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사하롭스키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Сахаро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9–1983 ○ 자연사

15년간 소련 대외정보를 지휘한 국가보안 간부

그가 소련 대외정보를 지휘한 15년은 소련·러시아 대외정보 역사상 가장 긴 재임이었다. 1955년 6월 대행으로 시작해 1956년 5월 총국장에 취임했고 1971년 7월 후임에게 자리를 넘겼다. 이 기록은 그의 중요성을 뒷받침하는 문서적 핵심이다.

1909년 9월 3일 코스트로마주 갈리치 예즈드 볼쇼예 오조기노 마을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83년 11월 12일 사망했고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되었다. 레닌그라드 조선소에서 용접공·선체 표시공으로 일하다 1930년 2월 당에 입당했고, 1939년 2월 국가보안기관에 들어가 레닌그라드 NKVD 수상부서를 거쳐 1940년 여객선 스바네티 부선장 신분으로 해외 정찰 활동을 했다. 전쟁 중 레닌그라드 NKVD/NKGB 제1(정찰)과장으로 정찰·파괴 공작조를 적 후방에 투입했고, 1946년부터 MGB 중앙기구와 루마니아 고문으로 근무했다. 1955년 6월 KGB 제1총국장 대행, 1956년 5월 총국장에 취임해 1971년 7월까지 소련 대외정보를 지휘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국가보안 기관과 대외정보 지휘부 (1939–1975)

레닌그라드와 대조국전쟁

1939년 2월 당의 추천으로 국가보안기관에 들어가 레닌그라드주 NKVD 수상부서에서 근무했고, 1940년에는 여객선 스바네티 부선장이라는 신분으로 7개월 넘게 지중해 연안 여러 나라를 돌며 정찰 활동을 했다. 1941년 8월 레닌그라드주 NKVD국에 제1(정찰)과가 신설되자 부과장이 되어 소령 계급을 받았고, 1942년 11월부터 과장을 맡았다. 임무는 적 후방에 투입할 정찰·파괴 공작조를 준비해 파견하고 독일군 침투조를 소탕하는 것이었으며, 전쟁 중 그가 관여해 전선 너머로 넘겨진 공작조는 40개를 넘었다. 레닌그라드 봉쇄 전 기간을 도시 안에서 보냈다.

전후 MGB와 루마니아 시기

1945년 모스크바의 MGB 중앙기구로 옮겨 라트비아·에스토니아·리투아니아 병합 과정에서 안드레이 비신스키를 지원했다. 이후 정보위원회 제2과장을 거쳐 루마니아 세쿠리타테 창설기의 MGB 고문으로 일했고, 루마니아 보안기관 조직에 참여해 미국·영국 정보망과 여러 지하 조직이 적발·해체되는 데 직접 관여했다. 1946년 9월부터 MGB 중앙기구에서 1953년까지 일곱 개 직책을 거쳤으며, 핀란드에 수개월간 파견되고 그리스·튀르키예·불가리아에서도 활동했다. 1949년 11월부터는 루마니아 주재 고문, 1950년 3월부터 선임 고문으로 근무했다. 이 시기 그는 내무부의 수석 소련 고문으로서 피고의 유죄를 밝히기 위해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라고 지시했고, 제오르제스쿠의 조사 중단 시도에 반대했다. 다만 퍼트러슈카누 사건에서 그의 역할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문서 기록이 남아 있다. 영어권 서술은 그가 퍼트러슈카누 심문을 책임졌다고 적는 반면, 루마니아 측 사료 연구는 그가 조사 재개를 압박하고 조사 종결을 거부한 수석 고문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두 기록을 합치지 않고 병기하며, 관련 정치국 회의록은 게오르기우데지의 지시로 파기되어 확정적 평가가 어렵다.

대외정보 지휘 15년 (1955–1971)

1955년 6월부터 약 1년간 KGB 제1총국장 대행을 지냈고 1956년 5월 총국장에 취임해 1971년 7월까지 소련 대외정보를 지휘했다. 대외 공작과 정보 수집, 비밀 공작원 관리, 정치·과학·기술 정보 수집을 총괄했으며 1959년부터 KGB 위원회 위원이었다. 재임 기간에 1956년 헝가리 봉기, 수에즈 위기, 베를린 위기, 쿠바 미사일 위기, 체코슬로바키아 사건이 일어났다. 같은 15년을 지휘한 인물은 소련·러시아 대외정보 역사상 없었다. 이 기간의 중요성은 문서로 확인되지만, 그를 '국제 테러의 아버지'로 부르는 표현은 기록된 사실이 아니라 1978년 망명한 루마니아 정보 장교 이온 미하이 파체파가 제기한 주장이다. 파체파는 그가 풀뿌리 테러를 반소 적대 세력에 대한 무기로 전환하고 팔레스타인 무장대원에게 항공기 납치·폭파 훈련을 시켰다며 시온 장로 의정서 같은 반유대주의 위조문서를 아랍어 선전지에 재수록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확인된 사실이 아니라 망명자의 주장으로 표시해야 한다.

만년과 죽음

1971년 7월부터 1975년 1월까지 KGB 의장 직속 고문단의 선임 고문으로 일했다. 1975년 2월 1일 뇌졸중으로 퇴직했고, 1983년 11월 12일 사망해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되었다. 레닌 훈장 3회를 비롯해 적기훈장, 노동적기훈장, 1급 조국전쟁훈장, 적성훈장, 명예휘장을 받았고 다수의 외국 훈장과 메달, 명예 국가보안요원 칭호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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