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두브체크

Alexander Dubček
체코 슬로바키아 1921–1992 ↓ 실각 1969

인간의 얼굴을 꿈꾸다 산림청으로 보내진 사람

1968년 8월 21일 새벽, 소련군 장교들이 두브체크의 사무실로 들이닥쳐 전화선을 끊고 수갑을 채웠다. 한 장교가 말했다: '필요하다면 체코인 백만 명을 죽여서라도 반혁명을 끝장낼 것이다.'

프라하의 봄을 이끈 슬로바키아 개혁공산주의자. 소련에서 소년기를 보내고 1968년 검열 폐지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추진했으나, 바르샤바조약군 침공 후 실각해 산림청 직원으로 15년을 보냈다. 1989년 하벨과 함께 발코니에 다시 섰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1968년 1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알렉산드르 두브체크는 1921년 슬로바키아 우흐로베츠에서 태어났다. 사회주의 이상에 이끌린 그의 부모는 1925년 소련 키르기지아의 인테르헬포 협동조합에 합류했고, 두브체크는 프룬제와 고리키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1938년 슬로바키아로 돌아온 그는 이듬해 비합법 슬로바키아공산당에 입당했고, 1944년 슬로바키아 민족봉기에서 무기를 들고 싸우다 두 차례 부상을 입었으며 형 율리우스를 잃었다. 소련에서 자라고 파시즘과 싸운 이 경력은 그를 누구도 반소주의자로 부를 수 없는 인물로 만들었다.

전후 당 기구에서 성장한 그는 모스크바 고등당학교에서 수학했고, 1963년 슬로바키아공산당 제1서기가 되어 1950년대 정치재판 희생자들의 복권과 슬로바키아의 동등한 지위를 밀고 나갔다. 1968년 1월 5일 중앙위원회는 노보트니를 대신해 그를 체코슬로바키아공산당 제1서기로 선출했다. 4월의 행동강령은 당내 민주주의, 언론 자유, 복권, 연방제, 경제 개혁을 내걸었고, 6월에는 검열이 폐지되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구호 아래 진행된 프라하의 봄은 사회주의의 포기가 아니라 갱신의 시도로 제시되었고, 대중의 열광적 지지를 받았다.

두브체크는 바르샤바조약과 코메콘에 대한 충성을 거듭 확인했으나, 소련과 이웃 당 지도부들은 개혁이 당의 지도적 역할을 침식하고 블록의 안보를 위협한다고 판단해 갔다. 드레스덴 회동, 바르샤바 서한, 치에르나 회담으로 이어진 1968년 여름의 압박은 사회주의 국가들 사이의 관계가 어디까지 대등할 수 있는가라는, 운동 전체의 미해결 문제를 노출시켰다.

1968년 8월 21일 새벽, 그리고 1989년 11월의 발코니

1968년 8월 20일 밤에서 21일 새벽 사이, 바르샤바조약 5개국 군대가 체코슬로바키아에 진입했다. 두브체크와 동료 지도자들은 중앙위원회 청사에서 소련 공수부대에 연행되어 모스크바로 압송되었고, 8월 26일 개혁의 대부분을 되돌리는 모스크바 의정서에 서명해야 했다. 크리겔 한 사람만이 서명을 거부했다. 귀국한 두브체크가 라디오에서 국민에게 연설할 때 그의 목소리는 여러 차례 끊겼다. 1969년 4월 그는 후사크로 교체되었고, 터키 대사를 거쳐 1970년 당에서 제명된 뒤 슬로바키아 산림청의 기계 담당 직원으로 15년을 감시 속에서 일했다.

문서고 개방 이후의 연구는 개입 결정이 블록 붕괴에 대한 공포와 「건전한 세력」을 자처한 체코슬로바키아 보수파의 요청 서한 위에서 내려졌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개입은 스스로 내건 목적에서도 실패로 판정되었다. 그것은 개혁을 멈춰 세웠으나 사회주의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함께 무너뜨렸고, 서유럽의 공산당들을 이반시켰다. 1989년 12월 4일, 개입에 참여했던 바르샤바조약 국가들 스스로가 1968년의 개입을 부당한 내정 간섭으로 공식 규탄했다.

1989년 11월 24일, 두브체크는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발코니에 하벨과 나란히 서서 21년 만에 군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해 12월 28일 그는 연방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을 민주적 사회주의자로 여겼고 1992년 슬로바키아 사회민주당에 합류했으며, 그해 9월의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11월 7일 사망했다. 소련에서 자란 소년이 사회주의의 갱신을 시도하고, 그 시도를 짓밟은 결정이 훗날 그 결정의 당사자들에 의해 철회되는 것을 지켜본 생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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