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불가닌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улган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5–1975 ↓ 실각 1958

군복을 입은 총리, 흐루쇼프에게 밀려나다

1941년 서부전선. 독일 폭격기들이 모스크바로 날아가자 불가닌은 "왜 격추하지 않는 거요?"라고 소리쳤다. 지도에서 눈을 든 주코프는 "진정하시오,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여기서 쏘면 아군 진지가 폭격당하니 후방 부대에 맡기시오"라고 답했다.

체카에서 출발한 행정가로 모스크바 시 행정과 MELZ 공장장, 러시아연방 총리를 거쳐 스탈린의 신임을 얻었다. 1938년부터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국가은행을 맡았고, 전쟁 중에는 서부전선 등 여러 전선의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일했다. 1947년 11월 원수 계급을 받았으나 이는 열병식 사열관의 지위를 맞추기 위한 것이었고, 군사 전략가가 아니라 실무형 집행자로 평가되었다. 스탈린 사후 국방장관을 거쳐 1955년 총리가 되어 흐루쇼프와 'B&K'로 불리며 유고·인도·영국을 방문했다. 1957년 반당 그룹 사태에서 어느 편에도 확실히 서지 못한 채 패배했고, 1958년 총리직과 원수 계급을 잃었다. 1975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소련 정치국

1958.09 해임

관련 역사 사건

스탈린 체제의 집행자와 1937~1938년 대숙청

불가닌의 상승은 대숙청의 산물이었다. 1937년 7월 그는 다닐 술리모프가 체포된 직후 러시아연방 인민위원회 의장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10월 전원회의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서 정식 위원으로 옮겨졌다. 영어 위키백과는 그를 "충성스러운 스탈린주의자"로 규정하며, 1937~1938년 대숙청으로 다른 지도자들이 희생되는 가운데 빠르게 승진했다고 기록한다. 그 이전의 모스크바 진출도 같은 맥락에 놓인다. 그는 1918년 여름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지역 공산당 지도자 라자리 카가노비치와 함께 적색테러를 집행했고, 1920년 투르케스탄에서 다시 그와 함께 일했으며, 1931년 카가노비치가 모스크바 당 조직을 맡은 직후 모스크바 시 소비에트 의장이 되었다. 1938년 9월에는 각료회의 부의장과 국가은행 총재를 겸했다.

전쟁 중의 임무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된다. 영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그의 역할은 주코프 원수를 비롯한 실전 지휘관들이 스탈린을 위협할 만큼 강해지지 않도록 감시하는 것이었고, 첫 보직은 티모셴코 원수 휘하 서부전선의 수석 정치위원이었다. 1947년 3월 3일에는 군대를 지휘한 적 없는 민간 정치인이 국방부 장관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전후 군 통제를 유지하고 전쟁 중 부상한 인기 지휘관의 성장을 막으려는 스탈린의 의도와 연결된다.

레닌그라드 사건은 그가 정치국 차원의 심문에 직접 관여한 사례다. 1940년대 말~1950년대 초 레닌그라드와 연결된 당·국가 지도자들에 대한 재판에서 피고들은 당 내부의 '적대 집단' 결성, 파괴 활동, 부패 혐의로 기소되었다. 알렉세이 쿠즈네초프, 니콜라이 보즈네센스키, 미하일 로디오노프, 표트르 폽코프 등이 중심 인물이었고, 1947년 사형이 폐지되었음에도 1950년 9월 29~30일 사형을 선고받고 즉시 총살되었다. 스미르튜코프의 증언에 따르면 체포된 레닌그라드 지도자들을 심문한 것은 중앙위원회 직원들과 정치국 위원들이었고, 불가닌은 보즈네센스키의 동생인 알렉산드르 보즈네센스키를 직접 심문해야 했다. 불가닌 자신의 말로는 보즈네센스키가 달려들며 자신은 결백하다고, 이제 스탈린이 진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외쳤고, 불가닌은 그를 발로 차며 "탐보프 늑대가 네 친구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불가닌은 베리아와 말렌코프가 어두운 방 구석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고, 때리지 않았다면 자신이 옆 감방에 갔을 것이라고 해명했다. 알렉산드르 보즈네센스키(1898년 3월 5일~1950년 10월 28일)는 경제학자이자 1941~1947년 레닌그라드 국립대학 총장, 1948~1949년 러시아연방 교육부 장관이었으며, 1949년 8월 19일 체포되어 1950년 10월 28일 총살되었고 1954년 5월 14일 복권되었다. 처형 후 84세 노모를 포함한 가족도 탄압받았다. 사건 전체는 1954년 복권되었고 기소 내용 자체가 허구로 선언되었으며, 기소 책임은 국가보안부 장관 빅토르 아바쿠모프에게 돌려졌다. 역사가들은 말렌코프-베리아 그룹과의 충돌, 내부 '러시아당' 억제, 레닌그라드 지도부의 실제 부패 등 여러 원인을 제기해 왔으나 주요 문서가 여전히 비공개여서 사건의 원인과 경과에 대한 완전한 학술 연구는 아직 없다.

주코프 사건도 세 번째 축이다. 스미르튜코프는 전후 불가닌이 주코프와 존중하는 관계를 유지했다는 점이 그를 구해주지는 못했다고 말한다. 불가닌은 여느 때처럼 이의 없이 지도부의 의지를 수행했기 때문에 전후 주코프에 대한 괴롭힘에 가담했다. 스미르튜코프는 스탈린이 일상적 관리에서 물러나 있는 동안 불가닌이 베리아와 말렌코프의 지시를 수행했고 두 사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많은 해를 끼쳤다고 서술한다. 같은 증언자는 불가닌이 국가은행과 국방부처럼 성격이 다른 기관들을 무리 없이 이끌 수 있었던 것은 정치국 결정에 담긴 스탈린의 지시를 부하들에게 전달하고 그 엄격한 집행을 감시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스미르튜코프의 평가에 따르면 불가닌이 정치 무대에서 맡은 역할은 순종적인 집행자였고, 그 역할을 해낸 뒤 아무에게도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이는 한 참여자의 평가로서, 이미 기록에 있는 CIA 자료에 근거한 평가와 수도플라토프의 평가 옆에 놓인다.

반당 그룹과 몰락

스탈린 사후 불가닌은 흐루쇼프와 함께 'B&K'로 불리는 이인조를 이루었다. 1955년 말렌코프를 대신해 각료회의 의장에 오른 불가닌은 흐루쇼프와 함께 유고슬라비아·인도·영국을 공동 방문하며 해빙기 소련 외교의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1957년 6월 말렌코프·몰로토프·카가노비치 등이 흐루쇼프 축출을 시도한 '반당 그룹' 사태에서 불가닌은 이들의 편에 기울었다. 흐루쇼프는 주코프 원수의 도움으로 중앙위원회를 소집해 역전에 성공했고, 불가닌은 공개 자리에서 자신의 배신을 자백해야 했다. 한동안 자리를 지켰지만, 1957년 말 태국 방문 후 귀국 집회에서 불가닌이 흐루쇼프보다 더 큰 박수를 받자 두 사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이 무너졌다. 1958년 3월 불가닌은 총리직에서 해임되고 흐루쇼프가 직접 정부 수반을 겸하게 되었다. 불가닌은 국가은행 총재로 강등된 뒤 스타브로폴 지역 인민경제회의 의장으로 좌천되었고, 1958년 11월 원수 계급을 박탈당하고 상장군으로 격하되었다. 1960년 연금 생활에 들어갔고, 이후 모스크바에서 쓸쓸한 말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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