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에게 언론자유를 요구하며 '먀스니코프주의'를 촉발한 노동자 볼셰비키
'열일곱인가. 많군. 그러나 다른 방법은 없다. 혁명은 무도회가 아니다.' — 미하일 로마노프 처형을 계획하며 쓴 회고록에서, 1918.
모토빌리하 금속노동자 출신의 러시아 혁명가. 1905년 볼셰비키에 합류, 1918년 페름 체카 부의장으로 미하일 대공 처형을 조직했다. 내전 후 당내 검열을 정면 비판하며 '군주제파에서 무정부주의자까지' 언론자유를 요구했고, 레닌의 직접 반박을 불러일으켜 '먀스니코프주의'로 불렸다. 1922년 제명 후 '노동자 그룹'을 결성, 프랑스 망명 중 『최근의 사기』에서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분석했다. 1944년 귀국 후 체포돼 이듬해 총살됐다.
경력 연표
- 1905–1906모토빌리하 병기공장 금속노동자, 사회혁명당 입당 후 RSDLP(볼셰비키)로 전향, 무장투쟁반 활동
- 1906–1917반복적 체포·탈옥·유형, 오룔 중앙감옥 복역 후 2월혁명으로 석방
- 1917–1918모토빌리하 소비에트 의장,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VTsIK) 위원, 페름 체카 부의장
- 1918–1920미하일 대공 처형 조직, 제16사단 정치위원, 페름 현당위원장
- 1921–1923'노동자 그룹' 결성, 언론자유 요구로 레닌과의 공개 논쟁 — '먀스니코프주의' 논쟁, RCP(b) 제명·체포
- 1928–1944이란·터키 경유 프랑스 망명, 『최근의 사기(Ocherednoy Obman)』 집필 — 소련 국가자본주의론 전개
- 1944–1945소련 대사관 초청으로 귀국, 직후 체포되어 1945년 11월 16일 총살 (2001년 12월 25일 복권)
관련 역사 사건
노동자 그룹과 '먀스니코프주의'
1921년 5월, 먀스니코프는 「논고」에서 "군주제파에서 무정부주의자까지" 모든 이에게 언론의 자유를 허용할 것을 촉구했다. 볼셰비키가 프롤레타리아트의 눈에 "코미체이카(당 주둔지)가 아니라 코미야체이카(당 세포)"로 비춰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레닌은 즉각 반박 서한을 보냈고, 중앙위원회는 먀스니코프의 견해를 "당의 이익과 양립할 수 없다"고 비난했다. 그럼에도 모토빌리하 당 조직은 그의 입장을 채택했고, 이 논쟁은 '먀스니코프주의(мясниковщина)'로 불리게 되었다.
1922년 2월 RCP(b)에서 제명된 후, 먀스니코프는 N. V. 쿠즈네초프, B. P. 모이세예프와 함께 '러시아 공산당 노동자 그룹'을 결성했다. 1923년 2월 발표된 선언은 △모든 국유 공장의 노동자 평의회 선거와 경영 참여 △사업장별 생산자 소비에트에 의한 산업 관리 △모든 육체노동자에 대한 표현의 자유 △인민위원회의 폐지와 그 기능의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이관을 주장했다. 신경제정책(NEP)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없이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새로운 착취"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으며, 당내 민주주의만 주장하는 '민주집중파'와 자본주의 복귀를 용인한다고 본 '노동자 진리' 그룹 둘 다를 비판했다.
이 그룹은 모스크바에서만 약 300명의 당원을 확보했고, '노동자 반대파' 출신 인사들과 22인 선언에서 연대했으나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등과 인적 연계가 있었을 뿐 조직적으로는 별개였다. 1923년 여름 파업 물결 속에서 총파업을 계획했으나, 같은 해 9월 OGPU의 광범위한 탄압으로 주요 활동가들이 체포되며 사실상 해체되었다. 그럼에도 일부 조직은 1920년대 말까지 지하에서 『노동자의 권력으로 가는 길』을 발행하며 명맥을 이었다. 노동자 그룹은 소비에트 체제 내부에서 노동자 민주주의를 요구한 가장 초기의 조직적 반대파 중 하나로, 이후 독일 공산노동자당(KAPD) 및 '공산노동자 인터내셔널'과도 연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