겐나디 이바노비치 야나예프

Геннадий Иванович Янаев
소련 러시아 1937–2010 ↓ 체포 · 사면 1994

소련의 유일한 부통령, 8월 쿠데타의 얼굴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크류치코프에게: '내 성격을 이해하게. 단 한 명이라도 죽으면 나는 살 수 없네.'

고리키주 콤소몰 제1서기와 소련 청년단체위원회 의장(1968~1980)을 거친 후, 1990년 VTsSPS 의장·정치국원·중앙위 서기를 지내고 12월 고르바초프의 강행으로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1년 8월 GKChP의 얼굴로서 고르바초프의 '병환'을 명분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을 자처했으나 사흘 만에 실패하고 체포되었다. 1994년 사면 후에는 회고록 『소련을 위한 마지막 전투』를 출간하고 학계에서 여생을 보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직업이 청년이었던 남자, 회색 기능인의 이력서

겐나디 야나예프는 1937년 고리키주의 페레보즈에서 태어나 농업대학에서 기계화를 전공했다. 그러나 그의 평생 직업은 농업이 아니라 기구였다. 고리키주 콤소몰 제1서기를 거쳐 1968년부터 1980년까지 12년간 소련 청년단체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마흔셋까지 직업이 「청년」이었던 셈이다. 이후에는 우호협회연합과 노동조합으로 자리를 옮겼다. 국제 연회와 대표단 접견, 건배사가 그의 전문 분야였고, 어느 자리에서도 그는 무난했고 어느 자리에서도 두드러지지 않았다.

1990년 그의 경력은 갑자기 수직 상승했다. 7월에 정치국원 겸 중앙위 서기가 되더니, 12월에는 고르바초프가 그를 신설된 소련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인민대의원대회 첫 투표에서 그는 과반을 얻지 못했다. 고르바초프가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라며 재투표를 밀어붙인 끝에야 당선되었다. 의회조차 내키지 않아 한 이 인선을 두고, 훗날 역사가들은 고르바초프 인사의 최대 실책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강한 자들의 야심이 부딪히는 자리에 무난한 사람을 앉힌다는 오래된 기구의 논리가, 여덟 달 뒤 어떤 청구서로 돌아올지는 아무도 몰랐다.

VTsSPS 의장과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노동조합 (1986~1990)

야나예프는 1986년 VTsSPS(전소비에트 중앙노동조합평의회)의 국제 담당 서기로 노조 경력을 시작해 1989년 부의장, 1990년 4월 의장으로 승진했다. 그가 VTsSPS 지도부에 오를 무렵 소련 노동계는 격변의 한가운데 있었다. 1989년 쿠즈바스와 도네츠크 탄광에서 광부 파업이 터지고 각지로 확산되면서, 브레즈네프 시기 내내 당의 '전달 벨트'에 머물렀던 공식 노조는 노동자 대표성을 둘러싼 실존적 위기에 직면했다.

야나예프는 이중의 도전에 대응해야 했다. 한편으로 국제노동기구(ILO) 경험을 살려 소련 노조의 국제적 정당성을 강화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VTsSPS 내에서 '실질적인 노동자 권리 보호'를 지향하는 개혁 노선을 표방했다. 루슬란 하스불라토프는 훗날 회고에서 그를 두고 "방대한 노조 기구를 단순한 관료 기계가 아니라 실제 노동자 권리 보호 기관으로 전환하려 애쓴 인물"이라고 평했다. 1990년 4월에는 VTsSPS 의장으로서 광부 파업 중재에 직접 개입했고, 노조의 정치적 독립성 확대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VTsSPS 의장 임기는 불과 석 달에 그쳤다. 1990년 7월 제28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과 정치국원, 중앙위 서기로 선출되어 당 핵심 지도부로 이동하면서, 노조 개혁은 미완으로 남았다. VTsSPS 의장 경험은 그에게 노동계 기반을 제공했고 고르바초프가 그를 부통령 후보로 주목하게 된 배경 중 하나였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1990년 12월 부통령에 당선될 때 노조 대표성을 내세운 그의 입후보는 인민대표대회에서 첫 투표 부결이라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

GKChP와 8월 쿠데타: 소련 부통령의 마지막 도박 (1991년 8월)

1991년 8월 18일, 야나예프는 쿠데타 개시 불과 몇 시간 전에야 자신의 역할을 통보받았다. 역사가 블라디슬라프 주보크에 따르면, 야나예프는 '쿠데타 시작 3시간 전에 자신의 핵심 역할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다음날인 8월 19일,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는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건강상 이유'로 인한 직무 수행 불능을 선언하고, 야나예프가 헌법에 따라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는다고 발표했다. 야나예프는 모스크바에 비상사태를 선포하는 포고령에 서명했고, 탱크가 도심으로 진입했다.

그러나 야나예프는 쿠데타의 얼굴이었을 뿐 실질적 지도자는 아니었다. GKChP의 실권은 KGB 의장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와 국방장관 드미트리 야조프 등 강경파에게 있었다. 8월 19일 기자회견에서 야나예프의 떨리는 손은 쿠데타의 상징적 이미지가 되었고, 훗날 그는 '손이 정말 떨렸다'고 인정했다. 동시에 그는 크류치코프에게 '단 한 명이라도 죽으면 나는 살 수 없다'고 말하며 유혈 사태를 극도로 경계했다. 이는 GKChP가 결정적 순간에 주저하게 만든 요인 중 하나였다.

사흘 만에 쿠데타는 붕괴했다. 8월 21일 야나예프는 GKChP 해산과 모든 결정의 무효를 선언하는 포고령에 서명했다. 8월 22일 크렘린의 자신의 집무실에서 체포된 그는 마트로스카야 티시나 구치소에 수감되었고, 반역죄로 기소되었다. 1994년 국가두마의 사면으로 풀려난 후에도 야나예프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2001년 인터뷰에서 '우리는 소련을 구하려 했을 뿐'이라고 말했고, 2010년 사망 직전 출간한 회고록 『소련을 위한 마지막 전투』에서 GKChP의 결정적 문서들이 실제로는 1991년 4월 고르바초프 본인의 지시로 준비된 비상사태 계획에 기초했다고 주장했다.

떨리던 손의 초상, 그 후의 조용한 20년

1991년 8월 19일의 기자회견에서 세계가 기억하게 된 것은 성명서가 아니라 야나예프의 떨리는 손이었다. 「고르바초프 동지는 크림에서 요양 중」이라며 대통령 권한대행을 자처하는 그의 목소리는 확신이 없었고, 기자들의 웃음소리가 회견장에 울렸다. 그 손은 이후 8월 쿠데타를 넘어 말기 소련 체제 자체의 초상으로 굳었다. 강압으로 지탱하려는 의지도, 그럴 확신도 남아 있지 않은 권력의 이미지였다.

체포된 그는 1994년 사면으로 풀려났고, 이후로는 관광대학에서 자문과 강의를 하며 눈에 띄지 않게 살았다. 죽기 얼마 전 출간한 회고록에서 그는 쿠데타가 아니라 고르바초프의 배신이 연방을 죽였다고 주장했다. 2010년 그는 73세로 죽었다.

역사가들은 그를 주모자라기보다 간판으로 본다. 부통령이라는 직함이 비상통치에 헌법의 외피를 씌워 줄 수 있었기에 마지막 순간에 끌어들여진 인물이라는 것이다. 「단 한 명이라도 죽으면 나는 살 수 없네」라던 그의 말은, 유혈을 감당할 각오 없이 시작된 쿠데타가 어떻게 끝날지를 처음부터 예고하고 있었다.

← 카드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