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앙드레 조제프 마리 드골

Charles de Gaulle
프랑스 국가기관 민족주의 프랑스 프랑스 1890–1970 ○ 자연사

패배 속에서 프랑스의 전쟁 지속을 선언한 국가 지도자

“희망은 사라져야 하는가? 패배는 endgült적인가? 아니다!”

샤를 드골은 프랑스의 군인·저항 지도자·정치가로, 1940년 패전 뒤에도 전쟁을 계속할 프랑스의 대표성을 자임했다. 런던에서 자유 프랑스를 조직해 비시 정권의 정통성 주장에 맞섰고, 해방 뒤에는 임시정부를 이끌며 국가 재건의 방향을 둘러싼 갈등을 드러냈다. 그는 강한 행정부와 국가적 자율성을 중시해 제5공화국을 세웠지만, 개인 권력과 식민지 전쟁을 둘러싼 긴장도 남겼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알제리 전쟁의 종결과 에비앙 협정

드골이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가장 시급한 과제는 알제리 전쟁을 끝내는 일이었다. 1958년 6월 총리에 오른 그는 곧바로 반란적인 공공안전위원회에서 모든 장교가 물러나도록 명령했고, 이는 피에누아르와 군부 지지자들의 격렬한 반발을 샀다. 1959년 9월 16일 그는 알제리의 민족자결 원칙을 인정하고, 독립 교섭의 상대로 민족해방전선(FLN)을 사실상 인정했다. 이어진 1961년 1월 8일 프랑스와 알제리 양측의 민족자결 국민투표가 그의 노선을 승인했고, 1960년 피에누아르 반란과 1961년 4월의 쿠데타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1962년 3월 18일 프랑스 정부와 알제리 공화국 임시정부는 에비앙레뱅에서 협정을 맺어 3월 19일 휴전을 선언했다. 협정은 정전과 포로 석방, 알제리의 완전한 주권과 민족자결권을 담았으나, 프랑스의 이해관계도 함께 보장했다. 프랑스군은 2년에 걸쳐 철수하되 메르스엘케비르 해군기지는 15년간 임차하고 사하라의 핵실험 시설도 유지할 수 있었다. 프랑스 기업에는 사하라 석유·광물 채굴에서 우선권이 주어졌고, 알제리인은 프랑스로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으나 프랑스 시민과 동등한 정치적 권리는 갖지 못했다. 드골이 산업·상업상의 우위와 사하라 석유 통제권을 유지하려 했다는 점에서, 이 협정은 독립의 조건을 둘러싼 불평등한 타협이었다. 1962년 4월 8일 프랑스 국민투표에서 약 91퍼센트가 협정을 승인했고, 7월 1일 알제리 국민투표에서도 압도적 다수가 독립을 택해 7월 3일 프랑스는 알제리 독립을 승인했다.

합의의 이행은 파리와 알제 양쪽의 저항에 부딪혔다. 극우 지하조직 OAS는 폭탄 테러와 1962년 8월 클라마르에서의 드골 암살 시도로 협상을 방해했다. 1962년 불과 몇 달 사이 90만 명에 이르는 피에누아르가 알제리를 떠났고, 7월 5일 이후 오랑 학살로 사망자가 나면서 탈출은 가속되었다. 프랑스군 보조로 복무한 무슬림(하르키)에 대한 광범위한 학살은 협정의 사면 조항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었다. 역사가 앨리스테어 혼은 100만에 달하던 유럽인 공동체의 대량 탈출로 3년 유예 조항이 사문화되었고, 알제리 측에서는 임시정부와 아흐메드 벤 벨라의 정치국 사이의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고 지적했다. 프랑스군의 전쟁 범죄를 모두 사면하는 포괄적 사면법은 1968년에야 통과되었다.

요컨대 드골은 알제리 전쟁을 끝내고 식민지의 독립을 승인함으로써 제4공화국을 무너뜨린 모순을 해소했지만, 협정이 보장한 프랑스의 경제·군사적 특권은 그대로 남았고, 알제리 민중이 겪은 폭력과 대량 이주, 그리고 프랑스군 범죄에 대한 불처벌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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