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크라를 함께 만든 여섯 사람 중 하나, 레닌과 갈라선 멘셰비키 이론가
10월 혁명을 목도한 포트레소프는 이렇게 썼다. "민주주의의 살해다." 그리고 볼셰비키가 세운 체제를 한마디로 규정했다. "바보들의 사회주의."
1900년 이스크라 창간 편집인 6인 중 한 명으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RSDLP)의 창립 세대다. 1903년 당 대회에서 마르토프 편에 서며 멘셰비키의 지도적 이론가가 되었고, 레닌의 전위당 모델에 맞서 대중정당을 주장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멘셰비키 방어파를 이끌었으며, 1917년 10월 혁명을 거부했다. 1919년 체카에 체포된 후 1925년 소련을 떠나 베를린과 파리에서 소비에트 체제 비판을 이어갔다.
경력 연표
- 1892–1896스트루베·마르토프의 사회민주주의 서클에서 활동, '노동해방' 그룹과 접촉
- 1896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 결성 참여
- 1897–1899체포되어 뱟카현으로 유형
- 1900–1903이스크라 창간 편집인 6인 중 한 명; 제2차 당대회 이후 멘셰비키 지도부
- 1905–1907귀국하여 멘셰비키 신문 『나찰로』『넵스키 골로스』 편집
- 1910–1914멘셰비키 청산파 기관지 『나샤 자랴』 편집, 4권짜리 『20세기 초 러시아 사회운동』 공동 편찬
- 1914–1917멘셰비키 방어파 지도자, 『나셰 델로』 발행
- 1925–1934베를린·파리 망명, 『사회민주주의자의 수기』 발행, 『환상의 포로』 저술
관련 역사 사건
정치사상: 청산주의에서 혁명 비판까지
포트레소프는 1905년 혁명 이후 멘셰비키 내에서 '청산주의'의 대표적 이론가로 자리잡았다. 그는 차르 체제 아래에서 불법 지하당 조직을 고수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보았고, 노동자 대중의 합법적 조직(노동조합, 협동조합, 두마 의회 활동, 공개 신문)을 통해 사회민주주의 운동을 재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0년 창간한 월간지 『나샤 자랴』는 이러한 입장의 핵심 매체였고, 이 잡지를 중심으로 모인 '자리스트' 그룹은 멘셰비키 주류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레닌의 전위당 모델을 '대중으로부터 유리된 음모 조직'이라고 비판했으며, 마르토프와도 당의 조직 원칙과 전술을 둘러싸고 논쟁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 포트레소프는 멘셰비키 방어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독일 제국주의가 전쟁의 주범이며, 협상국 측의 승리가 유럽 사회민주주의에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이는 치머발트 운동의 반전 국제주의 노선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입장이었다.
10월 혁명 이후 포트레소프는 볼셰비키 권력을 '민주주의의 살해'이자 '과두적 파벌의 전제'로 규정하며 철저히 거부했다. 1927년 파리에서 출간한 『환상의 포로』에서 그는 공식 멘셰비키 지도부와의 논쟁(멘셰비키가 혁명 이후에도 볼셰비키와의 화해와 연립을 모색한 것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전개했고, 소비에트 체제를 신착취계급의 지배로 분석했다. 1931년부터 사망 직전까지 발행한 계간지 『사회민주주의자의 수기』(23호까지 발간)에서는 사회주의 운동의 도덕적 권위 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제기하며, 수단과 목적의 일치 없는 정치운동은 스스로를 파괴한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