이를 목격한 일본 헌병대가 다가와 작업 중단을 요구하자, 프리놉스키의 개인 명령을 받은 저격수 바실리 비네비틴 중위가 헌병 한 명의 머리를 쏘아 죽이고 다른 한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사체는 밧줄로 묶어 소련 쪽으로 끌고 왔다.

이 사실은 블류헤르 원수가 7월 24일 직접 파견한 조사위원회를 통해 드러났다. 위원회는 소련군이 판 참호 일부와 철조망이 실제 국경선 밖 만주국 영토에 설치되어 있으며, 충돌은 모스크바발 특별조가 의도적으로 유발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블류헤르는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국방인민위원에게 분쟁의 진짜 원인은 프리놉스키의 도발이라는 취지의 전문을 보내고, 비네비틴과 해당 구역 책임자의 즉각 체포를 요구했다. 모스크바의 응답은 '위원회 소동을 중단하고 일본군을 격퇴하라'는 것이었다.

전투는 7월 29일 일본군 제19사단이 자오제르나야와 베지먀나야 고지를 야간 기습으로 점령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소련군은 증원을 위해 달랑 비포장도로 하나에 의존해야 했고, 40소총사단 병사들은 제대로 된 지도도, 경우에 따라서는 소총조차 없이 전장에 도착했다. 7월 31일 보로실로프는 제1연해군과 태평양함대에 전투준비태세를 명령했고, 소련군은 T-26과 BT-7 전차 354대를 포함한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켰다.

8월 1일, 스탈린은 보로실로프의 집무실에서 블류헤르와 직통전화를 연결했다. 스탈린의 첫마디는 이랬다: "솔직히 말해보시오, 블류헤르 동지. 일본군과 진짜로 싸울 의사가 있소?" 블류헤르가 항공 폭격이 조선인 마을을 덮칠 것을 우려한다고 답하자, 스탈린은 "무슨 상관이오, 일본군이 우리 병사들을 떼로 죽이고 있는데 조선인 마을 따위가!"라고 쏘아붙였다. 이때부터 블류헤르의 지휘권은 형식적인 것이 되었다. 8월 3일, 감시역으로 파견된 레프 메흘리스가 모스크바에 블류헤르의 지휘 능력 부재를 보고했고, 그리고리 시테른이 실질적 작전지휘를 넘겨받았다.

소련군은 8월 6일 216대 폭격기와 45분간의 포병 준비사격 후 총공세에 나섰으나, 진흙탕과 늪지대에서의 전차 운용 미숙, 통신 두절, 지휘부의 혼선으로 공격은 지지부진했다. 8월 9일까지 소련군은 고지를 거의 탈환했지만, 8월 10일 시게미쓰 마모루 주소 대사가 평화 협상을 요청했을 때에도 두 고지는 여전히 일본군 수중에 있었다. 8월 11일 오후 1시 30분 정전이 발효되었고, 일본군이 철수한 후에야 소련군은 완전히 고지에 들어설 수 있었다. 소련 측 전사자는 960명, 부상자는 2,752명이었고 일본 측 전사 526명의 거의 두 배였다.

8월 31일, 보로실로프 주재로 열린 주군사평의회에는 스탈린, 몰로토프, 그리고 피고인석에 앉은 블류헤르 본인이 참석했다. 평의회는 극동전선의 전투 준비 태세가 '허용 불가능할 정도로 낮은 수준'이며 블류헤르의 지휘는 '의식적 패배주의에 접근한다'고 결론 내렸다. 9월 4일자 비밀명령 제0040호는 극동전선을 해체하고 블류헤르를 해임했다.

10월 22일, 블류헤르는 일본 간첩 혐의로 NKVD에 체포되었다. 레프 시바르츠만의 심문 아래 18일 동안 21차례의 신문을 받으면서도 자백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11월 9일, 구타로 인한 부상으로 사망했고 시신은 당일 화장되었다. 1989년 《이즈베스티야》가 그의 죽음의 실상을 처음 공개했고, 1956년 이미 복권되어 있었다. 프리놉스키는 이듬해인 1939년 4월에 체포되었고 비네비틴은 이미 8월 1일 야간에 귀환 중 암구호 오인으로 자군 초병에게 사살된 후였다. 하산의 진실에 접근했던 인물들은 한 명씩 사라져갔다.

목초지의 말떼가 전쟁이 되기까지 한 달

할힌골 전투의 시작은 소총 한 발도 아닌, 풀을 뜯으러 강을 건넌 말떼였다. 1939년 5월 11일 몽골 기병 70~90명이 할하 강 동쪽의 분쟁 지역에 들어가 말을 방목했고, 이 지역을 자국의 땅으로 보던 만주국군 기병이 이들을 쫓아냈다. 3일 뒤 몽골군이 더 큰 규모로 돌아오자 이번에는 관동군 제23사단의 야마가타 다케미쓰 대좌가 지휘하는 정찰 부대가 개입해 이들을 몰아냈다. 그런데 이 작은 충돌이 전쟁으로 번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관동군 작전 참모 쓰지 마사노부가 작성해 4월 25일 채택한 「국경방비요령」은 '필요시 소련 영토에 들어가거나 소련군을 만주 영토 안으로 유인해 싸워도 된다'고 명시한, 중앙의 불확대 방침을 정면으로 무시한 문서였다. 도쿄의 육군 중앙은 중일전쟁에 매달려 소련과의 새 전선을 원치 않았지만, 관동군은 사실상 자율적으로 움직이며 기정사실을 만들고 있었다. 5월 28일, 야마가타 부대를 앞장세운 관동군은 소련·몽골군을 포위하려 했으나 오히려 역습을 받아 아즈마 정찰대가 포위 섬멸되었고, 장교 8명과 병사 97명이 죽는 참패를 당했다. 정찰 부대 하나가 통째로 사라지자 그제야 양쪽 모두 증원에 들어갔다. 모스크바는 이 시점에서 지휘부 교체를 단행했다. 현지의 제57특별군단은 펙렌코 사단장이 지휘하고 있었는데, 5월의 혼란을 지켜본 참모본부는 그를 소환하고 작전국장 자하로프의 추천으로 게오르기 주코프를 보내기로 했다. 주코프는 6월 5일 현지에 도착해 전차 여단과 항공 부대를 묶은 제1군집단을 편성하고, 그와 함께 도착한 공군 부사령관 스무시케비치가 스페인과 중국에서 실전을 겪은 42명의 조종사(그중 17명은 소비에트 연방 영웅)를 이끌고 와 공중전의 판도까지 바꾸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주코프를 현지로 부른 것은 숫자가 아니라 판단이었다. 전투가 시작된 지 한 달 만에 양쪽 모두 '국경 분쟁'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시험하고 있었고, 이 시험을 끝낼 사람이 누구인지가 그 시점의 진짜 문제였다.

강을 건넌 공세와 사라진 퇴로

일본군의 7월 작전은 단순한 국경 초소 쟁탈전이 아니었다. 관동군 참모들은 할하 강 서쪽의 바인차간 고지를 차지하면 소련군을 강 동쪽으로 밀어내고, 남쪽의 다리를 끊어 전선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야스오카 마사오미가 지휘한 제1전차단은 남쪽에서 공격하고, 제23사단 보병은 북쪽에서 강을 건너 두 부대가 소련군의 뒤를 자르는 구상이었다. 일본 측의 계산에는 이유가 있었다. 만주국 쪽 철도와 도로가 소련의 철도 종점보다 전장에 가까웠고, 류시코프가 전한 대숙청의 정보는 붉은 군대 지휘부가 약해졌다는 믿음을 강화했다. 일본군은 자신들이 주도권을 쥐고 짧은 작전으로 국경선을 결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7월 2일 이 계산은 기갑전에서 무너졌다. 북쪽 부대가 바인차간을 점령했지만, 게오르기 주코프는 보병이 따라붙기를 기다리지 않고 전차와 장갑차를 세 방향에서 투입했다. 일본군은 대전차포가 부족해 화염병과 급조 폭약에 의존했고, 전차와 보병의 협동도 끊겼다. 제1전차단은 장비의 절반 이상을 잃고 7월 5일 강을 다시 건넜으며, 야스오카의 부대는 해산되고 지휘관도 교체되었다. 7월 23일부터 25일까지 일본군은 장거리 포격과 야간 침투로 다시 돌파를 시도했지만, 소련 포병의 사거리와 종심 방어를 넘지 못했다. 일본군은 7월 말까지 5천 명이 넘는 손실을 입었고 포탄도 크게 소모했다. 공격을 시작한 쪽이 방어로 밀려난 것이다.

주코프가 준비한 8월 공세의 핵심은 병력 숫자보다 보급과 기동의 결합이었다. 치타에서 약 600킬로미터 떨어진 전장까지 트럭 수천 대가 왕복하며 포탄 1만 8천 톤, 폭탄 6천5백 톤, 연료 1만5천 톤을 날랐다. 소련군은 무전과 차량 운행으로 증원 방향을 숨기고, 일본군이 자신들도 겨울 방어선을 파는 중이라고 믿게 했다. 8월 20일 중앙의 보병과 포병은 일본군을 붙잡아 두고, 양익의 전차와 기계화 부대는 상대적으로 약한 만주국 기병 쪽을 돌아 후방으로 나아갔다. 일본군 제23사단장 고마쓰바라 미치타로는 남쪽 위협에 대응하려 했지만 북쪽 전선의 압박 때문에 병력을 자유롭게 옮길 수 없었다. 8월 25일 양익이 연결되자 일본군은 전투에서 진 것만이 아니라 퇴로와 보급로를 함께 잃었다. 항복을 금한 교리는 포위된 병사들에게 탈출 대신 사망을 강요했고, 8월 31일까지 포위망 안의 부대는 소멸했다. 일본군이 이 패배를 단순한 국경 분쟁의 불운으로 돌리기 어려웠던 이유는 분명했다. 소련군은 먼 사막에서 보급을 조직하고, 전차와 항공기와 포병을 하나의 작전으로 묶어 일본군이 선택한 장소에서 일본군의 방식이 아닌 전쟁을 수행했다.

패배 뒤의 계산, 총보다 먼저 맺은 조약

할힌골 휴전은 일본이 단순히 한 전투를 졌다는 뜻이 아니었다. 관동군이 국경의 기정사실을 만들고 도쿄가 뒤늦게 추인하는 방식, 곧 현지 장교의 독단을 국가 전략으로 바꾸던 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판정이었다. 일본 육군의 북진론자들은 소련의 정치적 혼란과 극동의 고립을 이용하면 시베리아의 자원과 전략 공간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1939년 전투는 그 계산의 가격을 보여 주었다. 일본군은 전차와 포병의 열세를 보병의 돌격과 정신력으로 메우려 했고, 소련군은 포위와 지속적인 화력, 트럭으로 유지되는 보급을 결합했다. 일본군 지휘부가 얻은 결론은 소련이 무섭다는 감정이 아니라, 중국 전쟁을 계속하면서 북쪽 전쟁까지 감당할 산업·연료·수송력이 없다는 냉정한 판단이었다. 쓰지 마사노부조차 1941년 대소 공격에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할힌골의 화력 격차를 근거로 들었다.

그렇다고 일본이 평화를 선택한 것은 아니다. 북진론과 경쟁하던 남진론은 인도차이나와 동남아시아의 식민지, 특히 석유와 고무를 장악해 중국 전쟁과 제국의 연료 부족을 해결하자는 노선이었다. 남쪽으로 가면 미국·영국·네덜란드와 충돌할 위험이 커졌지만, 일본 지도자들에게 그것은 한 번에 자원을 확보할 수 있는 전쟁이었다. 반대로 소련 공격은 만주에서 긴 보급선을 늘리고, 1939년에 드러난 기갑·포병의 격차를 다시 감수하는 선택이었다. 독일이 1941년 6월 소련을 침공했을 때도 일본은 즉시 동맹 의무를 따르지 않았다. 중립조약은 제2조에서 한쪽이 제3국의 적대행위 대상이 되면 다른 쪽이 전쟁 동안 중립을 지킨다고 명시했다. 부속 공동선언은 소련이 만주국의 영토 보전을, 일본이 몽골인민공화국의 영토 보전을 존중한다고 적었다. 일본은 조약을 지키면서 소련의 동쪽 전선을 묶어 둘 정치적 명분을 잃게 했고,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미국과의 전쟁을 택했다.

소련의 계산도 대칭적이었다. 전쟁이 유럽에서 시작되자 스탈린은 두 전선을 피할 시간을 샀지만, 일본의 의도를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1941년 독일 침공 직후에도 극동 병력을 그대로 두었고, 일본이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정보 판단이 서고 나서야 서부로 정예 부대를 옮겼다. 따라서 이 조약은 신뢰의 문서라기보다 서로 다른 전쟁을 먼저 치르기 위한 임시 안전장치였다. 할힌골에서 일본이 치른 인명 손실과 작전 실패가 북쪽 선택의 신용을 무너뜨렸고, 조약의 문구와 남쪽의 자원 계산이 그 패배를 외교적 불개입으로 굳혔다. 일본은 소련과 싸우지 않았지만 평화를 택한 것이 아니라, 더 감당할 만하다고 본 다른 전쟁을 택한 것이다.

익은 감을 기다린다는 결정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일본의 선택지는 오히려 선명해지는 듯했다. 외상 마쓰오카 요스케는 독일의 승리가 소련 극동군을 묶어 둘 짧은 기회를 준다고 보았다. 그는 4월에 맺은 소련-일본 중립조약을 폐기하고 독일과 함께 북쪽에서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관동군과 육군 참모본부의 일부도 같은 계산을 했다. 할힌골에서 패배했지만, 이번에는 독일군이 서쪽에서 소련을 압박하므로 일본이 치를 비용이 줄어든다는 논리였다. 그들에게 북진은 단순한 영토 욕심이 아니라 만주국의 안전을 확보하고, 오래된 적을 제거해 일본 제국의 대륙 지배를 완성하는 기회였다.

그러나 6월 24일 육해군 회의의 결론은 즉시 참전이 아니었다. 육군은 관동군을 증강하고 대소전 준비를 진행하되, 해군이 요구한 남방 작전 준비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절충을 받아들였다. 이를 일본군 내부에서는 준비태세를 뜻하는 ‘준비진’으로 운용했다. 뒤이은 7월 2일 어전회의의 「정세의 추이에 따른 제국 국책요강」도 같은 모호함을 문서화했다. 일본은 남방으로 진출해 ‘자존자위’의 기반을 만들고, 영국과 미국이 막으면 전쟁할 준비를 하면서, 북방 문제는 ‘정세의 추이에 따라’ 해결한다고 했다. 즉 북진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조건부로 보류한 것이다. 이때 육군 참모본부가 쓴 감의 비유가 논쟁의 본질을 드러낸다. 소련이 독일에 결정적으로 무너져 감이 저절로 떨어지면 치고, 아직 푸른 감일 때는 공격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현실의 계산은 북쪽보다 남쪽이 더 급했다. 중국 전쟁은 병력과 물자를 계속 빨아들였고, 일본은 미국·영국·네덜란드의 제재 속에서 석유가 모자랐다. 소련 극동을 공격하면 국경의 장거리 보급전과 중국 전선이라는 두 전쟁을 동시에 떠안게 된다. 반대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동남아시아로 가면 석유와 고무를 장악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미국과 영국과의 전쟁을 부를 위험이 컸다.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이 중립조약을 당장 깨지 않은 이유는 소련을 신뢰해서가 아니라, 어느 한쪽의 승리를 확정할 정보도 자원도 없었기 때문이다. 7월 일본은 만주에서 관동군 특종연습을 시작해 병력을 모았지만, 그 동원 자체가 공격 명령은 아니었다. 독일의 신속한 승리는 오지 않았고 남방 자원 위기는 심해졌다. 따라서 할힌골의 기억은 조약을 존중하라는 도덕적 명령이 아니라, 불확실한 전쟁을 미루고 더 급한 자원 전쟁에 힘을 집중하라는 군사적 경고로 작동했다. 일본은 북진을 버린 것이 아니라 ‘익은 감’을 기다렸고, 끝내 그 감이 떨어지기 전에 남쪽에서 미국과 전쟁을 시작했다.

승리와 불개입 사이에 남은 것

이 국경전쟁이 확정한 것은 국경선의 최종 조약이 아니라 선택의 비용이었다. 1939년 9월 휴전 뒤 일본 육군은 소련군을 만주에서 몰아낼 수 있다는 관동군의 낙관을 더 이상 작전의 전제로 삼기 어려웠다. 할힌골은 일본식 보병 중심 교리와 짧은 결전의 기대가, 포병·전차·항공기와 장거리 보급을 결합한 소련군 앞에서 얼마나 비싼 패배로 바뀌는지 보여주었다. 그렇다고 북진론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은 아니다. 1941년 7월 2일 어전회의의 「정세의 추이에 따른 제국 국책요강」은 남방 진출을 결정하면서도 소련과의 전쟁 준비를 중단하지 않았다. 관동군은 관특연이라는 대규모 특별연습으로 북쪽 선택지를 실제 병력과 물자로 시험했다. 일본이 독일의 소련 침공 뒤에도 움직이지 않은 까닭은 단순히 조약을 믿었기 때문이 아니다. 4월 13일 조약 제2조는 제3국과 전쟁하는 상대방에 대해 중립을 약속했지만, 일본 지도부는 그 약속을 깨고 얻을 시베리아의 땅보다 중국 전쟁을 끝내지 못한 채 남방 자원을 확보해야 하는 현실을 더 급하게 계산했다. 1941년 6월 24일 육해군은 「당분간 독소전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합의했고, 12월에는 미국·영국·네덜란드 식민지로 향했다. 이 결정은 소련에 동부 국경의 시간을 주었지만, 모스크바 방어에 투입된 부대가 모두 시베리아 사단이었다는 통념은 과장이다. 이동 부대에는 극동과 시베리아의 여러 편제가 섞였고, 정보기관의 일본 불개입 판단이 병력 이동을 가능하게 한 중요한 조건이었다. 역사가들의 논쟁도 여기에 모인다. 한 해석은 할힌골의 참패가 북진론을 꺾고 남진론을 승리시켰다고 본다. 다른 해석은 유럽 전쟁의 전개, 미국의 석유 금수, 중국에서의 교착이 더 직접적인 원인이었으며, 일본은 1941년 여름에도 북진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남아 있는 기록이 말해주는 결론은 둘을 함께 붙드는 것이다. 할힌골은 소련과 싸우는 선택의 군사적 위험을 높였고, 자원 봉쇄와 중국 전쟁은 남쪽 선택을 강제했으며, 중립조약은 두 계산이 겹칠 수 있는 외교적 시간을 만들었다. 조약은 영구 평화를 보장하지 않았다. 소련은 1945년 4월 5일 파기를 통보했고, 8월 9일 대일전에 들어갔다. 따라서 이 전쟁의 결말은 일본이 소련을 적으로 인정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당장은 그 적과 싸우지 않는 편이 제국의 다른 전쟁을 계속할 수 있다는 냉정한 결론이었다.

결과

할힌골의 패배로 일본 육군 내 북진론은 붕괴하고 남진론이 득세했다. 1941년 4월 소련-일본 중립조약이 체결되어 양국은 제2차 세계대전 대부분의 기간 동안 상대방의 적국과 싸우면서도 서로와는 전쟁하지 않았다. 이 조약 덕분에 스탈린은 1941년 가을 시베리아 사단을 모스크바 방어에 투입할 수 있었다. 소련은 1945년 4월 5일 조약 파기를 통보하고 8월 9일 대일 선전포고를 했다. 할힌골에서 주코프가 처음 선보인 이중 포위 전술은 이후 스탈린그라드와 쿠르스크에서 독일군을 상대로 반복되었다.

연표

  1. 1932
    만주국 수립과 긴장의 시작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고 괴뢰국가 만주국을 세우면서 소련과 일본의 국경이 맞닿게 되었다. 1932년부터 1934년 사이에만 152건의 국경 분쟁이 발생했으며, 이후에도 국경 침범과 정찰이 끊이지 않았다.

  2. 1936.03
    소련-몽골 상호원조의정서

    소련과 몽골인민공화국이 상호원조의정서에 서명하여 소련군의 몽골 주둔이 가능해졌다. 일본은 이에 대응해 독일과 방공협정을 체결했다.

  3. 1937.07
    중일전쟁 발발과 소련의 중국 지원

    일본이 중국을 전면 침공하면서 중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소련은 1937년 10월부터 1939년 9월까지 중국에 전차 82대, 항공기 1,300여 대, 군사고문 3,665명을 파견하며 국민당 정부를 지원했다.

  4. 1938.06.13
    류시코프의 망명

    소련 극동 NKVD 책임자 겐리흐 류시코프가 대숙청을 피해 일본으로 망명했다. 류시코프는 소련 극동군의 취약한 상태와 장교단 숙청 규모에 관한 정보를 일본 측에 넘겼다.

  5. 1938.07.29
    하산 호 전투 개시

    일본군 제19사단이 소련-만주국-조선 국경의 자오제르나야 언덕을 점령했다. 8월 2일부터 9일까지 소련군 제39소총병군단이 반격했고, 8월 11일 휴전이 성립되었다. 소련군 792명 전사, 일본군 526명 전사.

  6. 1938.10.22
    블류헤르의 체포

    하산 호 전투에서의 혼란스러운 지휘를 이유로 극동전선 사령관 바실리 블류헤르 원수가 NKVD에 체포되었다. 블류헤르는 고문 끝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7. 1939.05.11
    할힌골 전투 발발

    몽골 기병 부대가 할하 강 동쪽 분쟁 지역에 들어갔다가 만주국군의 공격을 받았다. 5월 28일 관동군 정찰대가 소련-몽골군에 포위 섬멸되었고, 양측은 증원을 시작했다.

  8. 1939.06.05
    주코프의 부임

    게오르기 주코프가 제57특별군단 사령관으로 할힌골에 도착했다. 주코프는 전차여단과 항공부대를 포함한 제1군집단을 편성하고, 보급을 위해 2,600대의 트럭을 동원했다.

  9. 1939.07.02
    일본군의 7월 공세

    일본군 제23사단과 제1전차단이 할하 강을 건너 바인차간 고지를 점령했다. 주코프는 전차 450대로 반격하여 일본군을 강 건너로 밀어냈다. 일본 전차 44대가 파괴되거나 손상되었다.

  10. 1939.08.20
    주코프의 8월 대공세

    주코프는 57,000명의 병력과 498대의 전차, 557대의 항공기로 총공세를 개시했다. 중앙에서 보병과 포병이 일본군을 고정하는 동안 기갑부대가 양익을 포위하여 8월 25일까지 일본군 제23사단을 완전히 포위했다. 8월 31일 포위망 내 일본군이 전멸했다. 이 공세는 나치-소련 불가침조약 체결(8월 23일)과 정확히 시기를 맞추었다.

  11. 1939.09.16
    할힌골 휴전

    소련과 일본이 휴전에 합의했다. 소련군 전사 및 실종 9,703명, 일본군 전사 8,629명. 이 전투로 관동군의 독단적 작전은 도쿄의 신뢰를 상실했다.

  12. 1941.04.13
    소련-일본 중립조약 체결

    일본 외상 마쓰오카 요스케와 소련 외상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모스크바에서 중립조약에 서명했다. 스탈린은 직접 역까지 마중나가 마쓰오카를 배웅하는 이례적인 제스처를 보였다. 부속 선언에서 소련은 만주국의 영토 보전을, 일본은 몽골인민공화국의 영토 보전을 존중할 것을 약속했다.

  13. 1941.06.24
    일본, 대소전 불개입 결정

    독일의 소련 침공 이틀 후, 일본 육군과 해군은 「당분간 독소전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결의를 채택했다. 할힌골의 경험과 중립조약이 이 결정의 핵심 근거였다. 일본은 대신 남쪽으로 향했고, 12월 7일 진주만을 공격했다.

관련 인물 19명

지도부7

소련 최고지도자이오시프 스탈린1878–1953

1937년 류시코프를 극동으로 파견하기 전 15분간 직접 면담해 임무를 부여했다. 류시코프의 망명은 후일 예조프 해임의 주요 명분이 된 대형 정보 실패였다.

극동전선 사령관바실리 블류헤르1890–1938

하산 호에서 소련군을 지휘했으나, 프리놉스키의 도발을 조사한 것이 '패배주의'로 낙인찍혔다. 1938년 8월 31일 해임, 10월 22일 체포, 18일간 고문 끝에 11월 9일 사망.

극동전선 참모장 → 제1군 사령관그리고리 시테른1900–1941

블류헤르가 밀려난 뒤 하산 호에서 실질적 작전지휘를 맡아 8월 6일 총공세를 지휘했다. 명령 제0040호는 '시테른 동지의 능숙한 작전 지도'를 승인했다. 전후 제1독립붉은기군 사령관.

국방인민위원클리멘트 보로실로프1881–1969

국방인민위원으로서 7월 31일 전투준비태세 명령을 내렸고, 8월 31일 주군사평의회를 주재하여 블류헤르 해임과 극동전선 해체를 결정했다.

제57특별군단 사령관게오르기 주코프1896–1974

1939년 6월 5일 펙렌코를 대신해 할힌골 지휘를 맡아 제1군집단을 편성, 8월 대공세에서 이중 포위로 일본군 제23사단을 섬멸했다.

할힌골 전투의 일본 측 사단장고마쓰바라 미치타로1885–1940

제23보병사단을 이끌고 할힌골에서 싸웠으나 포위되어 패배했다.

제1전차군단장야스오카 마사오미1886–1948

7월 공세에서 전차군단을 이끌었으나, 장갑 절반 이상을 잃고 후퇴했다.

참여8

NKVD 극동 책임자·망명자겐리흐 류시코프1900–1945

1938년 6월 일본으로 망명, 소련 극동군 병력·배치·숙청 규모 정보를 제공했다. 소련군의 압도적 우세(5:1 이상)를 드러내 관동군의 대소 작전 계획을 무력화했다.

NKVD 수장니콜라이 예조프1895–1940

NKVD 수장으로서 류시코프를 비호했으나 그의 망명 후 책임을 지고 1938년 말 해임되었다.

국방부인민위원·붉은 군대 정치총국장, 하산 호 파견 대표레프 메흘리스1889–1953

프리놉스키와 함께 극동으로 파견되어 블류헤르를 감시했다. 8월 3일 모스크바에 블류헤르가 지휘 능력이 없다고 보고하여 블류헤르의 해임을 촉발시켰다.

NKVD 제1부인민위원미하일 프리놉스키1898–1940

NKVD 제1부인민위원. 1938년 7월 15일 자오제르나야에서 직접 저격수 비네비틴에게 만주 영토 내 일본 헌병 사살을 명령해 충돌을 촉발시켰다.

할힌골 사건을 도발한 관동군 참모쓰지 마사노부1902–1961

게코쿠조로 사건을 일으켰고, 1941년에는 화력 차이를 이유로 대소 불가침을 주장했다.

소련 원조의 수령자장제스1887–1975

중소 불가침 조약 이후 국민당 정부는 소련으로부터 무기와 항공기를 지원받았다.

할힌골 선임 기갑 지휘관니콜라이 펙렌코1901–1951

5월 패배 후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주코프로 교체되었다.

할힌골 공군 재건 지휘관야코프 스무시케비치1902–1941

42명의 에이스 조종사와 함께 도착해 초기 패전 후 공군을 재건했다.

관련 용어

출처: Stuart D. Goldman, Nomonhan, 1939: The Red Army's Victory That Shaped World War II (Naval Institute Press, 2012)Alvin D. Coox, Nomonhan: Japan Against Russia, 1939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0)Sherwood S. Cordier, 'World War II: Soviet and Japanese Forces Battle at Khalkhin Gol', World War II magazine, July 2003Boris Slavinsky, The Japanese-Soviet Neutrality Pact: A Diplomatic History 1941–1945 (Routledge, 2003)Grigoriy Krivosheev, Soviet Casualties and Combat Losses in the Twentieth Century (Greenhill Books,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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