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전쟁의 장군·정치인, 1793년 오스트리아로 전향
1792년 발미와 즈마프의 승리로 혁명을 구했으나 1793년 3월 18일 네르빈덴에서 패배한 뒤 파리 진군을 기도했고, 국민공회가 보낸 위원들을 오스트리아에 인도한 뒤 전향했다. 그 전향은 지롱드파를 매장했다.
프랑스 혁명전쟁기의 장군·정치인. 왕정 시대 왕군 장교로 7년 전쟁에 참전하고 셰르부르 항만 책임자를 지냈다. 혁명 후 자코뱅 클럽에 가담했으며 지롱드파의 지지로 1792년 3월 외무장관이 되어 오스트리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주도하고 잠시 육군장관을 겸했다. 루이 16세와 갈등해 사임한 뒤 북부군 사령관으로 켈레르만과 함께 발미(1792년 9월 20일)에서 프로이센군을 물리치고 즈마프(1792년 11월 6일)에서 승리했다. 1793년 3월 18일 네르빈덴에서 패배한 뒤 파리 진군과 국민공회 해산, 1791년 헌법과 입헌군주정 복고를 기도했으나 군대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오스트리아 측으로 넘어갔다. 망명 생활 끝에 영국에서 사망했고 이름은 파리 개선문에 새겨졌다.
다른 이름: 샤를 프랑수아 뒤 페리에 뒤무리에
주요 활동과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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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2
프랑스 왕정 국가기관외무장관
외교·국제활동 -
1792–1793
프랑스 제1공화국 국가기관중부군·북부군 사령관대표
군사·지휘 -
군사·지휘
경력 연표
- 1739캉브레에서 출생. 출처에 따라 1월 25일·26일·27일로 생년월일 기록이 갈린다.
- 1792지롱드파 지지로 외무장관이 되어 오스트리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주도하고 잠시 육군장관을 지냈다.
- 1792북부군 사령관으로 발미(9월 20일)와 즈마프(11월 6일)에서 승리했다.
- 17933월 18일 네르빈덴에서 패배하고 4월 오스트리아 측으로 전향했다.
관련 역사 사건
망명과 영국 고문 활동 (1793~1823)
1793년 4월 오스트리아 측으로 넘어간 뒤 뒤무리에의 생애는 오랜 망명의 시기가 되었다. 그는 오스트리아군에 오래 머물지 않았고, 프랑스로 돌아가지 못한 채 유럽 여러 나라를 전전했다. 왕당파 망명 세력은 그를 입헌파라며 배척했고, 그는 프랑켄과 슈투트가르트 등지에서 배척당한 뒤 가명을 쓰고 스위스·이탈리아·영국을 옮겨 다녔으나 발각될 때마다 체류가 금지되었다. 결국 덴마크령이던 함부르크 인근 알토나에 정착했다.
그는 나폴레옹 통치기 내내 사면받지 못했다. 1799년 제1집정이 된 나폴로옹도, 1804년 황제가 된 뒤에도 그에 대한 추방령을 거두지 않았다. 1800년 그는 러시아로 가 차르 파벨 1세에게 복무를 제안했으나 성사되지 않았고, 그해 영국에 정착해 영국 정부로부터 고문의 대가로 연금을 받았다. 1803년 나폴레옹의 영국 침공 계획(불로뉴 진영) 시기에는 영국 방어와 관련된 활동을 했고, 1805년 프로이센, 1807년에는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4세와 접촉해 스웨덴군 지휘권까지 논의되었으나 틸지트 조약으로 무산되었다. 1808년에는 프랑스의 위협을 받던 포르투갈에 복무를 제안하고 에스파냐를 돌며 게릴라 체계를 전수했는데, 그가 제공한 지침은 《Pardidas de guerillas》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반나폴레옹 전쟁에서 게릴라들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고 전해진다.
1812년부터 1814년까지 그는 영국 총리 캐슬레이와 웰링턴 장군의 고문을 맡아 1814년 프랑스 침공을 앞두고 조언했다. 부르봉 왕정복고 뒤에는 웰링턴 고문 활동 때문에 루이 18세에게 귀국 허가를 거부당했고, 1814~1815년에는 원수 지휘봉을 얻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1822년 3월에는 리틀일링의 거처를 떠나 버킹엄셔의 튀르빌로 옮겼으며, 1823년 3월 14일 84세로 사망해 헨리온템스 교회에 묻혔다. 그의 전기 작가 장피에르 부아에 따르면 이 죽음은 일반의 무관심 속에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