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라우펜베르크

Heinrich Laufenberg

함부르크 노동자·병사 평의회 의장이자 「민족 볼셰비즘」을 처음 내세운 좌파 공산주의자

독일의 역사가·언론인·정치가. 가톨릭 중앙당에서 1904년 사회민주당으로 옮겨 함부르크 노동운동사를 썼고, 1차 대전 중 프리츠 볼프하임과 함께 전쟁 협력에 반대하는 좌파 급진파를 이끌었다. 1918년 11월부터 1919년 1월까지 함부르크 노동자·병사 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독일 공산당에서 의회·노조 활동에 반대하다 1919년 제명되었고, 1920년 독일 공산주의 노동자당(KAPD)을 함께 세웠으나 「민족 볼셰비즘」 때문에 그해 8월 다시 쫓겨났다.

다른 이름: 카를 에를러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함부르크의 「붉은 독재자」와 민족 볼셰비즘

라우펜베르크는 1907년 프란츠 메링의 추천으로 함부르크 사회민주당 지도부의 의뢰를 받아 함부르크 노동운동사를 연구했고, 1911년 『함부르크·알토나 노동운동사』 제1권을 냈다. 1912년 함부르크 당학교 교장이 되었으나 급진적 견해 때문에 당직을 내려놓아야 했다. 1914년 전쟁이 시작되자 그는 전쟁 공채에 맞선 좌파 급진파에 섰고, 프리츠 볼프하임과 함께 『제국주의와 민주주의』(1914), 『민주주의와 조직』(1915)을 내며 평의회 공산주의와 생디칼리슴 쪽으로 다가갔다. 1916년부터는 브레멘에서 《노동자 정치》를 내던 요한 크니프와 가까이 지냈다.

1918년 11월 혁명 때 그는 좌파 급진파 대표로 함부르크 노동자·병사 평의회 의장이 되었다. 평의회는 11월 12일 사회민주당 대표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치 권력 장악과 시의회·시정부 해산을 결의했고, 부르주아 신문은 그를 「붉은 독재자」라 불렀다. 그러나 은행들이 신용을 끊겠다고 위협하자 그는 두 기관을 되살리는 데 동의했고, 식량난과 파업, 사회민주당 계열 노동자들의 시위 속에 1919년 1월 20일 물러났다. 12월 제1차 전국 평의회 대회에서는 「통일 혁명파」 의원단을 이끌었다.

독일 공산당에서 그는 볼프하임, 오토 륄레와 함께 좌파 반대파를 이끌었고, 기존 노동조합 대신 독자적 경제 투쟁 조직을 세우고 선거를 거부하자고 주장하다 1919년 10월 하이델베르크 당대회에서 제명되었다. 그 사이 볼프하임과 함께 독일 민족주의를 끌어들여 소비에트 러시아와 동맹해 연합국에 맞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곧 「민족 볼셰비즘」을 내세웠다. 레닌은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에서 그를 「터무니없다」고 비판했다. 1920년 4월 독일 공산주의 노동자당을 함께 세웠으나 8월 그 생각 때문에 제명되었고, 1922년 병으로 정치에서 물러난 뒤 1932년 가난 속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