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이

陈毅
중화인민공화국 국가기관 마오주의 중국 중국 1901.8.26.–1972.1.6. ○ 자연사

신4군과 제3야전군을 이끈 시인 원수, 저우언라이를 이은 외교부장

1936년 겨울, 부상과 병고 속에 매령에서 포위된 천이는 죽음을 각오한 시 세 수를 옷 속에 숨겨 두었다. 「이 몸은 황천으로 가 옛 부하를 모으리니, 십만 깃발로 염라대왕을 베리라.」

쓰촨 출신으로 프랑스 근공검학 뒤 입당했고 난창 봉기 잔여 부대를 주더와 함께 징강산으로 이끌었다. 대장정에 참여하지 않고 남방에서 3년 유격전을 버텼으며 1941년 완난 사변 뒤 신4군 대리군장이 되었다. 국공내전에서 화둥 야전군(제3야전군)을 지휘해 회하이 전역에 참전하고 상하이를 점령해 초대 시장이 되었다. 1955년 원수, 1958년 외교부장이 되어 반둥 노선의 아시아·아프리카 외교를 이끌었다. 문화대혁명에서 「2월 역류」로 비판받았고 1972년 암으로 사망했으며 마오가 장례에 참석했다.

다른 이름: 진의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상하이 시장 재임기: 금융 안정화와 ‘은원의 전투’

1949년 5월 28일 상하이시 인민정부가 성립하면서 천이가 초대 시장이 되었다. 입성에 앞서 그는 ‘군대는 민가에 들어가지 않는다’(軍隊不入民宅)는 규율을 내세워, 무장 점령보다 도시 행정과 경제 운영의 인수를 과제로 세웠다. 그러나 상하이가 안고 있던 문제는 점령보다 컸다.

당시 상하이에는 이미 폐지된 금원권이 넘쳐났고, 시장에서는 은원(銀元)과 금, 외화가 사실상의 지불 수단이 되어 있었다. 1949년 5월 28일 군사관리위원회는 인민폐를 유일한 합법 통화로 선포하고 6월 5일 이후 금원권 유통을 금지했으며, 인민폐와 금원권을 1대 10만의 비율로 교환했다. 소액권을 가진 인력거꾼과 행상들의 사정을 고려해 부시장 쩡산이 시장 천이에게 보고해 최소 액면 제한을 완화하도록 한 것도 이때의 일이다.

문제는 은원이었다. 1949년 6월 1일부터 10일 사이 은원 암시장 가격은 세 배로 뛰었고, 정점에서는 인민폐가 도매시장에서 거부되거나 부분적으로만 통용되었다. 6월 7일 천이는 덩샤오핑, 류보청, 라오수스 등과 함께한 화둥국 회의에서 은원 투기의 본거지인 상하이증권교역소를 봉쇄하기로 결정하고 전화로 중공중앙에 보고했으며, 12시간 만에 마오쩌둥의 동의를 받아냈다. 6월 10일 새벽 실행된 조치로 2,100명이 조사를 받았고 그중 238명의 주요 투기 혐의자가 구금되었다. 이튿날 은원 시세는 인민폐 2,000원에서 1,200원으로 폭락하고 쌀값도 한 할가량 내렸다.

통화 투기를 잠재운 뒤에도 투기 자금은 쌀과 면사, 석탄으로 옮겨붙어 물가를 다시 끌어올렸다. 이른바 ‘양백일흑’(두 가지 흰 것과 한 가지 검은 것: 쌀, 면사, 석탄) 전투였다. 이 국면에서 시장 천이의 정무적 권위와 중앙재경위원회 주임 천윈의 시장 개입 수단이 결합해 물가를 진정시켰다. 1949년 여름 상하이의 이 같은 경험은 도시를 군사적으로 점령하는 일과 도시 경제를 운영하는 일이 서로 다른 과제임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