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태 자체로”를 내걸고 현상학을 세운 철학자, 나치 아래 유대계로 대학에서 밀려났다
1935년 빈과 프라하 강연에서 그는 근대 과학이 세계를 객관적 측정으로만 파악하려다 삶의 의미를 묻는 사람들에게 답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진단했다. 이 강연이 『유럽 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이 되었다.
오스트리아 제국 모라비아의 프로스니츠(오늘날 체코 프로스테요프)에서 독일어를 쓰는 유대인 직물상 집안에 태어났다. 빈에서 수학 박사가 된 뒤 철학으로 옮겼고, 1887년 개신교 세례를 받고 할레 대학 사강사가 되었다. 1896년 프로이센 국적을 얻었다. 『논리 연구』(1900~1901)로 이름을 얻어 괴팅겐을 거쳐 1916년 프라이부르크 대학 정교수가 되었고, 1928년 은퇴하며 하이데거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1933년 나치 집권 뒤 유대계라는 이유로 휴직 처분을 받았고 1936년 강의 자격을 완전히 잃었다. 1938년 프라이부르크에서 병으로 죽었다.
다른 이름: 에트문트 후설
주요 활동과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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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1928
독일 국가기관할레·괴팅겐·프라이부르크 대학 철학 교수대표
학술·연구
경력 연표
- 1883빈 대학 수학 박사
- 1887할레 대학 교수자격·사강사
- 1887말비네 슈타인슈나이더와 결혼, 개신교 세례
- 1896프로이센 국적 취득
- 1900–1901『논리 연구』 출간
- 1901–1916괴팅겐 대학 교수(1906년 정교수)
- 1913『순수 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 출간
- 1916–1928프라이부르크 대학 정교수
- 1928.07.25마지막 강의, 은퇴
- 1933.04유대계라는 이유로 휴직 처분
- 1936강의 자격 박탈
현상학은 무엇을 하려 했나: “사태 자체로”
후설은 처음에 수학자였다. 그는 수의 개념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어떻게 생기는지를 심리학으로 설명하려 했는데(『산술의 철학』, 1891), 논리학자 고틀로프 프레게에게서 논리를 심리로 환원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논리 연구』(1900~1901)의 첫 권에서 그는 바로 그 “심리학주의”를 물리쳤다. 논리와 수학의 법칙은 누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철학은 어디서 출발해야 하는가. 후설의 대답이 현상학이다. 현상학은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 곧 현상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학문이다. 그는 『논리 연구』에서 “단순한 말”에 만족하지 말고 “사태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고 썼고, 이 말이 현상학의 표어가 되었다. 높이 뜬 사변이나 물려받은 이론에서 시작하지 말고, 경험 속에서 사물이 우리에게 실제로 어떻게 주어지는지를 꼼꼼히 들여다보라는 뜻이다.
그가 의식의 기본 구조로 내세운 것이 “지향성”이다. 의식은 언제나 무엇에 대한 의식이다. 본다는 것은 무언가를 보는 것이고, 바란다는 것은 무언가를 바라는 것이다. 1913년 『순수 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에서 그는 “에포케”(판단 중지)라는 방법을 내놓았다. 바깥 세계가 정말 있느냐에 대한 일상의 믿음을 잠시 “괄호 안에 넣고”, 세계가 의식에 어떻게 나타나는지 그 구조에 집중하자는 것이다.
이 방법은 한 세대의 철학을 바꿨다. 괴팅겐과 프라이부르크에서 그는 큰 제자 무리를 길렀고, 에디트 슈타인과 마르틴 하이데거가 차례로 그의 조교였다. 오늘날 일상어가 된 “감정이입”과 “생활세계”라는 말도 그의 작업에서 크게 비롯했다.
유대계 철학자 후설은 1933년 뒤 어떻게 대학에서 밀려났나
후설은 1887년 개신교 세례를 받았지만, 나치의 인종 정책은 개종을 따지지 않았다. 1933년 4월 바덴 주는 「직업공무원제 재건법」(나치 반대자와 유대계 공무원을 공직에서 내쫓는 법)에 따른 특별 명령을 내렸고, 이미 은퇴한 후설도 이 조치로 휴직 처분을 받아 모든 강의를 금지당했다.
이 과정의 세부는 출처마다 다르다. 독일어 위키백과는 이 처분이 아들이 전사해 “전선 참전자 특례”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1933년 7월 철회되었고, 1935년 뉘른베르크 인종법 뒤인 1936년 강의 자격이 완전히 박탈되었다고 적는다. 영어 위키백과는 4월 6일 대학 도서관 이용이 금지되었다가 여론의 항의로 다음 주 풀렸다고 쓰면서도, 같은 항목의 다른 대목에서는 도서관 금지를 “소문”으로 적는다. 출판은 분명히 막혔다. 만년의 주저는 나치 독일에서 낼 수 없었다.
제자 하이데거와의 관계에도 전설과 기록이 섞여 있다. 후설은 1917년부터 하이데거를 밀어 주었고 1928년 자기 자리를 그에게 물려주었다. 그러나 1929년 하이데거의 글을 꼼꼼히 읽고 그가 순수 자아 대신 “현존재”를 놓아 현상학을 인간학으로 바꿔 버렸다고 결론 내렸고, 1931년 강연 「현상학과 인간학」에서 이를 비판했다. 1933년 4월 하이데거가 총장이 되고 나치당에 들어간 반면, 후설은 그해 독일 학술원에서 탈퇴했다.
흔히 하이데거가 후설에게 해임을 통보했다고들 하지만, 영어권 서술에 따르면 그것은 소문이고 실제 통보는 전임 총장이 했다. 하이데거는 그 무렵 이미 후설과 직접 연락을 끊었고, 1938년 장례에 오지 않았으며, 1941년판 『존재와 시간』에서 후설에게 바친 헌사를 뺐다. 이 헌사 삭제를 두 사람 관계의 부정으로 볼지, 책이 금지될 것을 걱정한 출판사의 요구로 볼지도 서술이 갈린다. 한나 아렌트는 한때 하이데거의 처신이 후설의 죽음을 재촉했다고 비난했다가 뒤에 그 말을 거둬들였다.
후설은 1937년 가을 넘어진 뒤 늑막염을 앓다가 1938년 4월 27일 프라이부르크에서 79세로 죽었다. 대학 교수 가운데 장례에 온 사람은 역사가 게르하르트 리터 하나였다. 독일어권 전기는 그의 죽음이 더 큰 박해를 면하게 했다고 적는다. 제자 에디트 슈타인은 1942년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되었다.
『유럽 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은 무엇을 경고했나
『유럽 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은 1935년 후설이 빈과 프라하에서 한 강연에서 자라난 마지막 저작이다(빈 강연을 1936년으로 적는 자료도 있다). 대학에서 밀려난 노철학자는 유럽이 비합리주의로 빠져드는 때에 철학이 왜 여전히 필요한지를 더 열정적으로 주장했다.
후설이 말한 위기는 과학이 틀렸다는 뜻이 아니다. 물리학과 수학은 눈부시게 성공했다. 문제는 근대 과학이 세계를 객관적 측정으로만 붙잡으려 하면서, 사람들이 묻는 삶의 의미에 대해서는 더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못하게 되었다는 데 있다. 그래서 그는 과학이 자기가 어디서 태어났는지를 돌아보라고 했다. 그 출발점이 “생활세계”다. 생활세계란 이론 이전에 우리가 따지지 않고 받아들이며 살고 생각하고 일하는 세계다. 과학의 정밀한 세계도 이 생활세계 위에서 사람들이 함께 쌓아 올린 것이다.
후설은 이 생각으로 사람과 세계 사이에 생긴 소외를 줄이려 했다. 그러나 책은 그의 생전에 독일에서 나올 수 없었고, 첫 두 부분만 1936년 베오그라드의 철학 잡지에 실렸다.
그가 남긴 4만 쪽가량의 속기 원고는 죽은 뒤에 사라질 뻔했다. 벨기에의 젊은 프란치스코회 수사 헤르만 레오 반 브레다가 1938년 프라이부르크에 왔다가 위기에 놓인 유고를 보고 독일 밖으로 빼돌렸고, 원고는 루뱅 대학에 세워진 후설 문서고에 지금도 남아 있다. 1939년 프라하에서 나온 유고 『경험과 판단』은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뒤 초판이 거의 모두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