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크말 이크라모비치 이크라모프

Акмаль Икрамович Икрам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즈베키스탄 1898–1938 ✕ 처형

우즈베크 공산당 최초의 우즈베크인 제1서기, 강제 집단화와 목화 단작을 이끈 뒤 대숙청에 희생된 인물

«나는 지금 발가벗겨진 인간 형상의 짐승이다.» 1938년 3월 제3차 모스크바 재판 최후 진술에서 이크라모프가 남긴 말로 전해지지만, 다른 사료에는 «너희가 나를 짐승으로 만들었다»는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어 정확한 문구는 확정되지 않았다.

타슈켄트의 우즈베크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8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해 내전기 투르키스탄에서 당 기관을 이끌었고, 1921~1922년 투르키스탄 공산당 중앙위 서기를 지냈다. 1922년부터 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에서 수학했으며, 1924~1925년 우즈베크 공산당 창당 조직국원을 맡았다. 1929년 제1서기가 되어 우즈베크인 최초로 이 직책에 올랐고 강제 집단화를 밀어붙여 우즈베키스탄을 소련의 주요 목화 공급지로 만들었다. 1934년 전연방 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1937년 해임되어 9월 20일 체포되었고, 1938년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총살되었다. 1957년 6월 완전히 복권되어 당적을 회복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민족 획정과 우즈베크 소비에트 공화국의 탄생

1920년대 초 투르키스탄 공산당 내에서는 중앙아시아의 미래를 둘러싼 노선 투쟁이 벌어졌다. 투라르 리스쿨로프가 이끄는 한 진영은 투르키스탄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라는 틀 안에서 범튀르크적 통합을 주장했고, 파이줄라 호자예프와 이크라모프가 이끄는 다른 진영은 중앙아시아를 개별 민족·지역 단위로 분할할 것을 주장했다. 모스크바의 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에서 수학하던 시절 이크라모프는 당내에서 투르키스탄의 문자 해득률을 높이고 학교를 세우는 운동을 벌이며 문화 사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24년 중앙아시아 민족 획정이 시작되면서 후자의 노선이 승리했다. 이크라모프는 우즈베크 공산당 창당 조직국의 일원으로서 새 공화국의 당 기반을 구축하는 핵심 역할을 맡았고, 1925년 1월 새로 세워진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타슈켄트 주당위 서기가 되었으며 한동안 잡지 『콤무니스트』의 책임 편집자도 지냈다. 이후 중앙위 제2서기를 거쳐 1929년 우즈베크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가 되었고, 1937년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 우즈베크인으로는 최초로 이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가 주도한 공화국 건설은 타슈켄트를 중심으로 한 영토적 통합뿐 아니라 당·국가 기구의 토착화를 수반했으며, 이는 이후 우즈베키스탄이 소련의 주요 목화 생산지로 변모하는 제도적 기초가 되었다. 1924년의 민족 획정은 오늘날까지도 중앙아시아의 국경을 규정하는 역사적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가 세운 우즈베크 공산당은 이후 강제 집단화와 반이슬람 캠페인을 현지에서 집행하는 도구로 기능했다.

집단화와 목화 단작에서 대숙청까지

집단화와 목화 단작

1929년부터 1937년까지 제1서기로서 이크라모프는 소련 우즈베키스탄의 실질적 정부 수반이었다. 그는 모스크바가 정한 스탈린의 정책에 따라 농업 집단화를 강제로 도입했고, 우즈베키스탄을 소련의 주요 목화 공급지로 만드는 결정을 집행했다. 1934년에는 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는데, 아시아 소수민족 출신으로는 유일한 중앙위원이었다.

이 시기의 이크라모프는 스탈린적 탄압의 대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집행자이기도 했다. 1937년 7월 30일자 소련 내무인민위원부 명령 제00447호로 만들어진 내무인민위원부 특별 삼인조에 들어갔고, 탄압에 적극 가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반종교·반이슬람 운동에서 그는 가장 큰 책임을 진 인물로 평가된다. 제1차 5개년 계획기에 반이슬람 조치의 구체적 설계를 주도했고 때로는 성직자 체포를 직접 지시하기도 했으며, 성직자와의 투쟁은 금지 조치가 아니라 광범한 당·조직 사업과 문화 계몽 사업을 통해 전개된다고 규정했다. 1930년에는 중앙아시아에 파견된 전임 제1서기 이사크 젤렌스키가 그를 축출하려 했으나 중앙위원회가 이크라모프를 지지하면서 실패했다.

대숙청과 제3차 모스크바 재판

1937년 2월 대숙청이 시작될 무렵 이크라모프는 니콜라이 부하린과 알렉세이 리코프의 운명을 결정한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 참여해 이들을 반역자로 규정하고 당과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반란을 도모했다고 비난하며 재판을 요구했다. 같은 해 6월에는 경쟁자였던 호자예프가 고발되어 해임되었다. 그럼에도 1937년 8월 2일 스탈린의 전보는 이크라모프가 주변의 반소비에트 요소들을 보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9월 8일 공개 비판을 받고 9월 10일 『프라우다』에서 고발되었으며, 9월 12일 당에서 제명되어 조사 대상이 되었고 9월 20일 체포되었다.

1938년 3월 제3차 모스크바 재판으로 불리는 반소비에트 우익·트로츠키주의자 블록 사건, 이른바 21인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 재판은 세 차례의 공개 모스크바 재판 가운데 마지막이었고, 피고들은 고문을 받아 자백을 강요당했다. 재판은 3월 2일부터 13일까지 진행되었으며 이크라모프는 21명의 피고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1923년부터 트로츠키주의자였다는 것, 1928년부터 우즈베키스탄 독립을 위한 비밀 민족주의 운동을 이끌었다는 것, 목화 생산 부족이 사보타주였다는 것, 영국 첩자였다는 것 등을 자백했다. 특히 1928년에 결성되었다고 주장된 민족주의 조직 밀리 이스티클랄(민족적 독립)의 지도자 가운데 하나였다는 진술이 핵심이었다.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고 다른 사료에 따르면 3월 15일에, 한 사료에 따르면 3월 13일 모스크바주 코무나르카 사격장에서 총살되었다. 재판의 기소 내용은 날조된 것으로 평가되며, 소련 대법원 전원회의는 이 사건의 판결이 구체적 증거로 뒷받침되지 않으며 자기비난이 기만과 협박, 심리적·육체적 폭력으로 얻어졌다고 인정했다.

복권 시점은 사료마다 다르다. 이크라모프의 전기 기사는 1957년 6월 완전히 복권되어 당적이 회복되었다고 기록하지만, 제3차 모스크바 재판을 다룬 다른 사료는 크레스틴스키, 이크라모프, 호자예프, 젤렌스키가 제22차 당대회 후인 1963년에 복권되었다고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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