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전쟁 공채에 반대표를 던지고 「혁명은 당의 일이 아니다」를 외친 평의회 공산주의자
독일의 교육자·저술가·제국의회 의원이자 평의회 공산주의 이론가. 사회민주당 순회 강사로 이름을 얻었고, 1915년 3월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전쟁 공채에 반대표를 던졌다. 스파르타쿠스단과 독일 공산당 창당에 참여했으나 의회 참여에 반대하다 밀려났고, 1920년 독일 공산주의 노동자당(KAPD)을 함께 세웠다.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서 돌아와 볼셰비키와 결별한 뒤 정당 자체를 거부하는 평의회 공산주의로 나아갔고, 멕시코 망명 중 사망했다.
다른 이름: 카를 슈토이어만
주요 활동과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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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1916
독일 사회민주당대표
교육 -
1918
독일 노동자·병사 평의회드레스덴 노동자·병사 평의회 의장
정치·당 지도 -
1918–1920
정치·당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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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
정치·당 지도
경력 연표
- 1896사회민주당에 입당했다.
- 1912–1918작센 제8선거구 제국의회 의원.
- 1915.03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전쟁 공채에 반대표를 던졌다.
- 1918.11.09드레스덴 혁명적 노동자·병사 평의회 의장이 되었다.
- 1920.04독일 공산주의 노동자당(KAPD)을 함께 세웠다.
- 1937멕시코에서 모스크바 재판을 조사한 듀이 위원회에 참여했다.
- 1943.06.24멕시코시티에서 사망했다.
드레스덴 평의회에서 「혁명은 당의 일이 아니다」까지
륄레는 1912년부터 작센 제8선거구(피르나·제프니츠)의 사회민주당 제국의회 의원이었다. 그는 카를 리프크네히트, 로자 룩셈부르크, 프란츠 메링과 함께 당의 극좌파에 속했고, 1915년 3월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전쟁 공채에 반대표를 던진 첫 의원이 되었다. 1916년 1월 1일 스파르타쿠스단 창립 회의에 참여했지만, 같은 달 《전진》에 공개 서한을 보내 당의 분열을 요구해 아직 당 지도부를 설득하려던 룩셈부르크와 맞섰다. 1917년 독립사회민주당이 생겼을 때 그는 들어가지 않고 드레스덴과 피르나의 좌파 급진파를 이끌었다.
1918년 11월 혁명 때 륄레는 드레스덴 혁명적 노동자·병사 평의회 의장이 되었지만, 사회민주당·독립사회민주당과 협력하기를 거부하며 11월 16일 독일 국제공산주의자(IKD) 동료들과 함께 물러났다. 12월 말 독일 공산당 창당 대회에서는 국민의회 선거 참여에 강하게 반대하는 쪽을 이끌었다. 1919년 내내 그는 하인리히 라우펜베르크, 프리츠 볼프하임과 함께 의회주의와 노동조합 활동으로 돌아서는 지도부에 맞서 공장 조직과 노동자 평의회를 통한 직접 행동을 주장했고, 결국 당에서 쫓겨났다.
1920년 4월 독일 공산주의 노동자당(KAPD)을 함께 세운 륄레는 6월 당 대표로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 갔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이 퇴화하고 볼셰비키가 권위주의적·관료적 모델을 국제 노동운동에 강요한다고 확신해 대회에 남기를 거부하고 제3인터내셔널과의 완전한 결별을 주장했다. 코민테른 안에서 싸우려던 KAPD 지도부와 맞선 그는 그해 말 당에서도 제명되었다. 이후 그는 모든 정당이 노동계급 대신 권력을 행사하려는 부르주아적 형태라고 보고, 계급 전체를 아우르는 노동자 평의회만이 혁명 조직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혁명은 당의 일이 아니다」라는 말이 이 입장을 담았다. 1930년대에는 카를 슈토이어만이라는 필명으로 파시즘을 분석하고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