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기 스테파노비치 흐루스탈료프-노사리

Георгий Степанович Носарь
반혁명 세력 러시아 러시아 1877–1919 ✕ 처형

1905년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의 초대 의장으로 선출된 무소속 노동 변호사

흐루스탈료프는 당과 대중이라는 이중의 빛으로 빛났지만, 그 빛은 모두 반사된, 타인의 것이었다.

무소속 노동 변호사로 1905년 혁명의 중심에서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초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무소속이라는 점이 노동자 대표로 추대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으나, 실질적 지도력은 트로츠키와 파르부스 같은 사민당 좌파가 장악했다. 1907년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탈출해 망명 생활을 하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 귀국했고, 1918년에는 고향 페레야슬라프에서 볼셰비키에 맞서는 자칭 '페레야슬라프 공화국'을 이끌다 이듬해 혁명위원회의 결정으로 처형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당에서 밀려난 망명자, 그리고 역사 서술 속의 논쟁 (1907~1917)

1907년 3월 베레조프 유형지에서 탈출한 흐루스탈료프-노사리는 그해 5월 런던에서 열린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제5차 대회에 참가해 당원 없는 전러시아 노동자 대회 소집을 제안했다. 망명지에서도 당적 문제를 둘러싼 논쟁은 계속됐으나, 제5차 대회는 '노동자 대회와 당원 없는 노동자 조직'을 정식 의제로 다루었고 볼셰비키가 다수를 차지해 이 안을 사실상 부결시켰다. 그는 1910년 당을 떠났고, 이 무렵부터는 당내 노선 투쟁의 당사자이기를 그만두었다.

무소속 노동 변호사라는 정체성은 1905년 노동자 대표로 추대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지만, 그를 지탱해 준 것은 노동자 대중과의 직접적 관계였다. 흐루스탈료프-노사리는 노동자의 신뢰를 잃은 뒤 두 차례 결정적 단절을 겪었고, 이는 그가 사회민주주의 진영 바깥으로 밀려나는 과정이기도 했다. 1913년 프랑스 법원은 그에게 타인 재산 횡령 혐의로 금고형을 선고했고, 트로츠키를 비롯한 옛 동지들이 이 사건을 앞장서 폭로했다. 출옥한 뒤 그는 사실상 배척된 처지가 되었고, 신문에 공개 서한을 내어 당 주변과 영구히 결별한다고 밝혔다.

무소속이라는 조건이 낳은 결과는 1905년 이후에도 계속 문제로 남았다. 그는 노동자 대중의 힘으로 밀어붙인 스타킹 혁명의 지도자였지만, 노동계급이 스스로의 조직을 공고히 하는 과정에서 그를 뒷받침하는 정치적 조직은 없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노동자 대표 기구와 대중 운동의 지도권을 장악한 뒤 그의 영향력은 급격히 줄었고, 페레야슬라프에서 노동계급과 다른 계급 세력에 기대었던 1917~1919년의 행보는 이 조건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의 역할을 둘러싼 평가는 오랫동안 이념 투쟁의 연장이었다. 트로츠키는 회고록에서 소비에트의 실제 지도자는 자신이었고 노사리는 '혁명 속의 우연한 인물'이었다고 주장했으며, 20세기 소련 역사 서술은 그를 '무원칙한 아방튀라주의자'나 나중에는 '툭하 체포, 페트류라 지지자'로 규정했다. 반대로 일부 연구자는 그가 형식적 의장이자 실질적 지도자였다고 보며 트로츠키의 회고 속 과장을 지적한다. 다만 어느 쪽 평가도 그가 페레야슬라프에서 볼셰비키에 맞서다 1919년 5월 혁명위원회 결정으로 총살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뒤집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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