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산업노동자연맹의 산업별 조직론을 함부르크로 가져온 라우펜베르크의 동지, 민족 볼셰비즘의 주창자
독일의 유대계 공산주의 정치가·저술가. 1909년 사회민주당에 들어갔고, 1910~191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의 신문을 편집하며 정당·노조를 하나로 묶는 혁명 조직론을 배웠다. 함부르크에서 하인리히 라우펜베르크의 가장 가까운 동지가 되어 독일 공산당 함부르크 조직을 이끌었고, 1919년 「민족 볼셰비즘」을 내세웠다가 공산당과 독일 공산주의 노동자당(KAPD)에서 잇달아 제명되었다. 나치 체포 뒤 라벤스브뤼크 수용소에서 죽었다.
다른 이름: 프리드리히 빌헬름 볼프하임
주요 활동과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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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
사회운동·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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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1913
사회운동·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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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
독일 공산당대표
정치·당 지도 -
1920
사회운동·조직
경력 연표
- 1909사회민주당에 입당했다.
- 1910–1913샌프란시스코에서 IWW 신문을 편집했다.
- 1913함부르크에 정착했다.
- 1919.10라우펜베르크와 함께 독일 공산당에서 제명되었다.
- 1920.08독일 공산주의 노동자당에서 탈퇴를 요구받았다.
- 1936나치에게 체포되었다.
- 1942.03.17라벤스브뤼크 강제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산업별 조직론에서 민족 볼셰비즘으로
볼프하임은 1910년부터 1913년까지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 사회당원이자 세계산업노동자연맹 회원으로 일하며 연맹의 독일어 신문을 편집했고, 샌프란시스코 지부 서기로서 랄라 하르 다얄과 함께 활동했다. 그는 여기서 정당과 노동조합을 따로 두는 모델 대신 하나의 혁명 조직이 필요하다고 확신했고, 1913년 함부르크로 돌아와 이 생각을 지역 당에 퍼뜨렸다. 안톤 판네쿠크도 이 생각을 열렬히 받아들였다. 그 결과 1919년 초 함부르크 공산당은 당원이 기존 노동조합에 함께 속하는 것은 양립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1914년 전쟁이 시작되자 함부르크에서는 볼프하임과 하인리히 라우펜베르크를 중심으로 사회민주당의 「성내 평화」 정책에 맞서는 사람들이 모였고, 두 사람은 신문 《투쟁》을 내며 반전 활동으로 여러 차례 투옥되었다. 1918년 혁명 때 그는 함부르크 노동자·병사 평의회 지도자 가운데 하나였다. 1919년 공산당에 들어가 반의회주의 좌파의 대변인이 되었지만 10월 생디칼리슴이라는 비판을 받고 라우펜베르크와 함께 제명되었다.
같은 해 10월 두 사람은 카를 라데크에게 「민족 볼셰비즘」을 제안했다. 독일 민족주의를 끌어들인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소비에트 러시아와 동맹해 연합국과의 전쟁을 다시 하자는 것으로, 계급 투쟁보다 민족 해방을 위한 계급 협력을 앞세워 마르크스주의 정통에서 벗어났다. 볼프하임은 극좌 전투 부대를 극우 의용군단과 합치자는 말까지 했다. 레닌은 이를 터무니없다고 거부했고 라데크도 강하게 비판했다. 1920년 4월 독일 공산주의 노동자당 창립에 참여했지만 8월 이 생각 때문에 당을 떠나야 했다. 이후 그는 갈수록 마르크스주의에서 멀어져 민족혁명파 쪽으로 기울었고, 1936년 나치에게 체포되어 1942년 라벤스브뤼크 강제수용소에서 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