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그단 자하로비치 코불로프

Богдан Захарович Кобу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인 1904–1953 ✕ 처형

베리야의 가장 가까운 부관이자 카틴·민족이주의 집행자

메르쿨로프는 회고했다 — "베리야는 밤늦은 업무를 마친 뒤 언제나 코불로프만 데리고 집이나 다차로 향했다." 루뱐카의 그 누구보다 코불로프는 베리야의 사적인 영역에 속한 인물이었다.

트빌리시에서 아르메니아인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나 1925년 1월 당에 들어갔고, 1922년 그루지야 체카에서 보안 기관 경력을 시작했다. 1931년 베리야의 눈에 들어 그루지야 GPU 비밀정치부로 옮겨간 뒤 그루지야 내무인민위원 차석(1937–1938)과 NKVD 수사부장(1938–1939)을 지냈다. 1940년 폴란드군 장교·경찰 등을 사형에 처한 카틴 학살 3인조의 일원이었고, NKVD·NKGB 차석으로 체첸·인구시와 크림 타타르 등 민족 강제이주를 지휘했다. 1946년부터 해외 소련 재산 총국(GUSIMZ) 부국장, 1951년 10월부터 제1부국장이었고 1953년 3월 내무부 제1차관이 되었으나 6월 27일 베리야와 함께 체포되어 12월 23일 총살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베리야의 개인 고문사 — '코불리치'

베리야는 코불로프를 '코불리치'라고 다정하게 불렀고, NKVD의 그 누구보다 가까이 두었다. 코불로프는 육중한 체구(180kg에 달했다는 증언이 있다)의 소유자로, 심문실에서 주먹과 고무 곤봉으로 죄수를 때리고 전신으로 짓누르는 것을 즐겼다. 물리학자 야코프 테를레츠키는 1945년 루뱐카에서 '달걀형'의 코불로프를 목격하고 몸무게가 180kg은 넘었을 것이라고 기록했다. 베리야의 아들 세르고는 코불로프의 '크고 털 많은 손과 짧고 굽은 다리'를 회고하며 그가 본질적으로 '고문과 살인의 기계'였다고 평했다.

코불로프의 잔혹성은 단순한 폭력 이상이었다. 그는 피의자를 때리라는 베리야의 지시를 열성적으로 수행했고, 1930년대 후반 트빌리시에서 베리야의 지시로 그루지야 농업인민위원 마티카슈빌리를 직접 구타했다고 스스로 인정했다. 1953년 여름 심문 조서에서 코불로프는 이렇게 진술했다: '베리야의 지시로 나는 전 그루지야 농업인민위원이었던 체포된 마티카슈빌리를 구타하는 데 직접 참여했다.' 한 노바야 가제타 기사에 따르면, 그는 '주먹으로 때리고... 위로 뛰어올라 자신의 엄청난 체중으로 내리찍었으며, 가장 좋아하는 고문 도구는 곤봉이었다.' 한 심문 중에는 베리야에게 달려드는 피의자의 목을 맨손으로 꺾어 죽이기까지 했다.

영국 역사가 사이먼 시백 몬테피오레에 따르면, 코불로프는 메르쿨로프, 로도스, 베리야와 함께 원동군 사령관 바실리 블류헤르 원수를 고문한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블류헤르의 눈을 뽑아내는 데 가담했다고 전해진다. 헤로니모라는 암호명의 스페인 공화국 망명자는 코불로프에게 18개월 동안 심문당하며 '나를 의자에 묶고 고무 곤봉으로 때렸다'고 증언했다.

역설적이게도 코불로프는 자신의 행위가 언젠가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동료들은 그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훌쩍이곤 했으며, 언젠가 자신과 동료들이 저지른 모든 일에 대해 답해야 할 날이 올 것이라는 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전한다. 그 예감은 1953년 12월 23일, 그가 스스로 수많은 희생자들에게 내렸던 것과 똑같은 총살형으로 실현되었다.

베리야 사건과 최후: 체포, 재판, 처형

1953년 3월 스탈린 사후 내무부가 베리야 체제로 재편되면서 코불로프는 내무부 제1차관이 되었고, 6월 26일 크렘린에서 열린 당 중앙위원회 간부회의에서 베리야가 체포되었다. 사흘 뒤인 6월 29일 중앙위원회 간부회의 결정은 수사관 R. A. 루덴코에게 베리야 주변부의 적대적 반당 활동을 폭로하도록 지시하면서 코불로프 B.(그리고 코불로프 A.), 메시크, 사르키소프, 고글리제, 샤리야 등을 이름으로 지목했다.

베리야 사건 수사는 여섯 달 동안 진행되었다. 1953년 10월 12일 루덴코의 보고서는 피고 명단을 베리야, 메르쿨로프, 데카노조프, 코불로프 B. Z., 고글리제, 블로지미르스키, 메시크로 적었고, 별도로 44명의 공범이 따로 기소되었다. 이 가운데 여섯 명이 소련 최고재판소 특별재판부에 섰다. 이 재판부는 원수 I. S. 코네프가 주재하고 1953년 12월 18일부터 23일까지 심리했으며, 메르쿨로프, 데카노조프, 코불로프, 고글리제, 블로지미르스키, 메시크가 피고였다. 코불로프는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내무인민위원 제1차석을 지냈고 이후 소련 국가보안부 차관, 체포 직전에는 소련 내무부 차관이었다.

판결문은 피고들이 내무부를 이용해 권력을 장악할 목적으로 내무부를 당과 소련 정부에 맞세웠다고 인정했다. 또 베리야와 공범들이 '자신들의 범죄 활동을 은폐하고 위장하면서' 자신들의 폭로를 두려워한 사람들에게 테러적 보복을 가했고, 체포된 죄 없는 사람들을 직접 구타하고 고문했으며, 부하 NKVD·MVD 요원들에게 대규모 구타와 고문을 명령했다고 밝혔다.

피고 전원에게 사형이 선고되었고, 판결 당일인 1953년 12월 23일 21시 20분에 총살되었다. 베리야 자신은 그보다 앞서 P. F. 바티츠키 대장이 개인 화기로 처형했다. 사건 기록에서 코불로프와 아마야크 코불로프는 베리야의 가장 충실한 심복으로 묘사된다. 1953년 7월 8일 베리야의 전 비서실장 B. A. 류드비고프는 심문에서 코불로프가 '베리야의 피보호자로서 그에게 가장 헌신적이었고 그의 요구와 명령을 무조건 수행했다'고 진술했으며, 베리야가 그의 충성을 의심하지 않고 신뢰했다고 했다. 반면 코불로프 자신은 심문관들에게 베리야를 '출세주의자이자 모험가이며 보나파르트주의자'라고 말했고, 데카노조프는 그를 출세주의자이며 권세를 부리며 악의가 있고 배신과 복수심으로 특징지어지는 인간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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