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츠담 회담 도중에 처칠을 대체해 등장한, 말수 적은 전후 개혁의 설계자
1945년 선거 승리 후 버킹엄궁에서 조지 6세를 만난 애틀리는 침묵을 깨며 "제가 선거에서 이겼습니다"라고 말했고, 왕은 "압니다. 6시 뉴스에서 들었습니다"라고 답했다.
클레멘트 애틀리는 1945년 포츠담 회담 도중 노동당의 압승으로 윈스턴 처칠을 대신해 영국 총리가 된 인물이다. 전시 연립내각에서 부총리로 처칠을 보좌했으나, 유권자들은 전쟁 영웅 대신 복지국가를 약속한 무채색의 그를 선택했다. 그의 정부는 국민보건서비스(NHS)를 창설하고 주요 산업을 국유화했으며 인도와 파키스탄의 독립을 단행해 대영제국의 해체를 시작했다. 대외적으로는 마셜 플랜과 NATO 창설을 주도하며 미국 편에 서서 냉전의 초기 윤곽을 그렸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45–1951 정부·행정 · 영국 국가기관
- 1935–1955 정치·당 지도 · 영국 노동당
경력 연표
- 1935–1955노동당 당수
- 1940–1942국새상서 (전시 연립내각)
- 1942–1945부총리 (전시 연립내각)
- 1945–1951영국 총리
- 1951–1955야당 당수
관련 역사 사건
이스트엔드의 빈곤과 사회주의 입문
애틀리는 옥스퍼드에서 근대사를 전공하고 1906년 이너 템플에서 변호사 자격을 얻었으나, 그해 런던 이스트엔드 스테프니의 헤일베리 하우스에서 노동계급 소년들을 위한 자선 클럽의 자원봉사자로 일하면서 진로가 바뀌었다. 1907년부터 1909년까지 그 클럽의 관리자를 맡으며 빈민가 아동들이 처한 빈곤과 결핍을 직접 목격한 그는, 사적 자선만으로는 빈곤을 완화할 수 없고 국가에 의한 직접 행동과 소득 재분배만이 실질적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 경험이 그를 사회주의로 전향시키는 과정의 출발점이었다. 1908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그는 법률 경력을 포기하고 정치와 사회사업에 전념했으며, 같은 해 독립노동당(ILP)에 입당해 지역 정치에서 활동했다. 1909년 스테프니 구의회 선거에 ILP 후보로 나섰으나 낙선했고, 페이비언 협회 서클에서 활동하며 베아트리스 웹의 빈민법위원회 소수파 보고서 대중화 운동을 도왔다. 1911년에는 재무장관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의 국민보험법을 전국 순회 강연으로 설명하는 정부의 '공식 설명관'으로 일했고, 1912년부터 런던정경대학(LSE) 강사로 사회과학과 행정학을 가르쳤다.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한 뒤 1919년 스테프니 구청장으로 선출된 그는 1920년 첫 저서 《사회사업가》에서 빈민을 돌보는 일을 자선에 맡길 수 없다는 입장을 정리했는데, 이는 훗날 그의 정부가 추진한 복지 개혁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